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 호서유학 변천의 자취를 찾아 (3)—①
— [국제퇴계학연구회] 제5회 유교문화 유적답사
2022.08.25.(목)~08.27.(토) (3일간)
* [호서유학의 유적 답사] (제3일) 8월 27일(토요일) 오전
▶ 속리산 법주사 마을 연송호텔에서 아침을 맞았다. 오늘은 호서유학 답사 3일째이며 마지막 날이다. 오늘의 일정은 먼저 충청북도 보은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을 탐방하고,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화양계곡’을 찾아 만동묘 등 송시열의 유적지를 돌아본 후, 충주의 ‘팔봉서원’―제천의 ‘한수재 황강영당’을 탐방한 후, 퇴계 선생이 귀향길에 지나가신 ‘청풍(문화재단지)’를 경유하여 제천의 의병장 유인석의 유적지인 ‘자양영당’을 돌아보는 것이다.
☆ 이광호 박사의 심신건강법 ☆
퇴계 선생의 활인심방(活人心方)을 중심으로
▶ 새벽 6시, 연송호텔 207호실에서 우로 이광호 선생의 ‘심신건강법’ 실습이 있었다. 같은 방을 쓰는 조긍호 교수를 비롯하여, 황상희 박사, 이중환 선생, 황연섭 박사 그리고 필자가 참가하여, 이광호 박사의 시연(試演)에 따라 ‘심신건강’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다음은 그 내용을 정리하 것이다.
¶ … 현대인은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흔히 과학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대상화되는 모든 것은 알 수 있지만, 대상화 되지 않는 마음은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나 마음은 몸의 주인이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기다운 삶을 살지 못하며 자기답게 살지 못하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없다. 모든 생명은 다층구조이다. 특히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몸과 기운과 마음의 구조이다. 내가 하는 운동은 몸운동, 기운동(도인술), 마음운동으로 이루어진다.
퇴계 이황은 명나라 주권(周權, 1378~1448)이 쓴 《활인심법》을 필사하여 즐겨 읽고, 책의 제목을 《활인심방(活人心方)》이라고 써서,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활인심방》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성인(聖人)은 병이 나기 전에 다스리고 의사(醫師)는 병이 난 뒤에 다스린다. 병이 나기 전에 다스리는 것을 ‘마음을 다스린다’고 하고 또는 ‘수양(修養)한다’고 한다. … 사람이 수양을 하는 데 이 책을 사용하면 신선이 될 수 있다. 하물며 오래 살지 않겠는가.”
1. 몸운동 * : 15단계의 몸운동을 시연하고 실습했다.
2. 기운동 * : 도인법(導引法)으로 몸 안의 기운을 인도(引導)하여 소통시키는 방법 16가지 동작으로 실시한다.
3. 마음 다스림[治心法] ; 마음은 몸의 주인이다. 마음이 중심을 잡지 않으면 온갖 잡스러운 것들이 침투하여 육체를 망가뜨린다. 마음은 신명(神明)이다. 신명인 마음이 항상 자신의 주인이어야 한다. 그러면 오장육부가 제대로 움직이며 몸의 기운이 맑아져서 병이 나지 않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다. ― * ‘몸운동’ 15단계와 * ‘기운동’ 16단계는 별도 〈유인물〉에 자상하게 정리되어 있다.
* [활인심방의 활용 사례] ☞
퇴계의《활인심방(活人心方)》은 몸과 마음에 활기를 넣어주는 방법을 담은 책으로 예방의학적 측면이나 심신단련 및 경락자극운동 등이 담겨 있다. 연세대 원영신 명예교수가 30여 년간 퇴계의 양생도인법(養生導引法)을 응용하여 K-양생체조라는 건강운동프로그램을 만들어 세계 각국을 돌며 강습회 개최 및 국제학술대회 등을 통해 세계에 알리고 있다.
원영신 교수는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며, 그릇이 비뚤어지면 마음도 비뚤어진다. 그러므로 몸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퇴계의 말씀은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며 그의 철학인 이기론(理氣論)에서 인간의 심(心)과 신(身)의 조화, 즉 마음과 몸의 균형 있는 조화를 올바른 인간상으로 본 교육철학으로 해석한다”며 “퇴계가 ‘신체는 인성교육의 수단이자 출발점’이라고 시사한 것은 교육의 3요소로 체(體)·덕(德)·지(知)를 강조한 서양의 존로크(1632~1704)보다 1세기 앞섰다”고 말했다.
○ 정이품송(正二品松)
속리산(俗離山)은 한반도 중심부에 우뚝 솟은 백두대간의 산줄기로, 장엄한 산세를 지니고 있다. 특히 푸른 소나무와 용출하는 암봉들이 줄기차게 이어진다. 속리산은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고, 한강(괴산 남한강)과 낙동강(상주) 그리고 금강(보은)이 발원하는 곳이다. 속리산의 거봉과 울창한 수림의 품안에 보은의 천 년 고찰 법주사(法住寺)가 있다.
법주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장대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세월을 받들고 있다. 정이품송(正二品松)이다. 수령 600년이 넘는 이 노송은 마치 거대한 우산을 펼쳐놓은 듯한 우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정이품송은 1962년에 천연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1464년 조선의 세조 임금이 앓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법주사로 가던 중이었다. 임금의 행차가 이 소나무 곁을 지나려는데 긴 가지가 옆으로 늘어져 임금이 탄 연(輦, 가마)에 걸리게 되었다. 이를 본 한 신하가 연(輦)이 걸린다고 소리를 치자, 소나무는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 올려 임금 일행을 무사히 지나가게 하였다.
며칠 후, 법주사에서 돌아오던 임금 일행은 다시 이 소나무 곁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세조는 이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세조는 이를 기특하게 여겨 소나무에 정이품(지금의 장관급)이라는 큰 벼슬을 내리고, 그 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정이품송이라 부르게 되었다. — 오랜 세월 탓인가! 오늘 바라본 정이품송은 그 성성하던 가지들이 부러져 나가고 전체적으로 많이 쇠약해져 보였다.
600여 년 수령만큼이나 풍파가 느껴진다. 1980년대만 해도 특유의 원뿔형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후 왼쪽 앞 가지는 1993년에 강풍으로, 왼쪽 상부 가지는 2004년 폭설 피해로 훼손됐다. 그래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올곧고 우아한 자태만은 그대로다. 인근 서원리에 있는 정이품송의 부인 나무 ‘정부인송’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 2004년 두 나무를 인공 수분시킨 후계목들은 충북 산림환경연구소에서 자라고 있다
○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 예전에는 보은에서 법주사로 가는 길은 말티고개 열두 구비를 돌아 돌아 넘어야 했다. 지금은 동학터널-속리터널과 함께 새로운 도로(37 국도)가 생기면서 주요 교통로가 되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37번 국도 연변에 있다. — 기념공원의 주차장에는 풍채 좋은 현지의 해설사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친절하게 해설을 해 주었다.
37번 도로 동학터널 가까운 북실(마을)[鍾谷]에 동학농민기념공원이 있다. ‘북실’은 보은읍에서 보청천을 넘어 속리산 방향으로 가는 성족천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 북실은 1894년 겨울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 민보군의 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학살당한 현장이다.
동학농민전쟁과 북실전투
1894년(고종 31) 전봉준이 주도한 전라도 고부의 농민항쟁을 계기로 탐관오리의 폭정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일어나, 전면적인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이후 9월 초에는 동학을 종교적 차원을 넘어 사회 개혁의 중심세력으로 세우려는 전라도의 남접농민군이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을미사변]을 계기로 봉기하면서 교주 최시형(崔時亨, 1827~1898)도 9월 18일에 봉기하였다. 외세의 침략과 부패한 탐관오리들의 횡포로 인해 백성들이 삶은 더 피폐해졌으니, ‘사람이 하늘이다’[人乃天]라는 동학(東學)의 평등사상이 민중들 마음속에 파고들기 시작하여 그 수탈에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농민들이 죽창을 들고 봉기한 것이다.
전라도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군이 남접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치열하게 치렀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결국 패배하고 나서, 순창에서 최시형을 만난 뒤 충청도로 북상하였다. 보은은 동학의 대도소가 있는 곳이다. 1894년 12월 7일 장거리 행군 끝에 보은의 장내리 ‘대도소’에 도착한 농민군은 마을 전체가 불살라진 모습을 보고, 즉각 보은(報恩) 읍내로 들어가 보복하고 북실[종곡]로 들어갔다. 눈이 내리는 한겨울이었다. 충북 보은의 북실(마을)은 이렇게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본거지가 되었다.
