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어울리는 말일까?
아니다 정말 불세출의 풍기인이시다.
소백산을 즐겨 찾아 글을 남겼고 이 땅에 님의 발자취가 가득하거늘
그 누가 풍기인이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풍기군수 재임 4년 여 개월(1541~1545)은 긴 세월이었다.
순흥이 풍기군안에 있던 때 서원의 효시 당시 백운동서원을 세우시고 인삼재배를 시작하신
군수님! 당신은 하늘이 보내준 귀인이셨다.
일행이 있어서 지난 12월 4일 탄신 512주기를 맞아 신재 주세붕군수님의 고향길을 찾아 나섰다.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 544번지는 신재 주세붕군수님의 고향이며 현재도 상주주씨 문중의 세거(世居)지다.
우리 풍기고을 사람뿐만 아니라 소수서원이나 풍기인삼을 아는 사람은 5백 년 전 주세붕 군수님을 모르는 분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시고 지금도 덕분에 “선비의 고장이다” “인삼의 고장이다” 하며 뿀을 내고 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그 큰 은덕을 알면서 얼마나 무심하게 살아왔는지 죄송한 마음은 고향마을 도착하기까지 무거웠다.
거리상으로는 6백리 먼 길이지만 중앙고속도로와 구마고속도로를 거쳐 가면 불과 2시간 대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곳이었다.
대설을 코앞에 둔 찬 날씨는 군수님 곁으로 빨리 가서 소시 적에 살았던 생가와 그 주변을 살펴보고 사진에서 보았던 능(陵)에 버금가는 유택이 눈가에 그려지면서 벌써 마음은 군수님 고향집에 와 있는 듯 설렘과 긴장이 교차되고 있었다.
차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니 완연한 겨울색이다. 산자락 드문드문 푸른 소나무그루가 보여도
언제 내렸는지 눈 색도 비쳐지고 그렇게도 옷 자랑을 하던 신록의 나무 모두 부끄러움도 모르는 체 옷을 벗고 나목(裸木) 차림 그대로 서 있었다.
반드시 오색찬란한 산색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균형 잡힌 몸매도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자태가 계절에 순응하는 모습이고 앞으로 엄동설한을 견디면 다시 이쁘고 활기차게 피어날 것을 기다리는 자연의 실상이 행인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
고향마을 무릉동촌 표석 |
두 시간 여를 달리니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경계를 지났고 얼마가지 않아 칠서IC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톨게이트에서 3분 정도 지났을까 곧 바로 고향마을이고 탄신 512주기 향제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보이더니 자연석을 옮겨 세운 마을비석 무릉동천(武陵洞天) 문화지향(文華之鄕)에 이르렀다..
1백 명 가까운 문중객들이 제향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손님이라고 찾아왔으니 몇 분이 마중을 해 주신다.
저 지난해 풍기를 찾으셨던 후손이 계셔서 어색함이 적었고 먼 길 오시느라 고생했다며 정중한 예를 갖추면서 안내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몰랐다.
제례가 끝나고 식사하는 가운데 인사를 나누며 알았지만 경상남도 부지사님이 직접 오셔헌관으로 참례하셨다.
신재 주세붕군수가 대단한 분이심을 누가 모르랴! 가까운 거리도 아니건만 도청에서 연말 바쁜 시기에 제례까지 오신 것은 아무튼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고 의복의 예도 갖추지 않고 참석한 무례가 죄송했고 어차피 왔으니 의식의 예라도 잘 보고 배우려고 분주히 오르내리며 사진에 담았다.
1시간 넘도록 진행되는 의식을 보며 주자가례에 따라 엄숙 하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을지언정 지루함을 갖게 한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간소화 되었고 제례의 엄숙함과 진지한 모습은 자꾸만 사라져간다고 하면서 아쉬움을 토로하는 후손의 말씀을 들으며 앞으로 10년~ 20년 후의 이 자리가 어떻게 바뀌어 질지 감이 잡혀졌다.
