기창덕이 2000년 3월 20일 향년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지 일년이 되었다. 일년전 필자는 말기암의 통증을 견디면서 ‘한국 개화기의 문화연보’ 3차 교정을 보고 있던 그에게 ‘치과의사로 살아온 삶이 행복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는 그때 ‘비록 부끄럽지만 한번도 타인의 삶을 흠모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것은 그가 북에 남은 아버지로부터 마지막으로 전해받은 편지- ‘너희들은 지금부터 고학이 될 것이니 타인의 생활을 흠모할 것 없이 백반절약하여 향학만에 진력하기를 바란다’-의 한 구절이기도 했다. 기창덕의 아버지 기인식은 황해도 재령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인창상회라는 사업채를 운영했고 해방과 동시에 재산이 몰수되자 북에 남아 장돌뱅이로 살다가 죽었다. 기인식과 달리 기창덕은 경성치과전문학교를 고학으로 졸업하고 77세까지 치과의사로 살다가 죽었다. 그렇다면 치과의사로 산 기창덕은 무엇을 흠모했으며 그가 죽은 뒤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사적으로 1년 3개월간의 암투병 과정에서 그의 현금은 바닥이 났고, 그가 쓰던 덴탈 유니트 체어와 기구들은 아직 처분되지 못하고 남아있다. 그가 집필 또는 편저한 책들로는 조선의보, 한국근대의학교육사를 비롯해 11권이 남아있고, 30여편의 논문들과 두 세권의 파일로 남은 기고문과 강의록, 그가 직접 조각해 찍어낸 피에르포샤르 흉상이 있다. 보다 공적으로는 50여년 동안 모아온 6천여권의 장서를 기증하여 개설된 素岩의문화자료실이 서울대학교 병원 부설 의학박물관에 위치하고 있다. 이와 함께 서울시 서초구 보건소에는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치과의사들이 제안해 1996년 개설한 장애인 치과가 있고 그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봉사단체가 있다.
이러한 흔적들은 그가 치과의사로 사는 동안 열망하고 밟아온 삶의 잔해들이다. 그가 살아있던 시간들은 다 지나갔고, 이제 그와 삶의 일부를 공유한 사람들의 추억과 그를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새롭게 쓰여질 역사가 남아있다. 이 글은 그가 죽기 얼마전에 인터뷰한 개인사 중 치과의사로서의 궤적을 추적한 것이다.
치과의사로서의 성장과정
기창덕은 1924년 황해도 해주군 재령읍에서 기인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책읽는 것과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글짓기나 포스터를 그려서 상을 타곤 했다. 명신중학교 시절에는 고즈마라는 일본인 국어선생에게 조선의 역사를 은밀히 전해듣기도 하고, 시험거부를 주도해서 야쓰다라는 물리선생에게 죽도록 얻어맞기도 했다. 이과과목에 흥미를 느끼던 그는 1944년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경성치과전문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입학생 175명 중 일본인은 120명, 조선인은 54명이었다. 일본의 전세가 심각해지자 경치전은 군입영 연기 대상학교에서 제외되고 기창덕도 군대에 들어가 교육을 받던 중에 해방이 되었다. 해방 후 서울에 혼자 남게된 기창덕은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공사장에 가서 노역도 하고, 옷감 장사, 쌀장사 등 닥치는대로 일을 해야 했다. 고학생활 중에 그와 이북출신 학생들은 구세군 고아원에 가서 발치와 구강검진을 해주고 구호물자를 얻어다 쓰기도 했다. 어느 날 기차에서 전쟁고아 노춘식을 만난 기창덕은 자신도 고아와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어 2∼3년간을 함께 살면서 처음으로 가까운 타인과 함께 하는 것이 봉사임을 실감하게 된다.
1946년 9월에 3학년으로 진급하게 된 기창덕은 친구 김선기와 공산주의에 관한 윤독회에 참가하기도 하지만, 얼마 후 김선기는 찬탁대열에 기창덕은 반탁운동 대열에 서게 되었다. 평양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의 2차회의 당시, 고향 재령으로 떠난 기창덕은 소련군에게 붙들려 형무소로 끌려가 인민재판에서 7년형을 언도 받았으나 소련군들의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서 도망쳐 나왔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기창덕은 임상 케이스를 채워 가졸업을 하고 방역연구소에 취직하였다. 1946년 콜레라가 창궐할 때 보건후생국에서 검변관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이 미생물학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방역연구소에서 기창덕은 평생 스승으로 모시던 기용숙 선생과 의형제로 지낸 친구 박승함을 만나게 되어 이후 실험동물사육실 마련이나, 생물의학연구회 발족, 대한미생물학회(대한면역학회전신)를 이끌 학문적 친분을 쌓게 된다. 1948년 8월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전문부 제2회 졸업생으로 졸업장을 받은 기창덕은 하숙방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아버지, 어머니 나 졸업했어요. 이것이 졸업장이야요.”
