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대
이연수
우리는 곧 만날 것이다. 준비가 끝났다. 방금 아로마 향 오일 촛대에 불을 붙였다. 남자에게 보낸 초대장에 적은 시각은 오후 8시였다. 거실 끝자락 적당한 높이에 맵시 있게 걸린 양면 시계는 정확하게 10분 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크지 않은 거실 한가운데에 교자상을 펴고 그 위에 하얀 색 테이블보를 깔아 음식상을 차린 것은 다시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마땅한 방석이 없어 퇴근을 하면서 시장에 들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 정성이야 당연한 것이었다. 새로 사온 방석은 테이블보와 세트처럼 어울렸다. 여자는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하얀색 미니 드레스가 놓여 있었다. 여자는 낭비되는 몸짓 없이 신속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화장대 거울 속에 비친 여자는 투명해 보였다. 드레스의 흰 빛에 반사된 여자의 살빛은 밝았다. 사뿐, 거실로 나온 여자는 시계를 보았다. 1분 전이다. 곧 초인종이 울릴 것이다.
<선생님, 제가 사는 작은 집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순수한 마음입니다. 선생님은 제 마음을 아시리라 믿습니다. 다른 욕망은 없습니다. 8일 저녁 여덟 시입니다. 아래 주소와 약도를 첨부합니다.>
8일 아침이었다. 남자는 이불을 둘둘 만 몸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어리둥절해서 깨어났다. 그리고 여자의 초대장을 집어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중간에 ‘욕망’이라는 낱말이 목구멍에 걸려 잘 내려가지 않았다. 몇 번 마른기침을 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불편했다. 어젯밤 혼자 마신 술이 과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다. 스승이었던 정 교수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다. 아니다. 바로 이 초대장 때문이었다. 남자가 신경 써서 깔끔하게 관리하는 침대 옆 사이드테이블에 초대장을 놓아 둔 것이 잘못이었다. 어쨌거나 남자는 찐득하고 잘 떨어지지 않는 액체를 뒤집어 쓴 것처럼 자유롭지 못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남자는 선뜻 자리를 털고 일어나질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남자는 초대장을 보낸 여자로부터 편지를 받고 있었다. 서너 달은 족히 넘었다. 남자가 답장을 보낸 적은 없었다. 보낼 수도 없었다. 여자는 발신인 주소를 생략한 봉투에 편지를 담아 보냈다. 사실 주소를 알았다 해도 남자는 답장을 쓰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자는 근래 이런저런 사람들과 엮이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었다. 여자의 편지는 일주일에 한두 통 오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최근에는 하루에 대여섯 통씩 남자의 우체통에 꽂혀 있었다. 무어하게 우표 값을 들여가며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는 여자만이 사용하는 어떤 규칙이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사전예고도 없이 여자의 연락처를 앎과 동시에 여자의 집으로 당장 초대를 받은 것이다. 누군가를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초대한다는 것은 속된말로 까놓고 보자는 의미였다. 남자는 불쑥 튀어 오른 여자의 낯선, 그러나 낯익은 문 앞에서 멈칫했다. 문을 열 것인가? 몇 번 노크를 하면서 좀 더 탐색을 할 것인가? 아니면 안면 몰수하고 뒷길로 대피할 것인가? 남자는 뜬금없이 세워지거나 가로막는 높고 단단한 벽들이 무서웠다. 그런 벽 앞에 설 때마다 속수무책이었다. 남자는 매번 굴욕의 쓰디쓴 입맛을 다시며 이불 속으로 숨어들곤 하였다. 남자는 여자의 초대가 낯설었다. 초대에 응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쉬운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남자는 이불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정신부터 차려야 했다.
여자가 읽은 책은 『이불 속에서 보내는 편지』라는 일종의 서간형식을 띤 처세서였다. 그 책은 남자가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 구상했던 것으로 언젠가는 태어나게 될 남자의 아이, 혹은 남자와 인연이 될 수도 있을 한 아이를 설정하여 놓고 그 아이에게 보내는 살뜰한 편지글이었다.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대한 단상과 충고 또는 질책을 쓰되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보내었던 편지마다 절절하게 붙어 떼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부정(父情)을 대폭 차용했던 것이 핵심이라면 핵심이었다. 그러나 고만고만한 처세서야 넘치고 넘치는지라 그 책 역시도 출판되자마자 식은 밥 처지였다. 남자는 개의치 않았다. 남자에게 글쓰기란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가진 몇 가지 시간을 잊는 방책 중 하나였다. 출판을 하는 이유는 남자의 이력에 따라붙을 일종의 ‘쇼쇼쇼’정도의 의미였다. 어쨌거나 여자는 남자의 독자이다.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또한 어떤 결정이 되었든 용기와 실행력은 거기 따라붙는 필수항목일 터이다.
