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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도 거룩한 주의 날, 성전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귀하고 복된 성도님들, 삶과 가정과 일터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눕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생전에 제자들에게 수많은 말씀들을 전해주었죠. 그중에 한 가지 말씀이 있는데요. 사람이 너희들을 배당이나 위정자들이나 권세 있는 자들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을 대답할지 무엇으로 말할지 염려하지 말아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이제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이 말씀의 실체가 무엇인지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회 앞에서 사도들은 답변을 하는데 아주 당당하게 자신들에게 주신 말씀을 선포하게 되죠.
성령께서 주신 말씀을 거침없이 내뱉었다라는 그러니까 심문하던 공회원들이요. 이들의 반응을 보면서 깜짝 놀라는 수밖에 없죠. 당황하게 되는 거 아니 저들이 도대체 무엇인데 이미 한 번 경고의 메시지를 줬는데 또 전하다가 잡혀왔는데 저리 당당할 수가 있을까 이렇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당황함에 그치지 않고 그것으로 인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죠. 더 이상 신문할 필요도 없겠다. 심문하지 말고 그냥 이들을 사형시키자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으로 마음을 모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요. 바리새파에 속한 율법학자로 여러분 종종 들어봤던 가말리엘이라는 학자가 그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사도들을 잠시 밖으로 내보낸 후에 70여 명의 공회원들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게 됩니다.
존경하는 공회원 여러분 지금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이 일에 대해서 섣불리 결정하지 말고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죠? 이전에 드다라는 사람이 일어나 자기가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놀랍게도 400여 명이 그들에게 모였습니다.
그들을 따랐지만 그가 죽고 난 후에 어떻게 됐습니까?
자연스럽게 다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드다뿐만이 아니죠. 그 뒤 인구 조사하던 해에 유다라 하는 갈릴리 사람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동해 많은 패거리를 이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도 죽고 나니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이 흩어지는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번 경우에 대해서도 여러분께 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저 사람들을 그냥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만일 저 사람의 사상과 행동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그들은 반드시 두다와 유다의 경우처럼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여러분 어떻게 저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여러분들이 도리어 하나님과 맞서 싸우는 자들이 될까 봐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매우 논리적으로 공유원들을 설득했던 것이죠. 공유원들은 가말리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기 여기 저기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합니다. 공감이 되고 동의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열성파들이 있겠죠. 그들은 마음 가운데 이게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 말이지 저들을 그냥 처단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그런 마음이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가말리엘은 온 백성에게 존경받는 사람이라 했죠. 그러니 그의 영향력을 볼 때 무시하고 따르지 못할 사람들이 적었던 것이죠. 결국 공원들은 가마이니엘의 제안을 전격 수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형 선고를 내리지 않고요. 이들을 석방하기로 결정을 해요.
그런데 이들의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그냥 석방할 수는 없겠다 싶어서 이번에는 매질을 좀 하자 그래서 때리기 시작합니다. 마구마구 때리는 것이죠. 태영 여러분 40에 하나 가한 숫자를 아마 맞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미 경고 후에 내보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제자들 사도들이 내놨던 현장 그들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요? 몸도 마음도 상했을 거예요. 몸은 아파서 상하고 마음은 내가 도대체 복음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렇게 고통을 주시는 게 마음도 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놀랍고도 놀라운 것은요. 그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을 매우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박해를 받고 돌아가는데 기뻤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이들은요. 정말 부당하게 매질을 당한 거예요. 맞아서는 안 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매질을 당하고 그들은 크게 기뻐하며 공회를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다는 거 이제 질문입니다.
훈련한 사도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두 가지 고기를 드린다. 첫째, 공회원들의 말에 따라서 이제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않고 전하지도 않는 삶을 산다. 2번 그래도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전하며 산다.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선택하시겠습니까?
네 그렇죠 이제 맞으면 안 되지 너 마포 고통스러워 내가 왜 이 집을 지어야 돼? 하면서 1번을 선택할 가능성이요. 굉장히 많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공원들의 선택을 한번 보실까요? 사도행전 5장 42절을 우리 함께 읽어보십니다. 시작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박해를 당한 후에 그들은 어디에 있든지 시시때때로 무엇을 합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전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날이면 날마다 성전에 들어가서 부지런히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또한 가정 집집마다 다니면서 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담대하게 선포했다는 거예요.
