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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 묵상글 등 ( 연중 20주 토요일-우리가 진정 형제가 되려면. 등 )
*오늘 복음과 관련
빠다킹 신부님은 실천하는 신앙과 겸손의 삶이 주님께서 끊임없이 보여주신 모습이였다고 하시며 우리는 어떨까요? 질문하십니다.
조재형 신부님은 코로나19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풀잎의 지혜 등을 이야기 하시고,
오상선 신부님은 “신앙인의 자세” , 이병우 신부님은 “위선이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전삼용 신부님은 『걸리버 여행기』는 4개의 서로 다른 세상을 여행한 이야기인데 동화 같지만 실제로는 사회를 풍자해 출판 즉시 금서로 지정된 풍자소설이라고 하시며 4개의 섬을 여행하면서 바뀌는 주인공의 시각을 그렸고, 이것이 겸손의 단계와 맞는다고 생각하신다 합니다. (천천히 읽으며 묵상하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양승국 신부님은 지금은 깃발 높이 쳐들고 길거리로 나가서 기도하는 시대가 아니라, 골방으로 들어가 간절히 기도하는 시대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며 묵상글을 이어 가십니다.
### 제가 정독과 묵상 깊게 아니하고 우선 적어봤습니다. 평화와 선, 김 루도비꼬. ###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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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0주 토요일-우리가 진정 형제가 되려면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구호는 "Liberté, Egalité, Fraternité"입니다.
이것을 보통 "자유, 평등, 우애(박애)"로 번역을 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우애라고 번역된 'Fraternite'가 실은 라틴말로
'Fraternitas'이고 우리 프란치스칸이 '형제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이 18세기 말에야 억압과 수탈의 구체제를
무너트리며 새롭게 내건 형제애가 실은 그 700년 전에 프란치스코가
이미 살고자 했던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형제애가 실은 프란치스코가 창안한 개념이 아닙니다.
이 형제적 관계와 형제적 사랑은 프란치스코가 창안한 개념이 아니라
복음을 그대로 살고자 했던 프란치스코가 오늘 복음에서 가져온 개념이지요.
프란치스코는 인준받지 않은 수도규칙 23장에서
오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먹인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는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구체제를 무너트린 위대한 혁명이라고 일컫는 프랑스 대혁명이
18세기에야 외친 구호가 이미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고 그리고
프란치스코가 다시 실천했던 것인데 이 말을 뒤집으면 예수님과
프란치스코가 그렇게 실현코자 했건만 이것이 그러나 그 오랫동안
실현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프랑스 혁명이 내건 이 형제애라는 구호가 예수님과 프란치스코의
그 형제애와 같은 말이지만 내용은 상당 부분 다릅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우리는 형제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인본주의적으로 인간은 평등하고
그래서 형제들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하느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기에
우리는 형제가 되는 그런 형제애입니다.
실로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시라면 우리가 형제일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신자가 아닌 어른께 어떤 신자가 형제님이라고 했더니
'내가 왜 당신 형제냐?'고 했다고 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애를 잘 살지 못함을 반성하고 고치고자 한다면
하느님을 우리 공동의 아버지로 섬기지 않기 때문임을 성찰하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합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바이지만 일본 사람을 제가 형제라고 부르다가도
어느 순간 일본놈이라고 원수 취급을 하는 것은 그저 인간적인
사랑부족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 하느님을 놓치고 그들만 보기 때문이지요.
인간을 보면서 인간만 보지 않고
하느님까지 같이 보는 깊은 관상의 눈이 우리에게 있어야 함을
오늘 주님 말씀 때문에 다시 한번 뼈저리게 성찰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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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주요 호칭 가운데 하나가 ‘사람의 아들’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몇 번을 제외하고는 예수님께서 이 표현을 직접 쓰십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도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대부분은 인간 존재나 인류를 가리킵니다.
특히 에제키엘서나 다니엘서에서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과 구별된 이로 ‘보통의 인간’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호칭을 다른 의도로 당신께 사용하셨습니다.
