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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61) 루돌프 슈나켄부르크 (상)
개신교 학자 주류 속에서 빛난 가톨릭 성경학자
- 루돌프 슈나켄부르크.
20세기 성서학은
20세기 성서학자를 이야기하자면 루돌프 슈나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 1914~2002)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시간적으로 20세기 초반에 태어난 인물이기도 하지만, 성경학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에서도 역시 그렇다. 성경을 공부하지 않은 이들에겐 루돌프 슈나켄부르크는 조금 낯선 이름일지도 모른다.
슈나켄부르크를 이야기하자면 당시 분위기를 아는 것이 조금 도움이 될 듯하다. 인문학이 발달하면서 18세기부터 성경 연구에 비평적인 방법론들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역사비평 방법론’이 성경 연구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자리 잡게 된다.
역사비평 방법론은 간단히 말하자면 성경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되었는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연구하는 것을 일컫는다. 물론 지금 모든 이들이 이 방법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적인 성경 연구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 방법론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사실 이러한 방법론을 처음 주창하고 발전시켰던 것은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들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오직 성경을 통해 하느님 계시와 진리에 다가가고자 했던 노력의 결과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개신교 신학자들이 성경 연구를 주도했던 시기에, 사제로서 그리고 성서학자로서 가톨릭 신학을 성경학계에 알리고 그것을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슈나켄부르크다. 그에 대한 관심은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저서인 「나자렛 예수」를 통해 더욱 부각됐다. 교황은 저서에서 슈나켄부르크에 대해 “20세기 후반 독일어권의 성경학계에서 가장 출중한 학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슈나켄부르크 발자취 - 혼란한 시기의 삶
루돌프 슈나켄부르크는 1914년 1월 5일 실레시아 지방 카토비츠에서 태어났다. 실레시아는 지금은 폴란드에 속하지만 당시 이 지역의 일부는 독일 영토였다. 산악 기술자(산에 마을을 건설하거나 필요한 건물 혹은 장치를 설치하는)였던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실레시아의 동쪽 산악 지역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1914년 전쟁에서 사망한다. 이후 어머니와 형과 함께 리그니츠(Liegnitz)라는 도시로 옮겨 살았는데 경제적인 면에서 아주 넉넉한 생활을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슈나켄부르크는 최고 성적으로 고등학교(Gymnasium)에 입학했고 두 반이나 월반해 졸업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학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졸업 이후 슈나켄부르크는 브레슬라우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꽤 많은 학생이 이 대학의 신학과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는데, 당시 이 학교에는 좋은 교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신약을 가르치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마이어(Friedrich Wilhelm Maier, 1883~1957) 교수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는 언어학적 방법론과 역사비평 방법론을 통해 성경을 해석했고 덧붙여 신학적인 정리를 해줬다고 함께 공부했던 이들은 전한다. 슈나켄부르크 역시 마이어 교수에게 논문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1937년 ‘요한복음 안에서의 믿음’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제목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슈나켄부르크는 이미 요한복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논문은 이후 요한복음 주석서를 펴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박사 과정을 마치던 해에 브레슬라우에서 사제로 수품한 슈나켄부르크는 1946년까지 본당 사제로 일했다. 그는 본당에서 일할 때 무엇보다 젊은이들에게 많은 관심과 열정을 가졌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어를 사용하던 브레슬라우대학은 폴란드로 넘어가고 교수들은 독일로 추방되었다. 이때에 슈나켄부르크 역시 독일 뮌헨으로 추방당하고 1947년 마이어 교수에게 교수자격논문(Habilitation)을 마쳤다. 그의 논문 제목은 ‘바오로의 성사적 구원 사건’(Sakramentale Heilsgeschehen bei der Taufe nach dem Apostel Paulus)으로 1950년 「사도 바오로의 세례에서 보이는 구원 사건」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 본격적으로 학자의 길을 시작한 슈나켄부르크는 1952년 딜링엔에 있는 철학-신학대학 부교수로 임명됐고, 3년 뒤인 1955년 밤베르그의 철학-신학대학의 교수로 임명됐다. 밤베르그의 철학-신학대학이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바이에른 주에 새로 생겨나는 대학들의 근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1957년 그는 뷔르츠부르그대학 교수로 임명됐고 1982년 은퇴할 때까지 이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했다. 이곳을 근거지로 그의 동료들과 제자들은 ‘뷔르츠부르그 학파’(Wrzburg-Schule)를 형성했다. 이때가 가톨릭 신학 안에서 성경 해석과 신학이 꽃피던 시기였다. 당시 수많은 학생이 그를 찾아와 강의를 들었고, 많은 이들이 그에게 박사 논문을 썼다는 것에서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신학의 방향과 성경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켰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뷔르츠부르그대학에 많은 애정과 열정을 보였다. 그가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뮌스터와 뮌헨대학에서 제의한 교수직을 두 번이나 거절했다는 일화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은퇴 이후의 삶을 통해서는 학자로서의 애정과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은퇴 이후 슈나켄부르크는 여전히 뷔르츠부르그에 머물면서 연구와 집필 활동을 계속했으며, 2002년 8월 28일 89세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뷔르츠부르그 시내 묘지에 묻혔다.
