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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 내 부활 ( 고전 15: 35-49)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존재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산 증거입니다. 거짓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은 로마 군병들에게나 혹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반드시 드러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삼국지의 관우나 장비처럼 용맹하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도망하고 숨고, 예수님을 부인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유약하고 비겁하며, 대부분 어부 출신의 무식한 제자들이 전한 예수 부활 소식이 수백년후 로마 황제를 무릅꿇게 했다면 예수 부활 사실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을가요?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는
첫째, 예수님께 대한 성경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됨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과 하나님께서 역사와 세계를 경영하고 계심을 ale게 합니다. 예수님 초림이 속죄를 위한 것이요, 예수님의 재림은 심판을 위한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이 신실함을 믿기에 재림을 기다리며 소망 중에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도록 도전을 받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통한 인류구원의 대업이 성취되어 죄인인 인간에게 천국문이 열린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야말로 굿 뉴스입니다. 행위에 의한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십자가 대속의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셋째는, 불의에 대한 의의 승리를 보장합니다. 악은 항상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이므로 의의 최후 승리를 믿고 용기 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넷째는,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인간의 내세관을 새롭고 확실하게 정립하여 줍니다. 오늘의 말씀은 특별히 인간의 내세관에 대하여 증거하려 합니다.
첫째, 재래종교의 내세관
SBS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는 프로에서 환생이라고 하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환생이 무엇인가요. 죽었던 사람이 나중에 다시 어떤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힌두교의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주제가 환생입니다. 불교도 환생을 아주 중요한 교리로 믿고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카스트라는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승려그룹이 제일 위에 그룹입니다. 그 다음이 귀족, 평민, 노예그룹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네 개 그룹에 들지 못한 불가촉 천민, 달리트라는 계층도 있습니다.
이 힌두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은 환생합니다. 이걸 가리켜 우리가 윤회라고 이야기 합니다. 전생에 어떤 존재 였던 사람이 다음세대 또 그 다음세대에 어떤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불가촉 천민인 달리트가 평민이 된다거나 평민이 귀족이 된다거나 귀족이 다시 승려 계급이 된다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전생에 어떤 사람은 귀족으로 어떤 사람은 천민으로 그들의 업보에 따라서 이미 일생이 결정이 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환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아주 물을 무서워합니다. 왜 무서워하나? 정신 심리학자를 데리고 가서 왜 이 사림이 물을 무서워하나? 했더니, 이 사람의 전생은 물을 무서워해서 물에 빠져죽은 어떤 사람이었다. 부부가 하도 싸워서 왜 싸우나? 해서 나중에 알아보니 전생을 주장하는 사람들 얘기로 이 두 사람의 전생은 아주 오래전에 한 마을에 사는 원수지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지요? 부부가 하도 싸우면, 전생에 원수지간이었다. 혹시 여러분 부부가 많이 싸우세요? 아마 전생에 원수지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가 있지요? 그거 혹시 우리 조상들 가운데 업보가 아주 나빠서 개로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윤회설을 믿는 전생과 환생을 믿는 논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만드셨을까요?
윤회와 환생의 기본은 절망입니다. 물론 희망이 없지는 않습니다. 더 좋은 일, 선을 많이 쌓게 되면, 언젠가 더 좋은 관계로, 더 좋은 존재로 태어날 것이라고 하지만 좋은 존재로 태어나는 것은 그 다음세대에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수 십대 수 백대가 지나간 다음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과 좌절이 바로 이 전생, 환생을 믿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환생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이 돌고 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잘 보는 라이온킹이라는 만화 영화가 있지요? 뉴에이지하는 사람들이 만든 헐리우드의 영화입니다. 이런 영화의 가사를 보면 삶은 돌고 도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써클 오브 라이프 (circle of life)가 되는 거예요. 인생을 하나의 원으로 칩니다. 그러니까 윤회입니다. 개로 태어났다가 선을 조금 더 쌓게 되면, 조금 더 좋은 존재로 태어납니다. 악업이 쌓이면 더 나쁜 저급의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 인생이 돌고 돈다는 것이지요.
