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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생(化生), 화신(化身), 화작(化作), 화현(化現)>
1. 화생(化生)
‘화생(化生)’은 사생(四生) ― 태생, 난생, 습생, 화생 ― 의 하나이다.
다른 물건에 기생하지 않고 스스로 업력에 의해 갑자기 화성(化成)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화생에 의해 태어나는 몸을 화신(化身)이라 한다.
낳는 자 없이 업력(業力)에 의해 홀연히 태어나는 것.
즉, 천신이나 귀신, 아수라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항상 불타고 있는 최악의 지옥에 있는 자들과 굶주리고 있는 귀신들은 자신들의 악업(惡業)으로 인해 화생(化生)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제천(諸天)이나 중유(中有)의 중생 또한 이에 속한다.
그런데 원력으로 나타난 보살의 모습도 화생이다.
또 부처님 중에서도 비로자나불이나 약사여래 같은 분은 태를 통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화현(化現)하신 화생이다.
고조선(古朝鮮)의 건국 설화에서 곰이 여자로 변하는 것도 화생이라 하겠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은 그 종류가 많지만, 성관음(聖觀音)만이 본신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보문시현 (普門示現)의 변화에 의해 나타난 화신이다.
오늘날의 말로는 일종의 아바타 (avatar)라 할 수 있다.
사실은 아바타가 고대 힌두 신앙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보문시현(普門示現)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중생의 근기에 맞는 33가지 몸으로 나타난다.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 이라 한다.
관세음보살께서 ‘넓은 문으로 (몸을) 나타내다’는 말이다.
헌데 화생의 본래 취지는 자신의 업력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보다 ‘진리를 깨달아서 거듭 태어남’을 의미한다.
깨닫기 전과 깨달은 후의 사람은 겉으로는 같은 사람이지만 속은 완전히 다르다.
생각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고, 살아가는 방식도 전과 같지 않게 달라져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즉, 깨닫게 되면 자기의 업력도 달라지고, 그에 따라 과보도 달라지며,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다.
새롭게 진정한 불자로 거듭 태어나는, 이게 진정한 화생이라 하겠다.
2. 화신(化身)
그리고 ‘화신(化身)' 은 화생(化生)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특정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몸을 나투어 나타내는 것을 화신이라 한다.
예컨대 영웅적인 인물을 찬탄할 때에 종종 민족의 화신이라는 표현을 쓴다.
또 좋은 인연의 인물을 일컬어 행복의 화신이라든가 사랑의 화신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모습으로 변화하는 일을 말하는데,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범천(梵天)ㆍ제석(帝釋)ㆍ범부(凡夫) 혹은 심한 경우엔 마왕(魔王)이나 축생(畜生)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해 나타나는데, 이를 말한다.
대표적인 경우는, 대승불교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현생에 몸을 나투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이라는 삼신사상이 생겼다.
따라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은 화신불(化身佛)인 것이다.
화신불은 응신불(應身佛)이라고도 하는데, 일체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중생과 같은 육체를 지니고 불신으로 화현(化現)한 역사적 부처님을 일컫는다.
이러한 화신사상은 불교 고유의 교의가 아니라 부처님 당시 인도에 있었던 보편적인 사상이었다.
그것을 불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힌두교에서는 힌두교 3대 신의 하나인 비쉬뉴(Vishinu) 신의 아홉 번째 화신이 붓다라는 것이다.-
3. 화작(化作)
그리고 화작(化作)이라는 말이 있다. ‘화작(化作)’이란 단어는 원래 불교 용어로서,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인연 따라 천백억 가지로 화현(化現)하는 모습을 일컫는다.
또 불ㆍ보살(佛菩薩)이 신비한 힘으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변형시켜 나타내는 일을 말하기도 한다.
마음 닦는 수행을 하는 데에는 세속의 풍랑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좋다.
그래서 풍랑이 이는 바다에는 아예 가지를 않는 이들이 있는데 이분들을 현인(賢人)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풍랑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큰 배를 만들어 타고 있기에, 어떤 번잡한 문제가 생겨도 이겨낼 수 있다.