이들은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공예원들의 협박과 핍박이 있었을지라도 전혀 개의치 않고 날마다 가르치면서 선포하는 놀라운 삶을 살았다는 것이죠. 결국 공연들의 협박 당시 전통 유대인들이 얼마나 핍박했겠어요 하나님만을 뜨겁게 사랑했고 섬겼던 그들이 핍박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점점 부흥해 갔다. 제자의 수가 더해졌다. 여러분 교회가 부응하려면 먼저는요.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자랑스럽고 어디서나 나는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죠.
또한 어떤 핍박이 찾아올지라도 아이고 예수 믿어 뭐 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아유 됐습니다. 우리를 외면하고 그러한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날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우리가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놀라운 것은 여러분 우리가 4장 5장을 보셨잖아요. 4장 5장을 잘 보시면 이렇게 반복이 됩니다. 외부에 박해가 있어요. 그다음에 내부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그리고 또 외부에 박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후에 볼 건데 내부에 문제가 또 생깁니다.
여러분 박해와 내부에 문제가 생기면 교회가 무너지는 게 정상이지 그렇죠. 열심히 박해받았어요. 힘들어 못하겠다. 이제 죽어도 복음 못 전하겠다 그럴 수 있잖아요. 내부에 문제가 생겼어요. 막 갈등이 증폭되어집니다.
그러면 이 공동체 도대체 뭐야? 그러면서 흩어질 수 있잖아 놀라운 것은 그러한 상황 가운데 교회가 성장해 갔다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보세요. 첫 번째 박해를 받았을 때 여러분 금지령을 내렸어요.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지도 말아라. 가르치지도 말아라.
그때 이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교회에 돌아가서 공동체와 함께 기도했잖아요. 하나님 우리가 이런 박해를 받습니다. 전하지 말라 합니다. 우리가 전할 수 있도록 능력 주십시오.
여러분 그 박해가 그들에게 기도로 이어졌다는 거예요. 그 기도로 말미암아 성령 충만해서 다시 나가서 선포하는 자들이 되었다라는 것이죠. 박해가 기도로 변화되어지는 축복. 두 번째 박해는요.
여러분 그냥 전하지 말아라. 경고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엎어놓고 매질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그 매지를 기어이다 죽을 쌍을 똥을 싼 표정을 하면서 나온 게 아니라 너무 기쁜 마음으로 야 내가 예수 이름 때문에 맞았어.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한 마음으로 이들이 주님을 따랐다. 여러분 박해가 기쁨으로 이어진 것이죠. 생각해 보세요. 박해가 기도와 기쁨으로 바뀌는데 어떻게 부흥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부흥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러한 반응이 부흥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어디서나 자신 있게 전하는 우리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복음 때문에 기도하고 복음 때문에 기뻐하는 자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 다시 한 번 부흥의 때를 맛봐야 되지 않겠어요 할렐루야 20년 전에 우리 교회가 이렇게 구했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물론 그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가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여러분 여기에서 멈춰도 되겠습니까?
우리도 다시 한 번 불응을 꿈꾸며 성경이 부응하는 교회는 어떻게 했더라라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따라가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 오늘 첫 번째 중요한 것은요. 복음을 기뻐하고 복음을 자랑스러워하며 박해 가운데도 여러분 기쁨으로 언제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돼야 된다.
여러분 이제 이렇게 제자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내부에 또 문제가 생긴 앞서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 때문에 한 번 혼란스러웠던 내부가 또 한 번 문제가 생긴 겁니다. 1절을 한번 보실까요? 1절 한번 보십시다.
그때의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짐으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이 구절을 자세히 보니까 헬라파 유대인이 있고 히브리 사람이라고 기록돼 있는 것을 보니 이들 모임 구성원에 두 부류가 있는 것을 알 수 있겠죠. 헬라파 교인 그리고 히브리파 교인이 함께 생활했다는 즉 당시 공동체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나서 이스라엘 땅에서 자라면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히브리파 교인이 있었고요. 이스라엘 땅에서 산 것이 아니라 흩어진 것이죠. 디아스포라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에 있는 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서 헬라어를 사용한 거죠.
왜 외부에 헬라의 문화권에서 살았으니까 헬라어를 사용하면서 함께했던 헬라파 교인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 두 그룹은 언어적인 문제도 있었겠죠. 우선 언어적인 차이도 있었겠지만 생각, 가치관, 그들의 삶의 방식도 달랐을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은 1절에서 그들의 정보 두 그룹이 함께 공존했구나라는 정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1절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제라는 단어 구제 이 단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의 시작은 전도라는 한 축과 구제라는 한 축이 두 날개로 비상하는 교회였다. 그래서 오늘 7절 마지막에 읽은 것처럼 예루살렘의 복음이 전해졌고 예루살렘의 제자의 수가 늘어났다.