남자는 그러나 아직 이불 속이었다. 남자는 보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날, 정 교수는 당신이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후배 경이 부교수직을 맡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남자는 여자의 편지를 상자에 담아 전봇대 앞 쓰레기장 전용 공간 옆 화단으로 가져갔다. 남자는 그것들을 활활 불태워 없애려고 했다. 일종의 화풀이였다. 후배 경은 미모가 출중한 재력가의 손녀딸이었다. 남자가 정 교수 밑에서 오만 더러운 꼴을 참아내면서 정 교수를 보필해온 지 어언 10년이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었다. 그 기막힌 세월동안 후배 경은 룰루랄라, 프랑스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보기만 해도 쓰러질 정도로 휘황찬란한 이력을 잔뜩 붙이고서였다. 인생막장? 한순간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막 상자를 터억, 내려놓고 라이터를 켜려고 주머니를 뒤지는 순간, 굵은 비가 쏟아졌다. 장대비였다. 상자 속의 편지와 남자는 순식간에 쫄딱 젖고 있었다. 어떻게 막을 방법도 없었다. 바람까지 휘몰아쳐 라이터는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남자는 상자를 발로 차다가 결국은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액체를 잔뜩 단 눈꺼풀로 상자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빗물에 쫄딱 조여진 몸으로 빗물에 한결 부풀어진 상자를 저의 무게보다 무겁게 안고서 화기라고는 없는 쓸쓸한 남자의 방으로 돌아왔다. 더 기가 막힌 사건은 그 다음날 일어났다. 남자는 흠뻑 젖었던 편지를 하나씩 꺼내 빨랫줄에 널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작업은 여러 날 계속 되었다. 남자는 차례대로 말려진 편지들을 원래의 봉투에 잘 담아 오천 원을 주고 새로 장만한 뚜껑이 있는 초록색 체크무늬 박스에 차곡하게 담았다. 남자는 장대비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니다. 여자의 편지를 운명으로 수긍했던 것이다. 아니다. 여자에게 의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자의 해괴하고 우스운 감정 상태는 여러 날 지속되었다. 남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남자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여자는 그날 이후로 사실은 강력한 여제사장이 되어 남자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벽 앞에서 무너지고 부서질지라도 남자에게는 여제사장이 있었다. 남자는 강아지들이 뛰어다니는 초록 들판이 그려진 벽지를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남자는 아직 무엇 하나 결정할 수가 없었다. 눈을 깜박깜박 하고 있는 남자의 표정은 처음보다는 정신이 들어보였지만 이불을 박차고 나오기엔 여전히 무리가 있어 보였다.
여자는 직감이 빠른 편이었다. 시계바늘은 8시 정각을 넘어서고 있었다. 여자는 맥이 탁, 풀렸다. 물론 남자가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누군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는 것은 단순한 순발력이나 기지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여자가 생각한 것은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의미로서의 ‘초대’였다. 왜냐하면 그동안은 자신이 생각해보아도 지나치게 남자의 책에 몰입했었다. 여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서서히 그러했던 열의가 빠지기 시작한 지점이었다. 여자는 그것도 알고 있었다. 계기가 필요했다. 넘어서거나 멈추거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혼자 시작했던 일이었지만 멈추는 것만은 혼자 결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편지를 받아준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여자가 처음 생각한 것은 적당한 외부장소에서 만나 가볍게 인사를 하고 마무리를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게 가벼워 보이거나 닳아 보였다. 조미료 냄새와도 같은 니글한 달달함이 느껴졌다. 여자가 두 번째로 생각한 것은 초대였다. 여자는 ‘초대’라는 낱말이 주는 떨림이나 끌림의 느낌이 좋았다. ‘초대’는 매혹이 깃든 낱말이었다. 또한 전혀 모르지만 누구보다 많이 알 것만도 같은 남자에게 합당하게 어울렸다. 그리고 남자가 초대에 응하지 않더라도 상처가 덜하겠다는 방어기제 심리에도 마땅히 부응했다. 여자는 알다시피 실행력이 강한 편이었다. 바로 초대장을 만들었고 평상시처럼 남자에게 보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숙제처럼 당당하게 해냈다.
