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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수족(幻想手足)
이민하
시집을 펴내며
약을 밀매하고 언어라는 부채를 끌어다 사들인 지우개들이여.
나의 꼬리뼈는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수족을 절단하는 효능에 대해서러면, 그것도 빨간 거짓말.
이제 너희들의 멍에를 풀어줄께.
호수에 빠진 달의 꼬리, 나는 내 몸에서 흘러나온 호수의 딸.
사랑하는 그에게만은 이 첫 時集을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2005년 6월
이민하
제1부
안개거리와 빵가게 사이
열리는 문 :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나온
찢어진 비둘기, 구름을 쪼며 질주하는
잉크빛 혈관
- 이번 역은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에 강이 흐릅니다
文에 기대지 마시오
입구
-벽화, 240*240cm,2000
도로 한복판에 머리가 잘린 버드나무 한 그루
가지마다 길이 뻗쳐오르고 털이 많은 녹색 새들이 꿈틀
거리고 있다
흐믈거리는 나무의 몸통, 그 위로 사람들의 지문 자국
이 뒤덮고 있다
드문드문 떨어져나옴 나무껍질 같은 손바닥들이 길바
닥에서 뒹굴고 있다
보라색 태양이 벤치 위에 앉아 있고 구백구십구 개의
손잡이가 여백을 메우고 있다
그리고 깃발처럼 나무의 몸통에 꽂혀 펄럭이는 바짓가
랑이
가까이서 보면 왼쪽은 맨발, 오른발엔 낡은 신발을 끼
운 검붉은 바지의 하반신 하나가 가지처럼 뻗어있다
그는 허리 아랫부분을 나무의 몸통 속으로 마저 밀어넣
고 있는 중이다
나비잠
원형 탁자 위로 물 한 컵을 갖다 놓는다. 나는 오늘도 밤
새울 모양이다. 창백한 몸뚱이가 한쪽 벽을 부여잡은 채
놓여 있다. 몸뚱이에서 관절들이 풀려 공중으로 추락한
다. 지나가던 사람이 전화선을 타고 방으로 들어온다. 소
금알처럼 버석거리는 웃음기가 작동되는지 확인하고는
연기가 되어 창틈으로 새어나간다. 강을 건너간 사람이
잠시 돌아와 추억을 벗어 말리고 바다로 간다. 몸뚱이에
묻은 발자국들을 기록하던 나는 의자에서 일어난다. 바람
의 링거액을 체크하고 천천히 물을 마신다. 그리고는 벽
쪽으로 가 몸뚱이에 묻은 발자국들을 물걸레로 훔치는 사
이 몸뚱이는 꿈을 꾼다. 비단실 꿈을 방 안 가득 풀어 헤친
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실타래를 감는다. 가느다란 실 끝
을 따라 아침이 온다. 몸뚱이를 아침에게 인계하고 나는
그 자리에 한족 벽을 부여잡은 채 누에처럼 눕는다. 누군
가 원형 탁자 위로 물 한 컵을 갖다 놓는다. 하늘이 들어오
려고 창문을 잡아뜯는다. 커튼이 찢겨져 낭자하게 붉은
빛을 뿌린다. 창문으로 빠져나가려고 벽이 약간 기운다.
