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시 22:22~26
제목: 가난한 자가 배불리 먹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 기독교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거룩하고 신령한 음료와 음식을 배불리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생하는 신앙입니다(시22:26).
개역개정)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새번역) 가난한 사람들도 “여러분들의 마음이 늘 유쾌하길 빕니다!” 하면서 축배를 들고,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
개역개정과 새번역은 같은 내용을 조금 다르게 번역을 했는데요. 둘 다 좋습니다. 시22:26의 겸손한 것은 마5:3의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요절인 시22:26 말씀을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마5: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
마5:6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예수님에 의해 배부를 것입니다. 신령한 것에 목마른 자들이 마시고자 갈망하는 음료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고전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
의에 주린 자들이 먹고자 소망하는 음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의에 목마른 자들이 갈급하여 마시고자 소원하는 음료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신령한 음료가 발원하는 반석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신령한 음식(떡)과 음료(생수)가 되신다는 대표적인 말씀은 아래와 같습니다.
요6:31.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참 떡은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고, 예수께로 나아와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신자는 신령한 떡을 배불리 먹고 신령한 음료를 시원하게 콸콸 꿀꺽꿀꺽 마실 것입니다. 이 모양을 잘 묘사한 것이 새번역의 내용이라고 봅니다(시22:26 가난한 사람들도 “여러분들의 마음이 늘 유쾌하길 빕니다!” 하면서 축배를 들고). 기독교 신앙의 즐거움은 생명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이 주신 신령한 음료를 축배에 담아 마시고 심령이 유쾌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신앙을 표지로 압축한 것이 성찬식인데요. 성찬식은 사람이 고안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친히 제정하신 성례입니다.
고전11:23.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시고 예수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시행하던 성찬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시행하고 전하며 선포해야 합니다.
● 오늘의 본문인 시22:22~26 문단을 보면 구약교회는 물론이고 신약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성찬의 모습을 그림처럼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시22:22.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3.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
23절에서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보고 덜덜 떠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외’라는 용어에 두려움의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녀가 어릴 때처럼 어리광만 부리는 것이 아니라, 장성하여 제법 어른스럽게 격식을 갖추고 아버지 앞에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서 사랑과 즐거움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잘 묘사한 말씀은 아래와 같습니다.
시2: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
떠는 것은 두려움이지만 아울러 동시에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경외함입니다. 하나님은 무자비한 폭군이 아닙니다. 참 성도들에게는 인자하신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에는 즐거움이 함께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함도 함께 합니다.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친밀한 자녀가 되는 양자의 영을 받은 참 성도가 참다운 경외를 합니다.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the Spirit of sonship)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
하나님께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그 모습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예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2:11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다른 번역본들로 보면 예배와 경배의 의미까지 확인해 볼 수도 있습니다.
공동번역) 경건되이 야훼께 예배드리고 두려워 떨며 그 발아래 꿇어 엎드려라. 새번역) 두려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여라. NIV) Serve the LORD with fear and rejoice with trembling. NASB) Worship the LORD with reverence And rejoice with trembling. |
공동번역의 “예배드리고”는 해석할 필요가 없고요. 섬기고 NIV의 “serve”하고 NASB의 “worship”하는 것도 예배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시2:11)은 곧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고, 예배에는 찬송이 있습니다.
시22:25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새번역) 주님께서 하신 이 모든 일을, 회중이 다 모인 자리에서 찬양하겠습니다. 내가 서원한 희생제물을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앞에서 바치겠습니다. |
회중이 다 모인 자리에서 찬양을 하는 것이 예배의 순서 중 하나인 찬송이고, 성도들 앞에서 약속한 헌금을 드리는 것도 예배의 순서로 포함될 수 있습니다. 서원한 희생제물을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앞에서 바치는 성도는 이전에 형편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주님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 받고 뒤늦게 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는 문제해결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었습니다.
시22: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
그가 울부짖으며 간절히 기도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알고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22:22~26 문단에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들인 기도, 찬송, 말씀의 선포(22절), 헌금 및 성찬 등이 다 포함되어 이상적인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거룩하고 신령한 음료와 음식을 배불리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앙이 기독교의 예배이고, 더 함축적으로 요약하면, ‘경외함’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댓글 오늘의 묵상은 본문을 중심으로 읽으시면 더욱 도움이 됩니다. 첨부한 주석이나 추가댓글은 예외적, 부가적 참고 정도만 하셔도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공감합니다.