북실에 들어온 동학농민군들은 춥고 장거리를 행군했던 터라 다들 지쳐있는 상황이었는데, 일본군과 상주·옥천 민보군이 야음을 타고 동학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그렇게 8시간 동안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농기구를 들고 저항한 동학농민군 2,600명이 사살 당하고 말았다. 추위에 도망갈 힘도 없던 수많은 동학농민군은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받고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날 북실에 쌓인 눈은 살해당한 사람들의 붉은 피로 얼룩졌다.
이 전투에서 북접농민군이 크게 패배하여 해산하였으며 교주 최시형(崔時亨)과 손병희(孫秉熙, 1861~1922)는 충북 음성 방면으로 도피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탐방
보은군 보은읍 종곡리에 있는 동학농민기념공원은 1894년 북실전투에서 전사한 2,600여명의 동학 농민군의 넋을 기리고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높이기 위해 전투 지역에 건립된 공원이다. 공원은 약 3만평 규모의 부지에 조성되었으며 2015년에는 동학농민군위령탑을 건립했다.
▶ 개천(성족천)을 따라 이어지는 길목 안내판에, 붉은 색으로 쓴 시 〈북실의 진달래〉가 마음을 아프게 울린다.
북실 이곳에
살과 뼈를 묻고 맺힌 한을 묻고
감을 수 없는 붉은 눈
진달래여 진달래여
식지 않은 더운 가슴이여’
그 옆으로 커다란 새알같은 타원형으로 다듬은 바위가 즐비하게 세워져 있다. 바위 하나하나에는 보은의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해 놓았다.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청일전쟁의 발발〉—〈전쟁 참화에 시달린 백성들〉—〈보은의 동학의병 봉기〉의 내용이 차례로 담겨 있다.
▶ 개천(성족천)의 다리를 건너면 본격적인 공원의 영역이다. 다리 건너 길목에 장승이 즐비한 데 각각 ‘守心平氣(수심평기)’, ‘輔國安民(보국안민)’, ‘用時用活(용시용활)’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그리고 길을 따가 가면 공원 안에는 좌측으로 성벽이 둘러싸고 있고 성벽 아래에는 ‘동학농민혁명군 추모가’, ‘용담가’, ‘새야 새야 파랑새야’ 등의 자연석 비석이 세워져있다.
전봉준 유시(遺詩) 〈운명(殞命)〉도 있다.
時來天地皆同力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
運去英雄不自謀
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 무슨 허물이랴
愛國丹心誰有知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공원의 광장 입구의 자연석 돌비에 〈동학농민혁명군 12개조 폐정 개혁안〉을 새겨 놓았다.
‘1. 동학도는 정부와 원한을 씻고 시정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을 징벌한다. 5.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차별을 폐지하고 백정들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7. 청상과부의 개가흘 허용한다. 8. 무명의 잡세를 일체 폐지한다.…’ 등이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이러한 개혁안을 내세운 동학군을 왜군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살육(殺戮)했다.
▶ 동학농민군위령탑으로 올라가는 긴 계단의 벽면에는 ‘보은취회 문서’와 백범 김구 선생이 동학혁명군을 이끌고 격전을 벌였던 ‘해주성을 담은 사진’, ‘동학 농민군이 싸우는 모습’, ‘무명 동학 농민군의 편지글’이 새겨져 있다. 답사단 일행은 산록에 우뚝 솟은 위령탑 앞에 올라가 혁명동학농민군의 넋을 기리며 참배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천·지·인은 하나! 사람이 곧 하늘이다.’ — 이곳 충청북도 보은(報恩)은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이 조선정부의 탄압을 피해 몸을 숨긴 채 동학을 전파했던 중요한 근거지로, 1893년 3월 전국에서 온 수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반외세·반봉건 정치집회인 ‘보은취회(報恩聚會)’를 가졌던 곳이며, 북접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최대 항전인 수많은 농민군이 일본군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한 통한의 역사의 현장이다.
나라 안팎의 위기가 날로 높아가던 1860년 경상도 경주에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는 후천개벽 사상과 함께 마음속에 신령한 하늘을 모신 존재인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東學)을 창도하였다. 보국안민(輔國安民)·제폭구민(除暴救民)·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를 내세운 동학(東學)은 신분제도를 전면 부정하고 근대적 인권을 주창하여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으나 조선 정부는 이를 철저히 금지하고 탄압했다. 급기야 최제우는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되고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에 의해 동학은 이곳 보은에서 다시 꽃피웠다.
저마다 하늘님이 되는 세상을 위하여
갑오년 동학농민군의 기록·1
1894년 11월 손병희(孫秉熙) 통령 지휘 아래 논산으로 내려온 우리 농민군은 전봉준 부대와 연합하여 공주로 진격했으나 노성을 지날 때, 진눈깨비가 내리는 가운데 목천의 동학농민군 일곱 명이 처참한 몰골로 연합부대를 찾아왔다. 서울로 가는 길목을 선점하고자 가파른 산등성이에 군량미와 무기를 숨겨두었던 목천 세성산 근거지가 관군의 기습을 받아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인과 웅치, 효포전투를 시작으로 동학농민군은 우금치 능선을 오르내리며 관군과 일본군과 밤낮없이 혈전을 벌였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쏟아지는 왜군들의 포탄과 총탄에 머리통이 깨어지고 가슴팎이 찢기고 팔뚝이 떨어져 나갔다. 우리 농민군들의 주검들이 골짜기마다 겹겹이 쌓여갔다. 찢겨진 깃발이 나부끼는 겨울나무 가지 사이로 개걸스럽게 날아오는 까마귀떼 … 우리 동학농민군은 피눈물을 흘리며 후퇴를 거듭했다.
무너진 하늘, 이 깊은 역사의 겨울을 넘어
갑오년 동학농민군의 기록·2
석 달만에 다시 밟은 보은 땅, 덜컥 내려앉은 하늘에서는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금치에서 물러나 후퇴를 거듭하던 우리 농민군은 11월 25일과 26일 이틀간 전라도 원평과 태인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또다시 패배하여 전봉준 장군과 손병희 통령이 연합부대를 해산했다. 우리 농민군은 터지고 찢겨나간 살가죽에 솔잎을 짖빻아 붙인 채 태인에서 정읍으로, 입암으로, 순창, 임실, 장수, 무주, 황간, 영동을 거쳐 수많은 전투를 치루면서 용산, 청산을 지나 보은에 돌아왔다.
우리가 돌아온 보은에는 관군들이 부숴버린 장안마을 폐허의 초막들과 살갗을 저미는 매서운 추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삼문을 부수고 보은 관아를 점령한 우리 부대는 일본군과 민보군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다는 척후병의 전갈을 받고 북실마을로 이동했다. 날이 저물고 눈보라가 더욱 거세지자 모닥불을 지피고 얼어붙은 몸을 서로서로 기댄 채 온기를 아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폭설과 한 치 앞도 분간할 구 없은 흰 어둠이 온 마을 뒤덮었다.
1894년 12월 18일 꼭두새벽, 마을 둘러싼 산자락에서 적들의 총구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최후의 결전! 골짜기마다 까마귀에게 눈알을 빼앗기고 무참하게 쓰러져간 농민군들이었다.
▶ 이상은 ‘동학농민혁명기념탑’ 뒤의 벽면에 새겨놓은 내용이다. 그 끝에 동학농민군의 넋을 기리는 헌시(獻詩)가 있다. —
“벗들이여 형제들이여. / 아, 수많은 농민군들이여! / 우리의 피와 살과 뼈가 흩어진 / 이 산하에 잠들라. / 그대들을 따라 / 저 쏟아지는 눈보라 뚫고 / 왜놈들의 총구를 헤치고 / 이 깊은 역사의 겨울을 넘어가리니, / 기필코 눈부신 봄을 맞으리니. / 그대 진달래 되어 / 조선 산하 굽이굽이 꽃불을 밝히리라!”
