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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와 훈》
‘흉노족(匈奴族)’과 ‘훈(HUN)족’이라고는 배운 적이 있으나, ‘흉노제국’과 ‘훈 제국’이라고는 처음 듣는 것 같다. 고대에는 로마와 페르시아, 오스만, 중국의 진·한·수·당 같은 나라와 중세 몽골을 제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나, 그 외 나라들을 제국이라고 부를 만한 나라가 있었나 싶기도 한데, 흉노와 훈이 살고, 지배했던 땅이 어디였는지, 어떤 종족이었는지도 잘 모르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은 그들을 ‘오랭캐’라 불렀고, 유럽은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주로 내륙아시아와 동유럽에 살았다고 하는데, 이 둘은 뿌리가 같은 종족이다. 같은 집단인데, 그들이 아시아와 유럽 문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세력은 어느 정도였는지? 나로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지금 읽고자 하는 이 책의 저자인 김현진 선생은 역사학자로서 이력이 좀 특이하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자랐고,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나왔고, 현재는 호주 멜버른 대학 ‘고전학·고고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고대 그리스와 고대 중국의 종족과 외국인》, 《훈, 로마 그리고 유럽의 탄생》등이 있다는데, 이 책과 연관이 있다. 이 책은 지난(2024) 3월 15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소개되었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보다 유능한 학자가 이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어야 마땅하지만, 혹여 독자들 중에 미래의 위대한 역사가가 있어서 이 책을 통해 영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 미래의 역사 연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길 희망하며 이 글을 씁니다. 우리가 평소에 잘 들어보지 못했을 유라시아 대륙을 망라한 흉노와 훈의 그 웅장하고 장엄한 역사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청합니다.”라고 했다.
책 표지의 금장으로 된 사진만 봐도 눈이 휘둥그래질 지경인데 이 검은 훈의 통치자 쿠브라트 칸(7세기 - 불가리아 박물관 소장)의 위세품으로, 찬란했던 역사를 짐작하고도 남을 유물이다. 이 책에서 배우게 될 흉노와 훈의 역사, 그들의 문화가 세계에 혹은 우리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디까지인지 그들의 찬란한 문화를 꼭 한번 가서 만나보고 싶어진다.
책에서는 ‘기원전 3세기부터 6세기까지’를 다룬다고 하는데, 우리의 삼국시대와도 연결되는 시기다. 유라시아를 지배한 훈과 흉노는 유럽과 아시아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전체로 보는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에 걸쳐 일어났던 훈 제국의 확장이 가져온 놀라운 지정학적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훈 집단의 정치·사회, 역사, 지리적 배경을 검토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됐지만, 훈과 흉노는 어떻게 다른가? 그들의 고향, 즉 발상지는 어디인가? 그것들이 이 책의 주제일지 모르겠다. 훈의 고향은 내륙 아시아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 등 5개국과 아프가니스탄)와 시베리아에서부터 극동의 태평양에 이르는 러시아 남부, 몽골공화국 전체와 중국의 북부, 서부 대부분을 합한 곳으로, 이 광대한 지역은 기후도, 지형도 아주 다양하다.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사막도 있고, 오아시스도 있다. 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맥도 있다. 온대림과 북방침엽수림이 있는가 하면, 대초원 또한 그들의 중심에 있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다양했는데, 흔히 이들을 유목민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그들이 살던 곳은 목축민과 농경민, 수렵민, 도시민들이 각각 따로, 혹은 뭉쳐서 살았다. 삶의 방식이 하나로 정해지지 않았고, 한 종류로 속해 살아가면서도 다른 종류의 방식으로 전환하는 일도 부지기수로 쉽게 이루어졌다. 언어도 튀르크어, 몽골어, 퉁구스어 등 다양했다. 우리와도 갈래가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이라고 배우기는 했으나, 오늘날 학계는 우랄 알타이어족은 입증할 수 없는 가설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유목민’을 영토 의식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흉노·훈 집단 전체에는 이를 적용할 수는 없다. 유라시아 초원지대 유목민들은 모두 명확한 영토 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목축민으로서 고정된 초지를 오가며 생활했다. 그들은 정해진 영토나 정치적 통제가 없는 삶을 살았다고 여기면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엄격한 정치 조직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다른 내륙 아시아 집단과 마찬가지로 생활양식이나 종족 구성이 동질적인 사회가 아니었다. 훈 제국 역사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위대하고 문명화된 것에 관한 역사만큼이나 흥미롭고 복잡하다. 그러나 종래의 역사가들에게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고, 세계사에 기여한 바도 간과되어 평가절하되어왔다. 저자는 훈족에 대해 처음 배우거나 내륙 아시아 또는 고대 후기와 중세 초기 유럽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래서 이 부분의 역사 논쟁까지는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다고 했다.
【1장】흉노/훈 제국
내륙 아시아에 위치한 흉노사회는 순수 유목사회가 아니었다. 농경목축 사회였다. 흉노 집단이 작은 국가였는지, 아니면 제국의 규모를 갖춘 극도로 복잡한 부족연맹이었는지에 관한 논쟁은 지금도 뜨겁다. 그 배경에는 유목문화가 국가체 형성을 넘어설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가란 어떤 성격을 띠어야 할까? 러시아의 역사학자 니콜라이 크라딘은 1) 혜시(惠施-베품)에 기반한 초씨족적, 비혈연적 관리직을 두어야 한다. 2) 관리의 봉급을 지불하기 위한 정기적인 세수입이 있어야 한다. 3) 정치 권력에서 독립된 사법권이 있어야 한다. 4) 전체 정치체의 행정을 운영하는 국가 기관에 종사하는 국가 운영 ‘계층’이 존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흉노는 기껏해야 ‘배아’수준의 국가 조직을 이루었을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초원제국은 국가 수준의 강력한 정치체였다는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널리 알려진 중국 한대의 사마천은 흉노를 어떻게 보았을까? 그는 정치체제는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전제성’으로 선우(單于)라 불린 황제를 정점으로 그 아래에 왕과 부왕을 둔 복잡한 위계가 있었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준봉건제’라고 했다. 또 그는 《사기》에서 “대신들은 모두 세습하는 관직이었다. 호연씨, 난씨, 수복씨가 있었는데, 이들 세 성이 귀하였다. 왕이나 장군들은 동방에 위치해 상곡군 동쪽을 담당하였고, 예맥, 조선과 접해 있었다. 오른쪽 방향의 왕이나 장군들은 서방에 위치하며, 상군의 서쪽을 담당하였고, 소월지, 저, 강(羌)과 접해 있었다. 각각의 영역에서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며 살았다.”고 기록했다.