흰두교의 전도 스티커에 born again이라고 크게 쓰여 있습니다. 다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전도지인가? 하고 생각을 했는데, 보니까 born again 이라는 커다란 빨간 글자 밑에 and again, and again, and again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다시 태어났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났냐하면, 또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지요? 무엇을 강조한 것인가요? 환생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은 불교 문화권에 지배를 받아왔기 때문에 불교의 윤회 사상을 많은 사람들이 믿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다니는 사람가운데서도 간혹 가다 툭 튀어 나오는 말이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혹시 그런 말을 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왜 전생을 이야기 할까요? 이것은 윤회를 믿는 불교인들의 사상을 영향 받아서 그렇습니다. 개나 돼지로 태어나고 가어 다니는 뱀으로 태어나는 것, 그것이 어느 날 몇 십대 후에 다시 사람이 된다는 것, 그래서 인생은 돌고 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먼 거리의 잘못된 교리입니다.
둘째, 하면 기독교는 어떤 내세관을 가졌습니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약속은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봄철에 돋아나는 나뭇잎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미물들에게도 부활의 신비가 있다면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부활의 신비가 없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잠자리 한 마리가 연못 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땅 위에 곤충 하나가 유심히 바라보다 물었습니다. “왜 그래? 뭐 잃어버렸니? 찾아줄까?” 잠자리가 대답합니다. “말은 고맙지만 안돼. 너는 땅에 사니까. 사실은 연못 속의 내 친구들에게 훨훨 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래.” “그러면 네가 연못에서 나왔단 말이야?” “응, 어제. 순식간에 변하면서 날게 됐지. 이렇게 넓은 하늘이 있는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지.” “혹시 다시 연못에 가고 싶지는 않냐?” “얘는 내가 미쳤냐? 그 냄새나는 연못으로 다시 돌아가게. 나는 다만 연못 위에 이러게 드넓은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을 따름이야. 그런데 알려줄 길이 없어 답답하단 말이야.”
이 이야기처럼 이 세상 너머 분명히 천국과 부활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가만 소개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몸으로 부활하셨을까요?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재림 하실까? 그리고 우리가 입을 부활체는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해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그리고 우리의 부활! 이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고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정말 우리를 궁금케 하는 이유는 우리가 전혀 체험해 보지 못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영원을 살수 있는 몸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활할 때 입을 우리의 몸은 어떤 몸일까요?
1.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몸은 썩지 않는 몸입니다
고전 15: 42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몸은 썩을 몸입니다. 그러나 부활체는 썩지 않는 몸입니다. 우리의 몸은 지금 아무리 아름답고 건강해 보여도 노쇠하고 병들고 죽고 썩습니다. 그러나 부활체는 영원히 썩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썩을 육체를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도 살 수도 없습니다.
혹시 이런 염려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매장하는 것도 무서운데, 화장이나 기타 흉측한 모습으로 죽으면 부활하는 데 지장이 없나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는 것이므로 우리의 육체가 어떤 상태로 죽고, 이러 저리 흩어져 썩어진다 해도 하나님이 썩지 않을 새 몸으로 변화시켜 줄 겁니다. 그리고 안구 기장, 장기 기증, 시신 기증을 하면 신체 일부가 다른 데 떨어지는 건데 괜찮나 하는 의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정도 문제 해결 못하는 분이 아닙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변화된다니까 어떤 분은 서로 알아보지 못할까봐 걱정하는데,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시키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서로 알아보게 해 주실 겁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맨 처음에는 못 알아보았으나 눈이 열려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오래 만에 만난 친구를 못 알아보다가 대화해 보고 잘 살펴보면 알아보게 됩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장차 부활체의 모습으로 변화된다 해도 서로 반갑게 알아보고 재회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2.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고전 15: 43절에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체는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지금 우리 육체는 아무리 젊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도 험한 세상 살다보면 상처 나고, 일그러지고, 늙어지고 ... 특히 늙어지면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추해 집니다. 주름이 늘고, 머리 희어지고, 머리털이 빠지고, 검버섯이 생기고, 눈이 흐려지고 귀도 멀어가고 ... 그래서 부끄럽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하면 영광스럽게 빛나는 몸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부활체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알수 있는 방법은 첫 열매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제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요 21: 9). 귀신은 음식을 만들 수 없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있는 집에 홀연히 나타나 당신의 몸에 난 못자국을 보여주시고 만지게도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이 엠마오라는 동네로 내려갈 때 그 길 중에 나타나셨으나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기도 하셨습니다.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마리아도 그가 동산지기인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셨기에 잘 알아보지 못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겨우내 입던 칙칙하고 더러워진 옷을 벗어던지고 산뜻한 봄옷으로 갈아입어도 기분이 좋은데 부활의 새 옷을 입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때는 모두 다 얼굴이 잘 생긴 사람, 몸매가 좋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3. 강한 몸이 됩니다
