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맡기다 외 4편
김선옥
웃음도 통증도 내 것이 아니다
살아서 저승을 갔다
부모님을 만나 더 늙은 인사를 드린다
자식들이 울다가 다녀갔는지
메스로 뱃속을 가르고 내장을 꺼냈다 넣었는지
알 수 없다
눈 뜨세요
몸 맡겼다 정신을 돌려받는지
가물가물
죽음이 살아나는 중이다
실직
김선옥
냉장고 티브이 세탁기가 수거차에 오른다
한때는 거실에서 주방에서 몸값을 톡톡히 하던 저들
흔전만전 내부를 파먹다가
붉은 살 군데군데 붙어있는 수박껍질처럼
내다 버린다
신제품이 출시 되면서
십 년 수명도 못 채우고 고물이 된
고장 한번 없이 아직은 쓸 만한데
차에 실려 중고센터로 가는 몸
정년이 멀었는데 누가 버렸나
끊긴 출근길에서
갈고 닦고 조여보지만
어디에서도 중고품이 된 남자
신상품에
앉았던 자리를 내어주고
어금니 거뭇거뭇 녹슬어 가는 몸
비 내린 뒤
김선옥
새소리도
바람 소리도
계곡물 소리도
말매미 소리도
숲속엔 온통 푸른 것들 뿐이다
내 몸에 흐르는 피도 푸르러진다
저 푸름 속에도
빛깔 고운 단풍잎 하나 갖고 싶을 게다
드라이플라워
김선옥
삼성의료원 암 병동 705호실
꽃이 피고 있다
난, 부지런한 그녀를 어릴 적부터
수레바퀴를 닮은 수레국화라 불렀다
반년 동안 쉼 없이 물을 주면
눈동자를 굴려 두 눈만 슬며시 피워 내는
그녀는 잠 속에서 죽음을 연습한다
살아서 수의를 입었다
네 귀퉁이가 뭉툭한 관 속에서
또 한 생 펼쳐지는 눈동자 속의 삶
그녀의 목 아래 조용한 내장을 뼛속을
더는 다칠 것 없는 마음을
나는 가늠 할 수가 없다
병실의 전등이 잠시 깜빡
가쁜 숨소리로 죽음의 곁 바퀴를 굴리던 그녀
몸을 지탱하는 충혈 된 두 눈
되돌릴 수 없는 수레바퀴는 녹슬지 않아도 튿어진다
피기 위해 피었던
지기 위해 지는 꽃
향기를 숨긴 꽉 다문 입술이 말랐다
내게 무언가 말하려는 듯 혀를 움직이는 그녀
아직 뿌리가 심장에 박혀있는
마른 꽃이 피고 있다
허수아비
김선옥
눈도 코도 앞산 쪽으로 말뚝을 박고
밤과 낮이 번갈아 온몸을 훑고 가도
불평 없는 그를 언제든 만날 수 있다
사방을 넓히는 어둠이 찾아와
보이지 않는 눈빛이 겹치면
개구리울음과 풀벌레 소리가
척추뼈 휘도록 매달린다
날마다 두 팔에 내걸던 그의 눈길
묵묵히 서서 들판을 지키고 키우는 일이 그의 몫인,
내 엄마가 그랬듯이 나도 그랬다
그와 나의 거리는 보이지 않아도 가깝고
눈앞에 서 있는 관계는 멀다
그나 나나 나이가 들면 표정에도 굳은살이 생기나 보다
어느 날, 미간에서 뻑뻑한 헛기침이 새어 나온다
발자국도 없는 그 자리가 온통
꽉 다문 입으로 살아온 날들이다
김선옥 약력: 경북 문경출생. 2019년 『애지』로 등단. 시집 『바람 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