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례문(徵禮門)
경주읍성 남문이자 숭례문 제외하고 전국 읍성 문루 중 가장 크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뒤에 부윤 전식이 1632년에 한번 수리하고 영조때 1757년에 개축하고 그후 1915년 철거되었다고 한다. 과거 성덕대왕신종이 이 문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징례문 또는 고도남루 이라고 불리지만 1909년 초 사진을 보면 고도남루(故都南樓)라는 편액이 흐릿하게 보인다.
<징례문(徵禮門)의 상량문(上梁文)>
정랑(正郞) 전극항(全克恒)이 지은 것이다.
기술하건대,
붉은 이끼 푸른 이끼의 황폐한 성은 보름달 형상으로 남아 있고, 푸른 기와 붉은 난간의 웅장한 건물은 구름과 잇닿은 형세로 솟아 있다. 비록 다시 규얼(圭臬)로 잰다고 해도 그 뛰어난 만듦새는 견줄 것이 없으며, 길고 짧은 것을 다 재어서 따져본다고 해도 빼어난 규모는 헤아릴 길이 없으니, 사람의 힘이 아니라 귀신이 있어 도와준 것이다.
이곳은 옛 탈해왕(脫解王)의 나라요, 실로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세운 나라이다. 언덕 위의 정자에서 한 번 바라보면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듯한 여러 봉우리요, 동구 밖의 세 갈래 길에는 개가 짖고 닭이 우는 사방 지경(地境)이다. 당(唐 요(堯)의 나라)나라 서울의 문물은 배수(裵秀)의 여도(輿圖)로 알 수 있고, 초(楚)나라 산천의 형세는 굴원(屈原)의 사부(詞賦)에 남아 있다.
경애왕(景哀王)의 황음(荒淫)을 당하고, 진지왕(眞智王)의 부강(富强)을 펼칠 때는 철봉(鐵鳳)이 용마루에 잇닿아 선각(仙閣)이 삼하(三河)의 모래톱을 포옹한 듯하였고, 옥룡(玉龍)이 낙수받이를 받들어 주궁(珠宮)이 구락(九洛)의 물가를 가로지른 듯하였으니, 번창하고 화려했을 때는 마음껏 구경하던 곳이었으나 가득 찼다가 넘칠 때는 화를 부른 곳이었다.
한서가 바뀌매 포석정의 성상이 얼마나 지났으며, 초목이 쓸쓸하매 계림의 문물이 한낱 꿈이 되었다. 한(漢)나라의 소고(簫鼓)는 유수(流水)에 빠져버렸고, 진(晋)나라의 의관(衣冠)은 옛 언덕이 되어버렸다.
옛 서라벌의 영토가 이제는 대도호(大都護)의 진영(鎭營)이며, 경주부 성곽의 남문 누각은 바로 옛 나라의 남은 터인데, 어느 때에 건립된 것이던가. 그 옆으로 높은 골짝과 닿아있어 길게 뻗친 교외를 굽어보고 있다. 누각의 길은 세 번을 쉬어야 하는데 은은히 성벽이 우뚝 솟아 있고, 정원의 큰 길은 사방에서 모이는데 가벼이 관개(冠蓋)가 뒤를 따른다.
이곳이야말로 영남의 요충지요, 정말이지 강남의 절경이다. 임천(林泉)이 어우러져 집집마다 동산의 꽃과 오솔길의 대나무요, 도서(島嶼)가 빙 둘러 곳곳마다 언덕의 지초와 물가의 난초로다.
신령스런 터를 독차지하여 빼어나서 아름다운 경치의 으뜸이니, 어찌 뭇 선인(仙人)들이 노닐고 군자들이 자적(自適)하던 곳이 아닐까.
병란 속에 노략질당하는 궁색한 운을 만나고 오랑캐들 겁탈하는 흉악한 음모를 당하여, 구슬 같은 집과 방은 맹렬한 불을 따라 모두 붉게 타버렸고, 수를 새긴 대들보와 서까래는 차가운 잿더미로 변하여 모두 검게 타버렸다.
