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목이 탄다. 이글거리는 복더위의 열기 때문이 아니다. 고뇌와 기쁨이 정제되어 말갛게 빛나는, 사근사근 다가오는가 싶으면 어느새 아뜩한, 글을 향해 태우는 목마름이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글 길에의 가슴앓이다.
그 글길 어디쯤에서 축제의 문이 열린다. 이런 선언문을 들어본 적 있는가. ‘수필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음성이다. 진지한 삶을 돌아봄이다. 수필을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고, 가슴에 불꽃을 태 울수 있다. 강과 바다를 찬란히 여울지게 할 수 있으며, 인류의 화해와 자연과 신과의, 만남도 이룰수 있다….’ 낱낱의 음소들이 모여 반짝이는 단어가 되고, 절이 되고, 구가 되고, 마침내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차려진, 오늘 잔치의 첫 마당이다. ‘수필의 날’ 축제는 이처럼 정갈하고 결연한 문(文)으로 고대하던 문(門)을 열었다. 연다는 것, 열린다는 건 침체하지 않는 것이며 나아갈 가능성일 수도 있겠다.
조용히 가슴이 떨린다. 야단스럽지 않으면서도 열기 펄펄한 지금 여기는 어디인가. 천년 신라의 역사가 면면히 흐르는 고도(古都),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백 주년 기념관에서 오늘은 ‘열세 번째 수필의 역사를 짓는다.’ 키 작은 아이가 드높은 곳을 우러러 한사코 발꿈치를 세울 때처럼, 어쩌면 이곳을 향해 짐을 꾸릴 때의 두근거림으로 잔치는 이미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까마득한 대선배에서부터 가까스로 문단 말석에 발을 걸친 후배들까지 수백 명이다. 세상의 하고많은 일들, 젖혀 놓은 채 수필이라는 글 향기에 스스로 끌려든 사람들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총총히 들어섰는데 아하, 온몸의 촉수는 유서 깊은 도시의 분위기에서부터 가만히 젖어 든다.
깊고도 긴 세월의 흐름을 간직한 고도는 진중한 글과 상통하는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은연한 문향(文香)이 풍겨 오는 듯하다. 무늬만 글쟁이라 하여도 마음이 아늑해진다. 역사의 고장답게 찬란했던 한국 불교를 대표하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우뚝한 불국사를 거쳐, 세월을 품고 누운 왕릉이며 수많은 유물과 유적들이 자리를 지키는 곳곳을 둘러보느라 분주했던 발길도 수굿해진다. 세상의 속도는 아랑곳없이 도시를 감도는 고고한 기운은 장소에도 격이 있음을 느낀다. 문득, 글에서도 그윽한 품격을 지닌 글이 수필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축전의 장이 훈훈하다. 고독한 글 길에서의 동지애일까. 각인각색의 얼굴에 억양이 다른 말씨에도 반가움은 어쩌지 못한다. 무작정 한 호흡으로 어우러진다. 각별한 곳의, 분위기에다 글 벗들의 정겨움까지 더하여지니 잔치는 절로 흥이 날 수밖에. 건조한 생활인의 계산과 술수와 음모, 우울과 슬픔은 이 순간 빌붙을 틈이 없다. 공통분모를 가진 ‘우리’란 팽팽한 세상 줄 위에서의 위안이며 서로를 추스르는 힘이기도 할 터이다. 우리의 향연은 그래서 더욱 출렁인다.
잔치의 기운이 점점 고조된다.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연세로 ‘올해의 수필인 상’을 받으시는 선생님께 축하와 존경을 담아 힘껏 손뼉을 치는데 후루룩, 내 가슴을 흔드는 소리가 있다. 글 길 에서나 인생길에서나 대선배이신 분들의 그런 열정에 따를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도 솔직히 자신이 없다. 모든 일에서의 기본은 성실일진대, 흉금을 적시는 글과 타인의 눈에 빛나 보이는 삶도 그 안쪽은 성실과 치열함 아닐까. 상이 주는 허명보다 뜨거운 ‘치열함’에 진정으로 박수를 보낸다.
향연이 무르익는다. 색소폰 밴드의 연주음이 감미로운 바람으로 장내를 스민다. 열세 번째 수필의 역사를 짓는 날, 천년 고도 경주의 저녁은 음악과 글 향으로 더욱 깊다. 세월을 품었으나 너무 무겁지 않으며, 소리를 품되 가벼이 드러내지 않으면서 마음을 안온하게 감싸 안는 글은 얼마나 감동적인가. 가끔은 겨자 맛처럼 톡 쏘거나 청양고추처럼 화끈하고 아찔한 맛으로 생기를 건져 올려 주는 글은 또 얼마나 상큼한가. 어느 수필가는 ‘온몸으로 소리를 가두었다가 육신을 덩덩 울려서 사람의 심금을 흔드는 종이 수필일 것이다.’라고 했다.
다시 내 수필을 생각해 본다. 은혜의 종소리는 언감생심, 행여 섣부른 치기들일랑 가라앉히고 또 가라앉혀서라도 쟁쟁거리는 꽹과리 소리만은 면해야겠다는 간절함이 있다. 내게 붙여진 가당찮은 이름도 되뇌어 본다. 수필가, 화려하거나 쌈빡하거나 그리 근사하진 않아도 소탈하고 수더분하게 다가오는 이름이다. 날카로운 빌딩들이 빽빽한 현대 도시보다는 아무래도 수많은 시간이 응축된 고도(古都)의 완만함을 닮은 글이 수필이지 싶다. 그 은근한 멋과 온기와 섬세함에 깊숙이 젖어 가는 사람들이 수필가일 게다.
그래서일까. 고즈넉한 옛 도읍의 한때, 수백 명, 글쟁이들이 어울린 하모니 속에 가만가만 타오르는 불꽃을 읽는다. 예술가의 피는 모름지기 뜨거워야 하고 심장은 말랑해야 할 터. 혹 험난한 세상 곡예로 닫아걸었던 마음의 문(門)이 있었다 한들, 조용히 그러나 사정없이 타오르는 문(文)의 불꽃에 소리 없이 열리고 말았으리라.
그 불씨 하나 소중히 가슴에 옮겨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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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잘읽고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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