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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효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와, 정지영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 삶의 현실성과 영화 속 환상에 대한 차이 -
이 명 진
1. 들어가며
이틀 동안 타임머신을 탔다. 60년쯤은 거슬러 올라가 본 시간 속에는, 문화적 욕구와 경제적 궁핍이 자의식을 억누르던 우리들의 청소년기가 무채색으로 암울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안정효의 장편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정지영의 영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와 맞물려 놀이 문화의 공백기에 젊음을 발산 할 수 있는 분출구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문화적 유혹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던 젊은이들에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성숙시키기 위한 자구책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었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작가 안정효 세대의 문화사적 자사전이라 해도 옳을 듯싶다. 그 세대들이 지니고 있었던 환상의 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현실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암담함과, 절망을 탈피하려는 방법은 어떠한 것일까. 이 소설은 영화의 매력에 빠져든 나머지, 영화 속 환상과 극장 밖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죽어간 임병석이란 인물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소설은 1950년대 후반 서울에서 중 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보았음직한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와 배우·감독들 이름을 나열하면서 한 시대의 문화적 초상을 그려내고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정신적인 공허와 물질적인 어려움이 지배하던 현실을 살아야 했던 청소년들이, 그 현실을 벗어나 극장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두 시간의 행복과 서양에서 창출된 문화에 젖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소설과 영화는 각각 보여 주고 있다.
2. 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서의 현실 인식
소설의 도입부분은 헐리우드 영화광인 임병석이 중, 고등학교 시절부터 황야의 7인이란 써클을 조직하여 좀 과하게 영화를 보러 다니는 일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그때는 한국 전쟁직후의 사회였고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화적인 혜택 뿐 아니라 경제적인 풍요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였다. 지금의 중․고생들이 고민하는 부분에 있어서 비슷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젊은이들이 그때의 현실을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벗어나려고 하는 모습을 생각할 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황야의 7인 뿐 아니라 그 시절의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헐리우드 영화를 좋아했고 그 중 임병석(별명이 헐리우드 키드)은 더욱 그러했다. 임병석과 윤명길은 영화에 의해서 더욱 친해지고 영화를 통해 현실을 잊으려했고 결국 영화 때문에 그들의 운명(?)까지 좌우되었다. 윤명길은 영화와 임병석 그리고 병석의 누나(소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병석과 같은 절망적인 길을 걷지는 않았다. 병석은 헐리우드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에 관한한 학교의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경제적인 능력이 없던 이들에게 영화를 보기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은 여러 가지 방법(돈을 안쓰는)을 통해 영화를 보게 된다. 그리고 영화를 그들 나름대로 평가하는데 그 기준이 처음은 그들의 정신적인 성숙단계를 표현하는 그런 수준에서부터 점점 나아져 갔고 그들이 느끼는 영화에 대한 생각 또한 조금씩 변하게 되었다. 영화 때문에 정학을 맞고 그 기간동안 세계여행을 하려던 그들의 무모한 여행 또한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나는 그들이 여행을 가려는 것이 영화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하나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헐리우드 키드에게 중요한 인생의 변환 점은 대학진학에 실패하고 그 뒤에 그에게 올 군 입대는 암담한 현실이 헐리우드 키드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암담한 현실이었다. 헐리우드 키드는 구속을 싫어하는 한마디로 말하면 자유인이고 싶어 했다. 