슈나켄부르크의 활동
슈나켄부르크에 대해 가장 먼저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독일 「공동번역 성경」(Einheitsbersetzung)의 번역 작업이다. 1962년에 시작해 1980년에 완성된 이 성경은 가톨릭 성서학자들과 개신교 학자들의 공동 작업으로 번역된 것으로 지금도 독일어권 가톨릭 전례 안에서 공식적인 성경으로 사용되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말 자체로 이미 성경에 대한 주석과 해석을 통해 번역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신학적인 의미가 가장 잘 담긴 성경의 번역은 모든 성서학자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슈나켄부르크 역시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 참여하고 또 그 열매를 맺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 중요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성경 번역 작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슈나켄부르크의 발자취 중 가장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은 가톨릭와 개신교 사이의 공동 작업이다. 그는 신약성경 연구를 위해 개신교 학자들과 함께 학문적인 바탕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러한 결실로 이뤄진 것이 독일어권에서 출판됐고, 지금까지도 가장 자세하고 풍부한 내용이 담긴 주석서로 인정받는 「가톨릭-개신교 주석서」(EKK: Evangelisch-Katholischer Kommentar)다. 이러한 작업을 가장 먼저 계획한 것은 스위스의 에두아르트 슈바이처(Eduard Schweizer)였다. 그는 슈나켄부르크에게 자신의 계획을 제안했고 두 학자의 주도로 이 주석서 시리즈가 출판되기 시작했다.
슈나켄부르크는 가장 먼저 이 시리즈에 에페소서에 대한 주석서를 썼고, 이 주석서는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서에 대한 주요한 참고 서적으로 꼽힌다. 그리스도교 일치(가톨릭과 개신교)라는 측면에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업적은 ‘신약성경 연구학회’(Studiorum Novi Testamenti Societas) 활동이다. 그는 1966~67년에 가톨릭에서는 두 번째로 이 학회 회장을 맡았으며, 당시 개신교의 학자들이 주를 이루던 상황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성경학계를 소개하고, 업적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62) 루돌프 슈나켄부르크 (중)
‘윤리적 가르침 실천이 신앙 생활의 중심’ 강조
슈나켄부르크의 저서와 논문 그리고 서평들은 상당히 많다. 앞서 언급한 그의 교수자격논문은 1930~40년대에 신비신학(Mysterintheologie)으로 가톨릭 전례에 큰 반향을 가져왔던 오도 카젤(Odo Casel, 1886~1948)의 영향을 받아 단순히 바오로 세례에 관한 성서적 해석만이 아니라 사도들의 세례신학에 관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슈나켄부르크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이미 현재의 믿음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자 종말의 완성을 향한 희망이라고 밝힌다. 그에 따르면 바오로 세례신학의 중심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것이기에 단순히 세례에 대한 사상이 아니라 바오로의 윤리나 신비 그리고 종말론과 함께 종합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렇기에 세례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현실에서 윤리적 가르침을 통해 실천될 때 의미가 있다.
바오로 서간
슈나켄부르크는 바오로 서간에서 구원론적 역사의 관점을 강조하고 이것이 바오로 서간 전체에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슈나켄부르크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들이 직접적으로 바오로에게 속한, 곧 바오로 친서라고 봤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서간들을 차명 서간, 즉 바오로의 이름을 빌려 다른 이들에 의해 쓰인 서간들로 생각한다.
1959년 슈나켄부르크는 「하느님의 다스림과 하느님 나라」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에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한 관점을 유지한다. 슈나켄부르크는 이 책에서 하느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며 하느님 나라가 가지는 종말론적인 긴장관계(이미와 아직 아닌) 안에서 현재적 의미와 종말론적 의미를 구분하고자 한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강조되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지니는 종말론적 특징으로, 이것은 한 마디로 예수의 선포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결국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림’과 관련된 표현으로 이해된다. 당시 많은 해석이 성장을 나타내는 비유(자라는 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세상 안에서 끊임없이 성장해 가는 교회를 나타내는 것으로 봤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슈나켄부르크의 성경 해석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신학자들은 하느님 나라가 하느님의 현존과 다스림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외에도 그는 구원의 완성을 지향하고 윤리적인 가르침을 통해 실천을 요구하는 특징들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하느님 나라의 다양한 측면을 조명했다. 또한 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가 초대 교회 안에서 그토록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답을 찾고자 노력했다. 슈나켄부르크에 의하면 예수의 선포는 예언자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됐고 그렇기에 초대 교회에서는 하느님 나라가 곧 오리라는 종말론적 기대와 희망이 생겨났을 것이라고 이해한다.