<호크마 주석>, 시편
=====22: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 `주의 이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로 인한 구원의 역사를 강조하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20:1 주석을 참조하라. 그리고 `형제'는 여호와를 경배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의미한다. 한편, 본절은 히 2:12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구절인데, 이 경우에 형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을 일컫는다.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 `회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할'(* )은 회집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이다(35:18; 출 16:3; 레 4:13-21; 민 10:7; 15:15; 20:6). 이들의 특성은 여호와를 찬송하며 경배하는 것이다.
=====22:23
본절에 언급된 세 구절은 서로 평행 대구를 이루고 있다 - 여기서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해야 함을 강조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고 의지하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며 환난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기 때문이다(21절).
=====22:24
그는...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윗이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체험했음을 엿 볼 수 있다. 즉, 전에는 밤낮으로 기도하여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으나(2절), 이제는 하나님의 응답을 이미 체험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체험이 그에게 찬송의 근거가 되고 있다(Kraus, Craigie). 한편 `곤고한 자의 곤고'에서 `곤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니'(* )는 `가난'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용어이다. 하지만 가난의 의미는 본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서 `아니'(* ) 는 앞에서 다윗의 호소한 바 있는 극도의 고통을 의미하는 말이다(1, 14-17절).
=====22:25
대회 - 문자적으로는 `큰 회중'(* , 카할 라브)이다. 이는 절기 때에 모인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數)를 가리킨다(Kraus).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 이는 찬송시 내용을 일일이 하나님께로 부터 계시받아 작성하였다는 뜻이 아니고 그의 찬송의 모든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는 뜻이다. 즉, 구원의 근거가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부터 그의 찬송이 흘러나오게 되었다는 말이다(Briggs, Lange).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 다윗은 고난 중에 감사제(레 7 :15, 16)를 서원한
것 같다(Lange, Kraus). 이제 모든 고난에서 벗어난 후, 다윗은 이전의 서원을 갚고자 했다. 그런데 혹자는 `서원'을 단순히 헌신과 일치시켜 생각하였으나(Rawlinson), 이는 다음 절에 기록된 감사제의 의식들에 비추어볼때 비합리적이라고 보여진다.
=====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 `겸손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윔'(* )은 24절의 `곤고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니'(* )의 복수형으로 여기서도 `곤고한 자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곤고한 자는 악인에게 억압받는 의인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후자는 `아나윔'을 `가난한 자'로 번역하여 다윗이 과부나 고아 등 가난한 자들을 초청해 이 감사제에 동참하게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Delitzs ch, Lange). 그러나 본 구절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라는 예수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 다윗이 의를 끝까지 좇은 자들에게 복을 비는 장면이다. 한 조각의 음식이 저들의 마음을 영원히 살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본 구절은 앞 구절과 함께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 구절을 주의 성만찬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당하신 희생의 살과 피를 나누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에 대한 예언으로 본다(Delitzsch, Rawlinson). 그러나 본 구절은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본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의의 원리를 따를 때 영혼이 소생할 것을 예표하는 구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렘 15:16; 겔 3:1-3, Lange). 이렇게 볼 때 `너희'는 단순히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 곧 경건한 무리들을 가리키는 것이다(Kraus). `여호와를 찾는 자' 란 표현이 그와 같은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장코뱅 묵상 본문과 큰 흐름이 비슷한 것 같고, 좋은 추가 설명 같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박윤선 주석>
시 22: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 여기서 이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을 얻은 뒤에 할 일을 서원한다. 그가 이때까지 하나님의 은고를 기구한 목적은, 결국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신본주의 신앙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귀절을 그리스도에 관하여 인용하였다(히 2:12).
시 22: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혜를 인하여 모든 경건한 백성도 찬송해야 될 것을 말한다. 리델보스(J. Ridderbos)는, 여기서 성도들의 교제를 발견하고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도들 중 하나에게 하신 일이 결국은 그 전체에 의미를 가진다"라고 하였다(Hier is de gemeenschap der heiligen: hetgeen Hij aan een der zijnen doet heeft betekenis voor allen.-De Psalmen I, p.195).
시 22: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 히브리 원문에는, 이 귀절 초두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 =키)이 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앞절에 말한 모든 성도들이 찬송할 이유를 말한 것이다. 여기 "곤고한 자"(* =아니)는 다윗과 같이 핍박 받은 성도를 가리킨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장차 그를 도와 주실 일에 대하여 과거사(過去事)와 같이 확신한다.
시 22:25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 곧, 다윗이 그 환난 중에서 받은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 만큼, 그가 그 환난 때에 서원하였던 것을 이행하겠다는 말이다. 신자들도 혹시 자기들의 받은 축복이 자기들 자신 혹은 다른 사람들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잘못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큰 죄악이다.
