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10월 9일) 특집/ 10월 9일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10월 9일은 568주년 '한글날'로 훈민정음(訓民正音) 반포를 기념하며 기리는 법정 기념일이요 공휴일이다.
한글날은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 한글학회의 전신)가 서울 식도원에서 1926년 음력 9월 29일(약력 11월 4일)에 처음으로 ‘가갸날’이란 이름으로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으로 기념하다가, '한민족의 으뜸 가는 글' 또는 '하나밖에 없는 큰 글'이라는 뜻으로 국어학자 주시경이 만든 '한글'이란 이름인 '한글날’로 1928년 명칭을 고쳤다.
'가갸날'이라는 말을 하다 보니 옛날 필자가 어려서 한글을 배울 때에는 '가가거겨~/ 나냐너녀~/로 배우던 생각이 난다.. 그 무렵 "가갸 가다가, 거겨 거렁에, 고교 고기 잡아, 구규 국 끓여서, 나냐 나하고, 너녀 너하고, 노뇨 노나 먹자~.' 라 노래하며 배우던 기억이 새롭다.
한글날 날짜도 지금과 달랐는데 1940년 7월에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선생이 경북 안동에서 발견한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의 끝에 ‘正統 11年 9月 上澣’에 의거하여 한글날을 음력 9월 10로 잡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해서 10월 9일로 확정하여 1945년부터 오늘날까지 한글날을 기념하여 오고 있다. 한글날은 10월 1일 '국군의 날'과 함께 1990년 공휴일 조정으로 취소 되었다가 2013년에 다시 공휴일로 환원된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한글의 세계 유일의 자랑스런 훈민정음 원본인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 발견된 이야기를 더듬어 보려 한다. 다음 이야기는 소설가 이충렬이 쓴 전기체의 '간송 전형필'(감영사)를 참고하며 국문학을 전공한 나의 경험을 덧붙인 글이다. 필자는 그분이 연백 땅을 팔아 재정 위기에 몰렸던 보성중고등학교를 구입한 그곳에서 15년 간 근무한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이어서 이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 훈민정음해례본
'훈민정음(訓民正音)' 하면 우리들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나랏 말씀아 中國에 달라 文字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쌔~'로 시작되는 훈민정음 서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월인석보(月印釋譜) 처음에 실린 언해본(諺解本)으로 이는 훈민정음 원문이 아니다.
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되기 까지의 훈민정음 문헌에는 한문본(漢文本) 하나와 언해본(諺解本; 국역본) 넷이 전하여 왔다.
한문본(漢文本)은 '세종실록'에 실린 목판본 '훈민정음'
언해본(諺解本)으로는 고(故) 박승빈 씨가 소장한 '훈민정음'과 '월인석보' 첫 머리에 실리고 서강대학교에 소장된 '세종어제훈민정음', 이 월인석보본을 모본으로 다시 한번 새겨서 펴낸 '희방사(喜方寺) 복각본' 그리고 필사본인 '일본 궁내성본의 훈민정음' 등 네 가지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모두 예의본이다. 예의본(例義本)은 세종의 서문과 새 글자의 음가를 중국의 음운학인 아(牙) 설(舌) 순(脣), 치(齒), 후(喉)의 오음(五音) 순서에 의하여 쓰고, 병서(竝書)하여 쓸 수 있는 "ㄲ, ㄸ,ㅃ, ㅉ, ㅆ" 을 배열하여 놓아 당시 국어연구는 그 정도의 범위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훈민정음해례'가 발견된 것이다.
*.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발견의 일화(逸話)
일본강점기를 살면서 조상으로부터 24세에 막대한 재산을 물려 받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이란 분이 있었다.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의 가르침을 받아 그 많은 재산과 젊음을 바쳐 일본으로 유출되는 그 귀한 우리나라 민족 문화유산인 서화, 도자기, 불상, 석조물, 서적 등을 수집하여 지킴으로써 우리 나라 문화를 지킨 분이시다.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 중에서도 꼭 찾아와야 할 것이 있으면 값을 따지지 않고 사온 '우리 민족문화유산의 수호신(守護神)'이라 일컬어지는 분이다. 그렇게 수집한 수많은 문화유산 중 국보(國寶)가 12점, 보물이 10점, 4점이 서울 지정 문화재로 지정 되었다.