흉노가 제국을 이루었다는 점에 부정적인 크라딘이었지만, ‘카리스마적 지배자와 황제 씨족으로 구성된 제국의 중심부가 직접 정복 또는 정치적 권위의 부과를 통해 본래의 영토나 종족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집단과 영토를 포괄하여 정치적 관계를 맺었다’는 점은 인정했다. 또한 흉노가 이웃한 중국의 관행을 국가 조직과 행정에 얼마나 흡수하고 변용했느냐는 것에서 찾을 수도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중국이 흉노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지만, 최상위 지배 씨족과 그 바로 아래 지위는 황족과 통혼이 허락된 주요 씨족 지도자에 한정되었다는 점에서, 흉노 제국은 본질적으로 준봉건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푸른색은 동쪽, 흰색 서쪽, 검은색 북쪽, 빨간색 남쪽을 상징하는 것과 같이 색깔을 영토의 상징으로 이용한 점 등은 중국의 우주론을 따랐거나, 나름대로 창안한 것일 수는 있다.
흉노의 핵심 영토인 몽골고원 북서쪽 투바공화국의 아르잔에서 발굴된 유적은 스키트 시대(기원전 8세기) 것으로, 중앙아시아에 극도로 조직화된 초원 정치체가 존재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거대한 스키트 유형의 무덤은 70개의 방으로 구성되고, 사카왕과 함께 160마리의 승용마가 묻혔는데, 이는 강력한 통치자 아래 잘 조직된 초원 연맹 흉노제국이 발흥하기 오래전부터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흉노와 이어진 후대의 훈 집단은 결코 무無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초기 흉노의 정치체제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사회 환경에 따라 진화한 것이다. 이렇게 초원 정치체들은 흉노와 유사한 정치 조직 구성역량을 보유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왕권이라거나, 민중의 삶, 혹은 군사력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정치역량, 즉 정치사가 아닐까. 사마천은 ‘흉노·훈 조상은 중국인들이 그들을 제압하기 전까지 수 세기 동안 중국을 위협했다.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가 그들을 중국 북부 내몽골로 쫓아내고, 그들의 침략을 막고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건설했다’고 했다. 중국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흉노 지도자 두만은 자신이 총애하는 다른 아내의 아들을 후계자로 굳히기 위해 전처의 아들 묵특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 사악한 아버지는 묵특을 월지에 인질로 보낸 후 월지를 자극해 아들을 제거하기 위해 월지와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묵특은 살아남았고, 내륙아시아를 통일하는 지배자가 되었다. 두만은 아들의 용맹함을 인정하고, 그를 기병 지휘관으로 임명한다. 부하들의 신임을 등에 업은 묵특은 이제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이복형제와 계모, 자신에게 반기를 든 귀족들을 모두 처형했다. 그다음은 동쪽의 가공할 적인 동호를 정벌하려고 했다.
동호는 새 선우 묵특에게 그의 아버지 두만이 가장 사랑한 말을 달라고 요구하고, 나중에는 묵특의 아내 중 한 명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묵특은 이런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고는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 전방위적 공세로 동호를 흉노에 편입한다. 승리를 거둔 묵특은 서방의 월지를 격파하고, 진시황에게 빼앗긴 남쪽의 영토를 되찾았다. 묵특은 기원전 200년 백등산 전투에서 한고조(유방)의 군대를 포위했다. 고조는 자신의 딸(사실은 친척의 딸)을 첩으로 내주고, 비단과 술, 곡식을 내주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화친하기도 했다. 한고조가 죽자 묵특은 여태후에게 자신의 아내 중 한 명이 되어 달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어마한 자신감이 아닐 수 없다. 이후 한문제(서기전 179∼157년 재위) 때는 오늘날 신장인 타림분지를 포함한 서역 26개국을 정복했다. 묵특은 기원전 174년 죽었으나 35년 동안에 흉노제국을 굳건히 세우고, 행정체제를 재조직했으며, 국토를 크게 확장했다. 이것은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차지한 영토보다 넓었다. 한나라를 조공국으로 전락시켰으며, 알렉산드로스는 그가 죽자, 제국이 붕괴됐지만 묵특의 후손은 이후 4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묵특이 죽은 후에는 그가 직접 선택한 선우(황제) 노상에게 이어졌다. 이때 흉노는 월지를 격파하고, 월지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 월지 잔당들은 박토리아까지 도망쳤는데, 오늘날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세운 후계 국가가 그들이다. 기원전 141년 호전적인 한무제가 등장하면서 흉노와의 화친 정책은 재고되었다. 여러 번 실패 끝에 기원전 129년 흉노제국과 한제국은 전면전을 벌였다. 기원전 126년 군신 선우가 죽고, 동생 이지사가 권좌에 올랐다. 이지사에 패한 어단은 한나라에 항복했고, 한무제는 흉노의 내전을 활용해 1세기 전에 빼앗긴 오르도스 지방을 다시 탈환했다. 두 제국은 거의 1세기 동안 진퇴양난의 전쟁을 벌였고, 서기전 60년 드디어 한나라는 흉노를 격파해 일시적이지만 타림분지를 장악했다.
기원전 114년부터 58년까지 흉노제국은 선우가 8명이나 즉위할 정도로 혼란했고, 왕의 재위 기간이 짧았다. 8명 중 두 명만이 겨우 10년 이상 권좌를 유지했다. 파벌 갈등은 내부 반란을 진압하고 남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한나라의 공격을 저지해야 하는 정부의 능력을 약화시켰다. 흉노의 통치자는 한 황제보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앉았다. 선우 호한야는 한나라 수도 장안으로 직접 가서 황제에게 항복했다. 기원전 36년 호한야가 이끈 흉노-한 연합군은 질지를 격파했다. 질지 추종자들은 패배한 군주를 따라 서쪽 장거(우즈베키스탄)까지 도망갔으나, 질지는 그곳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흉노가 한나라에 굴복했지만, 항구적이지는 않았다. 호한야가 한나라에 굴복한 40년 뒤, 왕망이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운 것이다. 이때 한나라는 구렁텅이에 빠져들었다. 흉노는 이 기회를 이용, 동쪽의 오환, 서쪽의 타림분지를 탈환했고, 묵특시대에 누렸던 것과 같은 조공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 몽골계 조상으로 보이는 선비족이 중국과 동맹을 맺고, 서기 87년 선비는 북흉노를 대대적으로 격파했다. 57개 흉노 부락이 한나라에 투항했다. 몽골고원과 초원 동부 패권은 이제 선비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 2세기 동안 알타이 지역 흉노 사람들은 북동쪽과 북서쪽에서는 튀르크계 정령에, 서쪽에서는 강거에, 동쪽에서는 선비에, 남서쪽에서는 오손에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긴 시간 동안 버텨내며, 잊혀진 뒤에야 이들은 강력한 훈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다시 등장한다.