1948년 졸업과 동시에 경성여자의과대학의 세균학 교실로 가게 된 기창덕은 무급조교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치과 유급조수로 자리를 옮겼다. 걸인 환자의 머리에서 상악 제1대구치 치근을 타고 들어온 구더기를 발견한 기창덕은 다시 깔멜 수녀원과 고아원에 진료봉사를 나가게 된다. 성당에서 돈보스코라는 영세명을 얻고, 잠시 수사가 되어 의료봉사를 할까 고민하던 중 6·25가 터졌다. 38육군 인민병원에 강제 복무 중 탈출해 숨어있다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자 공군에 입대하여 7년간 공군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군복무 중 丁敬淑 여사와 결혼하고 미군들에게 최신구강외과학 시술을 배웠다. 1960년 카톨릭의과대학 치과학 교수로 재직하게 되면서 성모병원 치과과장을 맡았다. 임상시술과 함께 그가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구강질환 역학조사와 기초학 분야였다. 1966년 동경의 실험동물중앙연구소에서 1년간 실험동물학을 공부하고 돌아오자, 병원측에서는 치과학 과장이 임상수입에는 왜 관심이 적은지 추궁했다. 기창덕은 고민 끝에 43세의 나이로 개원을 했다.
개원후 기창덕은 치과의원에서 얻는 수익금으로 학문과 봉사에의 열망을 실천해나갔다. 치의학 전공분야에서의 자기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대한예방치과학회, 대한구강악안면외과학회, 대한치과임프란트학회 등의 활동을 지속하였다. 1979년에는 피에르포샤르(Pierre Fauchard)아카데미 한국회 발족에 참여하여 국제학술교류 및 봉사활동을 하였다. 서울가톨릭의사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고, 나환자 정착촌 순회진료, 고아원, 수녀원 및 인근 빈민촌, 성가복지병원 및 하상복지회관 치과시설 및 진료, 교포사목후원회, 맹인협회 및 장애인치과진료를 위해 사재를 털고 시간을 내어 형제적 사랑의 봉사를 실천하였다.
의학사 연구자로서의 변신
1978년 기창덕은 종로구 필운동으로 치과의원을 옮겨 일반 아파트의 거실에 치과장비와 기구를 들여놓고, 화장실을 제외한 방을 서재로 개편한 뒤 의학사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평상시에는 아침 일곱시부터 저녁 아홉시까지, 집필시에는 일주일이나 열흘간 서재에서 먹고자며 생활했다. 1987년에 발간한 ‘조선의보’영인본과 ‘한국치과의학사 상권’은 그가 일본에 있는 의과대학 도서관 서고를 샅샅이 뒤져 자료를 모은 것이다. ‘한국치과의사논문총취’ 제 1,2집(1991, 1994)은 4천편의 한국치의학 논문들을 정리한 것이다. 1995년에 발간된 ‘한국근대의학교육사’는 외국에서 번역의뢰를 할 정도로 정확하게 기술되었다. 이렇게 20여년의 세월을 학문을 위해 힘썼으나 그가 외래교수나 강사로 활동한 것은 불과 몇 년되지 않고, 연구비는 물론 책 출판비도 모두 자비 출연한 것이었다. 국사학회나 고고학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한반도 인골의 변천을 연구하고, 차츰 의학사 연구자들과 연계하여 의학문의 영역을 확대했다. 외국 의사학자들과도 교분을 쌓아 일본학회에 가서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도입한 의료가 식민지배를 위한 상업적이고도 형식적인 것이었음을 논증하고, 중국에서는 동서의학의 접목 가능성을, 미국인들에게는 현대 서양의학이 봉착한 한계와 후반세기 한국의 의료진이 개발해낸 세계 최고의 의료장비와 연구성과에 대해 이야기 했다.
특히 남한 의료현실과 남북한 의료의 통일문제에 대해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남북한 의료의 통일의 힘은 우리 내부에서 나와야 한다. 자고로 의학과 치의학 기술과 장비는 국가경제수준과 궤를 같이하며 발전해왔다. 그러나 의술의 발달에 비해 의료의 공익성을 확대할 국가정책과 의료윤리에 투철한 전문인, 국민들의 의료에 대한 이해와 민주적인 훈련과정이 뒤쳐져 의술의 상업화를 부추기고 있다. 그럴수록 의료인들은 자신의 지위향상을 위해 학문적인 면에서 우수할 뿐 아니라 의료윤리와 사회적인 사명에 투철해져야 한다. 의사들이 전문적인 통제권을 확보하고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려면 먼저 집단적인 엘리트의식에서 벗어나 자기희생적인 봉사정신으로 스스로 보다 가난하게 살고, 의료수익을 사회로 환원시킬 수 있는 진보성이 필요하다.
그는 과거의 의학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의료행위가 단순한 생물학적 지식과 기술 적용이 아닌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전제로 함을 간파하고, 의학자를 단순히 의학 발달을 촉진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인간정신을 변화시키는 혁신적인 철학자로 자리매김하였다. 결국 기창덕이 열망했던 것은 개원의로서의 성공이 아니라 치과의사인 자신을 지탱해온 의학문의 뿌리를 캐고, 한국의료를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 갈 지에 대한 역사적 단서를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