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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시
사선死線에 서 있는 존재
에세이문예 가을호 시를 읽고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시에 있어서 세계라든지, 세계에 있어서 시란 세계의 참다운 의의와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해석이어야 한다. 송명화의 수필 <청와靑蛙>에는 ‘‘사선(死線)에 서 있는 존재’라는 말이 나온다. ‘환경의 지표종’이라는 별명을 가진 청와를 두고 한 말이다. 개구리가 인간에게 보내는 신호, 자연이 보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적 귀를 가져야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길이 열리리라는 그녀의 진단이 예사롭지 않다. “귀가 열려야 마음이 따라 열리는 법이다. 자연이 보내는 소리가 환희의 송가인지, 신음소리인지 구별할 수 있는 귀를 가지는 것이 인류의 무거운 과제라는 생각을 한다. ‘인간이 스스로 거대한 재앙으로 발전했다.’고 한탄한 부케티츠 교수의 말을 생각한다. 이 지경에 이르러 인간이 가해자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할까. 문명과 개발이라는 깃발 아래서 신음하는 생물들이 있다. 그들의 아우성에 기꺼이 청진을 하고자 하는 명의들을 길러내야 하는데.... 개구리가 인간에게 신호를 보낸다. ‘환경의 지표종’이라는 별명은 그들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무거운 족쇄라 싶다. ‘사선(死線)에 서 있는 존재’라는 뜻이 아닌가. 이 갈급한 신호를 외면한다면,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는 법도 없지 않을까.” 이번 권대근의 에세이문예 계간 시평에서는 자연으로부터 소외를 경고하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시인의 목소리를 들어보고자 한다.
Ⅱ.
중국 전국시대 도가 사상가 장자는 <장자>라 불리는 책을 남겼다. 장자 내편은 총 일곱 편이 있는데, ‘제물론편’의 그림자와 그림자가 나누는 대화가 눈길을 잡아끈다. 뿐만 아니다. ‘고목사회’라는 말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제물론 첫머리에 ‘고목사회’란 말이 나온다. 고목이란 푸르름 혹은 생명력이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는, 말라비틀어진 나무를 가리킨다. 사회란 불에 타버린 뒤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재를 가리킨다. 장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사람은 지인 즉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그는 화려한 외모와는 거리가 멀고, 언변이 좋지도 않고, 자랑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고목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화려한 외양이나 겉모습을 좋아한다. 남에게 자랑하는 것도 좋아한다. 출세하고 성공하고 외모 지향적인 삶을 누리고자 한다. 세태가 그렇다. 그런데 장자가 지향하는 인생관이나 세계관은 이와 다르다. 지인의 경지가 그렇다. 장자가 지향하는 삶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그림자의 그림자인 망량이 한 그림자에게 물었다. ‘아까는 그대가 거닐더니 지금은 그쳤고, 또 아까는 앉았더니 지금은 일어섰구나, 왜 그처럼 일정한 절조가 없는가?’ 그림자, ‘아마 나는 의지하는 무엇이 있어서 그런 성싶다. 그리고 내가 의지하는 그 무엇도 또 그로서 의지하는 그 무엇이 있어서 그런 성싶다. 그러면 내가 의지하는 것을 뱀의 발이나 매미의 날개라고나 할까? 그러므로 그러한 줄을 어찌 알겠으며, 그렇게 하지 않은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현대수필이 주는 가르침은 무엇일까. 살아온 길을 한 번쯤 되돌아 보라는 메시지가 들려오고, 인간만 생각하지 말고 자연 속 수많은 생명들도 생각해 보라고 꾸짖는 것 같다. 이런 현실 하에서 시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위기의 지구, 위기의 인간성에 경종을 울리거나 문명비판에 나서지싶다. 고전이 현대인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고전은 빠르게 움직이는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라고 한다.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어리석은 양 떼처럼 천 길 낭떠러지에 바치는 삶이라면 얼마나 어리석고 후회막심한 삶이던가. 잘 살고자 했던 삶이 불행의 저점에 이를지도 모른다. 오늘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에세이문예 실린 시를 읽으면서 송명화 수필가가 쓴 ‘환경의 지표’와 장자의 ‘고목사회’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결국 모든 질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있다고 하겠다.
