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역사에 젖은 하루, 김해 분성산
오늘은 2013년 2월 24일 일요일. 이명박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 내일이면 박근혜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다. 흐르는 물같이 세월이 가고 있음을 잘 느끼는 하루다.
날씨가 참 푸근하다. 순백의 대지는 어느덧 녹고, 산 능선도 봄꿈을 꾼다. 문득 두르고 온 목도리에 생각 미친다. 봄날이 되면 목도리는 장농속으로 들어가 잊힌다. 옛날 한나라 개국공신 한신장군이 버림받자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도 삶아 먹히고 나는 새를 다 잡으면 활은 선반위에 오른다." 하여 토사구팽 兎死狗烹 이라 하였으니, 사철 잊히지 않을 것은 이 등산지팡이다.
무인운행으로 달리는 부산~김해 경전철 시발역인 사상에서 출발하여 종착역인 김해 가야대학역에 내렸다. 그러나 경전철 작은 전동차를 타고, 마음이 달려가는 곳은 어디일까? 작고 향기로운 매화꽃잎 사이 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 속이거나.......
나는 한복판에 그저 앉아있다. 세상의 한복판, 산의 한복판, 내 인생의 한복판, 내 마음속 사색의 한복판에........
분성산은 김해의 진산鎭山이다. 진산이란 도읍이나 성시 城市의 뒤쪽에 있는 큰 산을 의미한다. 가야대학을 지나 분성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근린공원을 보니 지자체 노고가 많았다.
옛 공병학교 터에 위치한 근린공원 연못과 6.25와 베트남전에 참전한 기념비가 있는 쪽으로 올라간다. 임도를 쭉 따라가면 길은 아주 좋고 평탄하다. 도로 가의 멋진 큰 바위 하나 편안한 위치에 누워있어 안정감을 준다.
계속 우측으로 가면 중간에 애산정 愛山亭 정자가 나온다. 여기서 막걸리 참 한잔!
산속에서, 친구들과 들이키는 막걸리 한잔의 행복을 저울로 달면 얼마나 나갈까? 진달래 한줌, 참깨 한줌, 벌꿀 한줌, 인정 한줌, 바람 한줌을 비벼먹는 것과 같은 맛이다.
흔들리는 긴 그림자는 집에 두고 온 건강한 모습들이 봄 햇살을 조금씩 데워주고 있다.
"내가 연 세상 내가 닫고 가야 한다.
문제는 많은 문을 열었다는 것
풀잎 하나 스스로 흔들리지 않듯
오가는 모든 것 바람의 눈을 가졌다."
-전성호, 시집, 저녁 풍경이 말을 건네신다 <가난한 풍경이 말하는> 부분
조금 '쓸쓸한 행복' 도 든든하고 끈끈한 우정이면 다 날려버린다. 아, 자연은 품속이 넓고 아늑해서, 누구든지 찾기만 하면 새로운 정신으로 바꿔준다.
이제 무엇이 내 미소를 이끌고 가는가? 침잠하는 순간이 모여 은은한 미소로 번지고, 행복감이 봄비같이 소중하다. 나는 앞으로도 바람보다 앞서 가고, 별빛 보다 먼저 반짝인다는 신념으로.....
인생! 서고 앉고. 앉고, 눕고....이 속에 어떤 의미로 인생의 전부가 있다. 화롯불 속에 불씨 삭아감같지만 잘 간수하기 따라서는 더 오래 간다. 누구든지 불같은 마음도 여리고 순해져 간다.
등을 나무가 받쳐 주나, 스틱이 받쳐주나, 아니, 두꺼운 햇살이 받쳐주는, 양지바른 들판에선 냉이를 캘 철이다. 이 대목에서 시조 한 수 감상하며 웃어보자!
春情 / 임성화
아지랑이 달아오른 시장 통 담벼락 안고
쑥 냉이 달래 파는 과부댁 덕산아지매
혼곤한 봄기운 탓에 거시기도 꾸물꾸물
찬거리 사러 나온 시장 보던 노총각
쑥 빼면 얼만교 쑤욱 넣으면 얼만교
상큼한 봄나물들이 킥킥대며 돌앉는다.
