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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 13. 율법의 예언 14. 오리라 한 엘리야
마 11: 13. 율법의 예언 -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
세례 요한은 구약시대의 끝이다.
구약 마지막 책인 말라기 끝에 예언된 엘리야는 세례 요한이었다.
1] 모든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한 것은
본문의 선지자와 율법은 구약성경을 지칭하는 말이며 일반적으로 율법이 선지자보다 앞선다.
* 마 5: 17-18 –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마 7: 12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 눅 16: 16-17 –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모든'이란 어떤 특정한 구절들에 국한(局限)해서만이 아니라 '전체를 망라해서', 또는 '전체적인 맥락에서'로 이해해야 한다.
본문에는 선지자 뿐 아니라 '율법이 예언한다.'는 특이한 표현이 있다. 이것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 전체가 예언적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가리키며 앞으로 임할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임을 뜻한다.
2] 요한까지니
세례 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을 통해 구약은 최종 마감되었다. 이제부터는 계시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로 인한 새 시대가 전개될 것이다.
어떤 이는 이 표현을 두고 선지자들과 율법이 세례 요한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고 해석한다(Sigal).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선지자들과 율법이 세례 요한 때까지 그 예언적 기능을 다할 것이며 하늘나라가 시작되기에 앞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례 요한이 구약의 마지막 무대에 등장한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마태는 본문에서 구원사의 새 전환점을 밝힘과 동시에 선지자들과 율법이 예언했던 그리스도의 시대가 다가왔고 시작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마태는 구약의 가장 주요한 기능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며, 이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늘 염두에 두고 본 복음서를 기술하였다.
마 11: 14. 오리라 한 엘리야 -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한 이후부터 많은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오고 있다.
1]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즐겨'에 해당하는 원어 '데레테'(*)는 '좋아하다', '바라다'는 의미 외에 '뜻을 세우다', '선택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의지적이고 선택적인 결단에 의한 수용을 암시하는 말이다.
결국 진리를 수용하는 일이 감정적 흥미에서가 아닌 의지적 선택이 수반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자기들에게 강력한 비판과 엄격한 회개를 요구하며,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랑치 말라고 꾸짖기까지 했다.
더욱이 지금 현재 그가 헤롯의 정치범으로 옥에 갇혀 있음을 보고 요한이 오기로 약속된 엘리야라는 사실을 '즐겨 받지' 못했다. 또한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이 구약의 예언과 율법적 기대가 성취된 것으로도 '즐겨 받지' 못했다.
2] 오리라 한 엘리야가
엘리야는 열왕기상, 하에 기록되어 있다. 큰 권능을 가졌던 선지자로서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마차를 타고 승천(昇天)한 바 있다.
* 왕하 2: 8-11 – 8 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 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10 이르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 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데려가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지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 1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수백 년 후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보냄을 받을 것이며, 와서는 메시야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 말 3: 1-2 –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2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 말 4: 1, 5-6 –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3] 곧 이 사람이니라.
요한의 부친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 분향할 때 주의 사자는 그에게 요한의 탄생을 고지하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예비하리라"(눅 1: 17)고 예언하였다.
요한은 엘리야의 인성과 모습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요한 자신은 엘리야임을 부인하였다.
* 요 1: 21 -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승천 때와 같은 인격적인 엘리야로 다시 올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실재하는 역사의 반복으로서 엘리야의 귀환을 고대했다.
하지만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엘리야의 도래(到來)는 육체적, 문자적 도래라기보다 종말론적 구원자의 선구자로서의 사역적, 정신적 도래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은 그의 사명상 엘리야로서 주의 길을 예비한 주의 사자(messenger) 였다.
4] 요한을 향한 예수님의 증거
예수님께서는 사역하시기에 앞서 먼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그에게 메시야로서 증거를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이 자신이 생각한 메시야로서의 사역과 거리가 있음을 느낀 세례 요한에게는 자기의 증거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혼돈이 왔다.
때문에 그는 감옥에서 자기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진정 당신이 오실 메시야입니까? 라고 묻게 되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충분히 이해하도록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암시를 주셨고,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 자기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가 옳았음을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설파하셨다.
(1)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선지자와 율법의 마지막이라고 증언했다.
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전달하며 해석해 주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이러한 선지자의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구약의 모든 예언이 메시야의 강림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세례 요한에 의해 가장 완벽하고 정확하게 예언됨으로 구약의 모든 이유에서 완결되었음을 말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했다.
② 율법
이스라엘의 국가 개념은 출애굽에 와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계약 백성의 생활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데 이 공의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인간은 누구나 죽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고 인간이 죄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 제사 제도를 허락하셨다.
그러나 이 제사 제도 역시 완전한 것은 못되었다. 그것은 단지 대제사장과 속죄물이 되심으로써 죄에서 인류를 완전히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 히 10: 1-10 –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따라서 예수께서 요한을 가리켜 율법의 마지막이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 자체이신 자신이 이 땅에 옴으로서 세례 요한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구약의 모든 율법과 제사 제도를 통해 인간을 구하고자 하는 모든 법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의 증언은 세례 요한에 대한 증언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증언이었다. 구약의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자신을 증거 하는 것이며 그것이 세례 요한의 사역을 끝으로 종결되었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대한 증거를 위해 세례 요한을 깍아 내리거나 그 사역을 무익한 것으로 속단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을 유익한 것으로 인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증거와 함께 그의 사역의 당위성에 대해 증거 하시면서 그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내는 것도 아끼지 않으셨다.
(2) 세례 요한이 예언된 엘리야라고 증거 하셨다.
①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겸손을 부인하셨다.
세례 요한은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다. 일찌기 그는 '네가 엘리야냐?'(요 1: 21)라고 묻는 유대인들에게 극구 자기는 엘리야가 아니라고 부인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레 요한의 겸손한 부인을 뒤엎어서 세례 요한이 바로 다시 오시리라 예언된 엘리야임을 명백히 밝히셨다.
참된 진리나 사실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가리워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명백히 밝히셨다. 따라서 우리도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진리를 은폐해서는 안 된다.
② 세례 요한은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한 엘리야의 직능을 가지고 왔다.
* 말 4: 5-6 -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그가 엘리야와 같은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성경을 읽어보면 그는 충분히 그에 상응하는 일을 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에게 맡겨진 주의 사역을 반드시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어야만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겸손히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역 위에 함께 하실 것이다.
(3) 선택은 인간 개개인에게 달려 있다.
① 우리는 크든 작든 결단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이 말씀은 곧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그저 한번 듣고 흘려도 좋을 말씀이 아니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의 메시지는 반드시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는데 그의 메시지에 무반응하는 것조차도 그것은 우리의 결단에 속한다.
결단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다. 성도 여러분은 축복과 저주의 기로에서 어느 쪽으로 결단하겠는가?
② 우리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할 수 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또 하나의 사실은 우리는 언제든지 명백한 사실을 정면으로 부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린 모든 결단의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