요한복음
슈나켄부르크의 가장 큰 관심을 끌었던 것은 요한복음 연구였다. 이미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요한복음을 다루었던 것처럼 슈나켄부르크는 일생 동안 요한의 문헌을 연구했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독일 프라이브루그대 신약 교수였던 알프레드 비켄하우저(Alfred Wikenhauser, 1883~1960)에 의해 시작된 ‘헤르더 신학 주석’ 시리즈의 첫 번째 주석서로 슈나켄부르크의 「요한서간」이 1953년 출간됐다. 지금도 ‘헤르더 신학 주석’은 가톨릭 성서학계에서 펴내는 명망 있는 주석서로 꼽힌다.
이후 슈나켄부르크는 같은 시리즈에 「요한복음」 주석서를 썼다. 이 요한복음 주석서는 총 4권으로 구성돼 있으며 1500쪽이 넘는 분량의 방대한 주석서다. 영미권을 대표하는 가톨릭 성서학자 레이몬드 브라운(Raymond. E. Brown, 1928~1998)이 펴낸 「요한복음」과 함께 여전히 가치 있는, 전통적인 주석서로 평가받고 있다. 처음 세 권은 각각 1965년, 1971년과 1975년에 출판됐고 1984년 부록으로 내용을 보완하는 제4권이 출간됐다. 이 책은 여러 나라말로 번역됐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주석서에서 그는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의 해석에 비판적 시각으로 접근하며 요한복음의 신학적 일관성을 나타내는 이론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1966~67년에 ‘신약성경 연구학회’에서 펴내는 ‘신약성경 연구’(NTS; New Testament Studies)라는 잡지에 실은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글에서 슈나켄부르크는 불트만의 주장이 갖는 취약점을 지적하고 역사비평 방법론에 따른 해석을 통해 요한복음에 대한 해석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뒀다.
그는 주석서를 시작하는 머리말에서 “지난 100년간의 신학적 작업들과 지난 10년간의 학문적인 연구가 없었다면, 이 주석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전제한 뒤, 자신의 주석서는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초기 교회 공동체 신앙고백이 담긴 이 문헌을 해설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워낙 방대한 주석서라 그 내용을 지면에 담는 것은 지루할 뿐더러 불가능해 보이지만, 슈나켄부르크가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주제에 대해서 잠시 살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슈나켄부르크가 자신의 주석서에서 강조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예수께서 사랑한 제자’에 관한 것이다. 제3권의 마지막에 다시 한 번 그 내용을 정리해서 담을 만큼 그에게 이 주제는 요한복음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랑받던 제자에 관한 문제는 요한복음이 어떻게 생겨나고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 손에 지금의 형태로 주어졌는지에 대한 복잡한 논쟁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분위기는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사랑받는 제자가 역사적이지 않은 상징적인 인물이거나 만들어진 인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슈나켄부르크는 이 제자를 역사적인, 즉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주장했고 이러한 의견은 후대에도 받아들여졌다.
슈나켄부르크에 따르면 ‘예수께서 사랑한 제자’는 요한복음 저자로 생각되는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이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사랑받던 제자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다(요한 21,23). 그에게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복음서에 포함돼 있다는 것은 이 인물이 역사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근거가 됐다. 물론 요한복음 마지막 장인 21장은 후대에 보충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신학적으로 동떨어져 있거나 전혀 다른 내용이 아니라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는 슈나켄부르크의 주장은 현대의 학자들 의견과 상당히 가깝다. 이 논쟁은 여전히 학계에서 지속되고 있지만, 슈나켄부르크의 주장은 현대의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외 저술들
슈나켄부르크는 1982년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주석서를 출간했다. 에페소서의 중심 주제는 교회다. 그렇기에 많은 학자들은 에페소서에서 초기 교회의 조직이나 직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주셨습니다”라는 에페소서 4장 11절을 통해 초대 교회의 조직을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슈바이처). 하지만 슈나켄부르크는 이 구절이 교회의 조직화된 직무를 나타내는 것이기보다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교회의 전통적인 권한과 기능을 나타내는 것이라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바오로 서간에서 보이는 특징과도 부합하기에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이 견해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은퇴 후 그가 처음으로 출간한 책은 「산상설교」(1984)다. 그가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신약성경 윤리에 관한 것이었다. 1986년과 88년에 나온 「신약성경의 윤리적 선포」(Die sittliche Botschaft des Neuen Testaments)는 현실의 신앙인들에게 전해주는 신약성경의 윤리적 가르침을 심도 있게 다뤘다.
그는 세례를 통한 신앙생활은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윤리적 덕목을 실천하는 것에 중심이 있다고 밝힌다. 물론 성경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이 요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믿음과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세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63) 루돌프 슈나켄부르크 (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믿음 키우는 데 일조
슈나켄부르크는 은퇴 후 활발한 저술 활동을 이어갔는데 1961년 「신약성경의 교회」란 책을 펴냈으며, 1985년과 1987년에는 사목적 성경 해석에 적합하다고 평가받는 에히터 비벨(Echter Bibel) 주석서 「마태오 복음」을 출간했다. 1990년에는 「예수의 길」(Der Jesusweg)과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파견하시다」(Gott hat seinen Sohn gesandt)를, 1995년에는 「예수와의 친교」(Freundschaft mit Jesus), 1998년에는 「네 복음서를 통해 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Die person Jesu Christi im Spiegel der vier Evangelien)을 출간했다.
