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전지現前地와 반야바라밀>
- 지혜로 완성해 가는 보살들의 피안彼岸
6지의 보살이 주로 닦는 수행법이 10바라밀 가운데 여섯 번째인 지혜바라밀은 너무나도 중요한지라
한 번 더 언급하고자 합니다. 지혜바라밀은 『반야심경』에서 강조한 반야지와 일맥상통합니다.
수행의 한 과정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것이 곧 이 반야의 지혜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은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경전으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야지혜(절대지)’에 의지해야 하고, 수행 역시 반야지혜를 증득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반복해서 설하고
있습니다.
이 반야지般若智는 세속의 분별과 가치를 뛰어넘는 초월적 가치를 말하는데, 곧 공空의 이치를 여실히
증득한 경지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아뇩다라삼먁 삼보리를 증득하면 반야바라밀을
증득한 것인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만약 성불의 경지라고 한다면 아직도 10지보살의 중간 단계에
있는 6지보살이 얻을 수 있는 경지는 아닐 것입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대승불교에서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말하듯이 원래 불교는 ‘자리自利’가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자리’ 이후에 ‘이타利他’라는 것은 스스로 증득이 된 다음에 남을 이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자리’ 단계의 완성이 6바라밀의 마지막 단계인 지혜반야바라밀입니다. 그런 다음 ‘이타’를 위한
10바라밀의 방편方便·원 願·력力·지智바라밀이 있게 됩니다. 만일 다른 중생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방편을
비롯한 나머지 세 바라밀을 닦을 필요 없이 지혜반야 바라밀에서 끝낼 것입니다.
‘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야의 지혜까지 얻은 사람이 무슨 원이 필요하겠습니까. 법장비구가 48가지 원을
세워 아미타세계를 완성해서 아미타불을 한 번이라도 부르면 전부 극락으로 인도하겠다는 것,
관세음보살님께서 중생들이 관세음보살을 한 번만이라도 부르면 그사람이 어떤 고통에 있어도
건지겠다는 것이 원바라밀입니다.
역바라밀도 마찬가지입니다. 10바라밀의 방편方便·원願·력力·지智바라밀은 자기 수행의 과정이 아니고
이타행이라는 말입니다. 방편은 중생을 이익 되게 보살이 해 주는 교묘한 방법을 말합니다. ‘원’은 보살의
원력으로 중생들을 성불에 이르게 하겠다고 서원하고 발원하는 것입니다. ‘역’은 원을 이룰 수 있는
시간이에요. 이렇게 ‘이타’를 위해서 닦는 수행이 10바라밀의 방편·원·력·지바라밀이라는 것을 가슴속에
새기고 닦아나가야 합니다.
반야는 단지 공空의 도리를 아는 자리自利의 지혜일 뿐 반야의 지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써 나의
지혜가 완성이 되었다 해도 그 단계는 ‘자리自利’, 자기 문제만 해결됐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보살이
아닙니다. 중생을 위하는 마음과 중생을 위하는 고민을 하면서 중생의 이익을 위해 보살행을 해야
보살인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10바라밀 중에서 6바라밀까지는 철저히 ‘자리’입니다. 그러나 방편·원·력·지의
철저한 ‘이타’ 수행을 통해서 자리와 이타가 완전히 회통會通이 되어서 나타나는 번뜩이는 지혜는
10바라밀의 마지막 지智가 되는 것입니다. 불법의 이치를 아는 정도의 수준이 아닌 낱낱 중생의 업과
과보를 다 아는 지혜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반야는 공의 도리를 아는 지혜, 10바라밀의 마지막 단계인 지智는 우주의 이치를 꿰뚫는
지혜를 뜻합니다. 보살의 가장 마지막 단계 10지보살의 마지막 수행인 지바라밀 이후에도 등각等覺,
묘각妙覺, 불佛이 있습니다. 그러나 등각, 묘각이라 는 것은 수행을 해 나간다는 개념보다 10바라밀을
공고히 해 나간다는 개념이 강합니다. 실지로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 10바라밀 안에서 다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청정케 하는 연고로 지혜바라밀을 닦는다고 했습니다. 앞의 바라밀은 업을 바로
보기 위해서, 업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닦는 지혜입니다.
그것이 반야바라밀이고 제가 다른 책에서 주장한 것처럼 공을 증득했다는 것은 해탈이 아닙니다. 적어도
『화엄경』에서 말하는 지혜를 놓고 보면 분명히 공을 깨닫는다는 것이 곧 성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내용이 경전에 분명히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고 보면 공을 깨닫는다는 것은 6바라밀에서의 이
반야바라밀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과거·현재·미래의 삼세 부처님들이 모두 거들어 주셔서 우리 중생들이 성불할 수 있도록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 10바라밀의 마지막 지바라밀입니다. 이제 6바라밀의 지혜바라밀과 완전히
구별이 되십니까? 참고로 제가 <해외 우수학술서 번역 불사>의 간행사에서 밝힌 내용을 덧붙여 봅니다.