이 호칭은 그분의 인성만이 아니라 지상에서 수행하신 메시아 사명을 통하여 드러난 존엄한 신성까지 모두 담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지니고 계시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버림받고 고통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의 신분과 사명을 가지고 계심을 드러내는 호칭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겸손한 섬김의 삶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남들에게 보이려고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이며, 잔칫집이나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만을 좋아하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1요한 3,1 참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보통의 인간으로서 ‘사람의 아들’로 불린 에제키엘은 영광으로 가득 찬 하느님의 천상 어좌를 보았습니다. ‘사람의 아들’로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니신 예수님의 명을 우리가 따른다면,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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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3,1-12: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예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 해설가로 자처하며 그 지식으로 이익을 바라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기 때문에 자신들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이 있다. 이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바리사이라는 말은 분리된 자들(perusím)이라는 말에서 왔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행실 때문이 아니라, 가르침을 생각하며 그들의 말을 따르라고 하신다. 즉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는 사제들의 강론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우리가 듣는 것을 모두 행할 수는 없다. 또한, 사제들도 자기들이 가르치는 것을 모두 행하지는 못한다. 다만 가르치는 것을 행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것이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말만 할 뿐, 사람들에게 율법이라는 짐만 지워놓고 그 짐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자격도 없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었던 것처럼, 교회 안에도 그런 식으로 성직자의 자리에 앉아있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신자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말하지만, 자신들은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 신자들에게 부담만 주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은 많은 사제는 말하기 전에 행하고 현명하게 이야기하며 신자들을 도와준다. 이들은 자신들의 말을 듣는 신자들을 격려하려고 스스로 가장 무거운 짐을 진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라고 하신다. 신자들에게는 선행을 말하지만, 자신들은 눈가림으로만 하는 사제들은 남들의 눈에는 의인으로 보일지 모르나, 분명히 그의 행동은 의롭지 않은 거짓 교사이다.
주님께서는 이들의 허영심을 폭로하신다. 그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따스함도 가치도 없는 것에 목을 맨다. 성구갑과 옷자락 술이 바로 그들이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지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옷자락 술은 율법을 잘 알고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해 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다. 그들의 유일한 옷자락 술은 예수님의 은총이었다.
그들은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6-7절) 교회 안에도 이런 성직자들과 봉사자들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들추어내어 그들을 꾸짖으셨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것들을 알 필요가 있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8절) 우리는 물과 영으로 새로이 태어났으며,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에게서 난(요한 1,13 참조)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뜻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12절)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봉사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세를 낮춘다는 것이다. 끝자리라는 것은 바로 봉사하기 위한 자리라는 것이다. 그 사랑과 봉사를 통해 하늘나라에서는 높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끝자리를 택하여 참으로 봉사하고 사랑하는 삶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가르침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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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 한상우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오 23, 3)
이 어려운
시간을 위해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을
가슴으로
안아주었던
성모 마리아의
삶을 기억합니다.
저는 한 번도
예수님을
안아드린 적이
없음을 아프게
반성합니다.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를 알아야
십자가의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끝까지 품에안은
어머니의 빛나는
삶의 영광입니다.
모후가 되시는
여왕은 완벽한
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괴로움과
함께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삶의
첫머리에
어머니가 계십니다.
어머니는
힘들어도
앞으로
하느님께로
나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전폭적인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영광이
되시는 사랑의
어머니가 계십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삶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요.
사랑의 여정
어머니의 여정
그 여정의 시작과
여정의 끝에는
어머니의 삶
어머니의 실천이
있었습니다.
결코 끊을 수 없는
실천의 사랑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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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 새벽을 열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빠다킹신부님.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제 머릿속의 기억뿐이지요. 어렸을 때 형과 함께했던 여행을 떠올리며 혼자서 그 여행지를 찾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 기억 속의 모습과 지금 현재의 모습이 달랐습니다. 괜히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과연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겠냐 싶습니다.
너무나 많은 것이 변해가는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쓰고 있는 것이 바로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라는 묵상 글입니다. 2001년부터 썼으니 벌써 20년째입니다.
종종 이런 메일을 받습니다.
“10년 전에 신부님 글을 계속 보다가 사는 게 바빠서 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부님 생각이 났는데, 지금도 글을 쓰실까 싶었는데 아직도 쓰고 계시네요. 계속 이 자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글을 보고서 반가웠다는 분을 많이 만납니다. 변하지 않는 글,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변함없이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모습을 변함없이 계속해서 지키고 있어야 할까요?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 모습을 변함없이 드러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말만 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몸으로 실천하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높이는 교만과 이기심의 모습이 아닌,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면서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실천하는 신앙과 겸손의 삶이 주님께서 변함없이 보여주신 모습이었습니다. 그토록 위대하신 분이시지만, 주님께서 직접 자신을 늦추셨고 당신의 몸으로 적극적으로 실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떨까요? 좋은 쪽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만 변하는 것 같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만을 선택하면서 주님의 변함없는 모습을 제대로 따르지 못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자신의 높이를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높이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 결정하십니다. 따라서 스스로 높이려는데 온 힘을 기울이기보다, 주님께서 높여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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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외모나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나와 똑같은 영혼을 알아보았기에 사랑하는 것이다(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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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해야 할 것.
어렸을 때는 책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지만, 책을 가지고는 싶었습니다.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볼 수 있는 세계문학 전집, 세계위인전 등은 부러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신부가 되고 나서는 책을 직접 구매합니다. 현재 한 달에 50만 원 이상을 책값으로 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책, 의미 있는 책,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책들을 시간 될 때마다 구매합니다. 그리고 다 읽고 나서는 갑곶 성지의 작은 도서관에 비치합니다.