풍랑에 휘둘리는 사람을 보면 큰 배에 함께 태워서 보호할 수도 있다.
이 경지를 보살(菩薩)이라고 한다.
보살의 경지를 지난 분들은, 풍랑에 휘둘리는 사람을 보면 피하지 않고 함께 풍랑을 탄다.
풍랑을 타되, 휘둘리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면 풍랑에 휘둘리던 사람도 그를 본받아 바른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런 경지를 화작(化作)이라고 한다.
즉, 보살(菩薩)이 화작(化作)하는 모습은, ― 세속(世俗)에 들어가 중생과 같은 모습으로 같이 살아가면서 제도하는 것을 말하는데,
세속에 들어가는 것은 심우도(尋牛圖) 또는 십우도(十牛圖)에서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入纏垂手)의 단계이고, 거기서 사람들과 어울려 교화하는 것을 화작(化作)이라고 한다.
※입전수수(入纏垂手)
입전수수는 수행자가 깨달음을 마친 뒤에 적정(寂靜) 세계에 머물지 않고, 중생 속으로 들어가 시장바닥 같은 현실 세계 속에 중생과 함께 하면서 그들을 제도하는 것을 말한다.
화작은 심우도에서 이미 소도 없고 나도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보살의 모습이 아니라 중생의 모습으로 제도하는 것을 말한다.
또 제도한다는 마음조차 없이 같이 살아가는 것을 일러 화작(化作)이라고 한다.
‘나’라는 것이 없이, 마치 모양 없는 물같이 그릇에 따라 모양을 바꾸며 적응하면 된다.
수행에서 최고의 단계가 화작(化作) 이다.
주어진 일이 청소면 청소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일이면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 고집을 버리고 자기를 내려놓았을 때 바로 행해질 수 있을 것이다.
원효 대사가 저잣거리에 나가 표주박을 두드리며 중생들과 어울려 살면서 교화한 것도 일종의 화작이라 할 수 있다.
화작(化作)이란 나를 버리고 인연에 따라 모양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신라시대 원효(元曉) 대사는 요석공주(瑤石公主)와 스캔들을 일으켰다.
그러자 원효 대사를 위대하다고 하던 왕족, 귀족, 스님들이 원효를 크게 비판했다.
당대 최고의 스님이 하루아침에 파계를 하고 형편없는 존재가 돼버린 것이다.
원효는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위대한 이름을 버렸다.
그는 승려 사회에서 추방당해 불교가 지배하던 그 사회로부터 소외됐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천민들이 사는 동네로 들어갔다.
천민 마을 사람들은 전에 ‘원효대사’ 라는 높은 이름을 가진 그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바닥까지 추락해서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그를 자신들의 친구로 받아들였다.
원효는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천민 사회로 들어갔다.
신라는 ‘원효대사’라는 위대한 스승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원효는 천민사회에서 그들과 어울리며 깡패, 술꾼, 사기꾼, 도둑, 백정, 기녀들과 친구로 지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천민 사회에 살던 사람 중에 자기 스스로 스님이 되겠다는 사람도 나타나고, 살인이 줄어들고, 놀고먹던 깡패는 열심히 일을 하고, 대낮에도 술 취하여 길거리에서 드러누워 자던 사람은 술에 취하지 않고, 도둑질하는 일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원효는 화작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알고 이를 스스로 실천했다.
어떻게 이러한 것이 가능했을까?
<삼국유사> 「사복불언(蛇福不言)」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사복(蛇福)은 흔히 사동(蛇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쉽게 말하면 땅꾼, 즉 뱀을 잡아서 팔아 먹고사는 사람을 말한다.
원효가 살던 천민 마을에 남편 없이 아이를 낳아 기르던 한 여인이 있었는데 이 아이는 열 살이 돼도 잘 일어서지도 못하고 말도 잘하지 못했다.
