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월계택( (象月谿澤)
조선 선조 때 문장으로 뛰어났던 ‘한학 사대가’를 달리 이르는 말. 상촌 신흠, 월사 이정구, 계곡 장유, 택당 이식의 네 사람 호를 한 자씩 딴 것이다. 누구의 호를 먼저 놓느냐에 따라 게택상월 또는 월상계택이라 쓰기도 한다.
신흠(申欽 1566~1628 )은 조선 인조 때의 학자로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ㆍ현옹(玄翁)ㆍ현헌(玄軒)ㆍ방옹(放翁). 선조의 칠신의 한 사람이며 정주학자로 유명하다. 선조와 사돈지간이다. 셋째 공주 정숙옹주와 장남이 결혼할 때 주위에서 좁고 누추한 집을 수선할 것을 권했지만 집이 훌륭하지 못해도 예를 행하가에 충분하다며 끝내 기둥 하나도 바꾸지 않을 정도로 청렴했다. 광해군 등극하자 파직되어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이조판서,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저서에 ≪상촌집≫이 있다.
桐千年老恒藏曲 (동천년로항장곡)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제 곡조를 간직하고
梅一世寒不賣香 (매일세한불매향) 매화는 일생동안 추위에 떨어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月到千虧餘本質 (월도천휴여본질)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 모습이 변치 않으며
柳經百別又新枝 (유경백별우신지)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조선 시대의 문신ㆍ한학자이며.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ㆍ보만당(保晩堂)ㆍ치암(癡菴)ㆍ추애(秋崖)ㆍ습정(習靜). 벼슬은 우의정, 좌의정에 이르렀다. 한문학의 대가로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중 한 사람이다. 저서에 ≪월사집≫, ≪서연강의(書筵講義)≫, ≪대학강의(大學講義)≫가 있다. 월사 이정구는 외교관으로서의 역량도 발휘하여 임진왜란 때 수차례 명나라를 오가면서 조선의 이익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가평에 있는 그의 묘는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될 정도로 잘 가꾸어져 있다.
장유(張維)(1587~1638)의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ㆍ묵소(默所). 시호는 문충(文忠).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웠고 정묘호란 때 임금을 수행하여 우의정에 이르렀다. 특히 문장에 뛰어났으며, 저서에 ≪계곡집≫, ≪계곡만필≫, ≪음부경주해(陰符經註解)≫ 따위가 있다. 장유는 당싱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정주학에서 탈피하여 양명의 양지철학을 단순히 관념과 사변의 차원이 아니라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제적인 대안으로 발전시켜 나갔을 뿐만 아니라 몸소 실천을 통해 이를 실현해 보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양명학을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한국적 양명학으로 새롭게 탄생시키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식(李植))(1584~1647)의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ㆍ남궁외사(南宮外史). 한학 4대가의 한 사람으로 이조 판서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에 척화파(斥和派)로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왔다. ≪선조실록≫을 전담하여 수정하였으며, 저서에 문집 ≪택당집≫이 있다. 이식은 광해군 때(1610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갔으나 인목대비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백아곡(白鴉谷: 현재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소재)에 택풍당(澤風堂)를 짓고 은둔의 삶을 살았다. 본래 이식의 집안은 율곡 이이의 학통을 이어받은 서인 계열의 핵심이었다. 훗날 서인 노론의 적통(嫡統)을 이은 우암 송시열이 자신의 스승인 사계 김장생과 더불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식을 거론할 정도였다. 이식이 벼슬에 나아간 광해군 시대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북인이 권력을 장악하고 서인 세력은 핍박을 받아 크게 위축되어 있을 때였다. 이 때문에 이식은 세상사로부터 물러나 거처할 곳을 찾으려고 『주역』의 괘(卦)를 살펴보았는데, 때마침 ‘택풍대과(澤風大過)’가 나왔다. 이 괘에는 ‘독립불구 둔세무민(獨立不懼 遯世无悶)’, 즉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피해 살면서도 걱정하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다. 이식은 이 괘와 구절이야말로 자신의 마음과 뜻에 꼭 들어맞는다고 여겨 자신이 거처하는 곳을 ‘택풍당(澤風堂)’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때부터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택당(澤堂)’이라고 불렀다. (퍼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