그 간송이 우리의 문화재 중 고 서화나 문헌을 수집하기 위해서 당시 유명한 한남서림을 인수하였을 때 이야기다. 그 한림서림을 통하여 간송은 수집품 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을 입수하는데 크게 기여한 분에 간송의 지인인 천태산인 김태준(天台山人 金台俊) 소설가가 있었다. 경성제국대학 등에서 조선문학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1940년 여름 어느날 그가 총애하던 제자 중에 이용준(李容準)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저희 가문의 선조가 세종 때 여진정벌에 큰 공을 세워서 그 상으로 세종대왕으로부터 '훈민정음' 한 권을 하사 받아 세전가보(世傳家寶)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며칠 후 김태준은 제자 이용준과 함께 경북 안동군 와룡면 주촌 이한걸(李漢杰) 댁으로 찾아 갔더니 경성제대 도서관에서 본 '세종실록'에 기록되었으나 소실되어 전해오지 않은 '훈민정음해례본'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단 한 권뿐인 훈민정음해례본의 진가를 알 일 없는 후손들에 의해서 첫머리 2 장은 없어지고 책에 낙서도 있었다. 두 장 없어진 것은 언문책 소지자(所持者)를 엄벌하던 연산군 때 부득이 첫머리 2장을 찢어 버렸다는 가문의 전승(傳承)의 말을 들었다고 했다.
김태준과 이용준은 그 책의 제 값을 받기 위해서 없어진 2장을 복원하기로 하였다. 글씨체는 조선초기 3대 서예가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였다.
종이 색깔을 원본과 같이 고풍스럽게 누런색이 나도록 하기 위해서 한지를 쇠죽에 넣고 삶아 말렸다. 없어진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은 도서관의 '세종실록'에 쓰인 기록의 내용을 김태준이 외워 2 장을 복원하기로 하였다. 다행히 '훈민정음 해례본'을 가문의 가보라고 소개한 이용준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한 서예가(書藝家)라서 안평대군의 글씨체를 익혀 붓글씨로 써서 복원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복사기 등이 없을 때여서 붓글씨로 적을 때 실수하여 그만 원본 서문의 끝의 '耳'가 '矣'로 잘못 기재되어 옥에 티가 되고 말았다.
당시의 싯가로는 귀한 고서가 100원 정도 쳐주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책의 진귀함을 아는 소개자 김태준이 당시 좋은 기와집 한 채 값인 1,000원을 불렀다. 간송 전형필은 "훈민정음 같은 귀한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요. " 하면서 기와집 열 채 값인 1만원에 소개비 1,000원을 자청하여 더 주고 구입하였다.
대신 동국정운(東國正韻) 1권, 6권도 덤으로 얻었는데 이 또한 당시에는 세계 유일의 책이라서 그 후 국보 71호로 지정되었다.
동국정운(東國正韻)이란 조선 세종 30년(1448년)에 신숙주를 비롯한 집현전학사들이 중국의 음운서인 '홍무정운'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당시의 한자음을 새 체계에 따라 정리하여 펴낸 음운서(音韻書)다.
이런 통큰 간송 전형필의 마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조선의 모든 귀한 보물은 간송에게 오고 간송은 앉아서 귀한 문화재를 수집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명으로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8명의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훈민정의 한문 해설서로 전권 33장 3부, 1책의 목판본으로 국보 70호다.
이 책은 예의(例義) 다음에 '훈민정음 해례(訓民正音解例) 둘로 구성 되어 있어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 또는 '훈민정음 원본(訓民正音原本)’이라고도 한다.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은 예의(例義) 다음에 있는 부록편의 제자해(制字解),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 용자례(用字禮) 6부로 되어 있다.