도서관이 만들어진 지 3년 정도 되었는데 벌써 1,700권이 넘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모두 읽은 책이라는 점이 뿌듯해집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하냐고 묻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때 저는 무조건 읽으라고 추천합니다. 그래야 자신에게 맞는 장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몰라서 아예 읽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에게 맞는 기도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아예 기도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해야 할 것이 참 많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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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은 코로나19의 확진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500만 명이 넘었습니다. 100명 중에 한명 이상이 코로나19에 걸렸다고 생각하니 정말 심각한 상황입니다. 치료제와 백신이 나오지 않는 이상 확진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면 모르겠지만 쉽고도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었던 많은 나라들이 쉽고도 간단한 방법으로 지금은 확산이 둔화되고 있습니다. 어떤 방법일까요? 그렇습니다. 공공장소에서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입니다.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코로나19의 확산을 70%는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더운 여름에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불편할 수 있지만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 정도의 불편은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미국의 대통령도 ‘마스크 착용은 애국’이라고 말하였습니다. 6개월 전에 이렇게 말했다면 미국이 세계 최고의 코로나19의 피해국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건강을 과신하고 코로나19 파티를 했다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코로나19에 걸린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파티를 했다고 합니다. 결국 젊은이는 코로나19에 걸렸고, 소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젊은이가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건강을 과신했고, 코로나19가 정말 위험하다는 것을 몰랐고, 어리석었습니다.’ 코로나19는 가족 간의 전파가 많았다고 합니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내기 때문입니다. 가족 중에는 노약자도 있고, 지병이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분에게 코로나19는 생명에 위험을 주는 질병입니다. 그러기에 코로나19에 일부러 노출되는 행동은 본인은 물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피해를 주는 아주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코로나19를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할 것은 없습니다. 바람이 불면 풀잎은 먼저 고개를 숙입니다. 그것은 바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풀잎의 지혜입니다. 코로나19라는 바람이 좀처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유지한다면 우리는 코로나19라는 파도를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말은 새겨듣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식, 허위, 위선, 교만, 욕심, 이기심을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코로나19를 이야기하면서 마스크착용을 겁쟁이의 행동이라고 따르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코로나19를 이야기하면서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고 코로나19 파티를 여는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스크 착용을 이야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마스크일까요? 섬김의 마스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다른 이들의 발을 씻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섬김의 마스크를 착용하는 사람은 유혹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섬김의 마스크를 착용하였고, 순교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겸손의 마스크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겸손입니다. 첫째가 되고자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겸손의 마스크를 착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입니다. 모두가 쉬는 주말에 가끔씩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갑작스레 높은 분이 오신다던가, 부대 주변의 시설이 비바람에 무너졌을 때 청소를 하거나, 복구 작업을 해야 합니다. 사실 다들 쉬고 싶은 주말에 일을 하러 나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일직사관이 인원을 모집합니다. ‘참호 복구 작업 20명 나와라. 장마철 대비 하수도 정리 작업 10명 나와라.’ 그러면 대게는 계급 순으로 밑에서부터 작업인원이 정해집니다. 그런데 그런 작업에 계급이 높은데도 지원을 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물론 후배들이 잘 따르는 친구입니다.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작업도 쉽게 하는 그런 친구들입니다. 힘든 일, 고된 일을 해도 언제나 밝고 환한 그런 친구들은 쉽게 볼 수는 없지만 밤하늘을 비추는 별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공부방을 하는 대학생 친구들도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여름에 산으로, 들로 바다로 휴가를 가는데 공부방으로 휴가를 가는 친구들입니다. 다들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작은 성당으로 자청해서 지원하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하늘의 별처럼 기쁨과 희망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단순히 눈을 뜨고 있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어둠 속을 밝히는 ‘횃불’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꺼져가는 불꽃을 다시 키우는 ‘불쏘시개’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뒤로 숨기보다는 언제나 당당하게 앞서서 가셨던 주님처럼 선두에 서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문득 힘든 일, 고된 일이면 늘 앞장서서 나아갔던 군 선배가 생각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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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참 신앙인의 자세를 이야기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하지 마라."(마태 23,3)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종교 지도자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평가일 겁니다. 여타 학문의 전문가와는 달리 종교란 가르침과 행동이 둘이 아니라 하나여서 일치가 이루어져야 하는 분야니까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예수님께서 "보이기 위해" 행동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데 하느님의 이름을 이용하기 때문이고, 우월감과 교만으로 으스대기를 일쑤이며, 하느님 백성 위에 군림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딱 그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섬기는 사람"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고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밝히셨지요. 예수님은 가르침뿐만 아니라 실제로 섬기십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 차별성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말하는 바를 실천하는 행동은 백 마디, 천 마디 소리와 비교할 수 없는 진정성과 파장이 남습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다시 가득 차는 희망적 장면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에제 43,4)