고전 15: 43절 “......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얼마나 연약한지 모릅니다. 조금만 무리해도 피곤하고 병들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활체는 강건합니다. 밤낮 쉬지 않고 찬송해도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계4:8) 강한 몸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질병으로 시달린 사람도 더 이상 병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부활은 ‘완전한 치유’인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너무도 약합니다. 마치 도자기처럼 한번 놓치면 깨어지는 그릇과 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능력면에서도 연약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존재입니다. 심지어 우리 속에 숨어있는 작은 질병 하나를 이기지 못해서 쓰러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자기 속에 어떤 질병이 있는지도 모르고 삽니다. 그러나 부활하는 몸은 강한 몸입니다. 그 몸은 그 어떤 질병도 넘보지 못하는 몸입니다. 부활하면 건강에 대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부활체는 병들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생각만 해도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4. 신령한 몸이 됩니다.
고전 15: 44절.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라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육의 몸인데, 부활체는 신령한 몸입니다. 신령한 몸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눅20:36 보면 천사와 동등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의 모범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참조하면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모습을 적은 기록들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벽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요20:19,26) 금세 나타났다 사라졌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눅24: 31,36) 제자들에게 갈릴리 해변에서 만나자고 해 놓고 훨씬 먼저 가셔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 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신기한 몸이 우리의 미래 부활체라는 겁니다.
고전15:20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첫 열매이면 다음 열매인 우리도 처음 열매이신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아파트 단지를 건축할 때 미리 모델 하우스를 짓습니다. 그리고 구경시켜 준 후 분양 신청을 받습니다. 그것처럼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천국과 부활을 설명해 주시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견본으로 알고 나도 장차 저렇게 부활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요일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라고하였습니다. ” 빌3: 20~21에도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하였습니다.
셋째, 기독교인은 두 번 부활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존 스토트가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가르칠 때에, 오늘날 서구 교회 안에 있는 두 가지 불행을 지적하였습니다. 첫째는,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을 알지 못하여 마음 속에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인 둘째는, 자신이 사실은 구원받지 못했으면서도 불구하고 교회를 오래 다녔기 때문에 혹은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교리를 알고 있어서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인격, 성령의 인격 9가지 열매를 맺는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육신이 죽고 난 다음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부활을 기독교인이 경험하지 않으면 그는 진정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신자는 두 번 극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하나는 중생할 때입니다. 하나님 자녀는 착하고 바르게 살면 서서히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가 안에 들어오심으로 극적으로 바뀝니다. 겉모습은 불신자가 더 잘 나고 잘 될지 몰라도 무정란과 수정된 알은 근본이 다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재림하실 때의 변화입니다. 부활하신 예수처럼 나도 부활하게 됩니다.
넷째, 부활하게 되면 성도들은 어떻게 삽니까?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살전4: 17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하였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변화하여 그리스도처럼 될 것입니다. 고후 3:18절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든 아픔, 죽음 그리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계21: 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하였습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고전3: 8절에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롬8: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하였습니다.
실로 꿈같은 일이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한없는 감사와 찬송, 영광과 존귀를 돌립니다.
지혜자로 유명한 수도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지혜자로 불리게 되었나요?” “내다보는 능력 때문인가 봅니다.” “뭘 내다보시나요?” “애벌레에서 나비를, 알에서 독수리를 보듯 어떤 일이든 다음 일어날 일을 봅니다.” 1년 후 일을 알면 돈을 벌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음 세상을 알면 거기 맞추어 현재를 살게 됩니다.