문중예식이 문화적 행사의 본보기로 보존되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얘기다.
|
광풍각 제례의식 |
유적으로 보존되어 있는 건물이 여러 채 있었다.
소수서원에 보물 제717호로 봉안되어 있는 문민공 신재 주 세붕 군수 초상화를 복제한 영정이 비치된 광풍각 (光風閣)을 비롯해 무산서당(武山書堂)과 재사(齋舍) 그리고 신재 주세붕
군수의 유품을 영구보존하고자 국 ․ 도비와 군비로 건립된 청덕각(淸德閣)에는 많은 자료가 단아하게 정리되어있는데 특히 눈에 뜨이는 것은 두 점의 ·자헌대부 예조판서와 문민공시호 교지였으니 사후 추존된 것을 보더라도 당시의 국난에 신로(臣路)의 길이 얼마나 험난했던가를 보여 주었다.
30여 년간 관직에서 중종, 인종, 명종, 삼조의 은총을 입으며 관료생활의 높은 벼슬을 거쳤으나 곧고 바른 성품으로 두 번의 파직과 좌천의 행적을 보면 결코 평탄치 못한 일생이었다. 더구나 가정적으로 직계 혈손을 두지 못해 장조카 박(璞)을 후사로 두고 혈손을 이어오고 있다. 앞으로 인근 부지를 더 구입하여 유적과 유물을 보수 확장해서 우리고장의 소수서원처럼 사적지 견학장소로 활용할 것이라는 계획을 들으며 60세(1495-1554)를 1기로 일생을 마친 신재 주세붕군수의 사당을 적적한 마음으로 나섰다.
|
예조판서 문민공시호 |
중식 자리를 옮겨서 우리일행은 경상남도 부지사와 자리를 같이 해 주었다.
일반직 공무원으로 최고의 자리인 행정 부지사님. 인상이 부드러웠고 좋은 덕담도 해 주셨다. 일본이나 중국의 민속적 관습을 예로 들면서 신(神)의 개념을 쉽게 얘기하며 신재 주세붕 군수님이 가삼재배를 최초로 시작하셨다면 위상을 드높여 신격의 위치에서 그 업적을 알리는 것이 지방화시대에 앞서 갈 수 있는 길임을 홍보함이 필요할 것이라고!
순간적으로 경륜 있는 발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인삼하면 주세붕이라는 등식처럼 때로는 과다하게 활용하고 있지 않나 하는 무례함도 느끼고 우려도 가지지만 대 자연 속에서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인삼이라고 부정하지 않을 때 한번 깊이 고뇌하고 싶었다.
뜻이 있는 곳을 찾다보면 기대 이상의 많은 것을 얻는다더니 어느 날 나의 뇌리 속에서 화두가 떠오르리라.
450년 동안 잠들어 계시는 돛늪 뒷산 유택 가는 길은 가까웠다.
부(父) 능참봉 문보(文俌)와 군수님 그리고 嗣子 박(璞) 3대가 잠들어 계시는 곳이다.
낙동강변이며 묘소 앞엔 큰 못이 있는데 옛날에는 여기까지 강물이 들어 왔는데 언제부터 늪으로 변하고 연꽃 밭이 되었단다.
봉분된 묘소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
신도비 앞에서 일행기념 쵤영 |
임금의 능(陵)도 아닌데 이렇게 봉분(封墳)이 클 수 있을까? 설명을 듣기 전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해 내려오는 불가사의한 얘기가 있었다.
황해도 관찰사를 하실 때 해주 돌을 임진강-한강-낙동강을 거처 옮겨와서 석병(石屛))을 비롯해 묘비(墓碑), 신도비(神道碑), 망주석(望柱石) 등을 미리 만들어 놓으셨단다.