물고기 연인
그는 지붕 위에 올라 녹색 루주를 바른다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집에서 쫓겨난 남자
무슨 소용이에요 어머니,
벽 속의 열대어들을 꺼내 주는 칠판은 없는걸요
그는 오늘도 내가 준 지폐에 노란 매니큐어로 편지를
쓴다
넥타이를 매다 말고 나는 연인의 지느러미를 만져준다
바닥까지 늘어뜨린 그의 지느러미에서
불에 타다 만 풀 냄새가 난다
지붕 위의 그가 불안해
지느러미를 잡아흔들어 방바닥으로 떨어뜨린다
편지에 쓴 철자법을 검사하고
스타킹처럼 달라붙는 교복 안에 그를 집아 넣고 밀봉을
한다
해질녘 돌아와 보면
연인의 끈적한 타액이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다
혓바닥이 스친 벽마다 비린내가 슬고 있다
나는 그를 식탁 위에 올려 놓고 사료를 준다
그의 혀 끝에 달린 플러그를 내 입에 꽂고
그에게 이름을 붙여 준다
밤이면 잊어버리는 그의 발음을 입안의 채찍으로 상기
시킨다
연인은 밤새 오물오물 우우거린다
잠들기 전 나는 그의 혀와 지느러미를 둥글게 말아
내 몸 안에 밀봉을 한다
마지막 지퍼인 두 눈을 잠근다
안개거리와 빵가게 사이
안개의 거리 끄트머리에 모퉁이가 있네
옆구리에 빵냄새를 겨누고
붉은 피톨을 터는 빵가게가 있네
맛보지 못한 무수한 빵의 종류와
이끼로 뒤덮인 축축한 티비가 있네
종일 생중계되는 수족관이 있네
날마다 여자들을 갈아끼우는 유리창이 있네
천천히 유리창을 닦다가
주방으로 사라지는 여자들이 있네
안개에 절인 여자들을 곱게 갈아
반죽을 빚는 주방이 있네
문드러진 음부까지 바삭하게 굽는 토스터가 있네
비닐 포장된 여자들을 오토바이에 실어
어디론가 발송하는 하루가 있네
오토바이가 첨벙거리며 횡단하는
샛노란 고름 투성이의 저수지가 있네
울렁거리는 새벽비에
나뭇잎들을 토해내는 가로수가 있네
유리창에 튄 녹색 토사물을 씻어내는
오늘 처음 배달된 여자가 있네
여자가 엎드려 닦는 바닥에
기억 속으로 전송된 여자의 남겨진 핏자국이 있네
그걸 무심히 바라보는 창 밖의 여자가 있네
그녀들을 이야기하는 길가의 여자와
그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길 밖의 여자가 있네
안개거리와 빵가게 사이
길모퉁이가 있네
손을 대면 사라지는 한 칸의 유리가 있네
토마토
둥글고 붉은 토마토가 있다 四角의 방 안에 있다 한 사
람이 옆에 있다 아버지의 안경을 쓴 그는 고개를 돌려 나
를 본다 가만히 보니 애인의 얼굴이다 그의 핏발 선 두 눈
이 군침을 삼키던 나를 불결한 듯 욕실로 떠다민다 입이
파랗게 허기진 나는 높다란 선반에서 꺼낸 구름으로 입
안 가득 이빨을 문질러 닦고는 돌아온다 방으로 오는 데
한나절이 걸린다 사람이 사라졌다 둥글고 붉은 토마토가
사라졌다 새하얀 사각의 캔버스만 놓여 있다 캔버스를 들
여다보니 둥글고 붉은 토마토가 거기 있다 나는 캔버스
안으로 들어가 두리번거린다 둥글고 붉은 토마토 옆에 한
사람이 있다 애인의 넥타이를 맨 그는 고개를 돌려 내게
호통을 친다 가만히 보니 아버지의 얼굴이다 그의 둔탁한
목소리가 군침을 삼키던 나를 불온한 듯 캔버스 밖으로
떠다민다 나는 왼쪽 모서리에 매달려 안간힘을 쓴다 캔버
스 밖은 낭떠러지다 아득한 곳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
들린다 그는 내가 매달려 대롱거리는 캐버스를 들고 또
다른 사각의 방으로 옮긴다 몸이 심하게 흔들리자 나는
캔버스에서 떨어져 끝없이 추락한다 둥글고 붉은 토마토