그 예로 그는 모자 쓰기를 죽기보다 싫어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군 입대를 기피하면 죄인이 되는 동시에 이 나라에선 제대로 된 인간으로 살수 없음을 모르진 않았겠지만 자유를 선택한 헐리우드 키드의 인생을 바꿀 순 없었을 것이다. 그 후 헐리우드 키드는 현실과 영화를 따로 생각할 수 없었고 마치 마약 중독 된 환자와 같이 자신의 삶을 타락 시키고 있었다. 도망자 신세와 같은 헐리우드 키드는 편협한 사랑관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겐 육체적 관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래서 그는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지낼 수 없었고 그의 주위에는 단지 그가 일반인과 같은 생활을 못하기 때문에 그런 그를 도울 수 있고 그런 그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이 사회에선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여자들과 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생이 끝날 때까지도 그는 진정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윤명길은 헐리우드 키드 못지않게 영화에 그의 인생을 걸만큼 열정적으로 영화를 사랑했고 헐리우드 키드와는 어딘가 끊을 수 없는 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헐리우드 키드의 누나(소미)와 있었던 성(性)에 대해 경험은 바로 자신과 헐리우드 키드를 엮는 어떤 끈일 것이다. 하지만 윤명길은 헐리우드 키드와 달리 현실과 영화를 확실히 구분할 줄 알았다는 점에서 현실 인식의 시각이 달랐다. 윤명길은 하고 싶은 영화를 하게 되었고 영화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그와 헐리우드 키드와의 연결된 끈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헐리우드 키드가 그에게 주고 간 <무책임한 두주일>이란 원고는 그에게 있어서 헐리우드 키드의 선물인 동시에 그와 헐리우드 키드를 더욱 꽁꽁 묶는 연결고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무책임한 두주일>을 영화로 만들기 시작하여 반 정도 작업이 끝날 무렵 그는 헐리우드 키드가쓴 이 <무책임한 두주일>은 말 그대로 무책임한 작품이고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큰 위기임을 발견 한다. 하지만 그는 그의 인생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헐리우드 키드에 의해 발견할 수 있었고, 그 결론은 자신이 지금까지 만든 영화도 순수한 창작이 아니라 모방의 연속이었음을 깨닫는다. 즉 창작을 하는 “영감이란 결국 없는 것으로부터 무엇을 창조하는 기능이 아니라 있는 것들을 재조립하고 가꾸어 다듬는 능력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됐고 그럼으로써 헐리우드 키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작가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그때 당시의 어려움을 영화를 통해 극복한 것과 반대로 영화 때문에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던 헐리우드 키드가 결코 실패한 인생이 아니었다는 점을 우리들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 당시의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 그 시절을 함께 공유한 사람들에겐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고자 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글의 내용이 전개될 때 많은 영화가 나오는데 너무 많은 비유들이 좀 지루했었다. 나와 작가와의 견해차이겠지만, 너무 많은 제목들은 나에게 있어서 책을 읽을 때 좀 지루하고 소설의 내용에 몰입하는데 방해요소였다. 하지만 전체적인 글의 흐름과 내용은 세대를 뛰어넘어 같이 그 시대의 생활과 환경을 이해하고 동화되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3. 영화 속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에 나타난 삶의 환상
1994년 정지영 감독이 만든 영화이며, 그 때 관객수는 3만 7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15회 청룡영화상 대상. 33회 대종상 기획상 제31회 한국백상예술대상 대상, 작품상, 감독상, 남자인기상을 수상 했었다.
윤명길은 초등학교 시절 모두가 두려워하는 벼랑꼭대기에서 멋지게 다이빙을 해내는 병석을 보고서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다. 중학교에 진학하여 같은 반이 된 두 사람은 영화이야기를 하면서 말이 통해 서로 친해지게 된다. 병적으로 영화를 좋아하는 병석을 보면서 명길은 부러움과 함께 질투심을 가지게 된다. 고등학교도 함께 가게 된 그들은 두한, 승길, 대추씨와 `황야의 7인`이라는 영화동아리를 만든다. 그러던 중 명길은 극장에서 현숙이라는 여학생에게 한 눈에 반하고 그녀와 사귀지만, 영화를 찍게 되면서 현숙이 연출을 맡은 병석에게 더 관심을 보이자 병석과 절교를 한다. 어느 날 함께 영화를 보러 간 대추씨가 단속을 피하다가 추락사로 죽고, 이 일을 계기로 둘은 어색하게 화해한다.
세월이 흘러 군대를 제대한 명길은 수소문 끝에 술집여자와 지내면서 초라하게 살아가는 병석을 찾게 된다. 이후 명길은 대학을 졸업하고 충무로 조감독 생활을 하는데 이때 병석이 찾아온다. 병석의 시나리오로 윤명길은 한국영화 중 최고 수작의 자리를 차지할거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만만찮은 비평에 최종편집까지 수정했지만 결국 개봉 두 주일만에(원작속의 병석의 시나리오 제목은 '무책임한 두주일'이다) 개봉관에서 밀려나고 만다. 무책임한건 누구였을까. 감독일까, 관객일까, 비평가일까, 아니면 극장일까.