슬픈 가을 나그네가 되어 어느 곳에서 두보(杜甫)의 시를 읊으며, 한가한 날 시름을 씻으며 어느 곳에서 중선(仲宣)의 부(賦)를 쓸 것인가. 국가에서 개구리가 노한 것을 보고 출정하였으나, 양이 도망간 것을 인하여 우리를 고치는 격이었다.
국토를 개척하고 강계를 여니 대황(臺隍)이 현수(峴首)의 준험한 곳에 의지하였고,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게 쌓으니 보장(保障)이 진양(晋陽)의 웅장한 곳을 의거하였다.
순찰사(巡察使) 오공(吳公)이 중요한 지방에 부임하였는데 그의 재주는 문무(文武)를 겸전하여 임금의 교화를 선양하자 감당(甘堂)으로 소백(召伯)의 순행(巡行)을 노래하듯 하였고, 부월(斧鉞)을 짚고 지휘하자 고류(高柳)로 조공(趙公)의 덕행을 칭송하듯 하였다. 게다가 군사들을 진열하고 군대를 호령하니 대장 깃발이 휘날리는 병영이요, 괘(卦)를 방정하게 하고 시초(蓍草)를 둥글게 하니 나무를 깎고 시위를 만들어 발사한다.
단련하고 연마하니 다섯 번이나 신칙하고 아홉 가지를 정벌하는 군사요, 쌓고 뚫으니 일백 번 이기고 일만 번 안전한 계책이로다.
가군(家君)이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경주의 부윤이 되니, 파릉(巴陵)으로 좌천되어 악양루(岳陽樓)를 개수(改修)한 등왕(滕王) 격이요, 관사(官舍)를 수리했을 때
‘희우정기(喜雨亭記)’를 지은 소동파(蘇東坡) 격이다. 일천 간 넓은 집은 생각건대 모두가 기뻐하는 비호처요, 아홉 길 높은 집은 어찌 혼자만 누리는 안락처이겠는가.
통판(通判) 이공(李公)은 농서(隴西)의 명문(名門)인 이하(李下)의 후손으로, 황룡새(黃龍塞)에서 금생에 원비장군(猿臂將軍)으로 태어났으며, 백옥경(白玉京)에서 전생에 사신(蛇神)ㆍ사백(詞伯)이었다. 공적이 반자(半刺)보다 깊으니 자취가 왕희지(王羲之)의 못과 같으며, 뜻이 삼성(三城)을 쌓으니 호기가 진등(陳登)의 호해(湖海)와 같도다.
모두 생각하기를 기둥을 중첩하고 두공에 단청을 하니 비바람의 재해를 피하며, 정자를 넓히고 누대를 높이니 고명(高明)의 지위에 걸맞다고 한다. 따라서 청련거사(靑蓮居士)의 소원이 이미 세 번 오르는 것에 조화되었으니, 자부신군(紫府神君)의 일이 어찌 두 번 거행함을 꺼리겠는가. 더구나 왕공(王公)은 험준한 곳에 설치하여 언제나 예기치 않은 일에 대비하고 막을 것을 생각하였으며, 장자(長子)는 군사를 이끌 때 반드시 걱정이 없는 때에 막는 것에 의존했던 것임에랴.
이 때문에 민산(岷山)의 깊은 지역에 있는 검문(劍門)은 만부(萬夫)라도 뚫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며, 진(秦)나라의 웅장한 서울에 있는 함곡관(函谷關)은 천하의 견고한 곳이었으니, 어찌 옛 현인을 좇아 거듭 기이한 공적을 거두지 않을 것인가.
이에 사간(斯干)에서 옛 제도를 탐구하고, 대장(大壯)에서 옛 법도를 상고하였으며, 용성(容成)은 역서(曆書)를 견주어 기둥을 세움에 날을 택하는 마땅함을 알았고, 영장(郢匠)은 도끼를 휘두르고 재목을 선택함에 바람이 나는 듯한 공교함을 바쳤다.