어제 이스라엘이 다시 부활하리라는 환시에 이어 오늘은 주님께서 다시 주인으로서 새 성전을 차지하시는 대목입니다. '유배살이가 이십오 년에 이르렀을 때, 예루살렘 도성이 무너진지 십사 년째 되는 해'(에제 40,1 참조)에 주님께서 보여 주신 희망의 장면이지요.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에제 43,7)
지금은 남의 나라 땅에서 서럽고 모진 유배살이를 하는 처지지만,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모아들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사시겠다고 하십니다. 유배살이가 세대를 넘어가는 때에 이만한 희망의 말씀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이스라엘의 하느님 백성이라는 고귀한 신분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선민사상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의 소명은 자기들이 받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널리 퍼뜨려 하느님 구원 계획에 협력하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계급의식과 우월주의, 분리주의로 더 견고히 고착된 것입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유배에서 돌아온다 해도 이 구태를 벗지 못하면 그들은 주님의 현존을 제대로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예수님 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이스라엘의 오만을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의 행태를 들어 언급하십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고 허세에 의지해 산다는 것은 사실 내면에 주님을 모시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하느님께서 다시 머무르신다는 희망은 옛 영화와 신분질서로 회귀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존감 있는 백성으로 마음껏 사랑하고 섬기라는 새 부르심이었지요. 조상들은 비록 놓쳤지만,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미입니다.
나의 이웃을 그가 사회에서 윗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기꺼이 섬길 수 있는 사람,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가족이나 친지, 지인 등 옆 사람을 높여 줄 수 있는 이는 사실 속이 꽉 찬 사람입니다. 그는 내면이 하느님 현존으로 가득 차서 낮추어도 비참하지 않고 섬겨도 비굴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말씀을 모시고 사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성령께서 현존하시는 성령의 궁전이기도 하지요. 더 이상 우리는 윗자리를 탐하거나, 깜냥보다 낫게 보이기를 바라며 겉꾸미거나, 자기 영광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낮추고 섬겨도 여전히 존엄한 하느님의 자녀이고, 무시와 업신여김에도 구겨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제자니까요!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니 우리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영으로 가득 차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머무르려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천상 모후의 면류관을 받으신 여왕이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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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
'위선에 대한 책망!'
'위선이란?'
본질을 바라보지 않고, 본질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위선이란?'
본질이신 예수님과 본질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나를 통해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위선이란?'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위선이란?'
미사와 삶이 분리되어 있고, 말씀과 삶이 분리되어 있고, 기도와 삶이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 계시된 예수님의 가장 큰 분노는 본질과 하나인 사랑이 삶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위선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복음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에 대한 분노였고,
예루살렘 성전이 성전으로써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장사하는 집으로 변해 버렸을 때 드러난 분노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았다고,
또는 죄를 지었다고 분노하지 않으시고,
위선에 대해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우리는 본질이신 예수님을 믿고, 본질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인 사랑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서원과 서품을 통해 수도자와 사제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모후(여왕)이신 마리아는 본질이신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만인의 형제인 성 프란치스코 역시 회개이후 그러한 삶을 사신 분입니다.
하느님과의 약속을 잘 지키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성 프란치스코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큰 것을 약속했고 우리에게는 더 큰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고 약속된 것을 갈망합시다. 쾌락은 일시적이고 형벌은 끝이 없습니다. 고통은 짧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아멘."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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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 이영근 신부님. “너희는 스승, 선생, 아버지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진정, 나는 스승을 찾고 있는가?
우리가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스승을 만나지 못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민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이 없어서 우리 시대가 이 모양으로 혼탁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삶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알아 모시지 못하고, 그들의 제자가 되어 그들에게 머리를 굽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P. 이제민)
그렇습니다. 만약 지금 내게 스승이 없다면, 내 형제에게 머리를 굽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길 ‘셋이 함께 길을 걸으면 그 중에 한 명의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 모인 우리 중에 어찌 스승이 없겠습니까?
그러니 스승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승을 곁에 두고도 눈이 먼 까닭이요, 또한 제자가 되어 머리를 숙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식이 드러나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받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가 참된 스승인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이고자 하는가?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곧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둘째>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곧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셋째>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곧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첫째> 그는 가르치되, 언행이 일치하는 이, 말씀을 성취하는 이일 것입니다.
곧 가르침으로 타인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실행함으로 타인의 짐을 짊어지는 이입니다.
<둘째> 그는 일하되, 표리부동과 위선이 없는 이일 것입니다.