군수님 세상 떠나시고 호화분묘로 발각되어 수난을 겪게 되는데 오직 녹봉으로 물자를 구입했을 뿐 일점의 부정이 없었음이 조사되어 화를 면했으며 임진란에는 외인들이 굴총(掘冢)을 하려다 망주석에 쓰여 진 아래 글을 보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수무부모(誰無父母) 부모 없는 자식 어디에 있으며
숙비인자(孰非人子) 사람 아닌 자식이 누구인가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명문이다. 이런 상황이 있을 지를 예견하여 망주석에 써서
세우지 아니하였을까?
그 높은 학덕과 6년간이나 시묘(侍墓)하신 효심이 하늘을 움직이게 했던 것이다.
후손의 마지막 배웅을 받고 영원한 안식처 군수님의 유택을 떠나면서 큰 인물의 길은 역시 다름을 새삼 새겨 본다.
너무 많을 것을 남겨 주셨고 보존되어 오고 있다.
그 자체만으로도 기적이 아닐 수 없다.
5백년 의 긴 세월이 어디 하루라도 편안한 날이 없었거늘 두 번의 병란을 비롯해 한말의 격랑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유품과 유적이 잘 보존되어왔는지 하늘의 뜻이었기에 너무 고마웠다.
내가 태어나 삶의 터전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는 금계동 끝자락! 군수님께서 재임시절에 고향의 이름을 따서 무릉터라 하지 않았던가?
같은 시대 이 고장 인물 금계 황준량선생께서 군수님 재직시 치적을 선정비에 표현한 아래 글이 너무 자랑스럽고 그 가운데 오묘하게 표현된 글귀를 다시한번 되새겨 보며 군수님의 고향방문기를 줄인다.
興利革獘 ‘이(利)로운 것은 자주 늘리고, 나쁜 것은 고쳐 바로 잡으니‘
중국과의 교린과 왕조시대의 제도에서 국법으로 엄격하게 통제되었던 인삼재배나 기록금지로 매우 지혜롭게 군수님의 업적을 비전문에 넣어주셨다. 군민을 어여삐 여겨 목숨을 걸고 가삼제배를 시도하였고 오랜 목민관 생활을 통해 겪은 경륜으로 불합리한 제도를 군수권한으로 개혁했다는 뜻일 것이다.
이 땅에 영원한 빛이 되신 신재 주세붕군수님!
먼 곳 이승에서 지켜주소서! 굽어 살펴주소서!
군수주공선정비(君守周公善政碑)
公諱, 世鵬, 字景遊, 辛丑, 出守歲連世大飢, 全活甚多 以治最贈秩 乙巳冬 召爲國子司成 公資稟寬仁學行純熱, 爲政敬老尊賢, 先敎後 純推恕施恩, 興利革獘一境愛載, 誠感心化 人興孝悌, 俗歸純厚至於新先成廟, 立文成祠, 振起斯文, 尤有功焉父勞言自 國朝來典成者莫能及,
今爲承政院都承旨 가정(嘉情)28년 (1549) 黃俊良撰
공의 이름은 세붕이요, 자는 경유라 신축(辛丑)에 군수로 부임하자 연 2년 동안 큰 흉년이 들었는데 굶주림에 헤매는 백성을 모두 구하고 군민을 다스림에 최고의 선정을 베풀었으며, 을사년 겨울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 되었다.
공(公)의 천품(天稟)이 너그럽고 어질며 학문과 행실이 맑고 깨끗하여 정치를 함에 노인을 공경하고 착한 일을 존대하여 가르침을 앞세우고 형벌을 뒤로하고 용서를 미루어 은혜를 베풀고 ‘이(利)로운 것은 자주 늘리고, 나쁜 것은 고쳐 바로 잡으니‘ 마음이 감화되어 사람마다 효도를 다하여 군민들이 너그럽고 후한 마음으로 돌아가니 이에 이르러 향교를 새로 건립하고 문성공(文成公) 안향선생의 사당을 세워서 교(敎)를 진흥시킨 공이 더욱 많았다. 나이 많은 이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개국 이래 군수로 온 사람이 이런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지금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가 되어 있다. 가정(嘉情)28년(1549) 황준량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