높은 데를 따르고 낮은 데를 등지니 오늘 우뚝 솟은 것을 바라보게 되었으며, 옛것을 버리고 새것에 나아가니 당시 누추함을 비웃게 되었다. 층을 이룬 처마에 눈발이 휘돌면 병예(屛翳)의 궁전에 비끼어 통하고, 채색한 난간에 바람에 불면 비렴(飛廉)의 길을 막는다. 겹문이 열리면 도리어 설령(雪嶺)이 아득히 걸렸는가 의심하고, 일백 척 높은 누각은 다시 유종원(柳宗元)이 올라와 바라보는가 의아하다. 흰 마름 붉은 여뀌가 여동빈(呂洞賓)의 맑은 유람을 이루니, 가을 물 긴 하늘이 어찌 왕발(王勃)의 뛰어난 경치일 뿐이겠는가. 귀와 눈을 치달려 이에 보고 듣는 즐거움을 다하고, 육신을 마음대로 하여 이에 울적한 마음을 씻어버린다. 잠깐 좋은 노래를 일으키고, 아름다운 계책을 편다.
들보를 동쪽으로 드니 抛梁東
만리의 푸른 바다 한눈에 바라보내 萬里滄溟一望通
문득 신라의 전성기를 생각하니 却憶新羅全盛日
아름다운 자리에 해신이 와서 춤을 추었다오 海神來舞綺筵中
들보를 서쪽으로 드니 抛梁西
검술을 닦던 봉우리에 봄 해가 낮네 鍊劍峯頭春日低
어느 곳에 황량하게 무덤을 파는가 何處荒涼舒發墓
잘린 비석 글자도 없이 풀만 무성하도다 斷碑無字草萋萋
들보를 남쪽으로 드니 抛梁南
천 길 금오산 봉우리가 쪽빛인양 푸르도다 千丈鰲岑綠似藍
학사의 유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學士至今遺跡在
옛 산장에 고개를 돌리매 그리움을 어이 견디리 古庄回首思何堪
들보를 북쪽으로 드니 抛梁北
아득히 삼소를 바라보니 구름 기운 검도다 遙望三霄雲氣黑
대궐을 그리는 외로운 신하의 마음을 알고자 한다면 要識孤臣戀闕心
뭇 별들이 북극성을 돌고 있음을 보아야 하리 須看列宿環宸極
들보를 위로 드니 抛梁上
바람이 맑고 달이 밝은 적이 몇 번이던가 幾度風淸兼月朗
학창의에 윤건 쓰고 묵묵히 앉았노라면 鶴氅綸巾黙坐時
일종의 의미가 어이 그리 상쾌한지 一般意味何蕭爽
들보를 아래로 드니 抛梁下
맑은 창에 홀로 기대어 넓은 들을 바라보네 獨倚晴窓臨大野
우주는 아득하고 사람들 많기도 한데 宇宙茫茫人許多
뉘라서 정말이지 대장부인지 모르겠네 不知誰是男兒者
삼가 바라건대,
상량(上梁)한 뒤에 하늘은 맑고 땅은 평화로우며, 집은 풍족하고 사람은 만족하리라. 한 잔 술로 문장을 담소하면 대부(大夫) 사마상여(司馬相如)요, 한밤중에 풍류를 노래하면 종사(從事) 두목(杜牧)이리라. 서천 절도사(西川節度使)가 변방을 계획함에 용천검(龍泉劍)이 빛이 나고, 남국(南國) 가인(佳人)의 석상(席上)에는 연루(燕樓)의 한이 없으리라.
도성 사람들이 거듭 감상하니 때로 계서(雞黍)의 맹세를 찾고, 시골 손님들이 자주 머무니 간혹 어초(魚樵)의 흥을 일으키리라. 사계절을 돌면서 상쾌함을 다투고, 천 리의 아득한 회포를 쏟아놓으리라.