영화의 전개, 결말, 느낌은 원작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이부분이 가장 많은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곤 하지만 영화가 소설과 같을 이유는 없다고 본다. 단지 소설을 영상으로 옮길 뿐이라면 영화라는 장르의 특수성을 어디서 추구할 수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작가(감독)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얼마나 완성도 있게 표현해 냈는가 하는 것이며, 이를 기준으로 판단할 때 이 영화는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영화는 임병석과 윤명길의 이야기인데 둘 다 영화광이며 영화의 대사도 외울 정도이며 자신이 만드는 영화라면 혼신을 다하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병석은 화재에서도 아이를 구하지 않고 자신이 집필한 시나리오에 집착하여 시나리오만 들고 나온다. 그리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병원에 찾아온 명길에게 자신이 집필한 시나리오를 건네면서 명길은 그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들게 된다. 하지만 그 시나리오는 스토리와 대사 하나하나 그리고 배우의 움직임 또한 헐리우드 영화의 콜라쥬였다. 명길은 병석을 데리고 자신의 작업실에서 영화의 대사를 조목조목 가리키면서 어느 영화의 대사였는지를 말한다. 병석은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이 헐리우드영화의 콜라쥬임을 몰랐다는 듯이 슬픔에 가득 찬다. 그리고 친구이자 자신의 후원자인 명길에게 말한다.
"나도 속은거다. 헐리우드 키드에게 속은거야..."
그리고 그는 웃으면서 자신의 길을 떠난다.
영화속의 병석과 명길의 소년시절은 원작자와 감독뿐 아니라 많은 관객의 자화상이다. TV시대가 도래하기 이전, 영화 외에는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시절, 게다가 애정을 나눠줄 한국 영화도 변변치 않던 그 때, 헐리우드 영화에 맹목적인 짝사랑을 보냈던 이들이 그들만은 아니다.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대학입시라는 절대 절명의 명제 앞에, TV를 위시한 모든 오락거리가 통제되던 중고교시절, 시험을 마치고 나면 유일하게 허용되는 잠깐의 여유를 극장으로 달려가던 학창시절이 나에게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따뜻한 추억과 아련한 향수, 그리고 가슴 아픈 기억들을 되살려 준다.
극장에 들어갈 때의 설레임, 스크린이 밝아지면서 시작되는 환상의 2시간, 그리고 극장문을 나설때의 아쉬움과 허탈함.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환상에 대해 비극적인 시각으로 그려진다. 결국 꿈일 수밖에 없는 무책임한 2시간, 그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병석과 그 환상을 빠져나와 새로운 환상을 만드는 명길. 두 사람의 모습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우리네 두 가지 삶의 모습이다. 영화를 통해 떠나는 2시간의 환상여행은 우리의 꿈을 더해주고 그 꿈은 새로운 영화를 통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4. 소설과 영화의 차이
영화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서사구조이다. 소설의 경우 과거 (회상에 따른 시간순서의 변화) → 현재 (영화제작과 병석의 죽음)의 전개방식을 가지지만 영화의 경우는 현재 (병석이 죽기 전) → 과거 (학창시절) → 현재 (영화제작과 병석의 죽음)의 전개방식을 가진다. 이는 전개방식의 변화를 줌으로써 반전을 생성하고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켜 흥미를 유발한다.
이러한 흥미를 유발하는 방법으로 선정적인 표현, 원작에는 없던 친구의 죽음과 학창시절의 여인 등의 이야기가 삽입되었다. 소설에서는 병석의 정신적인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그렸는데, 영화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보다는 창녀와의 육체적인 경험만을 보여주고 있다. 창녀와의 육체적인 경험이 다른 사랑에 비해 중요하다고 보여지지 않음에도 굳이 이 장면을 삽입한 것은 흥행적인 요소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또한 병석의 누나가 춤추거나 목욕하는 모습을 명길이 몰래 보는 장면과, 누나가 명길을 유혹하는 장면 또한 흥미 유발을 위해 선정적으로 표현된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에 없던 부분이 영화에 삽입되거나 변화된 경우는 이외에도 여러 장면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영화에서는 학창시절에 병석이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프로그램을 명길이 훔쳐 갔고, 그로 인해 병석은 엉뚱한 친구와 싸움을 벌이게 된다. 결국 명길은 프로그램을 몰래 병석의 집 앞에 두려다가 병석과 마주쳐서 사실대로 말하게 된다. 이는 학창시절에 이들이 얼마나 영화에 매료되었고, 영화 프로그램이 단지 수집품이 아니라 자존심의 상징인 것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명길이가 제대한 후 병석이를 만나러 포항에 갔을 때 그들이 바닷가 절벽 위에서 나누었던 대화도 영화에 새롭게 삽입된 부분이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서 병석이가 소설에서처럼 병역기피자가 아니라 군대를 갔었다가 미친 척을 해서 일찍 제대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병석이 바다와 불빛을 보며 영화의 스크린과 조명을 생각하는 부분이 후에 병석의 죽음과 관련된 상징과 암시를 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병석이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여학생이 어른이 된 후 함께 살게 된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다. 