91년 흉노를 제압한 선비지만, 흉노와 달리 동부 초원의 모든 부락을 연합해 초부족적인 원시 국가체를 만드는데 실패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단석괴(141∼181년 재위)가 잠시 제국을 이끌었으나, 북쪽의 정령, 동쪽의 부여, 서쪽의 오손을 격파하기는 했어도, 그가 죽은 뒤 선비국은 다시 소규모 집단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216년 〈삼국지〉의 주역 조조가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남흉노 선우를 낙양에 인질로 잡아두기도 했으나, 이는 흉노가 오랫동안 중국 변경에 체류했음에도 제국적 면모가 존재하고 여전히 기능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중국 정권의 골칫거리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마씨에 의해 3세기 중반 중국은 晉나라로 다시 통일된다. 그러나 292년 진나라가 내전으로 국력이 약화되자, 흉노는 기회를 이용해 중국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304년 묵특의 후손인 유연이 308년 중국에서 황제로 즉위한다. 5호 16국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시기는 초원 내륙 아시아와 전통의 중국이 합성된 독특한 시기였고, 이후 수·당제국으로 이어졌다. 흉노는 중국에서 200년 가까이 당했던 굴욕에 대한 복수를 한 셈이다. 316년 흉노는 진나라의 두 번째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민제를 사로잡았다. 민제는 겨우 화평후라는 작위를 받고, 흉노 황제를 따르는 굴욕을 당하다 결국 처형되었다. 그러나 북중국의 흉노제국은 극도로 불안했는데, 흉노 지배층 내부의 불화 때문이었다.
431년 중국을 지배하던 흉노제국은 선비에 의해 멸망했다. 이어 439년 동아시아 최후의 흉노국가 북량마저 선비의 손에 쓰러졌다. 선비는 북중국 전체를 손에 넣고, 북위를 세웠다. 북량의 저거씨는 서쪽으로 도망가 신장 동부의 고창에서 460년까지 흉노족 통치를 이어갔다. 이제 소왕국은 흉노-훈 잔당과 선비, 그리고 오환까지 함께 뒤섞여 몽골고원에 성립한 유연제국과 합병되었다. 동방의 흉노는 중국과 함께 약 300년 동안 독특한 정체성을 지켜냈다. 중국 역사학에서는 홍노-훈은 거의 일관되게 잔혹하고 오만한 오랑캐로, 이들의 중국통치는 불법적인데다, 순전히 파괴적이기만 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는 그리스·로마 사료들도 현대 역사학에서 훈 집단에 대한 적개심과 놀랄 만큼 닮아있다. 흉노의 존재는 동서 문화의 진보를 늦춘 일탈이자, 파괴적인 재앙에 불과했을까? 이는 명백한 결함이 있다.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갈라졌는데, 서위의 내륙아시아 통치 지배자들이 곧바로 북주를 세우고, 그들은 중국을 다시 통일하는 수(581∼618)로 이어졌다. 수를 계승한 당(618∼907)은 내륙아시아 전임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입었다. 심지어 당을 세운 이연은 흉노의 후손이다. 혼인으로 연결된 튀르크계 기병대들은 단명한 수나라가 붕괴된 뒤, 중국을 다시 통일하는 과정에 활용되었고, 당나라 내부에서도 영향력이 컸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학계 연구는 충분하지 않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흉노’가 단일 인종 또는 단일 종족으로 구성되었다는 오랜 편견을 깨부수고, 다종족, 다문화, 다언어, 다층적 사회로 다각적인 농경·목축경제와 고도로 계층화한 사회·정치, 문화를 키웠으므로 유전적으로 단일한 집단으로 지칭해서는 안 되며 흉노는 제국체를 가리키는 ‘집단명’이라고 한다.
【2장】훈의 소위 200년의 공백 【3장】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훈
‘흉노’는 정치체와 통치 엘리트를 의미하는 것이지, 인종이나 종족적 개념이 아니다. 서기 2세기 중반 즈음 흉노 엘리트 일부 집단은 선비의 종주권을 받아들인 채 동부 초원에 남아 있었고, 타림분지에도 흉노계 소국가가 있었다. 그러나 북흉노 국가 본체는 서방 어딘가에서 ‘사라졌다’고 보고 있는데, 그것은 200년간 그리스·로마 사료에도 중국의 사료에도 기록이 희박해서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3세기 중반 편찬된 《위략》은 흉노가 본래 중심지인 몽골고원에서 서쪽 알타이 지역 정치체로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북위를 다룬 선비국가 역사서 《위서》도 5세기 서북 방면 알타이 부근에 흉노의 후예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흉노와 마찬가지로 월지/쿠산, 심지어 인도의 사카(석가모니 탄생국)까지, 후대의 초원제국들은 이원 집단의 관행이 있었고, 왕과 관리들을 갖춘 고도의 위계까지 있었다. 특히 이들의 편두풍습은 훈과 일간에 의해 유럽에도 소개되었고, 우리나라의 가야지역이었던 김해 대안리 고분에서도 편두가 확인되었다.