○ 석천암(石泉庵)
충암(冲菴) 김정(金淨)의 서재
▶ 동학농민기념공원의 아래, 도로의 가장자리에 단아한 기와집 한 채가 있다. 처마 밑에 ‘石泉庵’(석천암)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석천암은 조선시대 초기 충암(冲菴) 김정(金淨, 1486년(성종 17)~1521년(중종 16)) 선생이 학문을 강마하던 서당으로 ‘충암서재’라고도 한다. 2006년 오래된 석천암을 해체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는 신해년(1791년)에 충암(冲菴)이 공부하였던 옛 석천암(石泉庵)을 헐어 보은 읍내 배니(성족리)에 옮겨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2006년 해체된 자재를 성족리 주민들이 마을회관에 보관하여 오던 중, 보은군의 지원을 받아 2019년 9월 20일에 이 자리에 복원하게 되었다.
충암(冲菴) 김정(金淨)
김정(金淨)은 1486년(성종 17년) 충청북도 보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원충(元冲)이며, 호는 충암(冲菴)·고봉(孤峯)이다. 김호(金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처용(金處庸)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김효정(金孝貞)이며, 어머니는 김해 허씨(金海許氏)로 판관(判官) 허윤공(許允恭)의 딸이다.
김정(金淨)은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수학하기 시작했고 20세 이후에는 최수성(崔壽峸)·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관료 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에 대한 학문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시문에도 능했으며 새·짐승 등의 그림도 잘 그렸다.
1507년(21세)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고, 수찬(修撰)·병조좌랑을 거쳐 승승장구하여 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28세)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1515년 왕의 구언(求言)에 응해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1516년 석방되어 박상과 함께 다시 홍문관에 들고, 권민수와 이행의 파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것은 곧 중앙 정계에서의 사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뒤에 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그 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 뒤 *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賜死)되었다. 1545년(인종 1) 복관되었고,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신사무옥(辛巳誣獄) ☞ 1521년(중종 16) 10월 11일 관상감 판관 송사련(宋祀連)과 그의 처남인 평민 정상(鄭瑺)이, 안처겸(안당의 아들)의 모친 장례식에 온 인사들의 방명록을 안당(安瑭) 일파가,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사림 세력을 제거한 심정(沈貞)·남곤(南袞) 등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고 고변함으로써 일어난 것이 무옥사건이다.
제자로는 김봉상(金鳳祥)·김고(金顧)·최여주(崔汝舟) 외에 조카인 김천부(金天富)·김천우(金天宇) 등이 있다.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제주오현(濟州五賢) 김정(金淨)
일찍이 사림 세력을 중앙 정계에 추천했고,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뒤에서 도왔다. 그 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세력 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적극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개혁 정치를 폈는데, 그 일환으로 미신 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추진하였다.
충암(冲菴) 김정(金淨)은 제주오현(濟州五賢)의 한 사람이다. 제주오현은 조선시대에 제주도에 유배되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제주 지역의 교학 발전에 공헌한 인물들로 현재 제주시 오현단에 배향되어 있는 충암(冲菴) 김정(金淨, 1486~1521),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1499~1457),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등을 가리킨다.
‘제주 오현’은 학맥상으로 기호학파에 해당하며, 이들의 학문은 호서 사림으로 이어지며 이들의 인맥은 은진 송씨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충암 김정’은 은진 송씨 ‘송여익’의 사위이며 ‘우암 송시열’과 ‘규암 송인수’역시 은진 송씨이다. 또한 우암의 제주 적거지(謫居地)를 찾아 유허비의 비문을 쓴 ‘권진응’은 ‘수암 권상하’의 증손으로 ‘동춘당 송준길’은 그에게 외고조부가 된다.
저서로는 《충암집(冲菴集)》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이다.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고,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 오전 8시 50분, 보은 성족리의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주차장을 출발하여 37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괴산군 청천(면)을 경유하여 금평 삼거리에서 32번 도로를 이용하여 화양천이 달천강에 유입되는 화양대교(두물머리휴게소)에 도착했다. 휴게소 앞에서 화양동계곡을 따라 거슬러 올라간다.
○ 괴산 청천 화양구곡(華陽九曲)
화양동계곡
백두대간 청화산 서쪽(늘재)에서 발원한 괴산(槐山)의 화양동계곡(華陽洞溪谷)은 1975년에 속리산 국립공원에 포함되었다. 조선시대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의 행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화양동계곡은 원래 황양나무(회양목)가 많아 황양동이라 불렀으나 우암 송시열이 거처를 이곳으로 옮겨와서는, 중국을 뜻하는 화(華)와 * 일양래복(一陽來腹)의 양(陽)을 따서 이름을 화양동(華陽洞)으로 고쳤다고 한다.
* 일양래복(一陽來腹)의 양(陽) ☞ 주역의 복괘(復卦, 地雷復)를 보면 6효(爻) 중 초효(初爻)만 양(陽)이고 나머지 다섯 효는 음(陰)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양(陽)이 다섯 효의 음(陰), 즉 밝은 해가 어둠을 점점 밝혀 나가 강건한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지(冬至, 매년 양력 12월 22일)에 이르러 음의 기운이 절정을 이루는 동시에 그때부터 해가 점점 길어져 양의 기운이 다시 살아난다. 그러므로 일양래복(一陽來腹)은 해가 다시 돌아온다는 뜻으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다는 것이다.
화양구곡(華陽九曲)은 32번 국도 화양대교에서 시작하는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천(계곡)을 따라,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며 3km에 걸쳐 설정된 구곡(九曲)이다. 화양구곡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머물렀던 화양동계곡에 우암이 죽은 후, 그 제자인 수암(遂巖) 권상하(權尙夏)가 구곡을 설정하고, 이후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이 바위에 그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중국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아 설정한 것이다.
화양구곡(華陽九曲)
* 화양 제1곡 경천벽(擎天壁)은, 기암이 가파르게 솟아 있어 그 형세가 산이 길게 뻗히고 높이 솟은 것이 마치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하여 지은 이름이다. 화양동계곡 입구의 절벽 바위에는 ‘華陽洞門’(화양동문)'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 화양 제2곡 운영담(雲影潭)은, 경천벽에 400 상류 깎아지른 절벽 아래 맑은 물이 모여 소(沼)를 이루고 있다.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화양 제3곡 읍궁암(泣弓巖)은, 운영담 위쪽에 희고 둥글넙적한 바위가 있으니 우암 송시열이 제자였던 임금 효종이 죽자 매일 새벽마다 이 바위에 올라 엎드려 통곡하였다 하여 후일 사람들이 이름 지었다. 읍궁암 앞에 ‘만동묘(萬東廟)’가 있다.
* 화양 제4곡 금사담(金沙潭)은, 맑은 물 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화양구곡의 중심이다. 1666년 송시열이 바위 위에 ‘암서재(巖棲齋)’를 지어놓고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 화양 제5곡 첨성대(瞻星臺)는 도명산 기슭에 층암(層巖)이 얽혀 대를 이루고 있다. 경치가 아름답고 우뚝 치솟은 높이가 수십 미터이고 또한 평평한 큰 바위가 첩첩이 겹치어 있고 그 위에서 별을 관측할 수 있다하여 첨성대라 했다. 거기 절벽에 ‘萬節必東’(만절필동)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 ‘非禮不動’(베례부동)이란 의종의 어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이란 송시열의 글씨도 새겨져 있다. ‘세상은 명나라의 것이고 해와 달은 숭정제의 것이다’라는 뜻이다.
* 화양 제6곡 능운대(凌雲臺)는, 큰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화양 제7곡 와룡암(臥龍巖)은, 첨성대에서 동남쪽으로 1㎞ 지나면 이 바위가 있다. 궁석이 계곡 옆으로 뻗혀 있어 전체 생감이 마치 용이 꿈틀 거리는 듯하고, 그 길이가 열 길이나 되어 와룡암이다.
* 화양 제8곡 학소대(鶴巢臺)는, 바위산 위에 낙낙장송이 오랜 성상의 옛일을 간직한 채 여기저기서 있는데, 옛날에는 백학이 이곳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 화양 제9곡 파곳[巴串]은, 개울 복판에 흰 바위가 펼쳐 있으니 오랜 풍상을 겪는 사이에 씻기고 갈리어 티 없는 옥반과 같아서 산수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오늘의 화양구곡(華陽九曲) 탐방
▶ 화양대교에서 우회전하여 화양동계곡 물길 따라 구곡의 길이 이어진다. 주차장이 찻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서 있으므로, 계곡 초입의 건너편 절벽에 있는 ‘제1곡 경천벽(擎天壁)’은 차를 타고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 — 오전 9시 30분, 주차장에서부터 탐방 길에 올랐다. 맑은 하늘에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청명한 날이다. 포장된 길은 울창한 수목이 드리워져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계곡을 오른쪽에 끼고 가다가 콘크리트 다리를 건넌다.