가 함께 굴러 떨어진다 나는 추락하면서 둥글고 붉은 토
마토를 걱정한다 눈을 떠 보니 한 사람이 옆에 있다 아버
지의 파이프를 입에 문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애인
의 빨갛게 익은 혀가 내 입 속으로 들어와 아침인사를 한
가 비릿하고 물컹하다 그의 등 너머로 둥글고 붉은 토마
토가 보인다 다시 死角의 방이다
처녀들
외벽을 감은 고압선이 덩굴손을 늘어뜨린 늦은 오후
오징어를 굽는 처녀들의 손
바싹 마른 화초를 굽는다
수다를 굽는다
물에 불린 Y의 비계를 굽는다
Y의 물개수염이 오그라든다 안경알이 젤리가 된다
몸통을 뜯어내고 다리를 찢어발긴다
시계추처럼 끌고 다닌 넥타이를 찢는다
찢어진 무늬속에서 발라낸 물방울을 톡톡 터트린다
머리에서 살이오르는 무수한 발을 뜯어내 씹는다
오징어를 씹는 처녀들의 입
입 안 가득 비린내가
불거진 오후를 탱탱하게 부풀린다
바람이 창문을 찢고 고압선이 바리케이트를 친다
처녀들이 우르르 세면대로 몰려간다
입을 다문 먼지들이 처녀들 자리를 궤차고 앉는다
처녀들은 와글와글 입을 헹구고
비누거품이 처녀들의 분비물을 구워먹는다
안경을 벗은 당신,
참 아름답군요 딱 한 번 쓰쳤을 뿐인데 양파 같은 눈이
보기 좋군요 끝없이 즙을 짜는 세월의 물컹한 살점이 도
려내기 좋군요 당신은 안경을 벗고 나는 창문을 벗어요
당신은 바지를 끄르고 나는 계단을 끌러요 당신은 가랑이
를 벌리고 나는 활주로를 벌려요 당신은 혀를 내밀고 나
는 비행기를 내밀어요 당신은 내 몸을 올라타고 나는 구
름숲을 올라타요 구름숲에는 녹색 투명한 산들이 거꾸로
매달려 자라고 오렌지를 눈에 낀 태아들이 골짜기마다 우
글거리고 오 백 년 묵은 짐승들의 비명이 으스러져 보드라
운 밀가루처럼 날려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천릿길을 온
몸의 발굽으로 숨가쁘게 내 달리는 안경을 벗은 당신, 나
는 잘게 다져져 물푸레 잎사귀처럼 하늘거려요 구름숲보
다 더 멀리 날아다녀요 끝없이 찢어져 날리는 나의 메마
른 살점이 당신의 콧잔등을 핥아주기 좋군요 유리알보다
가벼운 나를 쓰고 어디 한번 웃어 봐요 안경을 벗은 당신,
양파 같은 눈이 보기 좋군요
Sand-wich
trance.
거리 한복판에 모델하우스.
빈혈을 앓는 낙타처럼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고 쓰러
질 듯 서 있다.
갑자기 술렁거리는 인파.
누군가 불꽃을 수혈하고 있다. 노랗게 불에 젖는 모델
하우스
여자는 끌려가듯 다가간다. 눈이 감긴다.
불길을 상하좌우로 잡아늘이던 거대한 손가락이
여자의 머릿속에서 하나씩 지퍼를 열어 준다.
S#1.
온몸이 하나의 혓바닥인 남자가 여자를 구부려 길을 만
든다.
스치는 굴곡마다 이정표를 세운다.
그는 수도원을 지나 가시나무숲을 지나 산호섬을 지나
자궁을 지나 심장까지 핥는다.
S#2.
비누방울 속에서 아이들이 번식한다.
욕조로 진화한 어머니가 여자에게 향기를 대물림한다.
욕조에서 방류된 아이들이 비누 냄새를 타고 들어와
여자의 뇌를 빨아먹기 시작한다.
S$3.
구 층 꼭대기에서 일 층까지 흘러내리는 긴 머리의
노파가 돌계단에 서서 구 년째 노래부르고 있다.
노래를 멈추면 사라지는 노파의 머리칼을 타고 오르내
리며
여자는 그녀의 기타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입으로 배설된다.
awakening.
모래를 개어 식빵에 바른다.