훈 집단은 유럽의 일간과 고트 및 동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의 페르시아와 쿠산샤 방면으로 진출하기 전에 강거와 오손을 합병했다. 다라서 ‘200년 공백’동안 훈 집단이 정치적으로 후진적인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정치 조직이 부족했다는 가설은 성립하기 어렵다. 훈 집단이 유럽에 진입하기 전에 정복한 인근 종족들의 정치 조직에서는 과거 몽골고원과 투르키스탄의 흉노식 모델과 비슷한 수준의 정치체제가 내륙아시아 다른 지역에서도 200년 내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내륙아시아는 물론 유럽에 등장한 훈 집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정학적 상황이 흉노/훈에게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확장할 기회를 열어주었다고 봐야 한다. 우랄지방의 고고학적 연구에서 이 지역을 향한 흉노/훈의 확장이 늦어도 4세기 초 이루어졌던 것으로 본다. 이것은 4세기 초에는 훈이 이 지역을 지배하고 다스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럽에서 훈 제국이 로마 제국과 여러 게르만 종족들을 공격하여 명성, 혹은 악명을 쌓는 동안에 또 다른 강력한 훈 제국은 중앙아시아·이란·인도에도 흔적을 남겼다. 이들의 이야기는 유럽의 훈만큼은 유명하지는 않지만 유럽에서 중앙아시아 흉노의 친척인 훈을 다루지 않는다면 훈의 역사는 불완전해진다. 이들이 각자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파고듦에 따라서 양자 사이의 방대한 거리는 이들을 갈라놓았을 것이다. 유럽 훈의 역사를 복원하기 쉽지 않은 것은 이들의 역사가 그리스·로마의 것에 비해 단편적이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와 인도의 기록도 제한적인 수준인데다 이들이 활동한 영역이 로마와 중국 사서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중앙아시아의 훈 집단이 흉노제국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중국 사료들에 중앙아시아 백훈 정복자들이 본래 흉노에 속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적시하고 있다. 백훈은 인도 북부에서 서쪽으로 지중해까지, 동쪽으로는 투르판까지 그 영역이 지금의 인도보다 훨씬 넓었다. 이들이 세운 키다라 왕조는 초기 쿠산의 상징을 주화로 사용했는데, 이를 근거로 최근 키다라 왕조(서쪽의 훈집단)가 이란 동부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점령한 훈계 침략자였고, 정복 이후에는 차츰 문화적으로 이란화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되기도 했다. 페르시아에서는 키다라 왕조가 훈 제국과 에프탈 왕조의 훈 제국을 아울러 키오니타이(훈/흉노)라고 불렀다. 일부에서 반대가 있지만, 키오니타이는 훈과 같은 이름으로 보고 있다. 이에 더한 사실은 페르시아가 훈 제국인 키다라 왕조에 연공을 바쳤다는 점이다. 사산왕조 지배자 야즈테게르드 2세(438∼458년 재위)는 굴욕적인 연공 지불을 거부하고 키다라 왕조, 즉 백훈 제국에 당했던 패배에 대해 복수하려 했다. 450년 페르시아는 토하리스탄(아프가니스탄 북동부)까지 나아갔다. 454년 페르시아 왕 아즈게로드는 키다라 왕조에게 연공을 받아야 한다며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백훈(키다라)측은 이를 거부하고, 대승을 거두면서 10년 동안 페르시아 제국에 주었던 연공을 모두 받아냈다.
6세기 동로마 제국 사가들은 키다라를 이은 에프탈 왕조가 훈계 집단임을 강조했다. 페르시아 사산조에 대한 승리 이후, 에프탈 왕조가 훈 제국이란 이름은 페르시아 등 이란계 종족에게는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488년 사산의 페로즈 1세의 아들 카바드는 에프탈 군주로부터 지원을 이끌어 내고, 훈 왕의 딸 혹은 누이와 결혼해 훈측이 사산 왕조의 재위를 얻는데 필요한 원병을 내주었다. 카바드는 10년 뒤에 에프탈 왕조로 망명했고, 에프탈 왕조는 3만의 군대를 보내 제국을 다시 찾게 해주었다. 페르시아인들은 484년부터 550년의 후스라우 1세 시대까지 훈 제국에 연공을 바쳤다. 페르시아를 복속시킨 에프탈 왕조의 힘은 이제 절정에 올랐다. 497년과 509년 사이에는 오늘날 중국 서부 신장까지 점령했다. 중국 사료는 에프탈 왕조, 즉 백훈 제국의 방대한 영토를 기록했는데, 《양서》54권에는 이들의 영토가 페르시아와 카슈미르, 카라샤흐르, 쿠차, 카슈가르, 호탄에 이른다고 했다. 또 《북서》97권에는 장거, 호탄 등 페르시아가 언급되고, 중국의 서쪽 30개 지역이 백훈에 복속되었다고 하였다. 5세기 후반 인도 붓다굽따를 침공하고 6세기 초에는 인도인들이 ‘한없는 명성을 누리는 지상의 지배자’라고 불렀던 제왕 또라마나의 이름 아래 에프탈 왕조가 인도 서부 전체를 정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6세기 중반 에프탈 왕조는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닌 국가였다. 동쪽으로 신장, 남쪽은 인도 중부, 북쪽은 카자흐스탄 초원, 서쪽은 페르시아를 통해 동로마까지 닿았다. 하지만, 이들 중앙아시아 훈 제국은 6세기 중반 동방에서 새로운 열강으로 떠오는 돌궐이 나타나면서 빛이 바랬다. 이 무렵 유연도 돌궐에 의해 멸망했다. 동부 초원의 지배자가 된 돌궐은 에프탈 왕조도 집어삼키려 들었다. 에프탈 왕조는 이제 페르시아와 돌궐 사이에 끼인 처지가 되었다. 560∼563년 사이 최후의 에프탈 왕조는 페르시아의 후스라우 1세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서 훈의 역사가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돌궐도 내분이 일어났고, 서돌궐 시대 새로이 당도한 동돌궐인들은 이미 진입해 있던 훈족들과 차츰 섞였기 때문에 7세기 초부터 어느 왕조가 훈계이고, 서돌궐계인지 구분하기 쉽지가 않았다. 키다라 왕조가 5세기 에프탈 왕조로 대체되었듯이, 7세기 초 서돌궐이 계속해서 에프탈 왕조 통치자들을 대체해갔다. 새롭게 등장한 강력한 내륙아시아 국가들에는 훈적 요소들이 섞여 들어간 것인데,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서돌궐 제국은 7세기 중반 내부 분쟁과 동쪽의 당나라가 가한 압력으로 혼란에 빠기기도 했다. 이에 이어 돌궐인의 서쪽 영토인, 즉 중앙아시아 남부는 새로 출현한 아랍 무슬림들의 침공에도 직면했다, 무슬림에 대항하는 에프탈계 훈인들의 투쟁은 서쪽에서도 벌였지만, 7세기 후반에는 결국 무슬림이 에프탈을 격파했다.
인도는 훈계인 키다라와 에프탈 왕조 및 무슬림들이 침공해 왔음에도 어떻게 민족종교인 힌두교를 지켜냈을까? 카불과 간다라를 지배한 튀르크 샤히 같은 인도 서부 지배세력과 아프카니스탄의 훈계 국가일지 모르는 수수께끼의 존재들이 무슬림들이 인도 북서방면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았다고 볼 수 있다. 7세기부터 11세기까지 인도북방의 구르자라 쁘라띠하라 정권은 백훈적 요소를 강하게 띠었는데, 이들이 강대한 제국을 세우고 무슬림의 침입을 막고, 힌두교 문화를 이슬람화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10세기에 들어 샤히 세력과 구르자라 세력은 쇠락하기 시작했고, 무슬림들은 튀르크계 지도자 가즈나조 아래서 근동과 이란 세계 대부분 지역이 무슬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데 반해, 인도는 비록 무슬림 지배하에 있었음에도, 종교와 문화를 지켜냈다. 인도의 훈계 집단과 후예들이 힌두문명를 지켜내는데 기여했던 것이다.