후에 땅꾼이 됐고 말은 간단한 정도로만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이 사복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사복은 친하게 지내던 원효에게 가서 어머니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당시 신라 사회에서는 천민이 죽었을 경우 묘를 쓰거나 관을 만들어 묻지도 못하고 그냥 산속에 갖다 버려야 했다.
사복은 원효와 함께 어머니를 거적에 둘둘 말아 지게에 짊어지고 산으로 향했다.
사복이 원효에게 “너는 그래도 전에 승려였으니 어머니 극락왕생하실 수 있도록 염불이나 좀 해라"라고 말했다.
이에 원효는 “태어나지 말지어다. 죽는 것은 괴로움이요. 죽지 말지어다. 다시 태어나는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염불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사복은 “야, 이 먹물 같은 놈아, 말이 너무 길다. 간단히 해봐”라고 하니 원효는 세 글자로 “생사고(生死苦)”라고 했다.
즉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괴로움이다”라는 뜻이다.
이에 사복은 마음에 드는 듯 만족해하며 말했다.
“옛날 석가모니가 사라수 사이에서 열반에 드셨도다.
지금 또한 그러한 자가 있어 연화장(蓮花藏)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네”라는 말을 원효에게 남기며 어머니를 따라 열반에 들었다.
후에 사람들은 사복을 기려 북악에 도량사(道場寺)를 짓고 다음과 같은 노래를 남겼다.
“깊은 못처럼 잠자는 용이 어찌 등한하랴
떠나면서 읊은 한 곡 간단하기도 하다
고달프구나, 생사는 본래 고통만은 아니니 연화장 떠도는 극락세계는 넓기도 하네.”
원효가 천민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수행의 가장 높은 단계인 화작이 가능했다.
버리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이러한 화작의 단계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원효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승려의 길을 스스로 파계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화작이 가능했고 천민 마을에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원효가 하심(下心)한다고 갖가지 어려움을 참고 보살행을 했지만, 그러나 방울 스님은 보살핌을 받아야할 불쌍한 스님이 아니라 이미 깨달아서 밝게 보는 분이었고, 동촌에 살고 있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구제받아야 할 중생이라는 것은 원효의 생각이고, 구제받아야 할 중생은 바로 명성과 권위라는 헛된 상(相)에 사로잡힌 원효 바로 자신임을 깨우치게 됐다.
그것을 벗어던지기 위해 수행자에게 있어서 목숨과도 같은 계율을 요석공주에게 파계하고, 원효는 파계한 승(僧)으로서 엎드릴 복(伏)자를 써서 복성거사(卜性居士) 혹은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스스로 칭하고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시고 광대복장을 하면서 동촌마을 사람들과도 어울리게 된다.
이단계가 화작(化作)이며 ‘사사무애법계(事事无涯法界)’인 것이다.
4. 화현(化現)
불⋅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려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해 세상에 나타남을 말한다.
역사적인 인물로서 석가모니 붓다는 위대한 스승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게 차츰 초인적(超人的)인 성격이 부여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같은 초기불교경전 이라도 후기로 갈수록 그러한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석가모니 붓다의 초인화는 지적ㆍ도덕적 그리고 신체적 모든 부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것이 결국 그를 인간을 뛰어 넘은 존재, 신성(神性)을 가진 어떤 존재로 비춰지게 됐다.
초기불교경전 가운데 이러한 경향의 진행은 궁극적으로 화현설(化現說)로 마무리됐다.
결국 후기 불교 종파에 있어 이러한 화현설의 최종적인 전개는 형이상학적인 붓다 개념으로, 붓다를 이 세계의 궁극적인 실재로 본 것이다.
이미 빠알리어 초기경전에서부터 준비돼 있었다.
즉, 붓다로 예정된 단 하나의 보살만이 도솔천에서 세계의 모든 존재의 구제를 위해 머무르다 강림한다는 것으로 마치 오랫동안 준비되고 계획된 전 우주 역사의 특수한 임무나 사명을 띤 것으로 묘사돼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단 한 사람의 보살만으로 예정된 성불은 같은 세계, 같은 시간에 다른 붓다들이 같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정된 붓다 개념을 ‘일국토 일불설(一國土 一佛說)’이라한다.