화양 제2곡 운영담(雲影潭)
다리의 바로 위쪽에 보(洑)가 설치되어 계곡의 봇물이 명경지수를 이루고 있다. ‘화양 제2곡 운영담(雲影潭)’은 건너편 절벽 아래의 맑은 물이 고여서 소(沼)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오늘 같이 맑은 날에 직벽의 바위 아래 맑은 소(沼)에 하늘과 구름이 물 위에 비치어 선연한 절경을 이룬다. 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라 운영담은 그대로 청산의 녹수이다.
▶ 오전 10시, ‘화양 제3곡인 읍궁암(泣弓巖)’에 이르렀다. 그 앞 산록에 만동묘(萬東廟)가 자리하고 있다. 읍궁암은 계곡의 가장자리에 있는 둥글고 넓적한 바위인데 우암 송시열이 효종이 죽자 이를 슬퍼하여 매일 새벽 한양을 향하여 통곡하였다는 곳이다.
만동묘(萬東廟)
만동묘 앞에는 현지의 문화해설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충청도 특유의 입담으로 재미있게 해설을 했다. 산뜻하게 단장한 만동묘 삼문 ‘陽秋門’(양추문) 앞 좌우에 각각 재실이 있다. 계단을 통해 삼문으로 들어가니, 좌우로 기와담장이 애둘러 있는 한 가운데, 높고 가파르고 너른 계단 위에 날아갈 듯한 내삼문(內三門)이 솟아 있다. 만동묘의 위엄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계단 아래 오른쪽에 만동묘 묘정비각(廟庭碑閣))이 있다. 해설판이 있다.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권상하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하기 위해 숙종 29년(1703)에 세운 사당이다. 이 비는 만동묘를 세우게 된 취지와 제사를 모시고 있는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추모하는 뜻을 기록한 것이다. 영조 24년(1747) 도암 이재가 글을 지어 세웠으며, 순조 14년(1814)에 다시 세웠다. 그 후 일제에 의해 1917년 제사를 금하게 되었다. 1937년에는 제사 용구를 불사르고, 묘정비는 비문을 알아보기 힘들게 쪼아버리더니, 1942년에는 묘당(廟堂) 등 일체의 건물을 철거하고, 묘정비는 땅에 묻어버렸다. 1983년에 괴산군에서 묘정비를 찾아 다시 세우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 가파른 계단 위, 단청이 화려한 내삼문에 올라갔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얕은 담장 너머로 묘당[萬東廟]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거기 묘당 안에 지금도 명나라 황제의 위패가 모셔져 있을 것이다.
만동묘(萬東廟)—‘萬節必東’(만절필동)
만동묘(萬東廟)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원조해 주었던 명(明)의 황제인 만력제(神宗)와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毅宗)를 제사 지내기 위해 조선 시대 숙종 대에 설립한 사당이다.
‘만동(萬東)’이란. ‘萬節必東’(만절필동)이라는 말에서 취한 이름이다. 만절필동은 ‘황하가 만 번을 휘어도 결국 동쪽으로 흐르듯, 황제 폐하를 향한 충성은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명(明)을 존숭한다는 의식(意識)을 표현한 것이다. 청(淸)나라는, 명(明)을 정복하기 이전에 조선을 침략하여 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을 일으켰는데, 이 사당은 명을 정벌하고 조선까지 침략한 청(淸)을 사상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앞서,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이 북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명나라 의종(毅宗)의 친필인 ‘非禮不動’(비례부동) 넉 자를 얻어다가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었다. 1674년(현종 15) 송시열은 이것을 화양계곡에 있는 절벽에 새기고 그 원본은 환장암(煥章庵 : 현재의 彩雲庵) 옆에 운한각(雲漢閣)을 지어 보관하고, 그곳 승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또한 김수항(金壽恒)은 장편의 글을 지어 그 일을 기록하여 놓았다.
만동묘(萬東廟)는 경기도 가평군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의 어필인 ‘萬折必東’을 모본하여, 화양동 바위에 새겨놓았는데 그 첫 글자와 끝 글자에서 취해 지은 것이다.
선조의 어필(御筆)의 연원은 이러하다. ― 잔인무도한 왜적의 침입으로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천병(天兵, 명나라 원군)을 보내 구원해줬으니 명나라는 재조번방(再造藩邦·제후국을 다시 세워줌)의 황국이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종전 후 명군 총사령관 만세덕이 귀국하게 되자, 만세덕이 볼 수 있도록 서둘러 ‘再造藩邦’ 네 글자를 써서 내려 보내기도 했다.(1599년 10월 5일 ‘선조실록’) 그리고 명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네 글자를 잊지 않았다.(1637년 5월 28일 ‘인조실록’, 김상헌의 상소문)
경기도 가평의 조종암(朝宗巖)
대명사대(大明事大)의 굳은 결의를 바위에 새기다
▶ 필자(筆者)는 수년 전, 경기도 가평(加平)의 현등사—운악산(雲嶽山) 등반 길에 조종암(朝宗巖)을 탐방한 적이 있다. 청평검문소(하리) 앞 교차로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운악산으로 향하는 길목, 가평군 상면 항사리 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대보교를 건너 우회전하여 조종천(朝宗川)을 따라 내려가면, 천변 도로의 산록에 조종암 바위군이 있다.
조종암(朝宗巖)은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대보리 조종천 변의 산록에 있다. 조종천은 가평의 한북정맥 명지산에서 발원하여 조종면을 경유하여 청평(淸平)에서 북한강 유입되는 지천이다. 조종천의 동쪽에는 명지산—연인산—대금산의 지맥이 이어지고, 서쪽에는 한북정맥 청계산—운악산(현등사)—축령산의 산줄기가 이어진다. 첩첩의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계곡이다.
1684년(숙종 10년)에 가평 군수 이제두(李齊杜)와 허격(許格), 백해명(白海明) 등은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가 베푼 은혜와 청(淸)나라에게 받은 수모를 잊지 말자는 뜻을 이곳 산중오지의 여러 바위에 새겼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50년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청나라 오랑캐에 대한 굴종을 참지 못하고 산천을 떠돌던 허격의 권유가 컸다. 백해명이라는 가평 사람과 함께 세 사람이 이곳 암벽에 22자의 글자를 새겼다.(유중교, 《朝宗巖誌》1875)
맨 왼쪽 위의 바위에 흘림체 ‘思無邪’(사무사)를 새겼다. 북경으로 쳐들어온 이자성의 반란군 앞에서 자살한 명(明)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 의종의 글씨이다. 청나라에 복수를 불태우던 효종의 시(詩) ‘日暮途遠 至痛在心’(일모도원 지통재심)도 새겨 놓았는데 우암 송시열의 글씨다.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먼데,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마음속에 있다.’는 뜻이다. 부여 백마강 건너 ‘부산’에도 같은 글씨가 있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 선조의 친필 ‘萬折必東 再造藩邦’(만절필동 재조번방)을 새겼다. 이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청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의 마지막 왕 의종의 어필 ‘非禮不動’(비례부동)을 본떠서 새기고, 따로 전서 ‘朝宗巖’(조종암)이 새겨져 있다.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우(李俁)의 글씨다. 1804년(순조 4년)에는 이러한 유래를 적은 조종암기실비(朝宗巖記實碑)를 세웠다.
* 낭선군 이우[1637(인조15)~1693(숙종19)]는 옛 명필들의 글씨를 모아 서첩을 만든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의 편찬자인 선조(宣祖)의 손자인 이우(李俁)이다. 낭선군은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기 위해서 단양, 영주를 거쳐 부석사를 경유하였다. 동행한 동생 낭원군朗原君 이간(李偘, 인조18년(1640)∼숙종25년(1699)과 함께 경로에 암각문(巖刻文)을 많이 남겼다.
조종암(朝宗巖)은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상징이요 그 본거지이다. 이곳의 행정명 조종천(朝宗川)‘, ‘조종면(朝宗面)’이 모두 여기에서 유래되었으며 ‘대보리(大報里)’도 인근 명나라 황제를 모신 대통묘(大統廟)에서 유래했다. 명나라의 큰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순조 31년(1831)에는 명나라 * 9의사(九義士)의 후손이 이곳에 와서 지방 유림들과 함께 대통행묘(大統行廟)와 구의행사(九義行祠)를 세워 명나라 태조와 9의사를 위한 제사를 지내었다.”(문화재청) 창경궁에는 대보단(大報壇)이 있다.