여자는 자신의 몸에서 가장 허기진 지퍼를 열고
샌드위치를 집어넣는다. 허虛, 겁怯, 지至, 겁劫,
새장 속의 혀
하루는 그녀가 머리에 새장을 쓰고 나타났는데요
시장에서 광장으로 이동하는 사람들
햇빛에 타오르는 붉은 깃털을 기다렸는데요
파라솔을 목에 끼운 사람들 속에서
너무 눈에 띄는군! 그녀 옆을 지나던 노인이 귀띔해 주
었는데요
그의 머리에선 희고 검은 건반들이 물결쳤는데요
태연히 웃어 보이는 그녀, 새장 창살에 잘린
그녀 입술은 일센티 간격으로 칼집을 낸 생선 같았구요
입술을 달싹이자 토막난 혓바닥이 비린내를 내뿜었는
데요
사람들은 달아나거나 귀를 막았구요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그녀의 새장에 매달려 밤늦도
록 철쇄를 감았는데요
입속에서 타다만 붉은 숯덩이는 목구멍 아래로 침몰
했지만요
다음날 그녀는 텅 빈 새장을 쓰고 나타났는데요
깃털만을 포획하던 뱃사람들은 몰랐더랬죠
바다 밑에 건재한 모리셔스, 배꼽에서 혀가 자라고 있
었다는 걸
잠 없는 잠
비도 오지 않는데 노란 비옷을 입고 있었어요 폭발 직
전의 전자레인지처럼 몸이 가열되었어요 햇빛이 유리창
에 채찍을 휘둘렀어요 지진이 나는 듯 쩍쩍 눈동자에 금
이 갔어요 눈꺼풀로 눈동자를 덮고 잠을 청했어요 창밖은
한여름인데 대야의 물이 얼어 있었어요 아주 먼데서 핏
물이 밴 부리를 매단 까마귀 한 마리가 푸드덕거렸어요
붉은 햇살 한 점을 물고서 유리창을 뚫고 날아들었어요
한쪽 눈알을 들어내 창을 향해 던졌어요 눈알은 유리창에
부딪혀 미끄러졌어요 먼지 낀 창틀에서 꿈틀대다 바닥으
로 떨어졌어요 까마귀가 눈알을 쪼기 시작하자 다른 까마
귀 두 마리가 날아왔어요 남은 눈알을 떼내어 탁자 위로
던졌어요 사진틀 속으로 굴러가는 눈알을 두 마리의 까마
귀가 쪼아댔어요 벽에서 붉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아
주 먼데서 얼어붙은 깃털을 휘감은 열 마리의 까마귀가
날아왔어요 창밖은 한겨울인데 형광등이 땀을 흘렸어요
눈꺼풀로 눈구멍을 덮고 잠을 청했어요 지진이 나는 듯
쩍쩍 눈꺼풀에 금이 갔어요 눈발이 유리창에 채찍을 휘둘
렀어요 파랗게 멍든 까마귀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침대
를 둘러쌌어요 텅 빈 눈구멍으로 쳐다보자 까마귀들은 시
간을 삽질해 나를 묻었어요 나를 삼킨 길다란 지하동굴이
어디론가 끝없이 기어가고 있었어요 아침 출근길이었어
요 잠은 이미 사라졌는데 노란 잠옷을 입고 있었어요 까
마귀 날개가 달린 사람들이 텅 빈 눈구멍으로 나를 보며
웅성거렸어요 나는 급히 가방을 뒤져 찢어진 두 눈을 찾
아 끼웠어요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벼랑 끝에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붉은 사자가 달려오는 벼랑 끝에 서 있던 꿈에서 막 깨
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여름 해변처럼 타오르는 갈기를 매단 붉은 사자가 달려
오는 벼랑 끝에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
을 보며 울고 있네
모래밭에서 알을 낳은 옥색 치마의 어머니를 집어삼키
던 여름 해변처럼 타오르는 갈기를 매단 붉은 사자가 달
려오는 벼랑 끝에 서 있던 꿈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
울을 보며 울고 있네
울고 있는 아이가 눈을 뜨는 모래밭에서 알을 낳는 옥
색 치마의 어머니를 집어삼키던 여름 해변처럼 타오르는
갈기를 매단 붉은 사자가 달려오는 벼랑 끝에 서 있던 꿈
에서 막 깨어난 한 아이가 거울을 보며 울고 있네
중천의 해만큼 키가 자라버린 한 아이가 거울 속에서
혹은 거울 밖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며 울고 있네
