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제네바!
망명객 이승만이 뒤늦게 운명의 반려 프란체스카를 만난 곳이 제네바다.
그 운명적 만남은 1933년 2월 21일, 그러니까 지금 정치회의가 열리기 꼭 21 년 전 일이다.
겨울은 겨울대로 더 아름다운 알프스 레만호수 호반의 호텔들은 그때도 붐비고 있었다.
당시 국제연합(유엔)이 아닌 국제연맹 회의가 열리던 기간, 일본의 만행과 만주 침략을 세계에
고발하려고 미국서 날아온 이승만은 저녁식사를 하려고 뤼시 호텔(Hotel de Russie)에
들어섰다. 식당은 초만원이라 자리가 없어 두리번거릴 때 다가선 종업원이 이끌었다.
따라간 식탁엔 백인 여자 두 명.
"합석해도 될까요?"
친절한 종업원 덕분에 이승만은 빈 의자에 앉았다. 여인들은 모녀 사이, 예쁘장한 백인 처녀가
바로 프란체스카였다.
이승만 58세, 프란체스카 33세 25년차 나이를 넘어, 국경을 넘어, 인종을 넘어 맺어진 국제적
로맨스. 무국적 이승만이 연인을 미국으로 초청도 못 하자 프란체스카가 이민 신청을 하여
태평양을 건녔다. "기품 넘치는 동양 신사를 보자 첫눈에 도와주고 싶었다”고 프란체스카는
뒷날 회상한다.
오스트리아 중기업의 셋째 딸은 아버지의 후계자 훈련을 받던 중에 그만 이승만에 빠져 버리고
만다. 현지 신문 한 면을 가득 채운 이승만의 인터뷰 기사를 보자 즉시 스크랩하여 이승만 방에
보내고, 다음날도 관련 기사들을 또 오려 보내고…. '하나님이 시킨 인연'이었다고 일기에 썼다.
독실한 기독교인, 강렬한 자립정신과 애국심, 지독한 청렴결백 절약가, 해박한 동서양의 교양 등,
공통점이 한둘이 아닌 천생배필.
‘속기사 자격증까지 따 놓았던 게 가난한 무명의 독립 운동가를 위해서였던가.’
프란체스카는 평생 이승만을 위해 수많은 영문 편지와 저술에 실력을 발휘하느라 손이
짓물렀다고 한다. 독립, 건국, 전쟁.… 파란만장한 혁명가의 아내는 혁명의 동지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레일리아와 헷갈린 한국인들이 '호주댁’이라 부르면 "나는 오스트리아서
태어난 한국인"이라며 미소 짓던 프란체스카 (1900~1992)의 유언은 “관 속에 태극기를 덮어
달라”였다.
- 인보길 저,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