* ‘9의사(九義士)’는 병자호란 때 청에 잡혀간 봉림대군과 합심하여 인조 23년 대군이 귀국할 때 우리나라로 망명했던 명나라 사람들을 말한다.
가평(加平)의 조종암을 만들 때 노론 당수 송시열(宋時烈)이 크게 작용했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이상 나오는 조선 중기 이후의 정치의 중심인물이다.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권력을 휘두른 집권세력이었다.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
‘有明朝鮮國’(유명조선국)의 조선중화론
화양동계곡 제5곡 첨성대 절벽에는 또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는 송시열 친필이 새겨져 있다. ‘천지는 대명(大明) 나라 것이요, 세월은 명 숭정제(崇禎帝)의 것’이라는 뜻이다. 송시열의 사대적인 숭명(崇明), 존숭(尊崇) 사상이 고스란히 새겨진 글씨다.
오랑캐[淸]에 의해 천자의 나라[明]가 멸망했다. 사대(事大)와 충성(忠誠)의 대상이 사라졌다. 그러자 명분론자들[노론]은 복수를 위한 ‘북벌론(北伐論)’과 조선이 명을 계승했다는 ‘조선중화론(朝鮮中華論)’을 새로운 사대(事大) 이데올로기로 완성했다. 그들이 내세운 북벌론(北伐論)은 비현실적이었다. 함께 북벌을 준비하자는 효종의 말에 재야의 권력자 송시열은 “마음 수양부터 하시라”라고 응답했다.(송시열, ‘송서습유’7, ‘악대설화’)
이후 조선 국내 정치를 농단한 잣대는 대명사대(大明事大)였다.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명에 대한 충성, 그리고 명이 소유했던 성리학적 세계관이 정파(政派)의 도구가 되었다. 1689년 남인과 정쟁[기사환국] 끝에 사약을 받고 죽으면서 송시열은 제자에게 “내가 살던 충청도 화양계곡에 명 황제를 기리는 사당을 만들라”고 유언했다. 명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죽고 60년이 되던 1704년 정월 7일 송시열 제자들은 화양동계곡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웠다.
사흘 뒤인 1689년 정월 10일 이 사실을 알게 된 숙종은 두 달 뒤 창덕궁 후원에서 직접 숭정제에게 제사를 올렸다.(1704년 3월 19일 ‘숙종실록’) 그해 11월 숙종은 제사를 지낸 터에 단을 쌓고 이름을 ‘대보단(大報壇)’이라 했다. ‘큰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이후 국왕과 노론 사대부 세력은 사대 순혈주의를 경쟁하며 권력을 나눠가졌다. 오랑캐[淸] 황제로부터 제후로 책봉을 받고, 오랑캐 달력을 쓰며, 오랑캐 황실에 조공을 하면서 뒤로는 명나라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하는 기이한 정치체제가 조선의 멸망 때까지 이어졌다. 당시 비석에 보면 그 첫 머리에 반드시 ‘有明朝鮮國○○之墓’이라고 썼다. ‘有明朝鮮國’(유명조선국)이란 ‘명나라가 속국 조선’이라는 뜻이다. 명나라는 이미 멸망한 나라였다. 그것이 ‘춘추대의(春秋大義)’라고 했다. 이제 그 만동묘와 대보단에서 벌어진 막장 풍경들을 본다.
만동묘(萬東廟) 설립과 폐해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사사(賜死)될 때 신종과 의종의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지낼 것을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유언(遺言)으로 남겼다. 권상하는 이에 따라 1703년 민정중(閔鼎重)·정호(鄭澔)·이선직(李先稷)과 함께 부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만동묘를 창건했다. 만동묘는 송시열이 만년에 은거한 화양구곡 중 제3곡인 읍궁암(泣弓巖) 위쪽에 낙양산(洛陽山)을 배산으로 하고 있다.
1726년(영조 2) * 민진원(閔鎭遠)이 묘(廟)를 중수하고 그 전말을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제전(祭田)과 노비를 주었다. 1744년에는 충청도관찰사로 하여금 묘우(廟宇)를 중수하게 하는 한편, 화양리에 있는 토지 20결(結)을 면세전(免稅田)으로 하여 제전에 쓰도록 하였다. 또, 1747년에는 예조에서 90인이 윤번으로 묘우(廟宇)를 지키게 하고 사전(賜田)에 전(廛)을 개설, 그 세전(稅錢)을 만동묘에서 수납하도록 하였다. 그해 * 이재(李縡)의 찬(撰)하고, 유척기(兪拓基)의 전서(篆書)로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졌다.
*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은 호가 단암(丹巖)이며 아버지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자 우참찬 민진후(閔鎭厚)의 동생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아들이 대사간 민형수(閔亨洙)다.
* 이재(李縡, 1680~1746)는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한천(寒泉). 진사 만창(晩昌)의 아들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의 대표적 인물로 윤봉구(尹鳳九)·송명흠(宋命欽)·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하여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예학에도 밝아서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암집 陶菴集》·《도암과시(陶菴科詩)》·《사례편람(四禮便覽)》·《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어필로 ‘萬東廟’를 사액(賜額)하고, 1809년(순조 9)에는 기존의 묘우(廟宇)를 헐고 다시 짓게 하였다. 1844년(헌종 10)에는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로 하여금 정식으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러나 이후 만동묘(萬東廟)는 유생들의 집합장소가 되어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욱 심했다. 제사 지낼 때 *자성지폐(粢盛之弊)는 물론이고, 면세전이 확대되어 국가의 경제적 손실이 컸고, 면역이 인정되는 *수직사(守直司)를 자원하는 자가 늘어 군역의 기피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1865년(고종 2) 조정에서는 대보단(大報壇)에서 명나라 황제를 제사지내므로 개인적으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지방(紙榜)과 편액(扁額)을 서울에 있는 대보단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기고 만동묘를 철폐했다. *자성지폐(粢盛之弊)는 제물을 준비하는 데 쓰는 비용을 말한다. *수직사(守直司)는 묘당을 지키는 사람이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1863년 고종(재위 1864~1907)의 섭정을 맡게 된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조 대비의 권위와 입을 빌어 서원의 폐단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나가면서 서원 철폐의 명분을 쌓아나갔다. 1865년에는 전횡이 극심한 우암 송시열의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시작으로,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모든 서원이 철폐되었으며 남은 서원들마저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으로 일부는 소실되기도 하였다.
1873년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송내희(宋來熙)·임헌회(任憲晦)·이항로(李恒老)·최익현(崔益鉉)·송근수(宋近洙)·송병선(宋秉璿) 등 유림들이 소(疏)를 올려 이듬해인 1874년 왕명으로 만동묘가 다시 부활되었다. 이것은 민비(閔妃) 일파가 노론(老論) 유생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취한 조처였다.
1907년 일본군이 우리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환장암과 운한각을 불태웠으며, 이듬해에는 일본 통감이 만동묘를 폐철함과 동시에 재산을 국가 또는 지방관청에 귀속시켰다. 1910년 송병순(宋秉珣) 등이 존화계(尊華契)를 조직, 봉제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일제치하에서도 송시열계 유림들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제향이 계속되다가 1940년부터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영영 끊기게 되었다. 마침내 1942년 만동묘 건물을 철거, 괴산경찰서 청천면 주재소를 짓는 건축자재로 사용하였다. 지금의 만동묘는 1983년에 괴산군에서 묘정비를 찾아 다시 세우고 건물을 복설하고 그 주변을 정비했다.
▶— 21세기 화양동 계곡에 만동묘(萬東廟)가 다시 산뜻하게 복설되어 밝은 햇살을 받고 있다. 이런 대명천지(大明天地, 눈부시게 밝은 날)에 아직도 화양계곡에는 송시열의 대명천지(大明天地, 명나라를 섬기는 의리)가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다.
송시열(宋時烈)은 조선후기 노론(老論)이 집권을 하는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이나 이름이 등장 했을 만큼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노론의 영수인 정치가로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반열에 올려 송자(宋子) 라고 까지 불려, 그의 문집이 《송자대전》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노론이 집권하던 조선후기 정치와 사상을 휘어잡으며 같은 노론의 후학들로부터는 칭송의 기록만을 남겼지만, 지금은 평가하는 사람들에 따라 극과 극을 오가고 있다.