여기에 초성(初聲) 글자 모양이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인 오음(五音) 발음기관 모양을 따왔다는 설명과, 모음은 중성(中聲)의 '. ㅡ ㅣ'는 천지인(天地人)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고, 초성(자음), 중성(모음), 종성(받침)을 합하여 쓰는 용자례(用字例)까지 상세히 적어 제자 원리를 밝히고 있는데, 이는 세계 어느 나라 문자에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유일한 책이어서 훈민정음해례본은 1997년 10월 세계기록유산으로까지 등재된 우리민족의 유산이요 나아가서 세계인들이 부러워 주목하는 세계문화유산의 하나가 된 것이다.
*.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우수성
필자가 이상에서 밝힌 훈민정음해례본의 이야기는 세계적으로 우수한 문자인 한글의 제작과정을 해설한 책이기에 소개하는 말들이었다.
그렇다면 한글은 어떤 면을 두고 세계인이 그 우수성을 찬양하는 것일까.
한글은 음소문자(音素文字)로 모음 10개, 자음 14 개로 간단하고 배우기 쉬워서 우리나라 전국민의 문맹율이 0% 이지만, 중국은 한자를 간체자(簡體字)로 바꾸고도 문맹률이 50%, 미국은 79%의 국민밖에 읽고 쓰지를 못한다. 글자란 소리를 표현하는 도구인데
일본 글자 가나는 71자로 약 300개,
중국 한자는 5만자로 400여 개
영어 알파벳은 26자로 300여 개의 음을 기록할 뿐인데 비하여
우리의 한글은 24개의 문자로 1만 1,000개 이상을 표현할 수가 있다.
게다가 영어처럼 대문자, 소문자, 필기체의 구별이나, 일본의 가나처럼 가다가나나와 히라가나의 구별이 없이 한글은 한 가지 글자가 한 음을 표현하고 있다.
다음은 세계적인 언어학자 등의 한글 찬양의 말들이다.
- 한글은 가장 쓰고 배우기 쉬우며, 풍부하게 다양한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자로 2009년에 이어 2012년 2회 거행된 나라글 자랑에서 연속 1위를 자치하였다.(-영국 옥수퍼드 대학의 언어학 대학에서)
-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자, 가장 훌륭한 글자다.(미 소설가 펄벅의 소설‘The Living Reed’ 의 서문)
- 세계에서 한글보다 뛰어난 문자는 없다. 한글이야 말로 세계의 알파벳이다.”(미국의 언어학자인 로버트 램지 메릴랜드대 교수)
-한글날은 세계인이 축하해야 할 날이다.(하버드 라이샤위((E. Reischauer) 교수)
-한글은 창조성과 천재성에 대한 위대한 기념비다.( 다이아몬드(C.J Diamond) 교수)
세계 모든 문자를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등의 기준으로 순위를 매겨 진열해 놓았는데 그 1위가 한글이다.(영국 옥수퍼드 대학의 언어학 대학에서)
그래서 아프리카의 문자가 없는 나라나, 세계 문자 없는 소수 민족들이 한글을 쓰기를 세계언어학회에서는 권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일 예로 인도네시아 찌아짜아족은 문자가 없어서 그들만의 고유문자를 기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없어져 가는 문화를 기록하기 위하여 2009년 한글을 도입하여 자기 종족의 글로도 쓰기로 하였다. 그후 그들은 자기 자신의 문화를 기록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세계인들이 이렇게 칭송하고 있는 한글을 꼭 알아야 할 것들을 우리들은 잘 모르고 있다.
한글날이 다가 오고 있다. 우리 다 같이 태극기를 한글 사랑하는 마음으로 빠짐 없이 달고 우리들의 한글날을 맞이하며 축하하자.
첫댓글 일만 형님 대단하십니다 ! 이많은 글과 자료들을 어떻게 올리셨나요. 잘 읽어보겠읍니다. 읽기도 힘드네요.
형님 오래오래 사시라는 말 밖에는 할말이 없네요...수고 많이 하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