곧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닌 자신을 보낸 분을 드러내는 일을 하는 이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 일을 바치는 이입니다.
<셋째>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되, 자만과 허영이 없는 이일 것입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이요, 섬김을 받으려하기보다 섬기는 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 선생, 아버지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마태 23,8.10)
그렇습니다. 섬김이야말로 참된 스승이 되는 길이요, 동시에 참된 스승이신 당신의 참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오늘, ‘후~’하고 불면 날아가 사라져버릴, 흙도 아닌 흙의 먼지로 창조된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오늘도 고개 숙여 배우기보다, 목을 뻣뻣이 세우고 가르치기를 일삼는 ‘나는 참 제자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 봅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마태 23,11)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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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 연중20주간 토요일. 동정 마리아모후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에 앞서 바른 행실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아마도 죽은 후에 신부님들은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은 귀만 가고, 일반 신자들은 발만 갈 것입니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습니다. 신분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삶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표양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기에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마더 데레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수도자와의 만남에서 “청빈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사람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또한 순전히 실용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은 것과 말한 것, 행하는 것 사이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로마2,1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꾸중을 듣는 것은 그들의 지향과 행동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놓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하셨습니다.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으며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고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어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자신이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태23,11),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태23,12)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을 하면서도 정작 대접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면 큰일입니다. 사람의 주목을 받는 일에는 기를 쓰고 일을 하려고 들고 알아주지 않는 일, 하지만 충실히 채워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백성이 떼지어 모여들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4,5). 그리스도인은 행실이 표양이 되어야 하고 버릇없는 이들과도 함께해서 좋은 것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듯 말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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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제자弟子다운 삶 - 주님의 영광榮光이 가득한 주님의 집 -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입니다.
아름다운 축일답게 입당송도, 새벽 성무일도 찬미가도 아름다웠습니다.
-“황금으로 단장한 왕비, 당신 오른쪽에 서 있나이다.”(시편45,1)
“우리의 동정성모 성마리아께 영광의 화관씌워 드높이시고
여왕과 어머니로 세운삼위께 영원한 찬미찬양있어지이다.”-
오늘 말씀 묵상중 ‘다운’이란 말마디가 떠올랐고, 강론 제목을 ‘주님의 참된 제자들’에서 ‘주님의 제자다운 삶’으로 바꿨습니다. 아주 오래전 52년전 서울교대 학장님의 호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스승답게’살아야 한다는 자각에서 ‘다운’이라 정했다 했습니다.
스승다운, 제자다운, 수도자다운 삶이 아름답고 매력적입니다.
어제 어느 자매와 주고 받은 대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사정을 들으니 사람이 되는데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일치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아주 노골적이자 직접적 표현을 나눴습니다.
“사람에게서 하느님 중심이, 예수님 중심이 빠져버리면 사람이 아닌 괴물이, 급기야는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광신도狂信徒가 또는 악마가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비로소 참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참으로 어려서부터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일치를 위한 신앙교육의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더불어 아주 예전에 써놨던 아주 짧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푸른 산 깊은 산 맑은 물
푸른 삶 깊은 삶 맑은 영성
산에 가까울수록 흐르는 물은 맑고
하느님께 가까울수록 흐르는 영성 또한 맑다”-1997.4
그대로 이상적인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상징합니다. 좋은 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깊은 산이라 합니다.
좋은 삶, 깊은 삶은 겸손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장마후의 요즘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 참 보기 좋습니다.
그러나 물이 점차 줄어드니 물오리들이 거의 떠났고 얼마 지나 물이 마르면 물오리들은 물을 찾아
완전히 다 떠날 것입니다. 수도공동체 역시 늘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강처럼 살 때 물오리들이 물을 찾아오듯 신자들도 하느님을 찾아 수도원에 올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맑게 흐르는 삶, 바로 삶의 중심이신 주님과 일치의 표현입니다.
늘 새롭게 맑게 흐르는 삶, 참으로 매력적인 파스카의 삶이요 주님의 제자다운 삶입니다.
주님의 제자다운 삶의 모범이 주님의 어머니이자 제자라 할 수 있는 오늘 축일을 지내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입니다.
원래는 성모성월의 마지막날인 5월31일에 지냈으나 1970년 새로운 로마 전례력에 8월22일 오늘로 옮겨졌는데 이는 8월15일 성모승천 대축일의 8일 축제를 마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 5단에서, “예수님께서 성모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묵상합시다.”하는 지향으로 기도를 합니다. 성모 마리아가 왕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시라는 말씀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께 오롯이 순종하심으로써 천상모후가 되셨습니다.