김해 천문대에서 수형을 잡아가는 잘 생긴 나무들 모습이 돋보인다. 천문대에서 보면 건너편에 분산성이 보이고, 분산성 쪽으로 오솔길을 내려가면, 좌측으로 신어산이 보이고, 신어산 골자기 분지에 가야역사테마 세트장이 나온다.
역사는 스며드는 것일까? 빠져 나가는 것일까 ? 우뚝 솟는 것일까? 가야의 역사는 신라로 빠져 나가서, 통일로 우뚝 솟고, 우리 살 속에 스며들었다.
분산성에는 해은사, 충의각이 있고, 정상에는 만장대라는 바위와 봉수대가 있다. 산 이름은 분성산, 성 이름은 분산성 헷갈린다. 김해평야 시가지와 낙동강, 남해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분산盆山은 높이 330m 야산이며 정상부에 띠를 두른 듯이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작은 봉우리 분산의 성이 분산성이다. 큰 산 전체는 '분산성이 있는 산'이라고 분성산이고.......
현재는 시내 쪽 경사면에 900m 가량의 성벽이 남아 있다. 성안에 있는 3개의 비문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분산성은 고려 말에 김해부사 박위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옛산성을 돌로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성안은 가야 신라의 토기편들도 출토되고, 분산성이 고대 산성의 주류였던 테뫼식 산성이란 점 등에서 신라나 가야시대까지 올라 갈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김해시민들에게는 만장대 萬丈臺라는 이름으로 친숙하다.
분산성 안의 해은사 海恩寺는 가락국의 허황후가 바다에서 왔던 것을 기린다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그려진 수로왕과 허황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해은사 절의 진입로에 세워둔 안내판에서 뜻밖에 시를 만나났다. 스님들이 시문학 마인드가 있나 보다. 횡으로 삼등분하여 왼쪽에 미당 서정주의 시 <마하금강 희망의 종>이고, 가운데가 나태주의 <풀꽃> 에서 발췌한 짧은 시와 그림, 오른 쪽은 '지혜로운 자는 자기를 다룬다'는 불가의 짧은 말씀이 있어서 마음에 새길 만하다.
▣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 예쁘다. /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 <마하금강 희망의 종> / 미당 서정주
조촐하고 의젓하게 남을 위해 사는 이들이
생각의 깊이와 슬기 다 해 사는 이들이
앎과 그리움과 바램의 숨결을 모아
우주와 영원의 어디 어느 때 까지나
날이 날마다 이 쇠북을 치고 또 쳐 울리나니
육바라밀* 여섯 송이 꽃이여
듣는 이들 마음속마다 그윽히 피어,
모든 목숨 두루 다 부처님 목숨 만 되게 하여라.
*6바라밀 : 보살도 수행을 성취(바라밀) 방법 6가지 : 1) 보시(베풂), 2) 지계(持戒 ; 계울지킴) 3) 인욕(忍辱 ; 참음), 4)정진(꾸준히 수양), 5)선정(마음을 고요히 가짐), 6) 지혜를 가짐
▣ <지혜로운 자는 자기를 다룬다>
물을 다스리는 자는 물을 이끌고
활잡인 화살을 고르고
목공은 나무를 다듬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다룬다.
스쳐가는 것은 바람인가? 꿈인가?
시, 문학, 선율에 마음 담으면, 마음이 스쳐갈 일 없겠지요.
충의각 忠義閣에는 분산성의 수축내력 등을 기록한 4개의 비석이 보존돼 있다.
1) <정국군 박공위축성사적비>는 고려 말 분산성을 보수하여 쌓은 박위 장군의 업적과 내력을 기록한 것.
2) <흥선대원군만세불망비> 2기는 부사 정현석이 분산성을 보수한 후에 흥선대원군의 뜻을 기렸고, 고려 말 정몽주가 쓴 분산성 관련 글도 새겨져 있다.
3) <부사통정대부정현석영세불망비>는 분산성을 보수하여 쌓은 정현석 부사의 공을 영원히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해 고종 11년(1874)에 건립한 것이다.
이곳 충의각에서 매년 양력 10월 28일 제례를 지내 공들의 애국 충정을 받든다.
만장대는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길이나 되는 높은 대 라는 칭호를 대원군이 내려줬다.