남자는 오후에 몇 개의 약속이 있었지만 모든 일정을 포기하고 잠을 잤다. 지키지 않아도 무방한 약속들이었다. 정오쯤 일어나 달걀도 안 넣은 라면을 한 개 끓여 먹고는 다시 침대 위로 엎어졌다. 남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척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지만 여자의 ‘초대’는 확실히 남자의 의식을 장악하고 있었다. 남자는 영화 「미저리」에 나왔던 뚱뚱하고 괴기스러웠던 여자를 떠올렸다. 여자는 남자를 초대해 놓고 그 여주인공처럼 남자를 묶어 버릴지 모른다. 남자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머릿속 영상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초대한 여자가 해군모를 삐딱하게 쓰고서 젖가슴을 거의 드러낸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나타나는 것이다. 여자는 침대에 꽁꽁 묶인 남자를 타고 올라와 한 손으로는 가늘고 긴 채찍을 허공에 돌리면서 자신의 엉덩이를 힘껏 돌리는 것이다. 남자는 엎어진 채로 한쪽 손을 팬티 속에 집어넣고 아직 끝나지 않은 영상을 팽팽 돌렸다. 이윽고 남자는 팬티에 넣었던 손을 빼고 나른하게 일어났다. 그러더니 무슨 생각인지 여자의 편지가 모아진 상자를 들어 침대 위에 좌르르 쏟아냈다. 남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침대 위에 수북하게 쌓인 편지를 손에 잡히는 대로 몇 장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여자의 문장은 여자가 「미저리」에서의 기괴한 여주인공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또한 오버랩 되었던 젖가슴이 엉덩이만 한 비키니 해군모는 더더욱 아니라고 조곤조곤 확인시켜주었다. 남자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기다란 한숨은 여자의 편지를 한번 더 꼼꼼하게 읽어보고 좀 더 ‘심사숙고’하여 진중한 최종결정에 도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몇 개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책에 관한 이야기랍니다. 저는 사실 오래전부터 책을 모으고 있어요. 손에 잡히는 아무 책, 또는 값싼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들은 말고요, 그냥 언제 어디서나 곁에 두고 여러 번 읽고 또 읽고 싶은 책들 말입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만약 제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다면 그 아이에게도 전해줄 수 있는 좋은 책을 말입니다. 물론 선생님의 책도 그 중에 있지요. 사실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랍니다. 이런 저런 책을 많이 보는 편이고 그것이 또한 제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축복이기도 하지만 보고 또 보고 그래서 더 보고 싶은 책을 찾기란 생각만큼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서점에는 날마다 새로운 책들이 전시되고 있지만 인연이 되는 책은 그 중에서 또 한정이 되고요. 또 어떻게 인연이 닿았더라도 작가의 진정이 독자의 마음에 닿아 짜릿한 영적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많은 책들 중에서 선생님의 책은 저와 인연이 닿았을 뿐만 아니라 저의 마음에 닿아 울림으로 교감하였으니 지금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선생님을 잘 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니 그리하여 저는 선생님과 요즘말로 ‘통’한 것이 아니겠는지요? …….”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서 지극히 아끼는 마음으로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서, 잠을 자는 것에 대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해서, 숨을 쉬는 것에 대해서, 신발에 대해서, 옷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해서, 책을 읽는 것에 대해서, 웃거나 우는 것에 대해서, 기호식품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 손을 보호하는 것에 대해서, 목욕이나 마사지를 이용해서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서, 일기를 쓰는 것에 대해서, 기타 여러 가지의 말씀들이 저를 울립니다. 그렇게 꼼꼼하게 지적해 주시거나 알려주시려는 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따뜻하고 자애로운 빛과도 같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선생님의 말씀을 새기며 출근을 하고 잠을 자고 있습니다. 저는 이토록 지극한 정성이 배어 있고 진정한 체험이 녹아 있는 자상한 말씀을 그 누구에게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모르시겠지만 저는 아침에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선생님의 손, 저녁에는 지친 어깨를 토닥여 주시는 선생님의 손을 느낍니다.”
“전생이란 것이 있다면 선생님과 저는 어떤 사이였을까요? 스승과 제자였을까요? 부모와 자식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때도 지금처럼 저자와 독자였을까요?”
“선생님, 선생님께서 간혹 들으시며 명상을 하신다는 인도 만뜨라 음악을 다운받았습니다. 조금 낯설기는 하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좌선을 하고 가만 따라서 읊조리니 마음이 많이 맑아지고 편안해졌습니다. 저는 선생님 말씀대로 종교에 대한 편견을 부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종교를 믿지 못해서 종교가 없었던 저는 지금은 모든 종교를 하나처럼 믿게 되었습니다. 제가 열린 걸까요? 고맙습니다.”