전임 교황의 저서 중에서
특히 슈나켄부르크의 마지막 작품은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의 저서 「나자렛 예수」에서 교황이 자신의 생각을 풀어나가는 열쇠와 같은 역할을 한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와 그리스도인 신앙에 대한 갈등이 함께 녹아든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임 교황의 책을 조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슈나켄부르크는 이 책의 의도를 ‘오늘날 학술적인 연구로 불안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구원자와 세상의 구세주로 확고하게 믿을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고 했다(「네 복음서~」, 6쪽). 그리고 이 책의 끝에서 평생의 연구 실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나자렛 예수의 역사적 모습을 학술적인 노력으로, 역사비평적 방법들을 이용하여 신빙성 있게 보여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그 목표에 도달하기에 부족하다’(같은 책, 348쪽). 또한 ‘전승의 여러 층을 가려내고 거기서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을 얻어내기 위한 학술적인 노력은 전승사와 편집사를 둘러싼 문제로 늘 논란을 계속하는 상황으로 끌어들여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같은 책, 349쪽).
그러나 그 역시 예수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 방법론을 따르다 보니 다소 일관성이 없다.
슈나켄부르크는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 예수상은 여러 전승이 단계적으로 겹쳐져 이루어진 것이기에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진정한’ 예수는 그저 멀리서만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복음서는 역사적 기초를 전제하고는 있지만, 믿음의 관점에서 이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그는 술회한다(같은 책, 353쪽).
여기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역사적 기초’라는 것이 도대체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명확하지 않을 뿐이다. 그렇지만 슈나켄부르크는 가장 결정적인 것을 지적하고 이는 역사적으로도 확실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의 하느님과의 관계성과 하느님과의 연대성이다(같은 책 353쪽).
하느님 속에 닻을 내리지 않고서는 예수라는 인물은 그저 희미한 그림자와 같고 비현실적이며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인물로 남아 있을 뿐이다(같은 책, 354쪽).
이것은 또한 이 책을 꾸려나가는 데 구심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예수를 어디까지나 아버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시는 분으로 바라본다. 친교는 그분 인품의 근원적인 핵심이다. 이 친교가 없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고 또 이 친교가 바탕이 되어 그분은 오늘도 우리에게 현존하신다”(「나자렛 예수」 1권, 10~11쪽).
자신의 저서뿐 아니라 슈나켄부르크의 큰 업적 중에 하나는 편집인으로서 활동하면서 남긴 책들이다. 가장 중요한 발자취는 무엇보다 가톨릭-개신교 주석서와 독일에서 출간되는 성경연구 잡지인 「비블리쉐 차이트슈리프트」(Biblische Zeitschrift)의 편집인 활동이다. 또 사회주의 정권의 억압으로 1938년 발행이 중단됐던 이 잡지를 1957년에 부활시키는 주역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삶을 살았던 학자
슈나켄부르크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의 단순한 삶을 이야기한다. 실제로 그는 은퇴 후에도 뷔르츠부르그 시내의 작은 집에서 삼촌과 함께 살았다. 그의 일상은 아침에 일어나 근처 양로원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을 시작으로 밤늦게까지 연구하는 것이 전부였다. 알프스 지역으로 휴가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항상 자신의 집에서 연구하고 집필했다. 유일한 취미가 있었다면 사제였던 형과 만나 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제자들과도 두터운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제자 중에 특별히 어려운 나라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는 은퇴 후에도 그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마치며
슈나켄부르크는 교회가 내적, 외적으로 혼란했던 시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라는 교회 내의 커다란 사건들을 두루 거친 시기에 활동했던 성서학자였다. 하지만 바티칸 공의회는 그에게 썩 좋은 기억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슈나켄부르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릴 때 공의회에 참여하는 독일 신학자들 가운데 성서학자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에 몹시 화를 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가톨릭 성서학계 역시 혼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새롭게 등장한 역사적 연구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 슈나켄부르크는 역사적 연구와 신앙 사이에서 고민하던 신학자였다. 그의 모든 연구가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의 저술들을 통해 드러나는 주장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성경연구는 무엇이 맞고 틀리고를 따지는 분야가 아니다. 연구를 통해 얻어진 다양한 결과들을 통해, 그리고 학자들의 열띤 논쟁과 토론을 통해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고, 그 메시지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슈나켄부르크에게 성경은 학문의 대상이기 전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담고 있는 문헌이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현재에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학자들의 모든 연구와 노고는 시간적으로 제약을 받기에 항상 ‘선행된 연구’이지 ‘마지막 결과’는 아니었다. 그의 글들에선 사제이면서 신학자로서 겪어야 했던 갈등과 함께 과거의 연구 결과들을 통해 새로운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슈나켄부르크의 바람은 자신의 마지막 책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오랜 세월 연구하고 사색하는 가운데 태어난 이 저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근본 문제들을 새롭게 고찰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과학적 탐구와 비판적 토론의 영향으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혼미해져 가고 있다. 그들이 구세주요 세상의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는 데 이 책이 작은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네 복음서~」, 7~8쪽).