【4장】 유럽의 훈
훈 집단이 유럽의 사료에 처음 등장한 것은 370년, 그들은 먼저 알란을 격파하고 그 뒤에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로마니아에 있던 고트 집단을 격파한 것으로 이름을 알렸다. 2세기 이전부터 카자흐스탄에서 흉노/훈계 집단들이 활동했던 것을 감안하면, 여기서 갈라져 나온 집단이 유럽에서 훈을 자처했다고 볼 수 있다. 2세기 훈 집단의 본체는 동쪽인 몽골고원과 카자흐스탄 사이에 위치한 알타이 지방에 있었다. 이들과 러시아 남부 알란 집단 사이에는 튀르크계 정령이 있었고, 이 정령인이 훈 국가에 흡수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4세기에 알란을 정복했다는 것은 훈이 알란의 영토에 당도하기 전부터 유럽에 존재했을 개연성은 없어 보인다.
알타이 지방에서 유럽에 당도한 훈은 이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는데, 훈이 도착하기 전 유라시아 대륙에서 길게 뻗은 반도, 즉 유럽에는 여러 갈래의 집단들이 있었다. 고트를 비롯한 게르만계들이 유럽 중부 대부분과 동부 일부를 차지했고, 동쪽으로는 사르마트, 남쪽과 서쪽으로는 로마 제국이 있었다. 4세기 중반까지 유럽에서 주요 정치체는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동로마제국이었다. 훈 제국이 오기 전 수 세기 동안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지배해왔던 로마다. 그러나 이들은 3세기 이전에 군사·정치·사회·경제적으로 혹독한 위기를 경험했다. 페르시아와 게르만 침략자들이 제국의 국경 대부분을 황폐화시켰고, 완전히 별개가 아닌 동로마와 서로마가 국력을 분열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1세기 이래 유럽과 유라시아 서부에서 반복된 갈등으로 거의 400년 동안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침략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들의 영역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훈 제국의 도래는 이를 극적으로 바꾸었다.
한때 무적이었던 로마 군대는 이제 과거의 유물이 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 뒤를 이은 황제들은 숱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로마식 군제가 초원 지역에서 들어온 새로운 전술에 비교하면 뒤처져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훈의 도래를 공포로 지켜보았는데, 로마령 발칸지역에 몰려든 고트와 알란 난민들이 퍼뜨린 이야기가 로마제국에 전해졌다. 386년 오도테우스 휘하의 고트계들이 훈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로마 영토로 진입하려 했으나, 이들은 파멸로 끝났고, 이후 5세기 초까지 다뉴브강 근처에서 그들이 이동하는 일은 없었다. 최소한 387년에는 훈 제국이 헝가리 평원을 확고히 장악했다. 훈은 고작 10여 년 만에 헝가리 서부에서 볼가강까지의 방대한 영역을 정복하고 지역을 평정했다. 이렇게 빠른 정복과 안정은 체계적인 행정 체제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로마 사료들은 훈 군대의 재빠른 기병-몽골군의 보는 것 같은- 앞에서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 알 수 있다. 애플람이란 역사가는 그들이 얼마나 극적이고 폭력적인지를 기록했는데, 훈 인들이 아이들을 잡아먹고, 여인의 피를 마시는 악마 고그마의 화신이었다고 썼다. 로마인들은 뒤늦게나마 힘을 합쳐 훈 제국에 대항하려 했으나, 강력한 훈에 직접 대적했다는 흔적은 없다. 훈은 로마군과 로마령을 약탈한 뒤 군대를 내륙 아시아로 철수 귀환했다. 로마제국은 피해가 막심했음에도 황제와 궁정은 훈에 대한 ‘허깨비 승리’를 선언했는데, 이런 일은 이후 로마가 지속되는 동안 계속되었다.
전통적으로 초원 제국 체제는 이원정치(좌익, 우익 또는 동부, 서부)의 특징을 가지는데, 유럽의 훈 체제도 두 사람의 최고 통치자를 발견할 수 있다. 420년 루가와 옥타르 형제가 함께 통치할 때 옥타르는 제국의 서부를, 루가가 동부, 절반을 다스렸을 개연성이 그것이다. 옥타르와 루아스 형제는 아틸라 이전의 왕들로 알려졌다. 둘의 뒤를 조카들이 계승했고, 블레드는 동부를, 아틸라는 옥타르가 다스리던 영지를 이어받았다. 아틸라가 서부를 다스렸다는 것은 아틸라가 게피드 훈에 속한다는 것을 말해주며, 게피드는 오늘날 헝가리에 해당한다. 훈노룸 렉스, 즉 훈의 으뜸가는 왕으로 불린 아틸라가 잠시 단독으로 왕권을 장악한 것은 초원의 관행에 반하는 독재이지만, 그는 아들 엘리크에게 통치를 맡겼다. 엘리크는 아틸라의 대리인이자 공동통치자였다. 아틸라가 죽은 뒤 내전을 거친 후 이원정치가 다시 부활되었고, 뎅기지흐와 에르나흐가 함께 훈의 왕좌에 올랐다.
이후 에르나흐에 의해 여섯 귀족으로 구성된 평의회에 의해 통치되다가 4대 주요 구역을 지배하는 4대 제왕이 존재하기도 했다. 훈 초기에 ‘천명에 따라 사방을 지배했다’는 관념이 나중에 돌궐 호르혼 비문에 나타나는데, 이는 훈 제국의 훈식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것이다. 로마인 프리스쿠스의 기록에 의하면 ‘훈 사람들이 아틸라의 행운을 빌었다’고 하는대목도 흥미롭다. 군주권에 대한 훈 사람들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훈이 내륙아시아적 기원과 흉노와의 관계를 의식했다는 사실은 유명한 불가르 왕명록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아틸라의 아들 에르나흐는 볼가르 군주와 돌로(Duilo) 황가의 조상 중 한 명으로 등장하는데 이 둘은 6∼7세기 서돌궐 제국의 연맹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이상 【4장】까지를 종합해 주었다. “훈 제국의 조상인 흉노나 당대 동방의 친척인 키다라 왕조-에프탈 왕조 백훈 제국과 매우 유사한 조직을 보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훈은 이 복잡한 준봉건적 사회·정치 체제와 대단히 훌륭한 조직력을 통해 게르만계, 이란계, 슬라브계, 핀우그르계, 튀르크계 등 무수한 목축민을 하나의 제국으로 묶어서 유럽에서 계속해 전쟁을 치르면서도 성공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이들은 유럽에서, 로마 국경 너머의 땅에서 처음으로 통합된 제국을 세우고, 로마의 패권을 대체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 실현 가능한 정치적 대안을 제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피정복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능력은 행정 효용과 국가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핵심 지표다. 훈은 두 능력 모두를 보유했고, 따라서 이들의 제국은 유럽에서 명백히 국가로서 존재했다.”