“저는 이 나이가 되어서야 일상을 다시 배우는 기분입니다. 일상이야말로 마음을 울리는 한 편의 서사시이며 타인의 영혼을 울릴 수 있는 최고의 음악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파랑새는 먼 데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 있는데 말입니다. 삶 자체가 기적이었는데 어느 먼 은하에서 기적을 구걸하고 있었던 저의 어리석은 영혼을 반성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코웃음을 쳤던 저의 가난한 시간을 돌이켜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지금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있습니다. 옆얼굴이라서 조금 아쉽습니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든든합니다.”
“선생님, 저는 오늘 아무 때나 언성을 높이고 시뻘겋게 화를 내는 게 예사인 상사를 무조건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녀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그녀는 일에 지쳐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돌볼 시간이 부족했던 겁니다. 그녀의 내면은 그래서 화가 난 것이지요. 바로 그 화가 아무에게나 투정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하직원인 저에 대한 화가 아니었어요. 선생님의 말씀대로 저는 그녀와 같은 부류를 관찰하고 메모를 하고 연구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자주 은총이 되는군요. 선생님께서는 삶 자체의 폭력적 관성에 휩쓸려 함께 망가지기보다는 다양한 삶의 모양새를 견본의 도구로 삼아 이해하고 분류해 본다면 미움을 이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고 하셨지요.…… 저는 선생님의 책을 통해서 다른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선각자이십니다. 내가 꿈꾸는 세계는 내가 만드는 것이 맞습니다. 저는 지금 깃발을 들고 싶어집니다.”
남자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휴대폰을 열어 시각을 확인했다. 눈을 오른쪽으로 치뜨는 것이 마침내 무엇인가를 결정한 것도 같았다. 입술을 일자로 만든 남자는 웃옷을 훌훌 벗고 화장실로 뛰듯이 들어갔다. 곧 칫솔을 입에 물고 나온 남자는 여자의 편지를 꼼꼼하게 정리해 처음대로 박스에 담았다. 남자가 하얀 거품을 문 부푼 볼을 하고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고 곧 물소리가 들렸다. 팔분음표처럼 발랄한 소리였다. 잘 정리된 각진 남자의 방은 모처럼 활기차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씻는다는 행위와 연결된 물소리의 덕목일 것이다.
남자는 택시를 타고 정 교수에게로 갔다. 정 교수는 강의실에 들어갔다고 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조교 노릇을 하고 있는 후배 녀석이 반갑네, 커피를 타네, 하는 것을 마다하고 정 교수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남자는 곧장 정 교수의 방에 걸린 액자 하나를 꺼냈다. 남자는 그것을 힘껏 바닥으로 던졌다. 액자는 깨졌다. 남자는 액자 위로 올라가서 잘근잘근 씹듯이 그것을 밟았다. 절정에 이른 남자는 그 자리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며 구둣발로 쿵쿵, 그것을 부쉈다. 후배 녀석이 자판기에서 뺀 커피를 양손에 들고 선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삼 년 전에 모 대학 강사자리를 추천 해준 정 교수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식이었다. 남자는 그 당시 한국에서뿐 아니라 엘에이나 도쿄에서도 서예 퍼포먼스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던 서예가를 대신해 몇 개의 논문과 잡문을 써준 적이 있었다. 그것은 그것의 대가로 받은 작품을 표구한 것이었다. 서예가는 휘호를 끝낸 후에 가격을 따질 수 없는 가보가 될 거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서예가가 장담했던 말까지 얹어서 남자는 후에 가격을 따질 수 없는 가보가 될 지도 모르는 서예가의 작품을 정 교수에게 선물했다. 서예가의 지나친 자부심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남자로서는 깨끗하게 표구한 자신을 정 교수에게 바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후배의 얼굴에 비딱한 웃음을 발라놓고 거리로 나온 남자는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라도 된 것 같았다. 남자는 버스정류장에 멈춘 아무 버스에나 올라탔다. 한방 멋지게 먹였다는 생각이 들자 천하가 발아래 놓인 기분이었다.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자 심하게 구겨진 초대장이 손에 물린 채 따라 나왔다. 택시를 타고 정 교수에게 가면서 내내 주머니 속에 있던 손이 움켜쥐었던 것이 여자의 초대장이었던 모양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초대에 응하리라 마음먹었다. 마음먹으니 별 것도 아니었다. 