아드님 예수님처럼 ‘비움-순종-섬김-겸손’으로 요약되는 참 거룩하고 아름다운 제자다운 삶을 사셨고
주님의 제자답게 살려는 우리에게는 평생 배워야 할 영적 삶의 롤모델이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참된 제자다운 삶에 대한 가르침을 줍니다.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외적 껍데기의 허영스런 삶이 아니라 내적 알맹이의 실속있는
진실하고 겸손한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혐오했던 삶은 위선의 허영스런 삶이었습니다.
외화내빈外華內貧이란 말도 있듯이 외적 과시와 허영은 그대로 내적 빈곤의 반영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의 부정적 모습들의 나열입니다.
영적 빈곤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그러니 이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주님의 제자들은 이처럼 외적 허영의 삶을,
표리부동의 삶을, 언행불일치의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복음 후반부는 그대로 참된 제자다운 삶의 요약입니다.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진리로 그대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 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일체의 우상이 배격됨으로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우리 모두가 형제라는 만민평등이 선언되고 있습니다. 이어 주님은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성모님을 닮아 자신을 비워 섬김과 순종, 겸손의 제자다운 삶에 충실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역시 영적 역설의 진리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섬기는 사람이, 겸손으로 낮추는 사람이 실로 높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비움, 섬김, 순종, 겸손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통해 주님의 영광은 환히 빛날 것입니다.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위대한 선은 물과 같다’란 말도 있듯이 끊임없이,
소리없이 자기를 비워 메마른 대지를 적시고 생명을 살리며 아래로 아래로 흘러 바다에 이르는 강물을 닮은
섬김과 겸손의 제자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날 때의 여정을 역순으로 해서 돌아옴을 묘사합니다.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주님의 집은 그대로 주님의 제자다운 공동체에 주시는 축복의 장면을 상징합니다.
에제키엘서 마지막 주님의 말씀은 이 거룩한 미사가 거행되는 성전을 지칭하는 듯 합니다.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영적 이스라엘 자손들인 너희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
과연 주님의 영광이 가득한 살아있는 주님의 집인지, 또는 주님의 영광이 떠난 죽은 주님의 집인지
살펴보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섬김과 겸손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함으로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주님의 집 공동체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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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에제키엘 43,1-7ㄷ
마태오 23,1-12
걸리버 여행기와 겸손의 4단계
사람 아이지만 늑대에게 자라서 늑대를 자기 아버지라 믿으면 그 아이는 본성이 사람일까요, 늑대일까요? 사람처럼 살까요, 늑대처럼 살까요?
늑대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 늑대의 본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본성은 자기가 그 본성임을 믿을 때 나옵니다.
그리고 그 본성은 자신이 아버지를 누구라고 믿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사람이라고 믿고 살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이라고 믿고 살라는 말씀일까요?
자신을 늑대라 믿으면 늑대처럼 살고,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처럼 살며 하느님이라 믿으면 하느님처럼 삽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당신 친히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교리서는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라고 하며,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460)라고 가르칩니다.
본성에의 참여가 자신이 아버지의 본성을 가졌음을 믿을 때 발휘된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라 믿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하느님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많은 분이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며 그것은 교만이라고 비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제는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하느님만을 아버지라 믿으라고 하신 오늘 복음은 겸손해지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고백하면 과연 교만일까요, 겸손일까요?
『걸리버 여행기』는 걸리버라는 영국 의사가 4개의 서로 다른 세상을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동화 같지만 실제로는 사회를 풍자해 출판 즉시 금서로 지정된 풍자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4개의 섬을 여행하면서 바뀌는 주인공의 시각을 그렸습니다.
저는 이것이 겸손의 단계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책의 순서대로 설명해 드릴 테니까 내가 걸리버라고 생각하고 언제가 가장 겸손한 때였는지 그 순서를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걸리버는 처음에 ‘소인국’에 표류합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 손가락만 합니다.
걸리버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을 위해 봉사합니다.
그들 식량의 1000배가 넘는 음식을 먹으니 밥값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적들의 배가 공격해오자 50척이 넘는 배를 줄로 엮어서 끌고 옵니다.
그렇게 소인국의 영웅이 됩니다.
사회를 위한 공헌자가 된 것입니다.
두 번째 표류지는 ‘거인국’입니다.
그는 거인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커스를 하며 지냅니다.
주인의 배를 채워주어야 자신도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 한없이 작아집니다.
자기를 좋아하는 공주를 위해 자신이 살던 나라는 비리와 폭력이 난무했다고 자아비판을 하며 그들을 높여줍니다.
조금은 비굴하지만 그래도 이웃을 높이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 표류지는 떠다니는 섬, ‘라퓨타’가 있는 곳입니다.
하늘을 떠다니는 섬에는 정치인과 학자들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스리는 백성은 굶어 죽고 있는데도 학문과 문화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걸리버는 그들에게 분개합니다.