들어가는 사람
십자로 칼을 꽂은 교회 첨탑 위에 올라 어머니가 끊어
진 무지개를 수리하는 동안 무거운 몸뚱이를 톱질하는 사
람, 너덜너덜 토막난 몸으로 냉장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 딸기 쟁반 사이로 종이 입술을 끼우고 이마에서 대
롱거리는 열두 개의 눈알을 뽑아 얼음박스에 담는 사람,
시클라멘처럼 벌어진 상처, 꽃술에 포르말린을 바르는 사
람, 숨막히는 불빛, 딸기 비린내, 냉장고를 나와 지붕 위를
천천히 거니는 사람, 손목시계도 없이 어머니의 자장가도
없이 석양에 젖는 사람, 닭털 같은 그림자들을 발목에 매
달고 방으로 들어가는 사람, 문에서 문으로, 서랍에서 서
랍으로, 손자국으로 짓무른 창문을 닫고 첫눈이 방영중인
티비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 자막이 되는 사람, 자막이 되
어 출구를 타진하는 사람, 누군가 리모콘으로 휙휙 돌리
는 기억, 절단된 언어를 매달고 피아노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 공기중에 소리를 발사하는 사람, 무지개를 폭파하
는 사람, 들어가며 들어가며 시한폭탄을 제조하는 사람,
터뜨리는 사람, 나르는 사람, 기차가 되는 사람, 기차가 떠
나는 8요일을 기다리는 사람,
제2부
세상에서 하나뿐인 수리공K의 죽음
산책
몸을 팔아 하얀 꽃바구니를 샀네 골목 어귀 눈에 띄는
담벼락에서 검은 장미를 한 웅큼 꺾었네 꺾인 장미는 웃
었고 나는 피를 흘렸네 담벼락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끄적이고 걸음을 재촉했네 검은 장미는 하얗게 변해 갔네
나는 꽃바구니를 검은색으로 칠했네 바구니에 꽃자 장미
는 깃털을 흩날리며 날아가기 시작했네 상심한 나는 꽃바
구니에 신발을 담았네 향이 진한 담배도 담았네 뚱뚱한
당신은 담기가 힘들었네 팔과 머리칼이 삐죽삐죽 튀어나
왔네 당신을 다시 꺼내 운동을 시켰네 심부름도 시켰네
검은 장미가 피었는지 골목 어귀에 가 보라고 했네 천 일
이 지나도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네 골목 어귀에 다시 갔
을 때 검은 담벼락에 눈이 부셨네 담벼락을 휘감은 당신
의 몸에서 아직 검은 꽃잎이 자라는 중이었네 날아갔던
하얀 장미가 담벼락 아래서 구경하고 있었네 나는 재빨리
들고 있던 검은 꽃바구니를 팔아 몸을 샀네 당신을 한 아
름 꺾어 내 몸에 꽂았네 꺾인 당신은 웃었고 나는 피를 흘
렸네
세상에서 하나뿐인 수리공 K의 죽음
-8요일, 빛
태초에 삼라만상이 있기 전 지중해만한 작업실을 가진
난쟁이 K가 있었습니다
제1요일에 K는 산책을 나갔습니다
대지를 둘러보고 바람의 세기를 측정했습니다 46억 년
전의 일입니다
(황금색 태양의 기록과 달리 그의 후계자인 시인의 주장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천 년쯤 후로 추정되기도 함)
제2요일에 K는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도면 위로 구르는 순간 그의 눈일은 부화하였고
그의 식탁은 야위어 갔지만 달빛 넝쿨로 출렁거렸습니다
제3요일에 K는 거대한 손수레를 만들었습니다
천천히 도면의 배를 가르고
산과 바다를 꺼내고 바퀴 달린 책을 꺼내고 화살과 모
자를 꺼내고 거울을 꺼냈습니다
수백 종류의 꽃과 수천 마리의 짐승들도 손수레에 실었
습니다
제4요일에 K는 아직 무게가 없는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황금색 태양의 길이 처음 만들어졌고
그가 땀을 흘릴 때 태양은 그의 모자 뒤에 숨었습니다
제5요일에 K는 길들 위에 고운 모래알로 집들을 지었습
니다
산의 집 바다의 집 바퀴 달린 책의 집 화살의 집 모자의
집 거울의 집......