[국역] 조철제 전경주문화원장
[원문]
<徵禮門上梁文>
正郞 全克恒 所著
述夫頳苔翠蘚荒城 餘滿月之形 碧瓦朱欄傑構 聳連雲之勢 雖復陳圭置臬 妙範無方較短量長 奇模不測 非人力也 有鬼相之 奧若脫解王之邦 實惟赫居世之國 亭皐一望 龍盤虎踞之諸峯 里閏三分 狗吠鷄鳴之四境 唐都物候 裵秀之輿圖可知 楚壁山川 屈平之詞賦卽在 當景哀之荒樂 席眞智之富强 鐵鳳連甍 仙閣擁三河之滸 玉虬承霤 珠宮橫九洛之涯 繁華爲縱觀之場 滿溢是招損之地 炎涼代謝 幾過鮑石之星霜 灌莽蕭條 一夢鷄林之文物 漢家簫鼓沉流水 晉代衣冠成古丘 昔之徐耶伐寰區 今者大都護鎭管 府城南門樓者 蓋故國之餘址 而何時所建耶 爾其傍連絶壑 俯壓長郊 閣道三休 隱隱垣墉之却峙 庭衢四會 翩翩冠蓋之相追 玆嶺外之要衝 信江南之佳麗 林泉糾合 園花徑竹之家家 島嶼縈迴 岸芷汀蘭之處處 占靈基而得雋 爲勝地之先鳴 豈非列仙之庭 君子攸芋者也 洎金戈鐵馬 逢否運於搶攘 鑿齒雕題 逞凶謀於劫掠 珉房砥室 隨烈火而皆紅 綉桷琱楣 變寒灰而盡黑 悲秋作客 底處詠子美之詩 暇日消憂 何從題仲宣之賦 國家見蛙怒而憑軾 因羊亡而補牢 拓土開疆 臺隍依峴首之峻 深溝高壘 保障據晉陽之雄 巡察使吳公任重藩 維才全文武 承流宣化 甘棠歌召伯之巡 仗鉞褰帷 高柳頌趙公之德 加以陳師鞠旅 高牙大纛之營 方卦圓蓍 剡木弦弓之射 鍜乃礪乃 五申九伐之兵 築斯鑿斯 百勝萬全之策 家君分憂北闕 作尹東京 謫守巴陵 修岳陽之滕子 始治官舎 記喜雨之蘇公 廣廈千間 竊意俱歡之庇 高堂九仞 何心獨享之安 通判李公 隴西名門 李下華胃 黃龍塞上 今生猿臂將軍 白玉京中 夙世蛇神詞伯 功深半刺 跡猶逸少之池亭 意築三城 氣則元龍之湖海 咸以爲重楹畵棋 斯避風雨之災 廣榭崇臺 乃稱高明之位 故靑蓮居士願 已諧於三登 紫府神君役 何憚於再擧 而況王公設險 常思備禦不虞 長子率師 必倚關防無患 是以岷墟奧壤 劍門非萬夫之開 秦塞雄都 函谷是四海之固 盍導往哲 重緝奇功 於是探舊制於斯干 稽前規於大壯 容成校曆立柱 知擇日之宜 郢匠揮斤掄材 獻生風之巧 因高背下 瞻此日之崔嵬 去故就新 笑當時之朴陋 層軒回雪 斜通屛翳之宮 綵檻臨風 直遏飛廉之路 重門擊柝 還疑雪嶺之遙懸 百尺高樓 更訝柳州之登眺 白蘋紅蓼 可成洞賓之淸遊 秋水長天 奚啻子安之勝槩 驅馳身目 于以極視聽之娛 放浪形骸 於焉洩鬱怏之思 聊興善頌 式播徽猷
抛梁東
萬里滄溟一望通
却憶新羅全盛日
海神來舞綺筵中
抛梁西
鍊劍峯頭春日低
何處荒涼舒發墓
斷碑無字草萋萋
抛梁南
千丈鰲岑綠似藍
學士至今遺跡在
古庄回首思何堪
抛梁北
遙望三霄雲氣黑
要識孤臣戀闕心
須看列宿環宸極
抛梁上
幾度風淸兼月朗
鶴氅綸巾黙坐時
一般意味何蕭爽
抛梁下
獨倚晴窓臨大野
宇宙茫茫人許多
不知誰是男兒者
伏願上梁之後 乾淸坤夷 家給人足 一樽談笑文翰 則大夫相如 五夜笙歌風流 則從事杜牧 西川節度籌邊 有龍劍之光 南國佳人席上 無燕樓之恨 都人襲賞 時尋雞黍之盟 野客頻留 或起漁樵之興 環四時而競爽 寫千里之長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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