택시를 잡아타기에는 시간이 애매했다. 남자는 버스에서 내려 여자의 집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서인지 남자가 앉을 좌석은 없었다. 남자는 오른손으로 버스 손잡이를 쥐고 버스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기었다. 남자에게 새로이 생긴 용기는 새로 탄 버스에서 다른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다. 좀처럼 꺼내지 않고 눌러 두었던 무력하고 무정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발동시킨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와는 달리 지금도 매우 정정한 편에 속하고 목소리 또한 여전히 또랑또랑한 남자의 어머니는 남자를 낳은 친모가 매춘부라고 했다. 중학교 입학식 하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어깨를 수그렸다. 특히 어머니에게는 말소리조차도 크게 못 내고 살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자주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란다.” 라는 표정이었다. 남자는 가슴을 펴고 살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무더운 여름방학 내내 방에서 꼼짝도 안 하고 책만 보던 남자에게 사내자식이 계집아이처럼 집구석에 틀어박혀 있다고 답답해하다가 “우리 모두는 네가 태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것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어머니는 핏덩이였던 나를 맡기고 떠난, 사랑을 믿었던 미련한 나의 친모가 이 섬 저 섬을 떠돌며 매춘을 하다가 끝내 자살을 했다는 사실을 자상하게 알려 주었다. 남자가 믿지 못하자 어머니는 남자의 손을 잡아끌고 친모의 유품 몇 개를 보관하고 있는 납골당에 가서 확인까지 시켜 주었다. 남자의 어머니는 예의 그 또랑또랑한 목소리만큼이나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그날은 수학여행 전날이었다. 남자는 수학여행을 갈 수가 없었다. 두고두고 서글픈 일이었다. 그 누구도 어머니의 또랑또랑한 기를 이기고 남자가 두 발 굳건하게 설 수 있는 바닥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남자의 친모가 매춘을 하다가 자살을 했다는 사실과 모두가 원하지 않았던 자식이라는 사실만을 기억했다. 그들은 일 년에 열두 번이 넘는 조상기일이나 차례를 모시러 올 때마다 수상한 눈빛으로 남자를 훑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남자의 아버지는 종갓집 종손이었고 남자의 어머니는 선천적 골반 기형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 대를 이을 자식으로서 남자는 어쨌거나 적합하고 타당한 존재였다. 남자는 그 사실을 서른 살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그처럼 가슴 한번 펴지 못하고 살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소년은 가버렸고 수학여행도 끝나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남자의 업장이라면 업장이었다.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또랑또랑한 어머니의 말이란 그런 것이었고 기운이란 그런 것이었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것만이 남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그러나 지금 남자는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치기였었는지를 깨닫고 있었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오늘 처음으로 남자는 ‘용기’라는, 남자에게 정말로 부족했던 덕목을 실천해 보았다는 사실이었다. 남자는 진작부터 아버지의 집에서 뛰쳐나와야 했었다. 돌이켜보니 한없이 비겁했다. 남자가 복수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럴 듯하게 자신을 속인 초라한 변명이었다. 남자는 두려웠던 거다. 그 억세고 또랑또랑한 세상과 맨 몸으로 한판 붙어 볼 용기가 없었던 거다. 그래서 속였다. ‘복수’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삶을 저당 잡히고 바보처럼 숨죽이고 고개 숙이고 두 손 싹싹 빌면서 이따위로 살아왔던 것이다. 남자는 어시장에서 생선박스를 나르면서 자신에게 떳떳하고 그래서 싱싱하게 팔딱대는 구릿빛 살빛으로 살 수도 있었다. 참혹한 그리움이 몰려와 남자는 독해진 침을 삼켰다. 남자는 여자에게 가서 어서 이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다. 독자에게 진실을 알려줄 책임을 완수하려는 사람처럼 남자는 버스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남자는 자신이 책에 쓴 소리는 다 개소리라고 알려주고 저자는 비겁하고 비굴하고 비루하게 살았던, 그야말로 재수도 지지리 없는 인간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말을 하는 자신의 당당한 입술을 생각하자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남자는 좀 아까부터 남자의 옆에 나란히 선 사내가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번 터진 눈물은 남자의 실룩이는 볼을 타고 흔들리는 버스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옆에 선 사내가 혹시라도 걱정할까보아 남자는 별거 아니라고 웃어 주려다가 말았다. 