어느덧 20년이 훌쩍 넘은 그의 연구들은 ‘전통적 참고서’가 됐을 만큼 그 사이 많은 다양한 새로운 연구들이 진행됐다. 비록 학문적 글들이기에 누구나 쉽게 읽기엔 지루하고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슈나켄부르크의 책들을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되리라 생각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의 책들 중 일부만이 우리말로 번역됐다는 사실이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8) 루이 부이에 (상)
모든 교파의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보편적 영성 일깨워
- 루이 부이에
20세기를 빛낸 또 한 명의 영성신학자를 추천하기란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인물은 영적 묵상집과 에세이가 한국에 많이 소개된 영성작가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과 헨리 나웬(Henri Nouwen, 1932~1996) 혹은 안셀름 그륀(Anselm Grn, 1945~) 등일 것이다. 필자는 영성신학을 본격적으로 접한 지 10여 년밖에 되지 않는 한국 가톨릭교회에 그나마 한 권의 책이라도 번역되어 소개된 몇몇 영성신학자 가운데 한 명인 루이 부이에(Louis Bouyer, 1913~2004)를 소개하고자 한다. 독특한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부이에는 20세기에 유럽권에서뿐만 아니라, 영미권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많은 저서도 남긴 신학자이기에 우리가 살펴볼 충분한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개신교 목회자 꿈꿔
루이 부이에는 1913년 2월 17일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소시민계층에 속했는데, 특히 부모님은 프랑스 루터교 신조에 가까운 프랑스 개혁교회 소속 개신교 신자였다. 부이에는 장래 희망으로 교회 목회자를 꿈꾸면서 프랑스 개혁교회나 감리교회와 접촉하기도 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루터교회와 연결의 끈을 만들었다. 부이에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프랑스 개신교 신앙 안에 다양한 주장들에 대한 일치 운동을 전개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 까닭에 파리에 소재한 개신교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할 무렵에는 파리에 있는 영국 성공회와 정교회와도 접촉하려고 시도하였다.
부이에는 파리에서 시작한 공부를 프랑스 북동부 지역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끝마칠 수 있었다. 그는 루터교 신학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학사학위를 취득했지만, 그의 학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영국 성공회 사제였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1801~1890)이었다. 아마도 이 주제가 훗날 부이에의 장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는 영향 중에 하나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리고 부이에는 1936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루터교 목회자로 안수받았다.
부이에는 계속해서 신학석사 과정을 공부하였고, 아타나시오 성인의 신학을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 훗날 사람들은 부이에가 아타나시오 성인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가톨릭교회 신조를 잘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1938년에 부이에는 자신의 첫 번째 신학 저서인 「네 번째 복음서」(Le quatrime vangile)를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부이에는 요한복음서의 교회론과 성사론에 대한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의 기본적인 사상을 받아들였다. 스트라스부르 출생인 쿨만은 루터교 전통을 따르는 신학자였지만, 교회일치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로서 루터교와 가톨릭교회가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공부를 끝마친 부이에는 파리 소재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하는데, 스트라스부르 시절부터 파리 시절까지 그는 러시아 출신 이민자들을 만나는 기회를 가지면서 정교회에도 개방된 자세를 갖게 되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부이에는 가톨릭교회에 가까이 다가갈 기회도 갖게 되었다.
가톨릭 신앙 받아들여
결국 1939년에 부이에는 자신의 목회 활동에서 떠나기로 하고 거의 일 년 동안 영국의 옥스퍼드에 머물면서 앞으로 할 일을 숙고하고 난 후, 같은 해 12월 말경에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 위치한 생-방드릴(Saint-Wandrille) 베네딕도 수도원 성당에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때마침 부이에는 오라토리오회 총장 신부로부터 파리 근교 센에마른(Seine-et-Marne)에 위치한 쥬이 신학원(Collge de Juilly)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것을 제안받고 2년간 그들을 가르치다가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게 되었다. 그 즉시 부이에는 파리 가톨릭 대학교에서 사제수품 준비를 위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이브 콩가르(Yves Congar, 1904~1995)는 부이에를 눈여겨보고, 1943년에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총서 시리즈에 부이에의 석사학위 논문 「성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강생」(L’Incarnation et l’glise Corps du Christ dans la thologie de saint Athanase)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부이에는 1944년에 드디어 모(Meaux) 교구 주교에게 사제로 서품되었고, 1950년에는 석사학위 논문 주제를 발전시켜 역시 아타나시오 성인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즉시, 부이에는 파리 가톨릭 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되어 그리스도교 영성 역사를 주제로 강의를 시작하면서 1962년까지 같은 대학에서 영성신학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강의하고 저서를 출판하였다.