내가 하는 대로 따라는 잘 하지만
어둠 속에 가면 금방 사라진다
신호음 받지 못하고 기억도 색깔도 없다
그냥 만나고 그냥 지나간다
살가운 정도 없이 세월을 딛고 간다
개에게 있는 사랑이 친척에겐 그림자
기차는 길가 꽃을 잘 알지 못한다
꽃은 뿌리의 마음 잘 알지 못한다
의미에 의미를 더해야 친척도 소중하지
- 주강식 <어떤 그림자>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 존재로서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면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사회적 존재로서 인격적인 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에는 존재의의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필봉을 휘둘러야 하는 시인에게는 더 더욱 사회의식이 중요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떻게 사는 삶이 보람되고 가치있는 것인지 하는 인생의 의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은 짤고 예술은 길다’고 하는 말도 문학의 본질 또는 시인정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톨스토이 등이 주장한 ‘인생을 위한 예술’도 역시 예술도 인생에 도움을 주어야 그 존재가치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주강식의 <어떤 그림자> ‘내가 하는 대로 따라는 잘 하지만/ 어둠 속에 가면 금방 사라진다/ 신호음 받지 못하고 기억도 색깔도 없다’라는 첫 번째 연은 주체성도 없을 뿐더러 힘듦을 싫어하고, 사회적 가치를 수용하지 못하는 개념 없는 사람을 ‘그림자’로 형상화하고 있다. 의미심장한 말은 두 번째 연의 ‘개에게 있는 사랑이 친척에겐 그림자’라는 것이다. 시인은 ‘개’와 ‘친척’의 대비를 통해 그림자 인간의 개인주의 또는 이기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그림자 인간들은 왜 생겨날까. 시적 화자는 세 번째 연에서 그 이유를 밝힌다. ‘기차는 길가 꽃을 잘 알지 못’하고, ‘꽃은 뿌리의 마음 잘 알지 못한다’는 대목이다. 시적 화자는 속도전 속에 또는 외양만을 쫓고 사는 현대인들의 삶 형태를 정조준함으로써 근시안적인 물신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오늘은 차 한 잔으로
해맞이 아침을 열고
주변을 돌아보니
사랑스러운 사랑초 꽃들이
여기저기 무더기 피었네
비탈과 평지 할 것 없이
오보록하게 모여
단란하게 사는 모습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네
나비 한 마리
발붙이기 어려운
작은 꽃일지라도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일세
- 김월강 <사랑초>
병든 지구를 구하려는 해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고, 사람마다 나라마다 제시하는 그 해법이 다를 수 있다. 세상을 구하려는 시인들도 마찬가지다. 월강은 승려시인이다. 조계사에서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물망초>란 시집 한 권만 달랑 들고 와 무소유를 실천하며 금정산 금어사에서 차시를 쓰면서 수행을 하고 있는 분이다. 차밭골이니 차도 있고, 산 밑이니 계곡도 있어 스님은 <차 한 잔 듬세>라는 첫시집을 내고, 호평을 받았다. 최근에 제2시집 <달 그림자>를 내고 지금 세평을 수집 중이다. 품어 안자니, 꽃 아닌 게 없다는 옛말이 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모든 풀이나 꽃이 사랑초가 된다는 세계관이 이 시에 잘 드러나 있어 감동을 준다. 월강의 자연관은 탈속이나 먼 이상향으로서의 요원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편재해 있는 이웃과도 같은 만연한 식물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시인은 인간중심주의 속에서도 자연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데 열심이다.
<사랑초>로 알 수 있듯이 자연친화적 생태의식이 깔린 월강의 시정신은 공생이라는 자연의 이법과 ‘더불어’라는 관계적 덕목이 내재된 화초에 흠씬 녹아 있다. ‘단란하게 사는 모습’은 어울림의 생태적 수월성을 나타낸다. 아침의 차 한 잔은 맑고 밝은 심신을 갖게 하니 보통 날보다 더 세상을 명징하게 볼 수 있다. 스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랑스러운 꽃들이 여기저기 무더기로 피어 있다. 왜 스님의 주변에만 사랑초가 많을까. 여기서 ‘사랑초’는 식물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스님의 사랑 가득한 시선을 의미한다. 비탈과 평지 할 것 없이, 모두가 더불어 함께하고 있으니 무척 행복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비탈과 평지’는 계급이나 계층을 나타내는 말이니, ‘비탈과 평지 할 것 없이’는 빈부 귀천이 없다는 뜻이다. 나비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작은 꽃의 여유 등 더불어 공생하고자 하는 동식물계의 협력관계와 자연의 이법이 잘 그려진 시라 하겠다.