【5장】 아틸라의 훈
434년 루가가 죽자, 조카인 브레다와 아틸라(아틀리)가 권좌에 올랐다. 훈 제국은 437년 아에티우스와 동맹을 맺고, 부르군트를 격파했다. 이로써 이때까지 그런대로 유지해오던 동로마 제국과 훈 제국 사이의 평화는 완전히 깨졌다. 아틸라 등은 발칸반도를 침공했으며 이때 사산조 페르시아도 로마를 공격했다. 이것은 의도적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 알기 어렵지만, 페르시아가 로마령을 취한 마지막 공격이었다. 이후 페르시아는 동쪽 백훈의 위협에 대응하기에 급급했고, 로마는 콘스탄티노플을 방비하는데 급급했다. 다행히 442년 말 로마가 훈 제국에 연공을 올려주는 조건으로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447년 로마에 대한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발칸반도 로마군은 말 그대로 쓸려나갔다. 아틸라는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가용 야전군을 격파했다. 흑해와 헬레스폰토스, 2개 바다로 진군하면서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에게 조약을 강요했다. 6세기 연대기 작가 마르켈리누스 코메스는 이때의 제앙을 이렇게 기록했다.
“과거의 어느 전쟁보다 거대한 전쟁이 아틸라왕에 의해 우리에게 닥쳐와 거의 모든 유럽 도시들, 성채들을 침공하고 약탈했다.”447년 이후에 맺어진 조약은 “모든 명령이 설사 가혹하다 할지라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훈 제국은 동서로는 판노니아 변경의 상기두눔(지금의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부터 노바이(불가리아 스비슈토프)까지 약 500㎞, 남북으로는 다뉴브강 남쪽으로 약 200㎞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차지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가 죽자, 조약은 즉각 파기되었다. 아틸라는 크게 분노했으나, 분노의 눈은 이제 다른 곳, 서방의 옛 동맹 아에티우스에게로 옮겨갔다.
453년 동로마가 다뉴브강 이남의 훈 제국령을 탈환한 것은 훈 제국이 일어난 지 4년, 아틸라가 죽은 지 5년이 지난 뒤였다. 아틸라가 죽고 10년이 지난 후, 훈 제국이 해체되고 나서도 동로마 제국은 여전히 소규모 훈 군벌이 다뉴브강 이남에서 활동하며, 사르디카를 막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둘의 싸움은 동·서방 모두에게 재앙이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아틸라의 침공으로 입은 피해로 인해 10년 넘게 무력한 상태에 빠졌다. 훈 제국 마지막 왕의 기록도 상당히 극적이다. 역사가 요르다네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종족의 관습에 따라 수많은 아내를 가졌던 그는 일디크라는 아름다운 소녀와 결혼했다. 결혼식에서 그는 크게 기뻐하며 포도주를 많이 마신 뒤, 돌아가 바닥에 등을 대고 잠이 들었는데, 평소라면 코로 나와야 했을 엄청난 양의 피가 목구멍으로 흘러내려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주취가 명성을 떨친 왕을 치욕스럽게 끌어내린 것이다. 이튿날 조신들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아무런 상처도 없이 피를 쏟아낸 아틸라의 시신과 베일 뒤편에 얼굴을 숙이고 훌쩍이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아틸라의 죽음과 관련해서 더 놀라운 일이 있었다. 활은 훈 종족이 가장 애용하는 무기였다. 그의 종족은 그의 유해를 받든 여러 방식에 따라 평원의 중앙에,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낼 만한 비단으로 만든 천막 아래 안치했다. 최고의 기사들이 사냥하듯 원을 그리며 시신 주변을 돌았고, 사람들은 ‘훈의 지배자, 아틸라 대왕, 문디우크의 아들, 가장 용감한 주인, 스키트와 게르만 영토에 홀로선 지배자, 수많은 도시를 정복하고, 양 로마제국을 공포에 떨게 했으며, 그들의 간청을 받아들이고 연공을 받는 대가로 약탈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완수한 그는 적의 공격이나 친구의 배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나라에서 즐겁고 행복하며 평화로운 상태에서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다. 누가 이를 죽음이라 말할 수 있겠고, 복수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들은 감정의 극단을 오가며 장례의 슬픔과 기쁨을 번갈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밤이 되자 그의 시신을 비밀리에 땅에 묻었다. 그들은 시신을 처음에는 금으로, 다음에는 은으로, 마지막에 단단한 쇠로 감쌌는데, 이 세 물질이야말로 전능한 왕에게 어울리는 인식이라는 때문이었다. 철은 여러 나라를 정복한 일을, 금과 은은 그가 양 제국의 추앙을 받는 일을 상징한다. 그들은 또 적으로부터 획득한 무기와 귀한 마구, 빛나는 보석들, 가치를 매길 수 없는 희귀한 장식물을 함께 넣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호기심으로부터 귀한 물품을 보호하기 위해, 작업을 완수한 이들을 죽임으로써 노동에 대한 끔찍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묻힌 사람뿐만 아니라, 그를 묻은 사람에게도 갑작스러운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
이는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을 수 없다는 비밀까지 밝혀준다. 훈 제국의 영화는 아틸라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6장】아틸라 이후의 훈
아틸라가 죽자, 그의 아들들과 귀족들 사이에 후계 계승 문제를 두고 내전이 뒤따랐다. 아틸다가 죽기 전 80여 년간은 확장을 거듭하며 놀라운 속도로 유럽대륙 거의 전부를 장악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상대적으로 정치적 대립이 적었고 단합되었기 때문이다. 간혹 권좌에서 밀려난 귀족과 왕족들이 처형당하는 일은 있어도 그것으로 제국의 안정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440년 아탈다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형 블레다의 권좌를 찬탈하고, 찬탈을 성공시키기 위해 훈 제국 서방에 있던 게피드 부를 이용했는데, 이로써 블레다를 지지하던 동방의 여러부를 억압했다. 이전까지 이들은 우크라이나 변방의 초원지대에 살던 동방의 부로 아틸라 재위 내내 제국의 서부 출신 귀족들에게 압박당했다.