이 여학생의 존재는 소설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병석의 여성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영화에 등장하고 있다. 또한 병석이 이룬 가정은 영화와 소설에서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영화에서는 여학생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낳은 아이를 병석과 재혼하여 함께 키우고 있지만, 소설에서는 여학생이 아닌 방황하다 만난 반찬가게 여인과 동거를 하는 과정에서 아들을 낳게 되는 차이가 있다. 명길의 경우도 영화에서는 여배우와의 결별 후 혼자서 살고 있는 모습이 그려지지만, 소설에서는 아내와 삼남매를 둔 가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병석이라는 인물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두 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영화에서는 병석의 집에 난 화재를 계기로 병석과 명길이 다시 만나게 되고, 이때 받은 충격으로 병석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이러한 장면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병석이 명길에게 원고를 넘겨주는 상황도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영화에서는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병석이 원고를 병원에 남겨두었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고쳐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소설에서는 병석이 명길을 찾아와 원고를 사달라고 부탁했고, 원고료를 받은 후 자취를 감추었다. 병석이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을 고친 것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고, 모든 것이 표절인 원고에서 자신이 쓴 한 부분을 남겨두었다는 것은 변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소설에서 병석의 생각이나 의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원고를 통한 명길의 해석만이 드러나는 것과 차이를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소설에 비해 시간적․공간적 제약이 있기 때문에, 소설의 모든 내용을 다 담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삽입이나 삭제, 변화를 통해서 영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부분만을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영화만 봐서는 이해되지 않은 인물의 행동이나 시대 상황이 소설에서는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어, 인물을 잘 이해하고 이야기에 더욱 공감할 수 있게끔 해준다.
소설에서는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은 병석과 명길, 주변 인물의 모습 및 병석의 미래에 대한 암시를 많이 나타낸다. 병석이 현실과 영화를 구분하지 못하는 부분과 평범한 여자를 영화의 여주인공과 동일시하여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병석을 바라보는 명길의 비중도 영화에서보다 소설에서 더 크게 차지한다. 병석의 타락 및 죽음을 영화에서는 잘 드러내지 않는데 비해서 소설에는 병석의 타락 및 죽음을 암시하는 말들이 여러 번 쓰여 있다.
병석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다시는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p.77) 1)
타락이랄까, 몰락이랄까, 하락이랄까, 어쨌든 떨어지는 과정이 병석이의 삶에서 …… 후략. (p.112)
나는 군대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가 창신동으로 이사를 해서 동대문 시장에다 이제는 제법 큰 도매점으로 발전시킨 피륙점 일을 …중략… 단역을 한 번 더 맡아 해본 다음에 배우로서의 장래성이 없다고 스스로 깨닫고는 일찌감치 포기해 버렸다.…후략… (pp.243-246)
영화에서는 주변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에는 병석이의 집안 환경이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고 있다. 또한 ‘황야의 7인’이라는 친구들에 대한 설명도 자세하게 나타난다. 영화에서는 이 친구들의 이름이나 별명, 대사가 거의 없는 반면 소설에서는 그들의 성격, 별명을 가지게 된 이유, 친구들과 겪는 에피소드가 다양하게 서술되고 있다.
병석이네는 본디 사리원에서 살다가 1․4후퇴 때 …중략… 오발탄 동네에 눌러앉았던 것이다.(p.47)
임호빈이 ‘깡 키드’라는 별명을 …중략… 진승길이 ‘커닝 키드’가 되었고, …중략… 최진성이는 어느새 ‘먹코 키드’가 되었으며, ……후략 (p.43)
병석이 아버지는 마포 형무소 부근에 있던 유리 공장에서 병을 부는 사람이었다. …중략… 어머니가 ‘보로꾸 공장’에서 모래 벽돌을 찍어 내는 모습도 그는 우리들을 샛강까지 끌고 가서 구경시켰다. (pp.54-59)
이러한 상세한 묘사들이 영화에서는 많은 부분 생략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보는 비용을 가난한 아이들이 어떻게 마련하는지, 병석이 콧등을 때리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병석이 어떤 거짓말로 위기를 벗어나고 돈을 마련했는지, 병석이 영화에 등장하는 헐리우드 여행 외에 얼마나 많은 계획들을 마련했는지 등의 다양한 내용들이 생략되었다.