다섯째, 부활신앙은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종교개혁시 모두 루터를 죽이려 했습니다. 엄청난 현상금이 붙었습니다. 황제도 교황도 군대도 자객도 마귀도 그를 죽이려 찾습니다.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보다 오래 수십 년간 도피하며 성경을 번역했고 싸웠습니다. 그는 위대했습니다. 세계와 역사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고백으로 부활 능력을 가불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 내 안에 계시다.” 부활 신앙은 사람을 강하게 합니다.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죽음은 또 다른 삶을 위한 단계일 뿐입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은 끝이 아닙니다. 씨앗의 죽음은 다른 삶을 위한 시작일 뿐입니다. 36절에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이 비유는 요12: 24절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씨가 죽어야 열매가 맺힌다는 진리를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씨의 죽음은 열매를 위해서는 필연적입니다. 죽음이 선행되지 않으면 다른 삶의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혹시 농촌에서 파란 싹이 돋은 밀을 뽑아 본적이 있습니까? 파란 싹이 돋은 뿌리에 껍질만이 뎅그렇게 붙어있는 씨앗들의 주검을 보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씨앗은 죽었지만 거기에서 또 다른 생명인 싹이 돋아난 것입니다.
식물만이 아니라 곤충도 보십시오. 생명은 한 가지 존재 양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로 존재하다가 알이 부화되어 애벌레가 되고, 애벌레가 성장하여 번데기가 되고, 그 번데기는 나방이 되고, 나방은 다시 알을 낳아 생명을 이어갑니다. 동일한 생명의 다른 존재 방식입니다.
씨라고 하는 것은 병속에 있거나 봉투에 담아져 있으면 100년 200년이 가도 절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변화되지 않습니다. 씨앗이 땅속에 들어가 있게 되면 이렇게 아름다운 꽃으로 열매로 변화 됩니다. 우리의 육체요? 보잘 것 없는 것 같지요?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가 한 번 죽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는 잠자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는 다시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름다운 존재로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윤회나 환생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지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조니 에릭슨 타다라는 여자 분이 있었습니다. 17살 때 다이빙하다가 목 아래가 마비됩니다. 혼자서는 먹기도 씻기도 화장실도 갈 수 없습니다. 2년 재활훈련기간 동안 수없이 자살충동을 느낍니다. 본래 신자였지만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의지합니다. 그러면서 부활의 소망을 갖습니다. 조금 참으면 영원히 건강한 몸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의지하고 감사합니다. 입으로 그림을 그리고 노래하고 책을 씁니다. 얼마든지 예수 심어 더 나은 부활을 만들어 갑니다. 이 절망적 상황을 인내로, 감사로 극복해가는 모습에 감동된 교회에서 사귄 청년과 결혼해 30년 이상 행복하게 살며 전신장애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조니가 받은 명예박사가 6개입니다. 큰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은반도 여러 개 제작되었습니다.책은 베스트셀러 몇 권을 포함 48권입니다. 그냥 된 일이 아닙니다. 각고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실로 결사적인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 많은 어려움을 능히 이겨낸 것은 부활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세계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현 미국정부 장애자위원회 고문입니다. 남편은 역사 교사를 30년하고 퇴직해 10년 전부터 아내 도우미로 나섭니다. 손발이 됩니다. 이 분이 더 훌륭해요. 얼굴도 몸도 씻고 휠체어에 앉히고 돌봅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부활의 권능으로 조니와 항상 함께 계셔서 도우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도우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여섯째, 부활신앙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변화시킵니다.
땅엣 것 보다 하늘의 것을 더 사모하며 삽니다. 빌3: 20-21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하였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도 우리의 본향은 우리의 영원한 나라는 하늘입니다. 세상의 것을 취하기에 급급하기 보다 하늘의 상급을 바라며 삽니다.(빌 3: 14)
부활 신앙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추구하게 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기 원하십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하였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기를 힘써야합니다. 다니엘 12장 2~3절에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하였습니다.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하였습니다. 하늘에 썩지 아니할 상을 바라며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