시 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 여기 "겸손한 자"란 말과
"여호와를 찾는 자"란 말은 다 같이 경건한 신자를 가리킨다. "먹고 배부를 것"이란 말씀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으로 만족할 것을 비유한다.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란 말씀은 영원히 복된 영적 생명의 풍족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결과인 영적 혜택을 영원히 누림이다.
@장코뱅 박목사님 주석 내용은 간단해서 나름 좋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매튜 헨리 주석>, “마5:3-6”
과연 복 있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3절). 겁 많은 심령(poorspiritedness, 역주:심령이 가난한 - poor in spirit와 비슷한 단어로 구성되어 있음)은 사람들을 축복 받는 것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므로 죄와 덫 ─ 비겁과 천박한 두려움, 정욕에 대한 자발적인 굴복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심령의 가난은 영혼의 은혜스러운 성벽이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게 되는 것이다.
1. "심령이 가난한"이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면 기꺼이 세상적인 부귀를 비울 수 있는 완전히 가난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낮은 조건일 때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조건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세상에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교만하고 불평하며 운명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빈곤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하며, "비천에 처할 줄도"(빌 4:12) 알아야만 한다. 우리에게 가난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만족해야 하며 그 불편은 계속적으로 참아야 하며,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하며, 그것을 최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세상적인 부귀에 무관심하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그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번영하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닥쳐올 손실들과 실망을 즐겁게 참는 것이다. 그것은 특별히 가난을 서약하지만 국가들의 부귀를 독점하는 로마 교회에 있는 자들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제공한 것을 팽개쳐 버림으로써 교만과 위선으로 자신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에서는 부요하다고 할지라도 "심령은 가난"해야만 하며, 즉 가난한자의 위치에까지 낮아져서 그들의 연약함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그들을 동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가난을 기대하고 준비해야만 한다. 과도하게 두려워하거나 그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가난이 특별히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에게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을 환영해야만 한다(히 10:34). 욥은 "심령이 가난한 자"였으므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취해갔을 때"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2. "심령이 가난한"이란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겸손하고 비천한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무엇을 가지든지,
하든지 자신을 비천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약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자나 교만한 자와는 반대되는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견으로 어린아이와 같으며 연약하고 어리석고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것이다(18:4; 19:14).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자신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였다(계 3:17). 즉 그들은 "정신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심령은 부요"하였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은사와 은혜 면에서 있어서 매우 탁월하여 "정신적으로는" 부요하였지만 "심령은 가난하였으며," 자신을 "사도들 중 가장 작은 자"나 모든 성도들 중 제일 못난 자, 그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여겼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지극히 멸시하는 자로 보며, 남을 가치 있게 여기며, 자신을 그들보다 낮은 자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선을 행하기에는 값싸고 비열하고 보잘 것 없는 자로 기꺼이 자처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위대하시며
우리는 비천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그는 거룩하시고 우리는 죄스러우며 그는 모든 것이고 우리는 하등의 보잘 것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그 앞에서, 그의 능력 있는 손아래에서 겸손히 낮추는 것이다.
3. "심령이 가난한"이란 우리 자신의 의로움과 능력은 결코 신뢰하지 않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창의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할 수 있으며, 우리의 성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를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 세리가 가난한 죄인에게 긍휼을 부르짖었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곧 이 "심령의 가난"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가난하다고 불러야만 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부족하며, 언제나 하나님의 문에서 구걸하며, 언제나 그의 집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1) 이 심령의 가난은 기독자의 은혜들 중에서 맨 처음에 두어졌다. 철학자들은 겸손(비천)을 그들 중의 덕 중의 하나로 취급하지도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그것을 맨 처음에 두고 있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그의 학교에서 처음으로 배우는 과목이며, 심령의 가난은 첫째 복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그 밖의 모든 축복들의 기초는
겸손(비천)을 그들 중의 덕 중의 하나로 취급하지도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그것을 맨 처음에 두고 있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그의 학교에서 처음으로 배우는 과목이며, 심령의 가난은 첫째 복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그 밖의 모든 축복들의 기초는 겸손(비천)에 놓여져 있다. 높이 세우려는 자는 낮게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복음적 은혜를 위한 맨 처음의 두드러진 준비이다. 그것은 씨를 받아드리는 데 알맞는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다.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이며,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쉼을 얻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복이 있다." 그들은 현재 이 세상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은혜스럽게 여기신다. 그들은 그의 작은 자이며 그들의 천사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더욱 더 은혜를 주시며, 그들은 최고의 안전한 생을 영위하며 편안함을 가지며, 그 어떤 것도 그들을 잘못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교만한 영혼은 언제나 불안하다.