남자는 호기심에 차서 남자를 힐끗거리며 훔쳐보면서도 섣불리 말 한마디 못 붙이는 사내에게 문득 연민의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내의 모습은 어쩌면 남자의 모습일 것이다. 사내가 ‘진짜 사내’다운 사람이었다면 “형씨,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소? 사실 뭐, 산다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소? 뭐, 이렇게 옆자리에 나란히 서게 된 것도 인연인데 어디 내려 소주나 한 잔 나누고 갑시다!” 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 배짱이 없다면 조용히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어 툭툭 두들겨 주었을 것이다. 뭐 이것저것 다 여의치 않으면 남자를 부여잡고 “나도 울고 싶었는데 마침 참 잘 되었소. 같이 좀 울어 봅시다!”라고 했을 것이다. 혹여 우는 게 딱 질색인 것 같으면 “에잇, 뭐 달린 게 아깝다. 그렇게 사내 망신시킬 바엔 얼른 떼서 개나 주시오!” 하면서 욕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있는 그 자리에서 여전히 남자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남자는 이제 자신의 모습이 투사된 사내에게 연민을 넘어선 경멸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주위를 곁눈질해가며 알아서 기었던 기억들이 수백수천의 겹으로 오버랩 되면서 남자의 의식을 훑고 지나갔다. 남자는 지금은 아니라고 믿고 싶은, 그러니까 남자의 어제를 보는 것만 같은 사내를 모욕하고 싶어졌다. 아니, 꼭 그렇게 해야지만 직성이 풀릴 것도 같았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사내를 쳐다보았다. 입술에 힘을 주고 눈을 부릅뜨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사내는 남자를 계속 힐끗거리다가 정면으로 맞은 남자의 시선에 놀란 눈치였다. 사내는 미간을 세우고 눈을 부릅뜨더니 다시는 남자를 힐끗거리지 않고 버스 차창만을 뚫을 듯이 쳐다보았다. ‘우리 사이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 않소?’, 시위라도 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사내의 희끗한 새치머리털과 귓밥이 가득 들어 있어 보이는 귓구멍과 그 아래 불룩거리며 뛰고 있는 목울대를 보았다. 남자는 사내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그러나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남자와의 거리에 팽팽하게 걸린 긴장을 간신히 버티다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남자의 몸과 닿지 않게 매우 조심하는 동작이었다. 마지막까지도 무력하고 비겁한 사내의 모습을 보자 남자는 사내를 쫓아내려 발로 콱, 밟아 주고 싶었다. 사내를 내려준 버스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남자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저 사내가 바로 나다. 뭣도 아닌 지식으로 무장하고 아닌 척 고상을 떨면서 때로는 글줄이나 쓸 줄 안다고 거들먹거렸지만 막상 삶의 높은 벽 앞에서는 아, 소리 한번 크게 못 내었던, 그저 조용히 엎디어 어디 개구멍이라도 없을까, 힐끔거렸던 남자 자신 말이다. 남자는 사내가 내린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폭발할 것 같은데도 목적지까지만 참고 가자는 마음 자체가 싫었다. 남자는 여자가 초대한 시각보다 조금 앞서 도착해 있다가 정시에 여자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도 한심하고 우스워보였다. 남자는 배를 내밀고 천천히 걸었다. 매연이 휘날리는 도로변에서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앞서 뛰어 나가려는 자신의 발을 다스렸다.
시계바늘은 8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10분은 긴 시간이었다. 여자는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은 바보짓일 뿐이라고 이해하는 중이었다. 완전하게 이해하고 수긍하고 나면 여자는 준비했던 것들을 하나씩 치울 것이다. 그리고 남자의 저서에서 느꼈던 절절한 ‘부정’에의 열망도 잊을 것이다. 여자에게 그런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습관처럼 잘 축척된 삶의 기술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여자는 천천히 일어나서 베란다로 나갔다. 무언가를 잊었다는 듯이 다시 거실로 들어와 아로마 촛대에서 따뜻한 빛을 뿜어 올리고 있던 불을 후, 불어 껐다. 그리고 표정도 없이 베란다 창가에 섰다. 여자는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아파트 입구로 진입해 오는 자동차 불빛 몇 개를 지켜보았다. 그것은 초대에 응하지 않은 남자에 대한 마지막 예의의 표현이거나 겸허하게 자신의 상황을 정리하고자 하는 의식의 일종일 것이다.