○ 화양서원(華陽書院)
만동묘 왼쪽에 위치하고 있다. 노론(老論)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한 서원으로, 1696년(숙종 22) 9월 사액(賜額)을 받았다. 당시 서원 중에서도 가장 유력(有力)하였으며, 횡포가 가장 심해 제멋대로 발행하는 ‘화양묵패(華陽墨牌)’ 때문에 폐해가 컸다. 묵패(墨牌)란, “서원에 제수전(祭需錢)이 필요하니 아무 날 아무 시간까지 얼마를 봉납(奉納)하라.”는 식의 고지서(告知書)에 묵인(墨印)을 찍어 군(郡)ㆍ현(縣)으로 발송하는 것이지만, 이 묵패를 받은 자는 관(官)·민(民)을 가리지 않고 전답이라도 팔아서 바쳐야 했다. 만일 불응하면 서원으로 잡혀가서 공갈ㆍ협박을 받고, 사형(私刑)을 당하였다. 화양서원의 이런 행패가 극심하여 흥선대원군 이전에도 여러 번 단속하였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858년(철종 9) 7월에는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의 주청(奏請)으로 화양서원의 복주촌(福酒村)을 영구히 철폐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것은 이 부락에 있던 지정음식점 같은 주호(酒戶)에도 불가침의 특권이 주어져서, 돈이 있는 요역기피자들이 이곳에 모여서 나라는 그만큼 피해를 보고 가난한 백성들만이 그 역(役)을 대신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또, 1862년 3월에는 이곳 유생들이 원우(院宇)를 수리ㆍ개축한다는 명목으로 협잡배들이 전라도 지방에까지 출몰하여 재물을 거두어들여서 물의를 일으켰다. 이 서원은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 — ▶ 만동묘와 함께 복원된 화양서원은 오늘도 정비 공사 중이었다.
화양구곡 제4곡 금사담(金沙潭) 암서재(巖棲齋)
암서재는 화양구곡(華陽九曲) 제4곡 금사담(金沙潭) 물가의 절벽 큰 반석에 있는 서재이다. 조선 후기의 대학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정치를 그만 두고 은거할 때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1659년 한때 자신의 제자였고 정치적 동지인 효종(孝宗)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고 난 후, 보위를 이은 현종과는 송시열은 원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그는 화양구곡으로 내려왔다. 깨끗한 물과 반짝이는 모래가 빛나는 금사담(金沙潭) 바위 위에 서재를 짓고 강학을 하며 지냈다.
문인 권상하(權尙夏)가 쓴〈암서재기(岩棲齋記)〉에 따르면 1666년(현종 7) 8월 암서재(岩棲齋)를 짓고 이곳에 거주하였다. 송시열이 정자를 지을 당시 이름은 암재(巖齋)였다. 그가 사약을 받고 죽은 후 돌보는 사람이 없어 허물어졌는데, 사후 26년 뒤 1715년(숙종 41) 김진옥이 서재를 중건했다. 다시 6년이 지나 제자 권상하가 ‘巖棲齋’(암서재)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때는 남인이 권력에서 완전히 실각하고 송시열의 서인(노론)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암서재(岩棲齋)는 목조기와로 2칸은 방이고 1칸은 마루로 되어 있는데, 방 안에는 현판 5점이 걸려 있다. 앞에는 암반 사이에 일각문이 세워져 있다.
▶ 오늘 우리 답사단은 오늘의 일정 상 화양구곡 제4곡인 금사담에서 발길을 돌렸다. 상류로 올라가면 제5곡 첨성대, 제6곡 능운대, 제7곡 와룡담, 제8곡 학소대, 제9곡 파천이 있다. 오늘같이 맑고 시원한 날, 나머지 구간을 오르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쉬웠다. 그런데 화양계곡 상류의 지천[관평천]에 선유동계곡이 있는데, 이곳에 퇴계 선생이 설정한 선유동구곡이 있다.
선유동구곡(仙遊洞九曲)
선유동구곡(仙遊洞九曲)은 화양천 상류 백두대간 장성봉에서 발원한 관평천에 설정된 구곡이다. 오늘 현지의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선유동구곡(仙遊洞九曲)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청천 송면(송정마을)의 함평 이씨댁을 찾아와 머물다가 관평천 상류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아홉 달을 동안 유람하며 설정했다고 한다. 오늘은 시간이 여의치 않아 탐방할 수가 없다. 선유동구곡은 다음과 같다.
제1곡은 선유동문(仙遊洞門), 계곡 입구에는 큰 바위가 버티고 서 있고 바위에는 ‘仙遊洞門(선유동문)’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신선이 내려와 놀던 곳이다.
제2곡은 경천벽(擎天壁)으로 계단처럼 쌓인 큰 바위가 객들을 굽어보고 있다. 화양계곡 쪽에도 같은 이름의 ‘경천벽’이 있다.
제3곡은 학소암(鶴巢岩), 기암절벽이 하늘로 치솟아 그사이로 소나무가 들어서 있으며 학이 둥지를 틀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제4곡은 연단로(鍊丹爐), 바위의 윗부분이 평평하여 가운데가 절구처럼 패여 있으며 신선들이 이곳에서 금단(金丹)을 만들어 먹고 장수하였다고 한다.
제5곡은 와룡폭(臥龍爆), 바위 사이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마치 와룡이 불을 내뿜는 둣 벼락 치는 소리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6곡은 난가대(爛柯臺), 이름이 걸작이다. 문드러질 ‘爛’자에 도낏자루 ‘柯’ 자를 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옛날 나무꾼이 나무하러 가는 길에 바위 위에서 신선들이 바둑 두는 것을 잠깐 구경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도낏자루가 썩어버렸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제7곡은 기국암(碁局岩), 바위의 윗부분이 평평항 바둑판 모양으로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던 곳이다.
제8곡은 구암(龜巖), 바위 생김새가 마치 큰 거북이가 머리를 들어 숨을 쉬는 둣하다.
제9곡은 은선암(隱仙岩)은 신선이 숨어 살던 곳이라는 의미로 두 개의 바위 사이에 10여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이 있다.
▶ 필자는 1980년대 초반 선유동계곡을 탐방한 적이 있다.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송면(송정마을)에서 백두대간 장성봉과 대야산 사이에 있는 버리미기재(922번 지방도로)를 넘어가면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에도 또 다른 선유동 구곡이 있다. 거기 선유구곡 제9곡에는 송시열 계열의 도암 이재가 설립한 학천정이 있다.
○ 충주 팔봉서원(八峰書院)
▶ 화양구곡 탐방을 마치고, 일행을 태운 버스는 달천강을 따라서 이어지는 533번—49번 지방도로를 타고 괴산(읍)을 경유하여, 12시 정각 수주팔봉이 바라보이는 팔봉서원(八峰書院)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우리를 안내하기 위하여, 팔봉서원 최원택(崔元澤) 원장과 함께 충주 〈중심고을연구원〉 이상기(李尙起, 문학박사) 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팔봉마을
수주팔봉(水周八峰)은 서쪽 대소원면 문주리 팔봉마을에서 달천 건너 동쪽 산을 바라볼 때, 정상에서 강기슭까지 여덟 개의 봉우리가 떠오르는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수주팔봉은 출렁다리를 건너 두릉산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보는 풍경이 제일 아름답다. 달천강을 따라 송곳바위, 중바위, 칼바위 등이 병풍을 이루고 한눈에 들어오는 팔봉마을이 한 폭의 동양화를 펼쳐놓은 듯하다. 팔봉마을은 안동의 하회(河回)마을이나 예천의 회룡포(回龍浦)처럼 물길이 아름답고 마을 안쪽의 팔봉서원은 4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은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 달천의 팔봉(八峰)마을에 있다. 팔봉서원은 달천을 낀 서쪽 경사면에 동남향으로 배치되었다. 서원 건너편에는 칼바위와 8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 있다. 이 산줄기가 팔봉산(八峯山)이다.
팔봉서원(八峰書院)은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 달천강 팔봉마을에 있다. 충주 ‘중심고을연구원’ 이상기 원장에 설명에 의하면, ‘팔봉서원’은 충주에 연고가 있는 조선시대의 이자(李耔), 이연경(李延慶), 김세필(金世弼), 노수신(盧守愼) 등 4현을 모신 서원이라고 했다. 이곳에 위패를 모신 네 분은 사화(士禍)와 관련되었을 때 청렬한 지조(志操)와 절개를 지켰던 분들이다. 충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으로 1586년(선조 19)에 세워졌다.
