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13:1-19
담대한 者
'하늘을 향하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이렇게 시작되는 시인 윤동주의 序詩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의롭고 가치 있는 삶을 희구하는 시인의 간절한 바람을 한마디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욥이 바로 그런 사람임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 아노라"는 본문 18절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말은 얼른 들으면 무척 거부감을 느끼게 됩니다.
지가 얼마나 거룩해서 그런 말을 하나? 하는 의구심마져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잘 살펴보면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의롭게 살았노라는 욥의 진실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경건한 삶을 살았노라는 스스로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얻은 영원한 생명 가운데서 떳떳함과 담대함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의롭게 살면 어떤 담대함이 생기는가를 본문을 통해 살펴 보시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려고 합니다.
##### 1.의롭게 살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욥은 자기가 의로운 자임을 밝히기를 앞서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고 본문 3절에서 자신있게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과 변론하고 싶다는 이 말에는 자신의 비참하고 억울한 처지를 하나님께 호소하고 싶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만은, 또 한가지 하나님 앞에서 그가 얼마나 담대했던가 하는 점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 의롭고 담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 많은 인간들은 하나님을 대면하면 그분의 영화로운 위엄과 거룩함 때문에 즉사하고 말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의로움이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우리 의롭게 삶으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해지시기를 바랍니다.
##### 2.우리가 의롭게 살면 사람들 앞에서 담대할 수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세 친구들은 계속해서 가차없이 욥을 정죄하였으나, 욥 자신은 그처럼 정죄받을 만한 죄가 없었기 때문에 자기를 정죄하는 친구들 앞에서도 하늘같은 당당한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너희 입들을 다물어라. 나는 무슨 일이라도 당할 만한 자신이 있다.' 이 얼마나 의젓하고 패기넘치는 태도입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면서도 사람은 무척 두려워합니다. 아니 어떤 사태에 처해서는 같은 사람 앞에서도 애처로울 정도로 벌벌 떠는 것이 인간의 약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몽둥이, 칼, 폭력, 고문, 협박 등이 난무하고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담대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에 대해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세례 요한은 상대편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자신이 한 말때문에 잡혀 죽을 것을 알면서도 헤롯 왕의 불륜을 당당하게 규탄했습니다.
--우리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사십시다.
##### 3.의로운 자는 자기 자신에게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욥은 세 친구들 앞에서 "사곡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고 본문 16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자신에게 자책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자기 양심에 대하여 조금도 거릴낄 것이 없다는, 그러기에 구원까지도 자신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자기 양심에 물어도 떳떳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의젓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떳떳한 사람은 설령 천하가 다 그를 공박하여도 끄떡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화인맞은 양심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을 대하여 거리낌이 없는 선한 양심이라면 그러할 것입니다.
이러한 양심에 비추어 보아 거리낌이 없는 사람은 자기를 향해서도 태산같은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 13:20-28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처신
##### 1.따지려 들면 안 됩니다
본문 22절...<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은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욥은 고난이 자신에게 왜 임했는지 도저히 알 수 없게 되자 감히 하나님께 따지려 하였습니다. 입이 있으면 어디 한번 말씀해 보시라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에게 어떤 참담한 일이 주어졌더라도 그런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따지려 들면 절대 안됩니다. 우선 그런 일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불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우리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냐하면 원래부터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사이에는 하늘이 땅에서 높은 것 만큼이나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유익을 주시려는 목적으로 하신 일도 사람에게는 커다란 손해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질책을 경계로 삼아야 합니다. "이 사람아 네게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9:20)
##### 2.자신을 대적한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감정이 극도로 격해진 욥은 하나님께 따지더니 이번에는 엉뚱한 말을 토하였습니다. 본문 24절...<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대적으로 여기시다니, 게다가 당대에 의인으로 널리 알려진 당신의 사람을 대적으로 여기시다니, 생각하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판단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아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게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께서 그 고통을 감당하기가 힘겨워 하나님을 향해 '왜 나를 대적하느냐'고 항변하면서 십자가에서 뛰어내리고 말았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불신자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는 있어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대적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사단밖에 대적이 없습니다.
--전에 어떤 신학생 하나가 "나는 하나님이 우리 집을 원수로 여기고 망하게 하셨기 때문에 도대체 그분이 누구인가를 알아 보려고 신학교에 지원했다"고 말했다가 그만 퇴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학교 당국은 그 말의 오염을 방지하려고 단호하게 조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대해서는 철저히 징계하시지만 궁극적으로 성도를 사랑하시되 그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형통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 3.그 분의 일을 속단하면 안됩니다
한번 빗나간 욥의 말은 다음에서도 또 빗나갔습니다. 본문 26절...<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
욥은 자기의 잘못을 찾아내기가 어렵자 그런 속단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허물과 죄를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03:10절...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한번 자녀로 부르신 자를 어찌 어렸을 적의 죄까지 들추어 다시 벌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두고서 너무나 분수 넘는 속단을 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이 때문에 남을 쉽게 정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일을 헤아리면 안 되며 더구나 성급한 속단은 금물인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대체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커다란 곤경을 만나면 당황하기가 마련이고 그래서 하나님께 항변하는 일도 있고 그분의 일을 두고서 속단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때 일수록 이성을 잃지 말고 하나님께 불경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진정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약1:12)
--어느 마을에 군대가 주둔하더니 이내 그곳엔 위안소(매춘부들의 집)한 채가 들어섰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위안소 맞은 편에는 카톨릭 수도원이 있었다. 그곳에 살고 있던 수녀들도 여자인지라 늘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수도원 문틈으로 건너편 집의 동정을 살폈다.
이 일은 어느새 수녀들에게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어느 날 프로텐스탄트 목사가 주위를 살피면서 위안소로 들어서는 것을 보자 수녀들이 빈정거리며 수군거렸다.
"그렇지 뭐, 프로테스탄트들은 겉으로는 그럴 듯한 말만 하고 저 모양이라니까.....?"며칠 후 이번에는 유대교의 랍비가 주위를 살피더니 그 집으로 들어갔다. 이것을 본 수녀들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지독한 것들이 랍비라고 뭐 다르겠어? 별 수 없지!" 라고 비난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나자 이번에는 카톨릭 신부가 역시 주위를 살피더니 위안소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것을 지켜본 수녀들은 놀라는 기색도 않고 "분명 저 집에서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을거야"라고 입모아 말했다.
성도 여러분!
들은 이야기라고 해서 다 할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본 일이라 해서 본 것을 다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그 자신의 귀와 눈과 입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거칠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궁지에 빠지고 맙니다. 현명한 사람은 남의 욕설이나 비평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또 남의 단점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현명하게 처신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