아카시아 시리게 핀 5월이 오면
숲속 작은 집이 그립다
그 셀 수도 없는 탐스런 빛은
영문도 모른 채
신포리 떠나온 내 아버지의 서러움으로
울어 하얗다
초등학교 뒤 언덕배기 너머
아카시아 숲속 숨어있는 골짜기 그곳
자유 정의 이데올로기
생소한 그 개념들 아무것도 모른 채
까까머리에 교복 입은 소년
유월의 뜨거운 하늘 아래 던져졌지
남으로 남으로
밀리듯 떠밀려 내려와 보니
한반도 지도의 끝 토끼머리 구룡포
양철지붕 두드리는 빗소리
청년 아버지에게
전장의 북소리처럼 들렸으리라
술 한잔 곁들이신 날 밤
한 스민 어버지의 아련한 가락과
아이들 깰까 노심초사하시는
어머니의 가느다란 모기소리
가슴 아린 내 삶의 떠나지 않는 목소리다
내 속에 사는 울음이다
- 남현설 <구룡포리 771번지>
남현설의 <구룡포리 771번지>는 남현설 시인이 태어나 자란 고향의 추억을 소재로 한 시로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운다. 이 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스멀거리는 동란과 피난살이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절제된 정서를 깔고 있다. 고난의 세월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시적 화자의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 감동을 준다. 시적 화자는 시인이 된 지금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신포리를 떠나와 한반도의 지도 끝 구룡포에 둥지를 틀게 된 아버지의 삶을 따라가 본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까까머리에 교복을 입은 채로 남쪽으로 내려와 아카시아 숲속 골짜기에서 숨어지낸 아버지의 어두운 세월이 시적 화자에게 안타까움으로 꽃피었다. 폭격을 피해 숨어지내는 나날 속에서 아버지에게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전장의 북소리로 들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시적 화자의 가슴은 아프기만 하다. 시적 화자인 딸이 아버지가 두려워했을 심적 고통을 헤아린 것이다.
숨어지내는 입장에서 이데올로기고 뭐고 자유도 정의도 먹고 사는 이유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소년에게 전쟁은 공포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홀홀 단신으로 내려와 포구에 자리를 잡았으나 생계는 막막했을 터, 한스런 세상을 원망하며 늘어나는 것은 주량밖에 없었을 것이다. 약주 한 잔 끝에 새어나오는 한 많은 아버지의 가락과 어머니의 가느다란 모기소리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니, 추억의 힘이란 크다고 할 수 있다. 가난하게 살았던 시절의 풍경이지만 시적 화자가 결코 잊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암울한 추억이 한 편의 시로 형상화되었다. 아마도 시적 화자의 기억 속에 구룡포리 771번지는 앞으로를 살아나가는 데 큰 동력이 되리라 본다. 시궁이후공이라 했으니, 이런 쓰라린 경험은 시의 좋은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시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과정은 고난이었지만 그 어려웠던 부모님의 세월은 결코 잊지 않으리라는 자식으로서의 굳은 맹세가 담겨 있어 우리들의 누선을 자극한다.
Ⅲ.
시인이 세계를 인간화하고 그와 일체감을 이룰 수 없는 세계를 구분한다는 것은 그의 개성 전체에 관한 문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있으며 다양하다. 개인의 전체 인생사에서 보면 성장함에 따라 어린 시절부터 장년기에 이르기까지 시적 화자는 의미있는 많은 일과 만나게 된다. 이 만남의 양상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지속적인 자아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인간이 아닌 인형이 된 비주체의 그림자로 살아가서는 안 될 것이며 의식이 없이 남을 따라만 다니고 거수기 노릇만 하는, 세상이 발전하고 달라져야 하는 데도 맨날 옛날식만 고집하는 수구적 태도는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것이다. 장자가 말하는 고목사회는 지성을 요구한다. 수필가 송명화가 요구하는 것은 근시안적 사고가 아니라 생태적 합리성이다. 도구적 이성이 아니라 거시적 안목을 가진 지성인-되기를 요구한다. 우리 시인들은 모두 ‘문명과 개발이라는 깃발 아래서 신음하는 생물’들의 ‘아우성에 기꺼이 청진을 하고자 하는 명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세분화되고 복잡해진 현대사회는 그만큼 실제생활에서 인간에게 다양한 역할을 요구한다. 워렌의 말처럼 이런 다양한 역할은 지속적 자아감각을 파괴한다. 역할의 다양성이란 역할의 모호성이며 궁극적으로는 역할의 상실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인들은 동일성을 이룰 수 없는 세계의 요구에 맞추는 그런 무개념의 사람들이 아니다. 주강식 교수는 의식없는 어중이떠중이를 비판하고, 월강 스님은 생태적 상상력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길 원하고, 남현설 시인은 현재를 아무리 풍요롭게 살더라도 근본을 알고 과거를 잊지 않고 현재와 관련지어 삶을 살찌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었다. 이들의 내면에는 세계와의 교섭도 지속적 자아감각도 살아있다. 이들 시의 시적 화자는 위렌의 정의에 의하면, 자아개념의 활기찬 반영이며 체계화된 자아의 모델이다. 현대인은 변화를 본질로 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 살고 있다. 따라서 과거와의 일체감과 연속감은 점점 쇠퇴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시인들은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하나의 일관된 통일적 자아를 갖고 있어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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