집과 집 사이에도 허공의 집을 세웠습니다
제6요일에 K는 무척 바밨습니다
간혹 빈 집이 눈에 띄었으므로 그 집에 들어갈 무언가
를 자꾸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집마다 새로운 이름이 적힌 문패를 달아야 했
습니다
제 집에서 살을 찌우고 있는 짐승들을 불러모았고
그는 아주 많은 그를 복제해야 했습니다
제7요일에 K는 수리공이 되었습니다
길이 수시로 바뀌었으며 집들은 스스로 이름을 짓기 시
작 했습니다
K의 텁수룩한 수염 사이로 녹슨 바람 소리가 났지만
떨어져나간 바다 한 귀퉁이를 눈물을 뽑아 메구는 일이나
빗물이 새는 지붕들을 살가죽을 떼어 꿰매는 일 따위
그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제8요일에도 무언가를 만들어 집집마다 배달하고 돌아
오는 길이었습니다
K는 팔이 아홉 개 달린 짐승의 돌담집에 이르렀을 때
무더기로 핀 맨드라미에 선홍빛 피를 쏟고는 그만 고꾸
라졌습니다
마을 어귀에서 서로 할퀴는 짐승들을 만난 게 화근이었
습니다
살을 찌운 짐승들은 집들을 톤째로 삼켰고
서로의 담장 너머로 화살을 겨누엇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장을 모두 꺼내 빚은 반죽을 고르게 분
배해야 했습니다
K가 죽자 그의 몸 속을 빠져나온 어둠은 삽시간에 전염
병처럼 퍼졌고
짐승들은 피 묻은 손톱으로 자신을 할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제8요일에 만든 건 시간의 생식기였습니다
붉은 꼬리가 있는 풀밭
-8요일, 혀
길고 어두운 복도 끝에서
붉은 꼬리가 달린 아이 하나가 걸어 나왔어요
작은 창이 나 있는 복도 끝까지 걸어 나오자 창문이 덜
컹거렸어요
붉은 고리가 달린 아이는 불고 있던 비누풍선을 모아
기차를 만들었어요
기차에서 향긋한 박하 냄새가 났어요
붉은 꼬리가 달린 아이가 웃을 때마다
기차 칸이 고무줄처럼 늘어났어요
기차 칸이 늘 때마다
아이들이 조약돌처럼 생겨났어요
아이들은 자꾸 어디선가 비누풍선을 삽질해 왔어요
주위를 둘러보면 구름이 뭉텅뭉텅 뜯겨져 있고는 했어요
덜컹거리던 창문이 두어 번 발길질을 하자
아이들을 태운 탱탱한 기차는 창을 뚫고 공중으로 발사
되었어요
-하늘 위에 레일-레일 위에 톱니바퀴-톱니바퀴 위
에 화살-화살 위에 아이들-
하늘의 융단을 펼치며
레일이 달렸어요 레일보다 더 빨리
톱니바퀴가 굴렀어요
화살이 풀밭 위에 곤두박질쳤어요
아이들이 두서없이 쏟아졌어요 그 순간
바람의 방향이 뒤집혔어요
붉은 꼬리가 달린 아이는 창문을 닫았어요
어두워진 복도가 잠드는 사이
붉은 꼬리가 달린 아이는 가만히 창밖을 내려다보았어요
이번에는 비누풍선 대신
화약으로 기차를 만들어 볼 생각이에요
풀밭 위에는 훝뿌려진 아이들 입에서 붉은 꼬리가 싹트
기 시작했어요
마술피리
-8요일의, 꿈
우리는 음악으로 즐겁게
죽음의 어두운 밤을 지나가도다!
