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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20-22
들어가지 못하리라 / 안양준 목사
옛 말에 ‘선악개오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선과 악 모두 내게 스승이 된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과거 역사를 통해 선한 일은 본받고, 악한 것들은 피함으로 우리 인생을 바르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도 선한 일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악한 일들도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 신앙생활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한때는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받던 사람이 마지막에는 비참한 최후를 당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몇주 전에도 발람에 대한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본문은 그와는 또다른 성격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본문에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호칭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은 아무에게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신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특별히 쓰임을 받는 사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의 활동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대개가 위기 때에 활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이 점점 악해져가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져있을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왕상 17:에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악한 왕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야 합니다. 점점 시대가 악해져가고 있는 시기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져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의 등장은 너무나 절실합니다.
수요일에 “세례 요한의 증거”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는데 세례 요한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영적 공백기에 오랜 가뭄 끝에 한줄기 비처럼 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메시지는 달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도 유다로부터 이스라엘까지 먼 길을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메시지를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그에겐 능력이 있었고,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명령을 조금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을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그의 사명
1절에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로 시작합니다.
유대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의 이름이 무언지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유다로부터 벧엘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 왕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2절에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그냥 말한 것이 아니라 외쳤다고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외칠 수 잇는 것은 그가 하는 말이 자신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입니다.
그가 ‘사람의 말’을 했다면 왕 앞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외칠 수 없었을 것이고, 왕권 앞에서 담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많은 목사님들이 부정한 권력 앞에서 ‘조찬기도회’라는 명목으로 오히려 그들에게 축복을 빌어준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변명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들이 그 순간 한 말은 분명히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 왕에게 전한 ‘여호와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이것은 분명히 저주입니다. 왕 앞에서 이런 저주를 퍼부을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기때문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 그가 유대에서부터 벧엘에 올라온 이유가 바로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는 외쳤고 이 저주는 300년의 세월이 지나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왕하 23:15에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묘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묘실에서 해골을 취하여다가 단 위에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그것이 능력 아닙니까? ‘하나님의 사람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그가 전하는 말씀이 ‘여호와의 말씀’일 때 그 말씀이 그대로 임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렘 23:29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히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저주를 들은 여로보암이 손을 펴면서 잡으라고 하자 편 손이 말라버렸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의 마른 손을 위해 기도하자 마른 손이 즉시로 회복되었습니다.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이제 여로보암이 많은 재물로 유혹합니다. 하지만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8절에 “하나님의 사람이 왕께 대답하되 왕께서 왕의 집 절반으로 내게 준다 할지라도 나는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이곳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다 하고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모든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물리쳤습니다. 모든 부분에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고 그래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그는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벧엘에 있는 한 늙은 선지자의 꾀임에 빠져 그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결국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한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본문을 읽으면서 어떻게 그런 조그만 방심 때문에 지금까지 완벽하게 모든 것을 잘 지켜왔던 ‘하나님의 사람’에게 그런 냉엄한 심판이 내려질 수 있을까?
이 사건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같은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 시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시대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이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거짓선지자의 꾀임
지금까지 모든 시험을 잘 이겨냈던 하나님의 사람이 왜 늙은 선지자의 속임수에는 넘어가게 되었습니까?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하나님의 사람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게 하는 말입니다. 사실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동료의식은 쉽게 긴장을 늦추게 하고 친밀감을 갖게 합니다. 더군다나 외로운 처지에 있을 때 이런 일이 더 쉽게 나타납니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꾀기 위해 달콤한 거짓말을 늘어놓습니다.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이에 그 사람이 저와 함께 돌아가서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니라”
벧엘에 사는 늙은 선지자는 자신이 벧엘에 살고 있으면서도 여로보암의 악한 일에 대해 한 번도 책망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늙은 선지자의 아들들이 여로보암이 벧엘에 단을 세우고 잘못된 종교행사를 치를 때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적어도 여로보암의 죄악에 동조했다는 추궁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자가 이제 와서 자신을 선한 일꾼처럼 가장하여 유혹할 때 하나님의 사람은 그의 영을 잘 분별했어야 합니다.
요일 4:1에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고후 11:14에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딤후 3:5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영적 해이함
또한 여로보암 왕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긴 모든 일들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영적인 해이함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언제 사단이 우리를 넘어뜨릴지 모릅니다.
벧전 5:8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삼하 10:에 보면 다윗도 블레셋, 모압, 에돔, 아람과 암몬과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였습니다. 이제 자신을 늘 괴롭히던 긴장감이 사라졌을 때 저녁 때 왕궁 지붕 위를 걷다가 밧세바가 목욕을 하는 장면을 보고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영적 전쟁에 있어서는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빌 3:12에 사도 바울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끝까지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결국 늙은 선지자의 꾀임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떡과 물을 먹고 마십니다.
14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상수리나무 아래 앉아서 쉬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피곤해서 쉬고 있을 때 유혹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죄악의 장소인 벧엘을 빨리 빠져 나왔어야 했습니다. 유혹의 현장에 오래 머무르는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롯의 가족을 보면 소돔 성이 멸망당할 때 천사들이 롯의 가족을 향해 빨리 그 성을 떠나 산으로 피하라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롯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고, 롯의 아내는 미련을 두고 자꾸 뒤를 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되었고, 결국 남은 롯과 두 딸도 산보다 가까운 소알 성에 머물겠다고 타협했다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르고 그 죄악의 씨앗이 계속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올무가 되지 않았습니까?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 쉬지 않고 서둘러 유다로 내려갔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처럼 당당하고, 그처럼 능력있었던 하나님의 사람이 거짓 선지자의 꾀임에 넘어지는 것을 보면 우리도 언제든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받은 명령은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상숭배하는 죄를 꾸짖기 위해 자신을 보냈는데 그들과 함께 떡을 먹고 물을 마시며 교제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잊어버리고 죄악을 먹고 마신다면 하나님의 사람에게 다가온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도 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왔던 길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 왔던 길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시 1:1에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세상으로부터 자신의 경건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단의 유혹을 말씀과 기도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사람은 누구나 죽을 때 고향에 묻히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유대인들에게 열조에 묘실에 묻혀야 한다는 것은 신앙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객사를 했다는 것은 엄청난 비극이요 불행입니다.
24절에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사실 사자는 배가 고프지 않으면 사냥을 하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죽여놓고도 그 시신 옆에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있을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분명한 하나님의 심판 임을 보여줍니다.
그리스 신화에 한 섬에 사람을 유혹하는 ‘사이렌’이라는 여신이 있습니다. 사이렌은 배가 지나갈 때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그 노래에 취한 사람들의 생명을 잃게 만드는 여신입니다. 사람들은 사이렌 이 유혹하는 곳을 지날 때마다 조심하지만 소리를 듣는 순간 유혹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사이렌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배가 사이렌이 있는 곳을 지나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배는 사이렌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곳을 무사히 지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는가 하면 그 배에 유명한 음악가인 올피어스가 올라타 하아프를 연주하는데 사람들이 올피어스의 연주에 심취하여 사이렌이 울리는 섬을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도 사이렌이 울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한 순간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믿음에서 파선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전 10:12에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잠 6:4에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군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