「영성생활입문」 등 저술
이 시기에 부이에의 대표적 저서로는 1950년에 「수도원 생활의 감각」(Le sens de la vie monastique), 1952년에 「성경과 복음」(La Bible et l’vangile)과 「뉴먼 그의 생애, 그의 영성」(Newman. Sa vie, sa spiritualit), 1955년에 「교회에서 개신교주의에 대하여」(Du protestantisme l’glise), 1957년에 「지혜의 옥좌」(Le Trne de la Sagesse), 1960년에 「영성생활입문」(Introduction la vie spirituelle), 1961년에 「신약성경과 교부들의 영성」(La spiritualit du Nouveau Testament et des Pres) 등이 있다. 이중에 「영성생활입문」은 지금까지 한국에 번역된 부이에의 유일한 책이다. 또한 영성역사를 주제로 한 「신약성경과 교부들의 영성」 이외에도 부이에는 같은 해인 1961년에 공동 작업으로 출판한 「중세 영성」(La spiritualit du Moyen Age)과 1965년에 저술한 「정교회 영성과 개신교와 성공회 영성」(La spiritualit orthodoxe et la spiritualit protestante et anglicane)을 묶어 세 권으로 구성된 그리스도교 영성 역사 시리즈를 편찬하였다.
이렇게 영성신학을 주제로 강의하던 시기에 또 다른 한편으로 부이에는 전례사목센터(Il Centro di Pastorale Liturgica)와 함께 전례에 관한 주제들을 연구하면서 저서들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또한 부이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준비 단계에서부터 고문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고, 공의회가 끝난 이후에도 전례 개혁을 위한 위원회 고문으로 참가하였다. 1969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국제신학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발타사르(H.U. von Balthasar), 라너(K. Rahner), 라칭거(J. Ratzinger)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60년대 이후 그는 미국 인디애나 주에 위치한 노트르담 대학을 비롯해 수도 워싱턴의 가톨릭대학교, 샌프란치스코의 가톨릭대학교 등을 다니며 1990년대까지 강의했다. 하지만 이런 여정이 무리가 되었는지 병을 얻게 되어 부이에는 유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부이에는 자신을 가톨릭 신앙으로 받아준 생-방드릴(Saint-Wandrille) 베네딕도 수도원에 손님으로 머물면서 오랫동안 알츠하이머병에 시달리며 고생하였다. 결국 부이에는 2004년 10월 23일 세상을 떠났고, 수도원 공동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물론 부이에는 영성신학만을 연구하고 가르친 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부이에는 다양한 종교적 체험을 바탕으로 교회일치 차원에서 모든 교파의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보편적 영적 여정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했기에, 오늘날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영성신학자 가운데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59) 루이 부이에 (중)
영성생활, 외적 활동에 더불어 영적 믿음 동반해야
부이에 영성신학의 특징
루이 부이에의 영성신학에는 그만의 독특한 면이 있다.
19~20세기에 출판된 영성신학 개론서들을 살펴보면,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영성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저서 내용을 구성할 때도 각자의 개성과 특성을 담아 다양하게 저술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루이 부이에가 저술한 영성신학 개론서에는 그만이 담아낼 수 있는 또 다른 독특한 측면이 있다. 즉, 같은 내용을 설명하더라도 부이에는 또 다른 관점에서 보다 더 포괄적으로 서술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필자는 부이에의 개성이 더욱 드러나는 몇몇 영성신학 주제를 선정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영성생활의 올바른 이해
다른 영성신학 개론서와 마찬가지로 부이에는 「영성생활입문」(Introduction la vie spirituelle)에서 먼저 가톨릭교회의 영성생활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내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전통에 따른 영성생활을 독자들에게 올바로 이해시키기 위해서 부이에는 다른 여타 종교와 비교하며 영성생활과 유사한 개념에 혼돈을 일으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먼저 부이에는 라틴계의 오래된 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종교에 속한 사람은 “어떤 형식을 정확하게 반복함으로써 예식을 수행하는 일 이외의 것”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키케로가 소개하는 코타와 같은 제사장은 개인적으로 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고 그에게 “오로지 예식을 잘 수행하는 것과 정해진 기도문을 잘 읽어 달라는 것”만 요구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이에에 따르면, 공교롭게도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서도 이와 유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자신의 종교를 오로지 ‘선행’이나 ‘실천’만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행과 사회봉사에 아낌없이 그들 자신을 바치는 자선 행위를 종교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전부로 이해되기도 하고 또는 적어도 그리스도교의 원리가 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을 부이에는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과 현상은 한국교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많은 신자들은 주일 미사뿐 아니라 평일 미사까지도 꼬박꼬박 참석하고, 성당 행사에서 봉사활동을 하거나 신심 단체에서 의무로 주어진 희생을 빠지지 않고 실천했을 때에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면서 영적으로 발전하는 영성생활을 실천하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열거한 예들은 신자들이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실천한 내용이기에 종교생활을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종교생활이 곧 영성생활이라고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 부이에는 바로 이 점을 혼동하지 말라고 언급하였다. 즉, 전례 참석의 의무를 다하고 희생 봉사의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고 하더라도 고대 종교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마음 없이 외적인 형식으로만 실천되었다면 영성생활과 연관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참된 영성생활이 되려면 외적인 형식에 영적 발전을 갈망하는 진솔한 마음도 함께 실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영성생활