처음 충청감사, 충주목사 그리고 이 지방의 사림이 1529년부터 1533년까지 토계리로 귀양 와서 살았던 계옹(溪翁) 이자(李耔, 1480∼1533)를 기리기 위해 서원을 세우자는 논의를 했다. 이자(李耔)는 조선 전기 연산군 7년(1501)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이조좌랑을 거치다 연산군의 난정으로 사직했다가 중종반정으로 부제학, 우참찬을 역임하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삭탈관직 되어 음성 음애동(陰崖洞)으로 귀양을 온 다음, 1529년 충주 토계리로 이거해 몽암(夢庵)을 짓고 살다 죽었다.
이자가 귀양살이 하던 토계리 몽암은 달천강[達川]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에 달천강 북쪽 산록에 1586년 서원을 세우고, 계옹(溪翁) 이자(李耔)와 탄수(灘水) 이연경(李延慶, 1484∼1548)을 배향하게 되었다. 이연경(李延慶)은 조선 전기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로 유배되는 할아버지를 따라 유배소까지 갔다. 이연경은 중종반정 때 형조좌랑까지 지내다 중종 14년(1519) 현량과 병과에 급제, 교리를 지내다 을묘사화(乙卯士禍) 때 파직되었고 현량과에 복구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처음 서원의 이름은 이들의 호인 계옹(溪翁)과 탄수(灘水)에서 한자씩 따서 ‘계탄서원(溪灘書院)’이라 불렀다. 이들이 함께 배향된 것은 기묘사화로 벼슬을 잃고 충주지방에서 교유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1612년(광해군 4)에는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과 소재 노수신(盧守愼)이 배향되었다.
김세필(金世弼, 1473∼1533)은 조선 전기 연산군 1년(1459) 식년문과에 급제 후 대사헌·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중종의 과오를 규탄하다 음죽현(陰竹縣, 지금의 충청북도 음성)에 장배(杖配)된 후 생극(면)에 은거, 죽은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38년(1543)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후 사간원·이조좌랑을 지내다 을사사화 때 파직되어 충주로 돌아왔다. 1547년부터 19년간 진도에서 귀양살이하며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였다. 1567년 선조의 즉위로 이조판서·대제학·좌의정·영의정에 이르렀다. 1672년(현종 13)에는 충주 유생 한치상(韓致相) 등의 상소로 ‘八峰書院’(팔봉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팔봉서원(八峰書院)은 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98년 정부지원과 후손들의 출연으로 서원이 재건되었고, 2003년 6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대지 200평에 팔봉서원 편액이 걸린 솟을삼문이 있고, 그 안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 숭덕묘(崇德廟)가 있다. 사당의 북쪽 측면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재실이 있다. 사당의 남쪽 측면으로는 ‘八峰書院重修紀念碑’(팔봉서원중수기념비)가 있다.
수주팔봉(水周八峰)
팔봉서원은 달천강을 낀 서쪽 경사면에 동남향으로 배치되었다. 서원 건너편에는 칼바위와 8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 있다. 이 산줄기가 팔봉산(八峯山)이다. ‘수주팔봉’이라 한다. 칼바위에는 인공폭포가 만들어져 그를 통해 석문천이 달래강에 합류된다. 그리고 칼바위 폭포 위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칼바위를 넘어 팔봉산으로 오르는 길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등산로에 전망대까지 만들어 팔봉마을과 서원을 완벽하게 조망할 수 있다.
달천은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괴산군 지역을 흐를 때는 청천(淸川), 괴강(槐江)이라 불리고 충주지역에 흘러오면서 달천(達川)이라 하였다. 물맛이 달다고 하여 ‘달내(달래)’ 또는 ‘감천(甘川)’이라하고 수달이 많아 ‘달강(㺚江)’이라고도 불렀다. 예로부터 달천의 물맛은 조선 최고로 꼽았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서는 우리나라 물맛은 충주 달천수가 으뜸이며 오대산 우통수가 두 번째 속리산 삼타수가 세 번째로 좋다고 기록하고 있다.
충주시 살미면 토계리에서 흘러드는 오가천의 물길과 달천의 두 물이 합쳐지며 운치를 더해주는 팔봉폭포는 1963년 농지개량사업을 위해 칼바위를 절단하여 만들어졌다. 수주팔봉은 물과 산, 그리고 수직절벽의 바위가 조화를 이루어 절경을 이룬다. 칼바위에는 인공폭포가 만들어져 그를 통해 석문천이 달래[達川]에 합류된다. 그리고 칼바위 폭포 위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칼바위를 넘어 팔봉산으로 오르는 길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등산로에 전망대까지 만들어 팔봉마을과 서원을 완벽하게 조망할 수 있다.
음애(陰崖) 이자(李耔)
이자(李耔), 1480∼1533)는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몽옹(夢翁)·계옹(溪翁)이다. 고려 말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였던 이색(李穡)의 5대손이며, 아버지 이예견과 어머니 선산 김씨(관안의 딸)의 셋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산 이씨는 고려 말 신흥 사대부 가문의 하나로, 이색이 조선 왕조의 건국에 지지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가문의 안정적 지위가 확보될 수 있었다.
가문의 성향이 훈구파에 경도된 것에 비해, 이자는 사림파 인사인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사림파 성향을 견지했다. 15세 때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며 효령대군의 증손인 이심원(주계군)에게 나아가 이희보·김공량·송세충 등과 함께 수학했다.
* 이심원(李深源, 1454년 ~ 1504년)은 조선 중기의 왕족,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자는 백연(伯淵),호는 성광(醒狂), 默齋(묵재), 太平眞逸(태평진일)이다. 연산군 때 동생과 함께 화를 당한 대유학자이다. 효령대군 보의 증손으로 보성군 갑의 손자로서 평성도정 위(사후 평성군에 추증)의 장남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그의 제자인 김굉필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정암 조광조와는 동문수학한 선배였다. 성종 때부터 훈구파의 퇴진과 사림파의 등용과 양심적인 지역 은거 인사들의 등용을 주장하였으며, 고모부 임사홍의 비행과 비리를 성종에게 고했다가 할아버지 보성군으로부터 고소당하였으나, 성종이 그의 충심을 이해하고 반려하였다. 사림파에 대한 지지 선언으로 인사들의 단종 정순왕후 복권 여론을 이끌어냈다.[2] 그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두 아들과 함께 사사(賜死)되었다.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 · 정광필 등의 상소로 죄를 면하고, 주계군으로 증직되었다.
22세 때인 연산군 8년(1502) 생원·진사시에 이수정, 김안국에 이어 각각 열두 명 중 2등, 열여덟 명 중 2등으로 합격했다. 그리고 24세 때인 연산군 10년(1504) 식년문과에서 장원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고, 이후 이조의 정랑과 좌랑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는 등 일찍부터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외직(의성 현령)을 구해 나갈 정도로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강했다.
음애 이자는 세상(世上)을 보는 눈은 날카로웠으나 경솔히 행동하지 않았고 연산군(燕山君)에게 불만이 많았으나 군주(君主)를 탓하는 선비들을 나무라고 위로하였으며 학문(學問)이 깊어서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으므로 그는 기뻐하면서도 남에게는 소인(小人)이라고 자처하며 겸손했다.
1506년 중종반정 후에 발탁되어 홍문관 수찬·교리 등을 지내다가 1510년(중종 5) 아버지의 상으로 관직을 떠났다. 1513년 복직하여 부교리·부응교·사간원사간을 역임하고, 이듬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했다가 1517년부터 홍문관전한·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에 승진하였다. 그 후에 좌승지로 옮겼다가 다음해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 무렵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의 신진 사류들과 일파를 이루어 조광조가 주장했던 이상적인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기묘명현이다. 하지만 그는 급진적 개혁만이 도학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다른 신진 사림들과는 달리 개혁의 속도를 늦추어 개혁에 더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조광조에게는 부족했던 배려와 포용을 알았던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기에 기묘사화 이후에도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1518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이 때 정사로 갔던 남곤(南袞)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된 것을 지성으로 간호해 회복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기묘사화 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519년 귀국해 한성판윤·형조판서·우참찬 등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으나 성품이 온유하고 교제가 넓어 남곤·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 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양파의 중간에서 반목과 대립을 해소하고 온건한 정책으로 유도하고자 했으나 급진 사림파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사림파가 참화를 입게 되자 그도 여기에 연좌되어 파직·숙청되었다. 그 뒤 음성·충주 등지에 은거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와 시문으로 소일하고, 십청헌 김세필(金世弼), 탄수 이연경(李延慶), 준암 이약빙(李若氷) 등 당시 명망 있는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마쳤다.