1999년 복원된 봉수대 뒤편의 바위에는 만장대라 쓴 대원군의 친필과 도장이 새겨져있다. 분산성에서 시내 쪽으로 조망하면, 시가지 가운데 평지에 김수로왕릉이 있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김해 박물관과 구지봉이 나지막하고 보이고, 가까운 기슭에는 허왕후릉이 있다. 보통 부부는 합장하거나 한곳에 나란히 묻히는데. 김수로왕릉 따로, 허왕후릉 따로다. 이상하지 않는가?
아버지 성을 따른 김씨, 어머니 성을 따른 허씨의 참배에 편의를 주기 위한 선견지명 같다.
이 봉수에 봉화불 오르면, 박위 장군, 이순신 장군도 말을 타고 오시겠지.
봉화대에서 단체 사진을 찍으며 친구들 표정을 살펴본다. 새벽에 울산을 출발하여, 합류한 친구는, 한 낮에 구야국, 가락국의 대왕처럼 우뚝 서 있다. 까치 한 마리 앉음이 큰 나무 한그루를 다 차지한듯 보이듯이 대화도 호기 여유롭다. 같이 오신 사모님 한분, 기분 좋게 이리저리 둘러보는 모습에는 '봉수대 든든한 벽이 우리 서방님 같이 믿음직해요' 라는 듯이 보인다. 그냥 편안히 앉은 친구 모습에서는 뚝배기 된장냄새 처럼 구수한 맛이 난다. 산을 사랑하는 친구 또 늘어, 달작지근 씁쓰레한 칡차 그 상큼한 맛같은 친구여! 후루룩 삶은 국수 많이 먹고, 키가 큰 것을 제 그림자는 분명히 알 것이다.
"마음이 울적한 날은 햇살 같은 시를 쓰자.
금새 파랗게 물이 드는 시를
바람이 부는 날은 노을 같은 시를 쓰자.
갈잎에 피는 노을 같은 시를
포장마차 불빛에 출렁이는 술같은 시를 쓰자."
-강민수 시집, 덜래곶 노래, <시를 쓰는 마음> 부분
오늘 같은 햇살좋은 날은 무슨 시를 써야 하나?
건너다 뵈는 김해 삼방동 신어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은하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고, 인조 때 중건한 조선 후기의 절이다. 조선 인조 때 대들보를 올리고 쓴 상량문을 보면 '수로왕 42년에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은하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사찰이다.
공식적으로 불교 전래는 고구려 4세기 소수림왕 때인 372년인데, 허왕후가 올 때 서기 1세기에 불교가 이미 전래됐을 수도 있다. 은하사 삼성각에 진영이 봉안돼 있는 장유화상은 허왕후와 함께 온 허왕후의 오빠다. 장유화상은 은하사를 창건하고, 김수로왕과 허왕후 사이의 일곱 왕자를 출가케 해 칠불로 재탄생토록 이끌었고, 국사로서 왕의 자문에 응하였다고 전한다.
어느때 신어산 서쪽에는 서림사, 동쪽에는 동림사가 있었는데, 동림사는 현존하지 않는다. 서림사가 지금의 은하사이다. 은하사 대웅전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서쪽은 인도를 바라보는 방향이다. 은하사는 허왕후의 고향인 인도 아유타국의 번성을 기원하는 절이라는 것이다. 김해시 가야문화축제 때는 뮤지컬 '제4의 제국 가야'로 가야 건국 신화를 잘 보여준다.
은하사 대웅전 대들보에는 380여 년 전에 그린 신어가 있다. 머리는 용이고 몸통은 물고기인 신어는 가야의 표식이라 할 수 있다. 은하사 대웅전 불단인 수미단에 쌍어(雙魚)가 새겨져 있다. 수로왕릉의 정문에도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는 쌍어가 있다. 인도의 아유디아국이 있던 아유디아읍에도 쌍어문이 곳곳에서 있다. 논리적으로 김해 유적의 쌍어들은 허왕후가 아유타에서 온 것을 알려주는 상징이다.
은하사 진입로의 소나무 숲은 영화 '달마야 놀자'의 주무대. 신어산 오른 쪽에는 작은 돛대봉도 건너 보인다. 2002년 4월 15일 우천과 안개로 중국 국제항공사(CA) 소속 여객기가 추락하여 129명의 희생자가 나온 참사가 있다. 경전철 김해시청역으로 내려와 다시 경전철을 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