차비절약, 집안 물건 내다팔기, 딱지와 구슬치기, 고철이나 빈병 수집, 구두닦이, 신문팔이, 도박, 포스터권 사용하기 등 (pp.93-103 요약)
공짜로 영화구경하기 위해 감행했던 수법은 다양했다. …중략… 혼자 들어가는 사람 동행인척 따라 들어가기, 역류하면서 극장 속으로 침투하는 방법, 담치기 등 (pp.113-114요약)
이러한 내용들의 생략과 함께 영화에서는 시대적 배경이 자세히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는 배경화면을 통해 보여지는 시대상황을 그리고 있을 뿐이지만, 소설에서는 정치적 비판의 목소리까지 담고 있다. 또한 소설의 경우 병석이나 명길이가 살아온 시대의 모습을 작품 전반에 걸쳐 묘사하고 있다. 또 다른 차이점을 살펴보면 영화에서는 아이들이 관람하는 영화 장면들이 스쳐가듯 지나가지만, 소설에서는 그 영화가 가지는 의미와 아이들이 그 영화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현실의 삶과 비교하여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영화가 짧은 시간 안에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이야기의 전개에 중요하지 않은 내용을 생략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소설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영화 제목들과 유명 배우들의 이름, 감독들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병석의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드러내는 부분으로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는 부분이 묘사되고 있다.
영화와 소설의 차이는 후반부로 갈수록 커지는데, 병석이 시나리오는 맡기는 부분부터 병석이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소설에서는 병석이 돈을 빌리기 위해 명길을 자주 찾아왔고, 시나리오도 돈을 받기 위해 명길에게 떠넘기다 시피 주고 원고료 80만원을 받고 자취를 감춘다. 명길은 시나리오를 던져 놓았는데, 아내의 추천으로 시나리오를 읽어보게 되고 신선한 충격을 받게되어 영화로 제작하게 된다. <무책임한 두 주일>이라는 영화의 결말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죽는 것으로, 미흡한 부분은 명길이 수정해가면서 영화를 촬영한다. 병석이 나타나지 않아 결국 극본마저 윤명길의 이름으로 내게 되고, 명길은 영화 촬영이 절반을 넘어섰을 무렵, 영화 <무책임한 두 주일>은 완벽한 표절의 꼴라쥬(collage)였음을 알게된다. 병석이 떠맡겼던 두 권의 공책과 시나리오의 대사를 비교해본 결과 90퍼센트가 표절임을 확인하고 분노와 좌절감에 빠진다. 그러나 자신 또한 병석을 비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되고 분노의 감정은 차차 병석에 대한 이해로 나아간다. 영화는 성공을 거두고, 각종 상을 휩쓸었다. 그때까지 병석의 소식을 알지 못하다가 술자리에서 만난 동창생에게 신문에 실렸던 병석의 죽음을 듣는다.
반면에 영화에서는 병석이 화재사고 이후 정신병원에서 지내다가 정신병원에 시나리오를 남기고 떠난다. 이것을 명길이 전해 받고 읽어본 후 영화로 제작할 결심을 하고 실천에 옮긴다. 여기서는 영화의 제목과 내용이 소설과는 다르다. 영화 제목은 <가면고>이고, 결말은 여자가 혼자 자살하는 내용으로 끝이 난다. 명길은 영화를 촬영하던 도중 결말은 남자가 바닷가에서 자살하는 것으로 끝냈으면 좋겠다는 병석의 쪽지를 받게 되고, 이 결말의 변화는 병석의 죽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자신만의 창작을 의미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와중에 명길은 <가면고>가 자신들이 봐왔던 영화들을 모아놓은 작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명길은 분노하고, 병석의 이름으로 발표한 시나리오가 상을 받게 되자 영화 시상식장에 나타난 병석을 만난 명길은 그에게 표절의 의도를 묻는다. 이에 병석은 “모든 걸 다 인정할게. 하지만 한 가지만 믿어 줘. 난 널 속인 게 아니야. 나도 내 자신한테 속은 거야. 모든 게 내 창작인줄 알았어, 무슨 말인지 알겠니? 나 임병석이가 헐리우드 키드한테 속은 거다”라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 병석은 명길과 대화를 했던 절벽을 향해 가던 중 사고를 당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처럼 소설(문자)과 영화(영상)는 표현 수단이 다른 만큼 큰 차이를 가진다. 소설에는 작가의 의도만 실려 있지만, 영화에는 원작자의 의도와 감독의 의도가 동시에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소설을 영화화하는데 있어서 너무 많은 생략이나 변화는 원작인 소설의 의도를 왜곡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영화는 감독의 의도에 따라 소설이 재구성되고 소설에서 나타나는 상징이나 암시를 영화적 표현에 맞는 것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에 소설과는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음과 동시에 하나의 작품으로 가치를 가진다. 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타이틀 크레딧은 십여 년 전 미국영화 직배 반대 집회 장면을 엮은 것이다. 감독의 실제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은 이 영상은 원작과 판이하게 다른 후반부를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을 쓴 안정효는 이를 ‘의식하지 않고 썼던’ 자신과 ‘의식하고 찍은’ 감독과의 차이로 파악한다.