의상에 의해 정립된 화엄 교학은 유심唯心 즉, 일심一心에 의해 펼쳐지는 법계연기法界緣起로 압축된다.
이는 붓다의 깨달음인 연기緣起를 모든 존재를 펼쳐지게 하는 본질인 이법계理法界와, 본질에 의해
펼쳐진 현상 세계인 사법계事法界를 무진연기無盡緣起로 설명한 세계관이다.
그리고 이 사상은 양자론같이 극미極微한 세계를 다루는 물리학이나 거시巨視적 우주를 다루는
천문학과도 잘 어울린다. 이는 화엄사상에서 다루는 대단히 심 오한 논리이기도 하다. 다만 화엄경의
모체인 「십지품」에서 설하는 보살 실수행의 단계와 경지는 물론 수행의 구체적 방법이 간과되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십지품」에서 설하는 보살지위의 수행은 10바라밀十波羅蜜로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방편·원·
력·지 등 열 가지로, 「십지품」에서는 열 가지 모두에 ‘바라밀’을 붙여 사용함으로써 그 뜻을 명확히
하고 있다.
10바라밀은 보살의 십지十地 수행과 정확히 일치해, 초지보살은 “보시바라밀을 주 수행으 로 삼되
다른 바라밀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순차로 마지막 10지보살은 “지[智, 般若]바라밀을 주 수행으로 삼고 나머지 바라밀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라고 명쾌하게 설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불교는 왜 6바라밀만을 거론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나는 한국불교가 10바라밀을 수용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0바라밀 중 앞의 6바라밀은 철저히 자리自利 수행의
단계이다. 여섯 번째 지혜바라밀은 자리의 지혜가 완성된 수행의 단계이고 보살 육지의 경지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어지는 보살 칠지에 십지에 이르는 수행인 방편·원·력·지바라밀은 자리를 여의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보살 이타利他 수행의 본격에 해당된다. 6바라밀을 성취한 육지보살이라도 중생 구제를 위한
관세음보살 같은 방편, 보현보살 같은 원력, 어떤 장애와 마장도 능히 다스릴 수 있음은 물론
천제闡提까지도 구제할 수 있는 금강 같은힘[力]을 갖추고, 마지막으로 궁극의 반야지般若智인
지바라밀을 얻게 된다는 것이「십지품」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10바라밀의 본질이다.
10바라밀을 상기한다면 한국의 승가가 이타의 시작인 방편바라밀을 얼마나 이기적으로 악용해 왔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자리 수행에서마저도 오지보살의 선정바라밀에 집착해 육지보살의 지혜바라밀 수행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수행의 지침으로서 화엄경은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10바라밀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수행의 방법을 말해놓은 것입니다. 사실 불교에서 10바라밀을
빼면 불교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10바라밀이라는 것은 우리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 또 이러한 것은 실천해야 한다는 것들을 열 가지로 명시해 놓은 것입니다.
바라밀이라는 것은 우리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열 가지 방법을 열거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필수
과목이라고 명시를 해 놓은 게 10바라밀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해 놓은 경전은 『화엄경』외엔 거의 없다고 봅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하면서 불교 사전을 찾아보셨겠지만, 불교사전을 찾아봐도 『화엄경』만큼 더 정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제가 『화엄경』과 10바라밀의 관계를 자주 언급했는데 실지로 『화엄경』이 화엄학華嚴學으로
접근할 때는 화엄 사상이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하지만 10바라밀로 다가서면 훨씬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경전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경전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학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따라서 우리 불자들은 처음부터
『화엄경』에서 말하는 중중무진연기라든가 하는 이론적인것부터 일부러 알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실은 화엄학이니 화엄사상이니 하며 학술적으로 논하는 것은 우리 불자들이 몰라도 될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일부러 이론을 익히기 위해서 애쓸 필요는 없고 10바라밀수행을 하면 된다는 것을 먼저 알려주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10바라밀 수행을 하다 보면 저절로 이해가 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 교리가 이해가 잘 안 된다면 억지로 이해하려고 고뇌하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번뇌입니다. 그러면
공부에 싫증을 느끼게 됩니다. 유식학을 모른다고 해서 불교를 모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불교를
궁극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어떠한 이론은 꼭 알아야 한다는 것은 실상 없습니다. 불교 공부를 하면서
이해가 안 된다고 절대 스트레스 받지 마십시오.
그럼에도 공부를 해 나가다 보면 어려워서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이 있지요. 처음부터 이해가 쉬우면
부처지 보살이 아니겠지요. 그러니까 억지로 애쓰지 말고 부분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그냥
넘어가세요. 이해가 될 때까지는 다음 단계로 안 넘어간다고 고집 부리지 마세요. 그런 방식은 수행에
정말 방해가 됩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런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해 안 된다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고 고집부리다 보면 포기하게 됩니다.
사실 이해가 안 되는 게 당연한 겁니다. 그냥 넘어가다 보면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됩니다. 2*8=16이 안
외워져도 나중에 8*2=16 외우면 저절로 알게 되죠? 그와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10바라밀에 대해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말씀 드리는 이유가 불교의 거의 전부가 10바라밀에 다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