여자는 베란다에서 아이를 들쳐 업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새댁이 주차장 길목을 서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전형적인 기다림의 양식이다. 아이의 고개가 새댁의 옆구리 근처까지 처져 있는 걸로 보아서 아이는 새댁의 등에서 잠이 들었나 보았다. 새댁은 비스듬히 틀어 올린 머리처럼 아기와 함께 기우뚱 기울어져서 걸었다. 기울어진 새댁은 주차장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걸었다. 그리고 다시 저쪽 끝에서 이쪽 끝으로 걸었다. 아이를 업은 기우뚱한 시댁은 그 길목에서 영원히 왔다 갔다 할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여자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여자의 아버지는 항상 늦었다.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회사일이 바쁘다는 것이 이유였고 그것은 거짓말도 아니었다. 여자는 주말오후에 소파에 길게 드러누워 있던 아버지의 감은 눈을 보곤 했다. 여자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많이 따랐다. 그것은 동물적인 감각이었다. 누구는 주는 것 없이 밉다든가 또 누구는 주는 것 없이 예쁘다든가 하는 종류의 말과도 같은 본능적인 느낌들 말이다. 여자는 어디서 주워온 아이도 아니었고 아버지가 밖에서 사고를 쳐서 데리고 온 아이도 아니었다. 여자는 온전한 가정의 온전한 아이였다. 게다가 외딸이었다. 여자는 이유도 없이 좋은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갈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자가 잠이 들고 나서야 집에 돌아오거나 아예 야근하고 다음날 저녁에야 초췌한 모습으로 현관을 들어서던 아버지에게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자는 타고난 천성이 똑 부러지고 강단이 있는 성격이었다. 특히나 생각한 것은 바로 실행했다. 그래서 공부뿐 아니라 예능까지도 노력한 시간에 비해 빨리 익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여자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여자를 주인공으로 세운 발표회나 공연을 보러 오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는 무엇보다도 일이 중요했다. 정말 필요한 순간에도 아버지는 부재였다. 여자는 섭섭했던 거였다. 꾹꾹 눌러 놓았던 섭섭함이 헛헛한 공기를 흡수한 것처럼 자꾸만 부풀어 올랐다. 기우뚱한 새댁은 아직도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신물이 넘어왔다.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무대 위에 선 기우뚱한 새댁을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여러 번 비추었다. 여자는 베란다 문을 닫았다.
닫힌 문에 다 커버린 여자의 모습이 있었다. 아버지에게 더 이상 징징거릴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이유도 없이 좋았던 아버지에게 한없이 유치하고 싶었던 여자의 눈빛이 아직 거기 있었다. “밥 먹었니?” “잘했네!” “용돈 남았니?” 정도가 아버지가 여자에게 한 이야기의 전부였다. 여자가 『이불 속에서 보내는 편지』에 빠진 것은 당연했다. 여자는 책을 읽는 내내 자신의 단단한 껍질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만 같은 후끈거리는 부정(父情)을 느꼈던 것이다. 어디선가 풀벌레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보다 아버지 같았던 책의 저자는 오지 않을 것이다. 책은 그냥 책이었을 뿐이었다. 여자는 베란다 문을 다시 반쯤 열었다. 기우뚱한 새댁이 건너편 아파트 화단 사이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가 베란다 문을 완전히 닫아걸고 거실로 들어온 시각은 8시 24분이었다. 여자는 자신이 정갈하게 차렸던 초대상차림과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방석을 내려다보았다. 새 방석은 팽팽했다. 하얗게 질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여자는 그 중 하나에 앉아 보았다. 남자는 여자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일이 바쁘거나 정서적으로 상당히 예민한 편일 것이다. 어쩌면 여자의 아버지만큼이나 일이 많고 그래서 일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여자는 아버지에게서 느꼈던 ‘섭섭함’을 남자에게도 느꼈다는 것이 부끄러워 목덜미가 빨개졌다. 가상세계나 다름없는 책 속의 ‘부정(父情)’이 실재한다고 생각했던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다. 아니다. 초대를 거절한 남자에게 화가 난 것이다. 아니, 아니다. 유치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화가 난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그들 모두가 처연하여 어디에다 화를 내야할지 망설여졌다. 여자는 스물스물 일어서는 화를 얼른 집어삼켰다.