한 세상에 두 명의 정등각자(正等覺者) 가 함께 출현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말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우두머리이고,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이고, 나는 이 세상의 가장 연장자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탄생이다. 더 이상의 다른 삶은 반복되지 않는다고 했다.」
초기경전의 일부에서 1겁 이상을 살 수 있다고 하는 붓다의 수명은 결국 이후 화현설(化現說)의 근거로 볼 수 있다.
즉,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붓다의 수명에 대한 개념은 차츰 형이상학적인 궁리(窮理)를 거듭해 영원한 붓다의 개념으로 차츰 발전하게 됐다.
예를 들면, 대승불교 <법화경>에서 붓다는 지상에서 80평생의 삶으로 마감할 수 없는 존재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붓다는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로서 영원히 사는 생명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반열반은 단지 중생들을 이끌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화현(化現)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붓다는 죽을 수 없는 영원한 존재로 간주된 것이다.
색신(色身)을 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했던 석가불의 80 평생은 결국 화현한 가상(假像)의 존재였다는 말이다.
<법화경> ‘여래수량품’에 나타나 있는 구원실성(久遠實成) 사상은 바로 ‘모든 붓다의 수명 또한 끝이 없다’는 입장을 보여준다.
<법화경>에서 말하는 영원한 불타관으로서 구원실성 또는 구원성불(久遠成佛)은 붓다는 아득한 옛날에 이미 성불해있었다는 것이고,
이는 <법화경>의 중심사상의 하나로 역사적 붓다의 성불에 대비해 영원불멸의 불타론을 보여준다.
석가모니불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색신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법신이 변화해 모습을 나타낸 것으로 본다.
다른 말로 바꾸면, 법신이 화현한 것이다.
그리하여 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응신(應身) 또는 법신(法身)ㆍ응신(應身)ㆍ화신(化身)의 3신 또는 자성신(自性身 = 法身)ㆍ수용신(受用身)ㆍ변화신(變化身)이라고 하는 3신설이 성립돼 대승의 기본 불신론이 됐다.
현대학자들의 일부는 '붓다의 신격화(神格化)'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불교적인 맥락에서 화현설(化現說)이란 말이 더 적당하다.
화현설이란 붓다를 세계의 궁극적 존재로 보고 있음이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화현설(化現說)이란 변해서 태어난다는 말이다.
예컨대 노자가 오랑캐 땅인 인도에 건너가 석가모니로 다시 태어나 오랑캐들을 가르쳤다는 설이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이다.
말하자면 도교가 오리지널이고, 불교는 도교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노자를 부처님 위에 두려는 도교 측에서 지어낸 말이다.
이에 맞서 불교 측에서 ‘노자화호설’에 대항하기 위해 제시한 설이 삼성화현설'(三聖化現說)이다.
‘삼성화현설’은 불타가 중국으로 3인의 제자, 즉 유동보살(儒童菩薩), 광정보살(光淨菩薩), 마하가섭(10대 제자의 한사람)을 파견해 각각 공자, 노자, 안회(顔回-공자의 제자)로 태어나게 했다는 주장이다.
대승불교 시대가 되면서 수많은 부처님이 등장하게 되고 다양한 불상이 조성된다.
이들 불상은 명칭이 다양하지만 보통 32상(相), 80종호(種好)라는 기본형식으로 나타난다.
부처님의 화현을 나타내는 기본 형식이다.
즉, 상이 원만하고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와 백호(白毫)가 있어야 하며, 법의(法衣)를 입고 장엄구(莊嚴具)가 없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조각(彫刻)하면 대좌(臺座)에 앉거나 서면, 등 뒤에 광배(光背)를 두게 된다.
이것은 3부 구성이라 할 수 있는데 불상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이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며, 옷은 삼의(三衣)를 입고, 손은 여러 가지 인상(印相)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