(3)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라." "은혜"의 왕국은 이와 같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만이 "가난한 자의 모임"(시 74:19)이라고 불리우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 되기에 적합하다. "영광"의 왕국은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들 자신에 겸손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낮추실 때 그에게 응하는 자는 이와 같이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크고 높은 심령들은 "세상의 왕국"의 영광을 취하지만 겸손하고 온유하고 순종하는 영혼들은 "하늘의 왕국"을 얻는다. 비록 부자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부귀를 가지고 선을 베푸는 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늘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차 올 때를 위하여" 좋은 담보물을 이와 같이 쌓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행을 할 수 있는 자금을 가지지 않는 가난한 자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물론 동일한 행복이 유용하게 부요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가난한 자들에게 약속되어 있다. 만일 내가 만족하게 그를 위하여 돈을 쓸 수 없으며 부족하다면 그것도 보상 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때에 우리는 좋은 주인을 섬기지 않는가?
@장코뱅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백인백색의 어설픈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참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심령이 가난한 성도들일 것입니다.
@노베 네, 매우 공감합니다.
고전10:4
<호크마 주석>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 - '따르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두세스'(* )는 미완료형으로서 계속적으로 뒤따랐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몇몇 주석가들은 바울이 랍비들 사이에서 전해져오는 우화를 인용하였다고 주장한다(Ruckert, Baur, de Wette, Meyer). 그 우화에 의하면 14피트 높이의 바위 덩어리가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다니며 물을 뿜어냈다고 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러한 전설을 근거로 해서 교회를 가르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반석'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트라스'(* )는 움직일 수 있는 바윗 덩어리를 가리키는 '페트로스'(* )와는 달리 움직일 수 없는 고정된 암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물질적인 바위 배후에 그 물의 참된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마셨으매 - 앞 문장에서의 '마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온'(* )은 부정 과거로 마신 것이 과거 사실이라는 점에 역점을 두는 반면, 본 구절에서의 '마셨으매'(* , 에피논)는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마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적인 방법을 통하여 메마른 광야에서계속 물을 공급받았으며 그 공급의 근원은 바로 그리스도였다. 바울은 구약 시대에나 신약 시대에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의 떡이며 물이심을 강조하고 있다(요 6 : 31, 32). 주께서는 배고픔과 갈증으로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시급했던 음식과 물을 제공 하셨다(요 7 : 37-39). 마찬가지로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신령한 음료'와 '신령한 식물'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바울은 주지시킨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 바울이 그리스도를 반석에 비유한 것과 같이 신 32 :4, 15, 18등에서는 하나님을 반석에 비유하고 있다. 이사야는 여호와를 '능력의 반석', '영원한 반석' 등으로 표현하는데(사 17 : 10 ; 26:4) 이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임이 분명하고(요 12:41) 본 구절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미 선재(先在)하셨음을 뒷받침하는 구절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의 신령한 반석이셨던 여호와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과 동행하셨으며
그들의 구원자였다.
@장코뱅 카페에서 칼빈 왈, 그리스도가 여호와시라는 기강 내용을 보았는데 흐름이 비슷한 좋은 설명 같습니다.
@노베 네, 읽었습니다. 호크마의 설명도 참 좋네요.
가난한 자가 배불리 먹고 축배를 들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멋진 그림을 그려주는 복음의 묵상에 대해 매우 공감합니다.
네, 축배와 축제 같은 신령한 예배를 상상하고 고대합니다.
@장코뱅 아멘!
오늘 본문 시 22:22~26이 예배와 성찬을 함축적으로도 보여 준다는 말씀이 잘 와닿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곧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예수님께로 와서 배불리 먹고 마시며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 하늘나라의 기쁨이요 복음의 능력이군요.
마음이 교만하여 자기를 높이고 부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공급하시는 하늘의 신령한 음료와 빵을 먹지 못할 것이고, 영적인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 유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물과 음식인데, 그와 같이 영혼의 생명 유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신구약에서 줄기차게 말씀해오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가장 좋은 말씀, 떡과 물을 성경을 통해서 공급받아 기쁨과 능력이 충만한 삶을 살아야겠고, 성도 간에 서로 축복하고 사랑하는 기운이 넘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약을 잘 해주신 것 같습니다. 풍성한 댓글에 공감합니다.
매우 공감합니다22
오늘도 좋은 묵상을 읽고 깨달음과 은혜를 받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