454년 게피드 왕 아르다리크는 아틸라의 맏아들이자 통치자인 엘리크를 격파해 살해했다. 엘리크를 패배시킨 게피드는 훈 제국에 반란을 일으킨 ‘게르만계’로, 고고학 조사에서는 이들의 지배층이 몽골로이드의 특성을 지닌 혼종 집단임이 밝혀졌다. 이것은 훈 귀족들이 종족과 상관없이 혼인을 했고, 게피드 귀족층과 지배가문 내에도 훈계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게르만계 가운데 게피드 엘리트들은 문화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아시아 출신 훈족과도 유사하다. 훈의 편두 풍습은 게피드인 사이에서도 유행했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몽골인의 전통 풍습이었다.
훈을 조상으로 둔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 최초로 ‘야만인 왕국’을 세우고, 서로마 제국의 잔존세력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오도아게르는 ‘종족으로는 로기인’이며, 그는 왕으로부터 압제당했다고 하는데, 로기인들은 북해 지역의 게르만계 루기와 동일시했다. 오도아케르가 아틸라의 삼촌이자 훈의 대왕이었던, 루가가 다른 씨족에 속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도아케르 형제의 이름은 훈울푸스(늑대)인데, 가까운, 거의 모든 개인과 부락이 훈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그 역시 훈 출신임을 의미한다. 칭키스 칸의 원 이름인 테무진은 철인(鐵人)이라는 뜻으로 이를 감안하면 훈계 기원 또는 초원의 전통을 암시하는 것일 것이다. 울프(늑대)란 이름이 널리 사용된 것은, 늑대는 튀르크·몽골 문화권에서의 토템이자 신화적 조상으로 숭배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훈 제국과 같은 시대의 몽골고원과 투르키스탄에 존재했던 유연 제국에서도 황실 호위부대 이름이 ‘늑대부대’였다.
유연 지역은 훈 집단이 서방으로 기나긴 여정에 오르는 출발점이었고, 튀르크계 부락인 철륵은 훈의 옛땅이었는데, 이들의 기원설화에 흉노·훈 선우의 딸과 늑대가 결혼해 낳은 아들이 왕가의 조상이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아틸라의 후예들이 다스린 후대 볼가르와 연관이 있는 토템적 조상으로 숭배받기도 한다. 훈의 시대로부터 1세기 가량 지난 뒤 동방에 있던 옛 훈 땅에서 일어난 돌궐의 아시나 씨족의 조상 역시 암늑대였다고 전한다. 늑대와 관련된 신화와 형상이 훈이나 후대 튀르크 문화권에서 유행했던 데 반해, 계르만계 조상들은 울프를 인명에 사용하는 경우는 있으나, 늑대를 조상이나 신성한 동물로 본 경우는 매우 드물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알려진 훈의 왕은 4세기 후반의 ‘발람베르’였다. 그는 4세기 중반부터 활동했는데, 그리스어로는 ‘발라메르’라고 기록돼 있다. 아틸라의 아버지 문주크(튀르크어로 眞珠)는 문디욱스로 변했고, 아틸라의 본래 이름도 같은 방식으로 튀르크어 아스틸라(큰강, 바다)에서 고트어 다운 발음인 ‘아타일라’즉 아틸라로 번한 것이다. 발라메르의 할아버지 불루울프(늑대)는 ‘장엄하고 영광스런 늑대’라는 뜻이다. 정복자라는 의미의 ‘반달라리우스’는 405년 반달 부의 정복을 피해 알란부 및 슈에비부와 함께 중부 유럽의 고향을 떠났고, 376년 훈이 그곳을 정복한 이후 반달 부(아프리카 튀지니)와 싸울 수 있는 왕은 존재하지 않았다.
【8장】훈의 유산
【7장】은 폰토스 초원의 훈 – 우티구르·쿠트리구르 불가르 훈 – 인데, 그들의 이름도 배경도 생소하여 생략하고, 8장을 보기로 한다. 이전까지 흉노에서 훈으로 이어진 역사를 보았다면, 이 장에서는 이들의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들은 무엇을 남겼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다. 훈은 파괴와 혼란을 일으키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훈은 로마만큼 중대하고 오랫동안 흔적을 남겼다. 그럼으로써 유럽과 아시아의 역사 모두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아시아 훈은 중국과 이란, 인도에 깊은 충격을 주었으며, 훈은 유럽은 물론 세계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훈이 야기한 정치적 변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마 제국의 파멸과 이탈리아에 오도아케르 휘하 토르킬링기 훈과 아말 가문의 훈-고토 왕조가 지배한 하나의 ‘오랑캐 왕국’이 설립된 것이었다. 역사학자들은 훈 제국이 서로마의 멸망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하나, 이것은 지나친 과소평가다.(전문가 아닌 나 같으면 흔히 이스탄불을 최후의 수도로 한 동로마에 대해서는 조금 알아도, 서로마가 프랑스, 독일 등으로 변해갔다는 역사에 대해서 아는 바는 그리 많지 않다)
최후의 로마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훈계 왕자라 할 수 있는 도르킬링기 훈·로기·스키리의 지도자 오도아케르에 의해 폐위되었다. 로마 제국에 최후의 일격을 날린 것이 오도아케르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훈 제국에서 아틸라의 비서를 지냈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아버지 오레스테스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또 오레스테스의 아버지는 타눌로스였는데, 역시 훈의 혼혈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세력을 로마로 합류했고, 시간이 지난 473년에는 군도바트를 몰아내고, 서로마 제국 마기스테르 밀리툼이 되었으며, 475년 아들을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당시 이탈리아 로마군 대다수를 구성한 ‘야만족’군대의 지지를 얻어낸 것에 있었다.
오도아케르의 통치 기간은 짧았다. 그는 훈계의 다른 군주 오스트로고트의 왕 테오도리크에 의해 타도되었다. 로마를 붕괴시키고,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된 오스트로고트와 랑고바르드 모두 오도아케르가 이끌던 연맹과 마찬가지로 옛 훈 제국에서 형성된 정치체였다. 따라서 서로마 제국의 끝이 훈인들에 의해 초래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신생 왕국 역시 여전히 로마령에 있었고,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황제를 폐위시킨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야만인’왕은 새로운 정치체의 독립된 군주였다. 이후 새 황제들은 자신의 영토가 로마 제국에서 분리되었고, 서로마 제국과 유사하나 결국 다른 제국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오도아케르는 자신의 아들을 이전의 로마 황제인 카이사르라고 부르게 하고, 동로마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어떠한 추인도 받지 않았다. 그 아들이 황제가 된 뒤, 507년에는 추종자들이 자신을 아우구스투스라 부르는 것을 허용하고, 자신의 모습이 새겨진 주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훈-게르만 왕들은 폭력으로 이탈리아를 정복했지만, 옛 로마 원로원 엘리트들과 화해함으로써 충격을 희석시킬 수 있었다. 왕들은 로마 관습에 따라 악기를 연주하듯 정치를 함으로써 새로 정복한 이탈리아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면서 서서히 새 시대를 열 수 있었다.