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원작자와 현재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감독의 접근 방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감독은 극중의 두 주인공 명길과 병석이 각각 자신의 반쪽씩을 대변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한쪽은 영화의 꿈과 환상에 빠진 채 평생을 그 속에서 살았고, 다른 한쪽은 냉정한 현실에 맞서면서 단단해져 갔던 것이다. 헐리우드라는 미몽과 충무로라는 현실. 그래서인지 수많은 미국영화들이 발췌, 인용되었음에도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오히려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가장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으로 남는다. 그리고 개봉된 지 십 년이 훨씬 넘은 이 ‘옛날’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지금’ 한국영화판을 옥죄고 있는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5. 나가며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의 음성해설은 촬영장 뒷얘기보다는 ‘영화 탐식’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감독과 원작자가 시대와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방담에 가깝다. 소설과 영화가 다른 점, 미몽과 현실, 1950년대와 60년대,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거침없이 오고간다. 때문에 다소 난삽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이야기는 한 시대의 진솔한 기록이며 그 중의 얼마간은 현재도 의미를 잃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헐리우드키드의 생애> 는 1950년대 한국전쟁이 끝나고 정신적인 공허와 물질적인 어려움이 지배하던 현실을 살아야 했던 청소년들이 그 현실을 벗어나 극장 안에서 두 시간동안만이라도 행복을 누리고, 서양의 얼굴을 자신들이라고 잘못 알고 자라왔으며, 남의 나라에서 생산된 문화에 젖어 불결한 정신환경 속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성장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지나간 날을 회상시켜주며 관객으로부터 자신의 유년기와 대비시켜 가면서 극중으로 빨아들이는 마력을 가졌다.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에 걸쳐서 영화에 매혹 당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숱한 영화정보를 등장시켜 자신의 추억 속에서 그리워했던 하나의 이름을 발견하게 한다. 그렇지만 그 시대를 겪지 못한 요즘 세대는 영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 할 것이라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영화는 헐리우드 키드라 불리는 한 남자가 영화 속 가상현실 세계에 갇혀 자신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파멸하는 이야기이다.
헐리우드의 수많은 영화 속에서 방황하다가 자신을 잃고 현실을 잃어버린 불능자.
가공의 현실 속에서 살아온 임병석은 성공한 결과로 가기 위한 과정의 고통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병석은 마지막까지도 단 한마디도 자신의 대사, 자신이 표현하고픈 장면, 자신만의 삶을 찾지 못한 것이다.
살아가면서 자신이 창작해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알고 보면 어느 사이 길들여져 온 것이고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했고 창조해냈다고 착각하는 것들이다.
결국 영화와 현실의 차이를 깨닫게 되고, 뒤늦게 자신이 행한 일들을 알게 된 후, 병석은
죽음을 택하게 된다.
이즈음 우리는 모두 어쩌면 임병석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일수도 있다.
소설 속 명길이는 임병석의 시나리오를 보고 영화를 제작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를 고뇌했다. 결국엔, 창작의 본질적인 의미를 깨닫고 제작을 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작업의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창조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이전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에 각자가 독창적인 요소가 더해지고 서로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기존하는 것이 무엇이고, 새로운 것이 무엇이며, 그것들과 관계를 형성하며 우리들이 창조 해 낼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이 진정한 창조일 것이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안정효 작가가 쓴 소설을 정지영 감독이 영화한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본 후 영화를 보면 영화가 소설의 내용과 상당부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또한 감독 정지영이 자신의 독창적인 요소를 더해서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 낸 것으로 이해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참고문헌>
민족과 문학사, 안정효저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