다음으로 부이에는 순수하고 원초적인 불교 형태를 살펴보았다. 부이에에 따르면, 이러한 불교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없는 종교’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불교를 모든 다른 종교와는 분리된 영성의 한 형태로 일종의 ‘영성생활’이라고” 해둔다면 “역설적인 ‘영성생활’의 차원을 찾아볼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즉, “부처가 설교하는 ‘영성생활’이란 원래는 우주적이든, 인간적이든, 신적이든 간에 모든 존재에 관한 절대적인 무관심인 이 이탈로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그러한 체험은 단지 심리적인 체험이거나 궁극적으로 허무한 체험이 될 수도 있다고 부이에는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종교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대상으로 하느님과 같은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인은 하느님을 찾기보다는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것을 즐겨 한다. 게다가 외부 세계로부터 어떤 자극이 가해지더라도 그것을 애써 무시하고 심리적인 차원에서 마음으로부터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면 영성생활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다른 종교, 심지어 하느님이 없는 종교가 제시하는 영성생활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떤 삶의 모습이 아무리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교인이 실천해야 하는 영성생활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에 기반을 두지 않고 실천되는 형식에 기반을 둔 영성생활은 그리스도교인의 영성생활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적 생활과 영성생활
마지막으로 부이에는 내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부이에에 따르면, “종교적인 것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성생활’의 의미를 아무리 확대한다 하더라도 ‘영성생활’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도 찾아볼 수 없는 … 완전한 무신론자들이며 자칭 유물론자들이라고 하는 시인들이나 예술가들도 순전히 그들 자신의 풍부한 상상력과 사상 또는 감정을 체험하고 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인들의 “체험들은 흔히 혼동하리만큼 신비적 체험의 형태를 상기시키기도”하기 때문에 “이러한 내적 생활이 나름대로 매우 풍요로운 생활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가 없다”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이에는 시인들이 “깊은 종교적 성찰을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적 체험이 그것을 느끼는 인간 이외의 다른 실재에까지 확대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매우 의심스럽다”고 지적하였다.
결국 부이에는 초자연적 질서에 참여하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 그리스도교 영성생활과 내적 생활을 분명하게 구분했다. 즉, 아무리 자신의 내면을 깊게 성찰하여 감동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거기까지는 내적 생활일 뿐이고, 그 수준을 넘어서서 초자연적 질서에로 나아가는 발전의 여정이 뒤따라야만 영성생활을 실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개신교의 영성생활
부이에는 가톨릭 전통에 따른 영성생활의 특징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개신교 영성생활의 관점과도 비교하였다. 부이에에 따르면, 개신교에서는 영성생활을 내면화시키고, 개인화시키는 데 주안점을 둔다. 왜냐하면 개신교 신자들은 캘빈(Calvin)의 주장에 따라 성령께서 직접 주신다고 여기는 ‘내적 증언’에 의해 하느님 말씀을 발견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개신교는 “복음서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인격과 신자 개개인 인격의 상호 관계와 공존으로부터 나오는 영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고 부이에는 고찰하였다.
물론 하느님께 직접 계시받은 신앙을 마음에 간직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영적 여정을 걸어가고자 하는 것이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부이에는 이러한 관점에는 부족한 것이 있다고 본다. 부이에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과 다른 신자들과의 동등한 공존의 실현이 없이 참된 그리스도교적 영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즉, 하느님 사랑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이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실천할 때에야 비로소 가톨릭 전통에 따른 영성생활의 핵심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성생활을 정의내리는 데에도 다양한 종교의 관점을 두루 살폈던 것이 바로 부이에만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60) 루이 부이에 (하)
전례와 성사는 영성생활 발전의 초석
지금 우리는 루이 부이에를 영성신학자로 살펴보고 있지만, 사실 부이에가 교의신학자 및 전례신학자로도 활동하면서 성사론(聖事論)과 전례(典禮)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저술 활동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배경 때문이었는지, 우리는 부이에가 자신의 영성신학을 전개하는 데 성사론과 전례적 관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관점은 다른 영성신학자들보다 더욱 두드러지면서 부이에의 영성신학에서 고유한 특징을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시작은 성경에서부터
먼저 부이에는 그리스도교인이 영성생활을 올바로 실천하기 위한 기준점을 성경을 통해서 발견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개신교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하였다. 다만 개신교와 차이가 있다면 성경을 올바로 알아듣는 현장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지난번에 부이에가 영성생활에 있어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가 커다란 차이를 보이는 관점이 개신교의 개인적인 측면이 강조된 점과 가톨릭교회의 이웃 사랑을 통한 공동체적인 측면이 강조된 점에 있다고 언급하였다.