-모짜르트의 마술피리 中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한 무리의 아이들이 도화지 속으로 걸어 들어갔겠지
백발의 소년이 탕, 탕, 탕, 지팡이로 땅을 내려치자
아이들은 하얀 모래밭에 사이좋게 앉았겠지
엽총이 든 가방을 끄르고 점심을 먹었겠지
양이 안 찬 아이들은 뱃속에 모래를 집어넣었겠지
백발의 소년은 바위에 걸터앉아 황금피리를 불었겠지
구부정한 허리에 해가 혹처럼 솟아 있었겠지
숭숭 뚫린 구멍 속에서 흘러나온 자장가가 포도주처럼
도화지를 적셨겠지
아이들이 하나 둘 하품을 하거나 트림을 했겠지
아이들의 입에서 가시 돋친 고양이들이 튀어나와
물결 속으로 겹겹이 사라졌겠지
아이들은 은종을 울리고 새들이 걸어와 눈을 맞췄겠지
백발의 소년은 돋보기안경을 벗었겠지
눈가의 주름이 나비처럼 나풀거렸겠지
아이들은 엽총 대신 고운 모래를 가방에 챙겨 넣고,
깃털의 사냥꾼 밤의 여왕은 예리한 가위로 도화지를 오
렸겠지
아무리 잘라도 소년의 피리소리는 끊어지지 않았겠지
새와 맞바꾸지 못한 꿀과 사탕이 주머니를 적시고
쌈박한 가위날이 여왕의 손목을 그었겠지
손목에서 방울방울 아이들이 앵두처럼 피어올랐겠지
백발의 소년은 탕, 탕, 탕, 지팡이로 인솔하며 황금피리
를 불었겠지
여왕은 젖은 손목을 창가에 내어 말렸겠지
구부정한 허리에 모래언덕이 혹처럼 솟아 있었겠지
아이들은 모래언덕 위로 사이좋게 뛰어올랐겠지
여왕이 바스라져 재가 될 때까지
피리소리 종소리가 지상의 창문들을 불질렀겠지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사각의 눈
1. 窓-날개 꿈을 꾸었어요 이카루스, 벽을 빠져나가는 꿈
눈감지 말아요 이카루스, 다가갈 수도 달아날 수도 없
는걸요
천만분의 일도 식지 않는 몸의 열기를 벽에 묻었어요
날개 잃은 당신은 내게 의미 없으니까요
한 치의 미래도 안전한 비행이란 없네
벽에 아랫도리를 박아 넣고 두 손을 철쇄로 감았어요
몸이 조여질수록 멀리 튕겨져 오르는 두 눈,
사각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이는 당신의 날개
창문에 매달려 당신을 보는 천개의 눈알,
소리도 없이 난사하는 무수한 비명, 하지만 눈맞추지
말아요
빨갛게 일렁이는 폭포수 같은 머리칼
거슬러 올라와 입술을 깨무는 허기진 당신
용수철처럼 유리벽 위에 엉겨붙은 두 개의 빗방울
2. 벽-迷미宮궁
벽에 들이댄 쇠망치를 거두어요
오래 버틴 힘으로 벽은 무너질 줄 모르네
오래오래 묵은 힘으로 벽은 몸을 반으로 가르지도 못
하네
미궁을 벗어나면 추락일 뿐이지
날개를 탓하지 말아요, 끝없는 날개짓
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걸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 나는 노래를 불러요 배가 불러요
날마다 만삭이 되어요
해마다 벽 속에서 해산되는 탐스런 일곱 아이들
당신을 위한 제물이에요 벽 속을 궁금해하지 말아요
벽은 날개를 삼켰지만 당신과의 안전한 소통을 보장해
줘요
눈감지 말아요 이카루스, 끝없는 열기에 흔들려도
달아나지 말아요 다가오지 말아요
당신의 부릅뜬 눈이 좋아요 당신의 불안이 좋아요
* 반인반수의 괴물을 위해 해마다 7명의 아이들이 먹이로 바쳐
지던 그리스 신화 속의 미궁 라비린토스는 우리 몸 속에 여전히 건
재하다. 날개를 매달고 달아난 이카루스는 경고를 무시하고 높이
올라 태양열에 밀랍이 녹아 떨어져 죽음으로써 영원히 미궁을 벗어
난다. (추락을 위한 비상일까, 비상을 위한 추락일까.) 이카루스는
밀랍으로 날개를 붙이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처음 눈을 떴다. 19세
기기를 통과한 오딜롱 르동은 두눈에 날개를 달고 두리번 거렸다.
또 다른 세기말을 지나온 이만하 씨의 눈은 날개를 버리고 나는 법
에 고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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