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오늘도 옛날 지나온 내기억력을 더듬어 사실을 기록해본다)
용두리 장날은 옛날부터 5일장날이 2일 7일로 정해저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있다
60년대까지의 용두리장은 주위에서 아니 동대문 밖에서 제일 큰 장이라고 불렀다.
5일장(1,6일---홍천 횡성. 2,7일---용두. 3,8일---양평. 4,9---양덕원. 5,10---용문)
일용품 시장
장날만되면 먼동이트는 새벽 시장입구 길목에 어김없이 나란히 10여명의 장작짐이 한지게 100가치씩 (소나무나 참나무장작)예쁜 모습으로 지게 작대기에 뻣처저 주인을 기다리는 장면이 아련하다. 이들은 모두 다대리 삼성리 사람들이였다. 60년대는 가정에서 땔감은 나무이기에 용두마을 주민들은 장작을 매입하여 굼불이나 밥을 짛었다.
주위에 단월 양동 굴업 장이 없어 장날이면 백동골,통골,벗고개,도둑고개,등에서 산길로 사람들이 하얗게 걸어 넘어 오는 모습이 장관이였다. 길목마다 중간에서 등짐으로 장에 팔러오는 잡곡이나 건 약재등을 낚아 채려는 중간상이 요소요소마다 멍석을 깔아놓고 대기중 간이 거래가 이루어진다. 현재 내가 운영하는 부리꼴 농장이 부리기서 넘어오는 길과 굴업에서 통골고개를 넘어오는 삼거리로 중간상들이 장꾼들을 만나는 요충지였다
장꾼들은 무거운 짐을 벗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잡곡이나 건약재 판돈으로 시장에 도착, 일용품시장도보고 우시장도 돌아보며 맛있는 먹거리 각종 장국밥에 컬컬한 그 유명한 용두 막걸리 한잔에 흥건히 취해 보기도하고 기분이나면 색씨가있는 옥이 12집이나 있어 그곳에서 회포를 풀고 돌아가는 장꾼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장똘뱅이들은 주로 용문이나 양평 양덕원사람들로 화물차(단바리 G M C나 도요다 이스스)를 이용 5일장을 순회하면서 이른 아침에 도착 주로 기성복을 비롯하여 비단 포목 고무신 어물 잡화 과자등 장사치로 대형 짐보따리를 하차하여 자기 지정 난전에 해가림포장을치고 하루 종일 장사하고 한편 싸전에서는 지정 말강구(원뭐루 전해룡씨)에 손을 빌려 공평한 말질이나 되빡질로 잡곡거래가 이루어진다.
우시장
우시장은 동대문밖에서 제일 큰시장으로 통했다.
강원도 홍천과횡성시장이 1,6일장이라 다음장이 용두리2,7일장으로 연결되면서 소몰이 꾼들은 홍천,횡성장에서 구입한 우량소들을 서울을 향한 길목 마지막 시장인 용두장에서 한몫을 챙기려고 밤새 3,4 마리의 소의 앞뒤 고삐를 쥐고 끌고 중간 마방 신당리나 증안리,여물리 원뭐루에서 하룻밤을 잠을자고 쉬면서 다음날 용두시장에 몫이 좋은 말뚝을 차지하려고 새벽 3,4시부터 말뚝 경쟁이 치열하다. 하룻장에 소 출하 숫자는 송아지를 포함6,7십마리 정도로 출하되는것으로보아 시골 장터 에서 큰시장으로 유명세를 탓다.
송아지 거래는 개개인간에 이루어지면서 소장수들에 거친말솜씨는 일반 사람들은 알아듣기 민망할정도 쌍스런 욕지거리가 횡행하고 돈다발을 팽개치며 을움장도 처가면서 송아지 궁둥이를 냅다치며! 그놈 잘났다는등으로 거래하며, 먹이소와 육소는 팔뚝에 노란색갈에 중개인 표시 완장을찬 중개인들에 소개로 축협에서 일일출장나온 직원에 영수를 반듯이 받아야 거래가 이루어진다. 다만 육소에 한하여 매수자가 육가를 확인하기위해 현장에 설치된 육중한 대형 계근장에서 확이도 할수있다. 축협에서는 일일 출하되는 송아지,먹이소 육소등을 파악한다, 먹이소는 다음장이 양평 덕소가있으나 대개는 용두 우시장이 끝장이다.
그러나 육(살)소는 용두시장에서 화물차에 실려 마장동 도살장으로 직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