효도와 우애가 돈독했고 학문과 수양에 정력을 기울였다.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던 그는 살아서 많은 사평(史評)을 썼으나 일찍 죽어 정리되지 못하였다. 《주자가례》를 독신했으며 자손들에게 그 실천을 유언하였다.
《기묘명현록》에도 이름이 올라있고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에 탄수(灘水) 이연경(李延慶)과 함께 배향 되었으며,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제수받았다. 저서에는 《음애일기》, 《음애집》 등이 있고, 노수신(盧守愼)이 행장을 썼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노수신(盧守愼, 1515년 5월 29일(윤4월 16일)~ 1590년 5월 10일(음력 4월 7일))은 한양의 낙선방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주(光州) 노씨 노홍(盧鴻)이고 어머니는 성산 이씨이다.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穌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이다.
노수신은 6세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13부터는 시(詩)와 부(賦)를 지었다. 15세에 충주에 우거하고 있던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했고, 17세(1531년)에 스승 이연경의 사위가 되었다. 이연경은 조광조의 문인이다. 노수신은 이 무렵 충주 토계에 귀양 와 있던 음애(陰崖) 이자(李耔)에게도 나아가 학문을 연마했다. 이자는 기묘사화 이후 충주로 귀양을 와 탄수 이연경, 십청헌 김세필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했다. 27세 때인 1541년(중종 36) 당대 명유(名儒)였던 이언적(李彦迪)에게 배우고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퇴계 이황 · 하서 김인후 등과 친분이 있었으며, 율곡 이이와도 친하게 지냈다.
노수신은 1534년(중종 29년)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1543년(중종 3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한 이후 성균관 전적·수찬을 거쳐, 1544년 병조좌랑,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었다.
인종 즉위 초에 사간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그해 9월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되어 충주로 낙향했다. 충주에는 그의 처가가 있다. 1546년에는 선대의 고향이 상주로 이거했는데 1547년(명종 2) 3월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해 9월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珍島)로 이배되어 1565년 12월까지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1551년(명종 6)에는 송나라 남당(南塘) 진백(陳栢)이 지은 〈숙흥야매잠〉을 주해한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지었다.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 ☞
노수신이 유배지 진도에서 쓴 글이다. 그는〈숙흥야매잠〉을 8장으로 나누고 각 장별로 자구(字句)를 주해하고 논지를 해설했다. 초고를 완성하여 하서 김인후와 퇴계 이황에게 보내 질정을 구했다. 이후 세 사람은 분장(分章)과 자구 해석, 각 장의 논지, 수양방법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제들에 대해 토론했는데, 핵심 쟁점은 경(敬)에 대한 해석이었다. 노수신은〈숙흥야매잠〉의 강령이 경(敬)에 있고 경은 바로 일(一)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늘의 일(一)은 성(誠)이고, 인간의 일(一)은 경(敬)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심(心)과 성(性), 심(心)과 천리(天理)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심성론에 회의(懷疑)하고, 경은 천리와 즉자적으로 일치되어 있는 마음의 본체를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소재는 하서와 퇴계의 비판을 상당히 수용하여 정본을 확정했다. 이들 세 사람이 주고 받은 서신 내용이 〈삼자 숙흥야매잠해 왕복록〉으로 남아있다.
노수신은 1552년(명종 7) 진도 유배지에 초가를 짓고 ‘蘇齋’(소재)라는 편액을 걸었다. ‘蘇齋’는 주자(朱子)의 ‘我讀我書如病得穌’라는 글에서 따왔다. ‘내가 글을 읽고 글을 쓰니 병이 낫는 것 같다’라는 뜻이다. 이후 노수신은 이를 아호로 썼다. 1559년(명종 10) 진도에서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을 짓는다.
1567년 10월 선조가 즉위하면서 이준경 등의 계청으로 유배가 풀려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이후 홍문관 부제학, 청주목사, 충청도관찰사, 대사간, 이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홍문과 예문과 대제학을 거쳐 1573년(선조 6) 우의정에 이르렀다. (그 사이 1570년 퇴계 선생을 곡하고 1573년 남명 선생을 곡했다.) 1574년(선조 7) 회재 이언적(李彦迪) 연보를 찬하고 《회재집(晦齋集)》 서문을 썼다. 1579년 2월에는 음애 이자의 행장을 쓰고, 그리고 6월에는 탄수 이연경의 묘지명을 썼다.
1585년(선조 18) 5월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이듬해 11월 자신의 묘갈명을 지었다. … ‘小事糊塗或終累 大意分明信無愧’(작은 일에 투철하지 못하여 혹 잘못이 있기는 해도 큰 뜻이 분명하니 진실로 부끄러움이 없도다) —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으로 인해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하여 왕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588년(선조 21) 12월 판충추부사가 되었다. 1590년(선조 23) 3월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그해 3월 12일에는 부인상을 당하고 4월 7일에는 소재 자신이 세상을 떠났다. 7월 1일 상주 화령현 원천리에 장사지냈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에 추서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문간(文簡)이다. 강유선(康惟善)은 그의 동서(同壻)이다. 문장과 서예에도 능했고 양명학을 깊이 연구했다. 저서로 《시강록》(侍講錄), 《소재집》(蘇齋集) 등이 있다. 사후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상주의 봉산서원(鳳山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등에 배향되었다.
* 노수신의〈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 ☞
노수신은 일찍이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경연에서 《서경》을 강론할 때에는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의 설명과 일치했으나, 진도로 유배되어 그 당시 들어온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困知記)》를 보고 난 후에는 이전의 학설을 변경하여 도심(道心)은 미발(未發), 인심(人心)은 이발(已發)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진도 유배지에서 쓴 노수신의 〈인심도심변〉은 주자(朱子)의 〈인심도심설〉에 이의(異意)를 제기하는 글이다. 주자는 〈인심도심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심은 형기(形氣)의 사에서 생긴 것이고, 도심은 성명(性命)의 바름에서 근원한 것이다. 인심은 위태로워서 불안하고 도심은 미묘하여 드러나기 어려우나, 도심을 유지하고 인심이 도심의 명령을 받도록 하면 모든 행동이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잘못이 없게 된다.”
그러나 소재(穌齋) 노수신은 인심과 도심의 근원을 성명(性命)과 형기(形氣)로 이원화하는 이러한 주자의 견해에 이의(異意)를 제기한다. 도심은 본성이자 미발의 심체이며, 인심은 선한 본성인 도심이 발한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말한다. 인심을 본성인 도심이 발한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소재는 주자의 인심도심설을 수정, 미발의 심체가 바로 본성이자 도심이며 이 도심이 발한 인심은 악한 사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소재(穌齋)는 인심이 악으로 흐르는 것은 형기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마음을 놓아 버린 것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그 자체로 완전한 것으로 보는 소재의 인심도심설은 양명학(陽明學)의 심성론에 상당히 근접해 있다. 이러한 〈인심도심변〉에 대해 퇴계를 비롯하여 고봉 기대승, 일재 이항 등 많은 주자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퇴계는 “남명(南冥)이 장자(莊子)의 학문을 창도하고, 소재(穌齋)가 육상산(陸象山)의 견해를 고집하고 있으니 고봉이 분발하지 않으면 육씨(陸氏)의 학문이 성대하게 유행하는 것이 중국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게 될 것”이라면서 소재의 학문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 중심고을연구원 《살아움직이는 팔봉서원》 〈노수신의 삶과 학문〉 57~59쪽
* [따뜻한 점심식사] —
▶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 팔봉서원 탐방을 마치고, 그 마을의 식당인 ‘팔봉콩밭’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팔봉콩밭’ 식당은 충주의 농가맛집으로 ‘버섯전골’로 이름난 집이다. 미리 예약한 버섯전골이 식탁에서 보글보글 끓었다. 답사단 일행은 정겨운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식당에서 큰 길[도로]로 내려가 전망대에 서면 강 건너 보이는 곳에 아름다운 ‘수주팔봉’이 있다. 식사 후, 충주호에 연해 있는 송계계곡의 황강영당으로 향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