같은 관점에서 부이에는 성경을 개별적으로 해석하는 개신교의 방법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면서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 해석되는 장소도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의 개인적인 해석으로 새로운 생명이 불어넣어지는 죽은 글자처럼 성경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것을 말씀하신 분의 현존으로 여전히 생명이 부여되는 곳에서, 즉 성경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신 성령이 끊임없이 활동하시는 곳에서 성경을 사용해야 한다.” 여기서 성령이 끊임없이 활동하시는 곳은 바로 전례가 거행되는 곳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전례적인 모임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하느님 자신에 의해 함께 모이도록 불린 하느님 백성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가톨릭교회는 모든 유형의 전례 예식 안에서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접하고 가르침을 들었다. 특히 부이에에 따르면, “미리 준비되고 조명된 신약의 체험 속에서 심화된 구약의 교훈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형성되고 완성되는 전례 예식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지를 보여준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전례의 독서와 복음에서 구약성경의 말씀과 신약성경의 말씀을 선택하여 봉독하고 그 의미를 되새겼다. 그런데 이렇게 전례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그저 무작위로 선택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이에에 따르면, “교회가 전례를 통해 전해 주는 체계화된 성경의 점진적인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 백성의 전 역사를 우리 각자가 내적으로 다시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말씀 중심의 전례 예식을 통해 그리스도교인은 영적 자양분을 공급받고 영성생활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개신교와 달리 공동체적인 측면의 중요성 때문에 전례 예식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접하라고 언급한 부이에는 그러한 전제 조건이 잘 충족되면 다시 전례 안에서 접한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개개인에 더 적합한 가르침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고 본다. 즉, 부이에에 따르면, “하느님 백성의 전례 생활은 성경 전체가 집중되고 이해의 출발점이 되는 그리스도의 심오한 진리에 대해 객관적으로 우리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방법도 제시해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하느님의 말씀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공동체적인 측면이 마련된 후에 개개인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진정한 의미를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또한 부이에는 전례 예식 중에서도 특히 미사 전례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그 의미에 다가가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사실 교회가 전례와 특히 미사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방법은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대로 소화하기 위하여 성경에 대한 모든 영적 독서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며 어떻게 적절히 묵상 되어야 하는지 실천적으로 가르쳐 준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인이 전례주년에 맞추어 짜인 독서와 복음 말씀을 잘 읽고 묵상한다면 영적인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전례생활은 영성생활의 발전에 꼭 필요한 요소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비로 나아가기
그런데 그리스도교인은 전례 예식을 통해 하느님 말씀을 접하면서 깨달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고 살아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부이에에 따르면, “우리가 이 신비에 실제적으로 참여하고, 선포된 신비를 믿음 안에서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성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가톨릭교회에서 미사 전례는 성사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성사생활을 함께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이에는 “본래의 모습을 지닌 성경의 말씀은 이와 반대로 자연스럽게 성사적인 실재성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 성사들을 통해 말씀의 대상인 하느님의 신비가 영광의 희망이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서 교회 안에서 전달되는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부이에에 따르면, 사실 “성사들이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통한 그리스도의 실재성과 그리스도 부활의 충만함에 참여하도록 그리스도의 죽음과 새로운 생명 안으로 뛰어들어야 할 우리 자신들의 실재성 사이에 있는 만남의 장소”이기 때문에 “미사에서 복음의 말씀으로 선포된 하느님의 신비로부터 축성의 말에 의해 현존하게 된 하느님의 신비로 자연스러운 이동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미사 전례에서 거행되는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것은 더욱이 우리 구원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가져다주는 중요한 영적 여정의 한 방법이다.
물론 부이에에 따르면, “성체성사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현존과 그리스도의 신비를 온전히 우리 안으로 옮기고, 영광의 희망이신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서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가 우리 안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체성사를 중심으로 준비의 기도와 제물의 봉헌 및 성체 배령은 특히 그리스도교인이 성사생활을 통해 영성생활을 실천하는 직접적인 방법이다.
부이에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기도는 … 하느님의 뜻을 믿고 순종하며 우리를 불러 주신 당신의 이름을 알아듣는 것, 곧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그 사랑에 우리를 내맡기는 것이다.” 다음으로 “성찬례에서 바치는 빵과 포도주는 이것을 먹고 살아가는 우리 생활의 봉헌에서 구체화되고, 이 생활 속에서 우리의 삶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온전히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체 배령은 성부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봉헌에서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아드님이 되신 바로 그 실재성 안에서 우리를 일치의 절정에 이르게 한다.”
영성생활 어렵지 않게
이렇게 부이에는 가톨릭교회의 영성생활은 전례생활과 성사생활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접하는 것이 아주 중요할 뿐만 아니라 영적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영성생활이 아주 특별하거나 어려운 실천을 수반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일상적인 전례생활과 성사생활에 소박하게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도 손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영성생활은 성직자, 수도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평신도 그리스도교인도 어렵지 않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부이에는 가르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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