정치만 비판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섬은 거짓말을 모르고 평화를 사랑하는 말들이 사는 곳입니다.
말들의 섬입니다.
그런데 또한 야후라는 괴수들도 있습니다.
야후들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짐승의 손과 발을 가졌습니다.
너무 자기만 알아서 5마리에게 50인분의 음식을 주어도 그들은 서로 먹겠다고 싸우며 죽입니다.
사랑 지극한 말들과 그 괴수들 앞에서
자신이 그 괴수 중 하나였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말처럼 살려고 네 발로 걷고 말의 목소리도 흉내 냅니다.
모습은 괴수지만 말들처럼 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자, 결정하셨습니까?
우선 겸손과 가장 거리가 먼 섬은 어디일까요?
걸리버가 겸손의 길을 시작하지 않았을 단계입니다.
바로 세 번째 하늘을 나는 ‘라퓨타’섬입니다.
걸리버는 정치인들은 비판하면서 자신은 실제로 가난한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정치인들 비판하며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이방인들처럼 겸손의 길로 들어서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것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요? ‘소인국’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믿는 단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같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람들을 돕지만, 그 가운데에서 사람들의 영광을 받아
자신만 커집니다. 겸손보다는 아직은 교만이 지배하는 단계입니다.
그다음 단계는 당연히 ‘거인국’에 갔을 때입니다.
이때는 이웃이 있으니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단계입니다.
따라서 이웃을 들어 높이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겸손하기 위해 자기 힘으로 자기는 작아지고 이웃은 크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단계입니다.
성경에서는 나자렛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높여주려고는 하지만 예수님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만하다고 비판합니다.
사람이 겸손해져야지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고 따집니다.
아직 참 겸손의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단계의 겸손은 ‘천국 백성이 사는 섬’입니다.
그들은 선택된 하느님 자녀라 여기고 그렇게 거짓 없이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는 사람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아드님인 예수님의 삶과 비교할 때 자신은 괴수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괴수 같은 사람들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음을 믿고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살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을 입은 하느님 자녀임을 알게 된다면 이 단계에 오릅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으면 자신을 그리스도와 비교하게 되어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인간이라고만 믿었다면 어떻게 물 위를 걸어볼 생각을 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느님이라 물 위를 걷는데,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물 위로 뛰어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며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에 빠졌다가 걸었다가 하면서도 끊임없이 나도 하느님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을 때
가장 겸손해집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
이것이 구원의 핵심교리입니다.
인성에 참여한다는 것은 인간이 된다는 말이고,
신성에 참여한다는 말은 하느님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인간이라 믿어야 인성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느님이라 믿어야 신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느님 신성에 참여하여 신이 되었다고 믿는다면
이는 마치 인간인 것을 알았으면서도 두 발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처지를 인식하는 아기처럼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되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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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지금은 깃발 높이 쳐들고 길거리로 나가서 기도하는 시대가 아니라, 골방으로 들어가 간절히 기도하는 시대입니다!
무릎 꿇고 백배 사죄해도 부족할 판에, 잘못한 것 하나 없다며, ‘대국민 입장문’까지 발표하면서, 큰소리 떵떵 치고 있는 전광훈이라는 자를 바라보며, 제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환자로구나! 환자!’였습니다.
과대망상증 환자!
과대망상증은 그릇된 자기 인식으로 인해 시작되는 증세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부풀리거나 과대평가합니다.
자신에 대한 가치나 의미, 위치를 과하게 격상시킵니다.
증세가 심각해지면 스스로를 왕으로, 전지전능한 메시아로 여기기도 합니다.
전광훈이라는 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니 딱 그꼴입니다.
환자 한명과 그를 추종하는 끄나풀들의 난동과 횡포로 인한 서민들의 삶이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저희 공동체 같은 경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은 희망을 가졌습니다.
완벽한 원상복구는 불가능하겠지만, 작은 대안들을 찾아가며, 소박하게나마 다시 시작해 보자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자로 인해 꿈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저희 같은 수도자들이야 어떻게든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루하루 일을 해야 삶이 돌아가는 서민들, 소상공인들, 자영업자들께서 겪고 있을 혹독한 고통을 생각하니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환자를 메시아처럼 여기고 따라다니시는 분들, 지금이라도 제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꼭 쥐고 있는 줄은 구원과 영생의 줄이 아니라, 불붙는 지옥으로 인도하는 썩을 동아줄이라는 것을 빨리 파악하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분연히 일어나 길거리로 나가서 외치는 시대가 있는가 하면, 깊은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하는 시대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이 시대는 깃발 높이 쳐들고 길거리로 나가서 기도하는 시대가 아니라, 골방으로 들어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시대입니다.
깊은 골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기도하는 시대입니다.