남자가 여자의 집 앞에 막 도착한 시각은 정확히 8시 38분이었다. 남자는 초대시각을 맞추지 못했다. 버스를 갈아타고 지나치게 천천히 걸어온 탓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집을 찾느라 잠시 미뤄두었던 생각을 마저 했다. 남자는 여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또한 남자는 여자에 대해서 매우 잘 안다.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남자는 마침내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초인종 앞에 자신의 검지를 가로로 꼿꼿하게 세웠다. 누르면 된다. 1초, 2초, 3초…… 남자는 석회라도 바른 듯 그대로 한참을 서 있었다. 아직도? 남자는 또다시 튀어나온 자신과 마지막 경기를 치루고 있었다. 처절했다. 하필이면 지금 그랬다. 남자는 생각을 이기지 못했다. 찰나에 남자가 오면서 생각했던 모든 결심들이 뒤집혀 지고 있었다. 그 고지에서 마침내 남자가 뽑아 든 깃발에는 “여자는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 이면에는 당연히 남자의 ‘자기기만’이 깔려 있을 터였다. 남자는 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여자는 남자를 보는 순간부터 실망할 지도 모른다고. 그것은 독자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고 정당화하기까지 했다. 가로로 꼿꼿하게 세웠던 손가락은 점점 구부러지고 작아져 축 쳐져서 제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문 앞에서 다만 멀겋게 떠있었다. 생각을 한다고 하고 있었지만 생각은 거기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아니, 더 이상은 생각할 것도 없었다. 깊은 수중이었다. 압이 차오르고 남자는 숨이 막혀왔다. 초라하게 조여드는 남자의 몸은 난쟁이처럼 작아보였다. 여자의 문은 남자가 경험했던 다른 어떤 벽만큼이나 두껍고 높았다. 남자는 아버지에게 아니, 정 교수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아이처럼 울먹이면서 잘못했다고 빌고 싶었다. 여자의 문 앞에서 남자가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여자는 더 이상 기다리지도 그렇다고 준비했던 것들을 치우지도 않았다. 여자는 유령처럼 일어나서 다시 한번 시계를 보았다. 8시 38분이었다. 어떠한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부재감으로 여자는 현관 앞에 섰다. 손바닥만 한 청록색 타일이 박혀진 바닥에는 신으면 꽤나 폭신할 것 같은 여자의 하늘색 슬리퍼 한 쌍이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하얀 발을 슬리퍼 속으로 밀어 넣고 신발장 옆에 장착된 거울을 보았다. 여자의 표정은 적막했다. 여자는 거울 속이라 그런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적막한 공기를 휘저을 바람이 필요했다. 여자는 현관 손잡이를 잡았다. 찰라, 기우뚱한 새댁이 떠올랐다. 그 새댁처럼 주차장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기우뚱하게 걷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멈칫했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남자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이 여자의 몸속으로 후욱, 들어올 것만 같았다. 여자는 기우뚱한 새댁처럼 남자를 기다리는 욕망에게 빈 가슴 전부를 내주게 될지도 모른다. 잡았던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압력이 강한 어떤 홀에 빠진 느낌이었다. 멍하면서 찌릿했다. 여자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팽팽하게 조여 오는 공기를 밀어 내려고 노력했다. 온몸의 세포가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가위눌림 경험과 흡사했다. 다른 것이라면 아직 잠이 들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다.
여자가 마침내 허물어지듯 쓰러져 잠이 든 시각은 밤 9시였다. 여자는 현관 앞에서 꽤나 피로했던 모양이었다. 깊은 잠이었다. 그 시각 기우뚱한 새댁이 기우뚱하게 왔다 갔다 하던 주차장 길목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여자의 베란다를 보고 있는 것도 같았다. 지금은 잠이 든 여자가 좀 아까까지 서 있던 아파트 베란다에서도 남자는 선명하게 보였다. 여자가 남자를 초대한 시각은 밤 8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밤 9시다. 밤 9시란 말이다. 기우뚱한 새댁은 등에서 잠이 들었던 아가를 내려놓고 그 옆에 앉아 식은 된장찌개를 뜨면서 끔벅끔벅 눈꺼풀만 여닫고 있을 밤 9시인 것이고 남자의 후배였던 조교는 어느 칙칙한 호프집에 둘러앉은 동기들에게 남자의 이야기를 우주인 이야기하듯이 떠벌이면서 쓱쓱싹싹 버무리고 있을 밤 9시인 것이고 프랑스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경은 조만간 난을 얹은 사연 깊은 책상을 받겠다는 확답을 무럭무럭 부풀리고 있을 밤 9시인 것이다. 초대는 사라졌다.
여자는 새벽녘에 깨어서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결이 고운 희미한 어둠이었다. 여자는 현관문 바깥쪽에서 들려왔던 남자의 숨소리를 떠올렸다. 그러나 곧 형광등을 켜고 어둠을 밀어냈다. 그리고 하나둘 초대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동이 터올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신들린 듯이 자판을 두들겼다. 아버지였다. 아니, 정 교수였다. 아니다. 바로 남자였다. 그들은 남자의 자판 위에서 지치지도 않고 밤새 팔딱팔딱 뛰어 다녔다. 동이 터올 무렵, 남자는 침대에 엎어졌다. 남자의 몸에 침대가 철커덕 붙은 것도 같았다. 이불 속에서 베갯머리에 얼굴을 파묻은 남자는 현관문 안쪽에서 들려왔던 여자의 숨소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마법처럼 남자는 잠이 들었다.
남자는 지금 이불 속이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배낭을 싸든 남자가 서둘러 택시를 잡아탈 것이다. 초대를 까맣게 잊어버린 여자에게 가기 위하여 운명처럼 힘들고 외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꼭 그랬으면 좋겠다. 어느 누구라도 진정 바라는 일이므로.
ㅡ『시에티카』 2011년 상반기 제4호
이연수
경기도 여주 출생. 2010년 『시에』로 등단.
|
첫댓글 무소식 희소식, 오는 26일 신춘 모임 때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맞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