5세기 가까이 서유럽을 지배한 서로마 제국을 훈인들은 이 지역의 정치 지형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그들은 이제 프랑크 왕국 같은 포스트 로마 정치체가 유럽에 출현하는 것을 촉진시켰으며, 로마 붕괴 이후에 나타난 소위 중세 봉건제는 훈 제국이나 이들과 같이 유럽에 진입한 다른 내륙아시아인(알란 등)들의 영향이었다. 훈의 관행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왕의 권위가 눈에 띄게 강화시켰는데, 이는 권력이 전쟁기 같은 비상시에 한정되며 평화기에는 존재감을 지니지 못했던 과거 게르만 세계의 소왕들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프랑크 왕들은 초원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통제력이 닿는 영토와 집단 모두에 절대적 권력을 행사했다.
왕이 종속된 봉신에게 선물을 하사하는 행위는 내륙아시아 정치체제의 구성요소였다. 우연히도 이와 연관된 페르시아 이웃 이란계 정치체제도 이것을 행사했는데, 이 관행은 봉건 질서를 묶어주는 사회적인 접착제가 되었고, 관대함을 표출하는 초원 지도자의 본질적인 미덕이었다. 따라서 왕의 권위를 유지하고 귀족층의 눈을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거창한 규모의 미덕을 보여줘야했고, 여기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전쟁을 벌여 군사적 정복을 통해 필요한 공물과 필요한 자원을 얻어냈다. 훈과 프랑크 등 여러 내륙아시아인들이 왕조의 통치자에 매료된 이유를 설명해준다고 보여진다. 테오도리크는 전통적인 초원의 방식으로 행동한 것이다.
정복왕의 순회 관행 역시 내륙아시아 왕들의 유목생활을 그대로 흉내 낸 것이다. 로마 제국을 대체한 속칭 ‘오랑캐’왕과 왕국은 자원과 실체에서 대륙아시아적 면모를 강하게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치 관행의 강력한 영향력은 훈 제국의 종말 이후로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지배 씨족의 공동통치 관념은 심지어 동유럽의 슬라브계 사이에도 분명히 반복되었다. 9세기 덴마크는 양두정치를 시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양두정치는 초원인들과 마찬가지로 지배가문의 모든 남성 구성원이 왕위를 주장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또한 정형적인 내륙아시아 방식으로 행정구역을 색을 이용해 지정했다. 하연 크로아티아인과 하얀 세르비아인이 프랑크인의 영역에 가까웠음을 알게 한다. 이들의 통치 엘리트층이 내륙아시아의 사르마트인에 기원을 두었다는 설은 상징화되고 있는데, 다섯 형제가 등장하는 크로아티아 건국 신화와 불가르의 훈 통치자 쿠브라트 이름의 변형 중 하나가 종족명인 크로아트의 어원이라는 설은 더 주목을 받는다. 오환(아바르)과 선비(세르비)는 내륙아시아 흉노에게 정복당한 동호연맹의 일원이었다. 만약 헝가리 지방의 아르비가 최종적으로 오환과 관련되었다면, 그 이웃인 세르비아의 지배 엘리트가 선비/세르비와 연관이 있다는 가설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륙아시아 군사문화가 서유럽에 전파되는 과정에는 알란의 역할도 훈 못지 않다. 알란인들은 4세기 말 훈에 정복당해 대부분이 훈의 통치 아래 복속되었다. 그러나 일부가 훈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405∼406년 사이 반달이나 수에비 같은 반란 부락 연맹을 구성해 로마령 유럽으로 진입했다. 이들은 훈의 정치적 지배를 거부하긴 했지만, 애초에 내륙아시아의 일부였기 때문에 훈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적어도 아틸라 통치기간에는 로마 제국의 권위를 파괴하는 입장이었던 훈과 달리 알란인 다수는 로마군 내에서 복무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로마군 유지와 변화과정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알란인들은 로마군의 핵심이 되었고, 고트와 훈을 상대한 전쟁의 중심에 있었다.
활쏘기, 말타기, 매부리기 등은 당연하게도 훈이나 알란과 같은 이들에 의해 유럽에 소개된 스포츠였다. 육식을 식습관화한 것도 초원식 식습관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훈식 예의범절과 긍정의례는 더 후대인 중세 궁전 관행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노골적 상무정신이나 해골을 술잔으로 만드는 섬뜩한 풍습도 게르만계 엘리트들에게 채용되었다. 6세기 랑고바르드 왕 알보인은 게피드 왕을 패배시킨 뒤 그 머리로 술잔을 만들었다는 것은 앞서 본대로 이고, 중국의 역사서에도 사마천은 흉노 선우가 패배한 월지 왕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만들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풍습의 마지막은 16세기 페르시아의 샤였던 이스마일 1세가 우즈베크의 지배자 시바니 칸의 해골을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한 술잔으로 만들어 자신의 승리를 기념했다고 한 것이다.
앞에서 본 편두풍습은 우리나라에도 있었는데, 편두는 왜 했을까? 그것은 평민과 귀족 사이의 명백한 외형을 갈라놓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다뉴브강 중상류는 물론 더 동쪽에 있던 고트나 게피드에서도 훈식 편두 풍습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는 강력한 훈적 요소를 지닌 지배층이 존재했음을 방증한다. 아무튼 유라시아 대륙에서 지리적으로 지금처럼 유럽과 아시아가 별도로 분리되어 있었다는 고고학적 근거는 없다. 각기 두 대륙으로 인식했던 그리스에서도 유라시아의 초원은 유럽의 지리적 단위로 여겼고,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 대륙의 일부 지방에 포함시켰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유럽과 아시아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야 유럽에서의 훈 제국이 성립하고 그 지역에서의 영향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훈과 알란이 유럽에 전해 준 것은 새로운 정치 문화뿐 아니라, 새로운 이미지와 예술 양식, 모티프, 귀족적 가치까지 포함되며, 이들은 유럽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중세시대에는 훈과 알란에서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장엄하기 그지없던 이전의 문화제국 로마와 달랐다. 경주에서 발견된 찬란한 금관도 중국 이북의 만주 초원에서 도래했다고 하는 것과 같이, 유럽도 그들의 문화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이후에 몽골의 세계지배 역사는 또 한 번 이 책 《흉노와 훈》를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