교만하게, 안하무인격으로 살아왔던 지난 삶에 대해 크게 가슴치면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국에 겸손하신 성모님의 존재는 얼마나 큰 위로요 희망으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오늘 가톨릭 교회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모후’라는 말은 ‘왕의 어머니’, 또는 ‘여왕’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가장 충실히 협조하셨던 성모님의
머리 위에 빛나는 왕관을 씌워드린 것을 경축하며‘여왕’ ‘모후’라는 칭호를 붙여드렸습니다.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 바치실때, 제일 마지막 5단은 어떤 신비를 묵상합니까?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워드림을 묵상합시다.”입니다.
일종의 대관식 장면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삼종기도 첫구절은 어떻습니까?
“천상의 모후여, 기뻐하소서! 알렐루야! 태중에 모시던 아드님께서 알렐루야!”
보십시오! 여기서도 천상의 모후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성모님 성가 중에 아주 유명한 성가 있습니다.
“하늘의 여왕되시는 오 마리아!”
매일 수도자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이런 찬미가를 부릅니다.
“여왕이시며 사랑에 넘친 어머니”
보십시오. 하늘이 여왕이신 성모님에 대한 표현이나 이미지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 여기 저기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여왕’ ‘모후’라는 호칭은 단순하고 소박하신 성모님, 고향에 계신 우리 어머니 같은 성모님께 그리 잘 어울리는 호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는 분,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마니피캇 찬가의 내용처럼, 주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어 버리십니다.
권세있는 자들을 자리에서 내치십니다.
부요한 자들을 빈손 돌려보내십니다.
목에 잔뜩 힘주는 사람들, 잔뜩 폼 잡는 사람들을 바닥으로 내동댕이 치십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한결같은 충실함으로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최선을 다해 협조하셨던 지극히 겸손하신 성모님께 큰 축복을 내리시어,
‘모후’‘여왕’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모후요 여왕이기는 하시지만,
사치와 허세가 하늘을 찌르는 모후가 아니십니다.
대신 지극히 인간적인 여왕, 한없이 겸손하신 여왕이십니다.
우리의 성모님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갖은 고통과 상처로 힘겨워하는 어린 양들을
측은지심의 눈빛으로 굽어보시고, 살뜰하고 극진히 챙기시는 봉사의 모후이십니다.
승천하신 성모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천상 모후의 관을 받으신 후에도, 한결같이 자애롭고 온유한 모습으로, 죄인인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봉사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성모님께 여왕이란 어마어마한 칭호를 붙여드린 이유는 그분이 하느님의 여종으로서 최선을 다했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평생토록 침묵 속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고, 계속되는 고통과 십자가 속에서도 기도하고 희망하며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에 적극 참여하셨습니다.
이것이 여왕이 되신 이유였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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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2.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연중 제 20 주간 금요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비오 10세 교황은 183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858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20년 가까이 본당 사목자로 활동하다가 만투아의 주교와 베네치아의 총대주교를 거쳐, 1903년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비오 10세 교황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립하고자 노력하였고, 특히 광대한 교회법을 현대화하여 새 법전을 편찬하고, 성무일도서도 개정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 생활을 해치며 교회를 위협하는 오류들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1914년에 선종한 비오 10세 교황은 1954년에 시성되었습니다.
주제는 '하느님께서 영을 넣어 살게 함과 율법의 예언서의 정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숨을 불어넣고 살아나게 하며 힘줄과 살을 오르게 하고 영을 불어 넣겠다.고 예언 합니다. 마태오 복음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3분 동안. 주님을 바라봅니다.
-. 현장을 되돌아 봅니다. 나와 만나 사람들. 만남 대화, 한 일을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허물과 그릇됨을 봅니다. 복음적 생활을 묵상합니다. 회개함가 개선을 묵상합니다.
-. 지난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그 무렵 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숨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그분께서 분부하신 대로 내가 예언하니,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그때에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은 온 이스라엘 집안이다. 그들은 ‘우리 뼈들은 마르고 우리 희망은 사라졌으니, 우리는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언하여라.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에제 37,1-14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마태 22,34-40
-. 말씀을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묵상.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 그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주님은 마른 뼈에 숨을 불어 넣고, 힘줄을 놓고 살을 오르게 하며, 살갗을 씌워 주시고, 영을 주시어 살게 해 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돌아갈 우리 땅에 데려다 놓으십니다. 주님은 당신을 믿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살게 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교회와 각 공동체, 특히 마른 뼈들 처럼 되어있는 가족들을 살려 주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이를 위해서 각 공동체와 교회는 그리고 가정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 두 가지를 잊지 않고 실행합니다.
마음과 목숨, 그리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지속적으로 실천합니다. 오늘도 두 가지의 사랑을 잊지 않고 실천해 나갑니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 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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