여러분 사도행전이 예루살렘부터 시작해서 퍼져나가는 선교의 사역이잖아요. 여기까지는 예루살렘 예루살렘 지역의 복음이 편만해지는 거예요. 그런 다음에 이들이 선교회 현장으로 흩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흩트시는 작업을 하신 거죠.
우선은 가장 처음에 초대교회는 전도 그리고 구제 이 두 사역의 축으로 시작이 되어졌다는 것이죠. 구제라는 본 단어는 여러분 들어보셨지만 디아코니아라는 섬김이라는 단어예요. 당시 과부를 돕는 일이 주된 사역이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그 사역을 했는지 성경에는 구제가 매일 행해졌다.
우리 매일 새벽 기도 드리자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구제가 행해졌다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앞서서 성경을 보았듯이 바나바와 같이 자신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놓으면 사도들이 그것을 가지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그 사역이 바나바만 헌신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은혜받았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좀 삶의 여유가 있으면 자신의 것들을 내어놓고 구제의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했다는 것이죠. 특별히 생계 유지가 힘들었던 과부들은 매일 구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구제는 이미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 하셨던 그 구약의 말씀에 따라서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아름다운 전통이었습니다.
교회가 시작되면서부터 구제는 반드시 해야 될 것 왜 하나님께서 구약 말씀을 통해서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에 전도도 해야 되는 건 마찬가지지만 이 구제도 어디 수위에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사역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 귀한 구제 사역으로 인해서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쓰는 유대인들을 원망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1절에 잘 보시면 그 이유가 기록되어져 있죠. 교회가 탄생한 이후 계속되어졌던 구제인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헬라파 과부들이 제외됐다는 겁니다. 그러니 불공정함을 느낄 수밖에 없죠. 우리 공동체 안에 이렇게 구제받아야 될 분들이 있는데 히브리파 사람들은 받는데 헬라파 사람들은 받지 못합니다. 왜 이래 왜 우리는 안 줘 불공정함을 느낄 수밖에 없죠. 그러니 그 불공정함을 느낀 사람들이 불만이 생기고 그것이 점점 커지니까 원망이 되어버린 거죠.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라 믿습니다. 신앙 안에서 한 마음이 되어 한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차별 대우를 느끼는 순간 원망과 불평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 원망과 불평이 분열과 분쟁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원망이라는 것 공동체를 허무는 이 작은 여우를 붙잡아 없애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즉 공동체를 무너뜨릴 만큼 강력한 힘이 있는 것이 원망이라는 거예요.
또한 원망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보세요. 출애굽에서 가나안을 향해 갑니다. 그리고 홍해 바다를 건넜어요. 구원의 은총을 입은 거죠.
그런데 고린도전서에 보면 그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그들 중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멸망당한 이유를 한 4가지 정도로 쭉 나열하고 있는데, 그중에 하나 속한 것이 고린도전서 10장 10절 말씀인데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원망이라는 거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아라.
고린도 교회 형제들에게 야 이스라엘 백성들 그때 당시에 원망하다가 멸망당했잖아. 그러니까 너희 원망하지 마. 원망하면서 살면 안 돼
라고 가르친 것이죠.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야고보 사도도 편지를 통해서 같은 경고를 해줍니다. 야고보서 5장 9절인데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큰 소리로 읽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서 계시니라.
여러분 보십시오. 원망이라는 것과 심판이라는 것을 연결시켜 놓았다는 거예요. 원망하지 말아라. 원망 때문에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절대로 원망하지 말아라.
여러분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부당한 일을 당하게 되면 원망을 토로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죠. 저도 목회자이지만 매우 원망합니다. 인간이잖아요. 한숨 푹 쉬면서 원망도 하고 주어진 상황과 환경 속에서 원망도 하고 삽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깨닫는 거죠. 이게 옳은 방법이 아니구나 기도하는 가운데 깨닫고 수정하는 거죠. 그렇지 않고는 우리는 계속 원망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이지 이렇게 원망을 토로하며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의 현실입니다.
왜 원망하고 싶지 않겠어요? 부당함을 당했는데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한다는 거예요. 성도가 되었다면 성도가 되었다면 원망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나에게 찾아온 부당함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는 그것이 죄가 된다는, 왜 나에게 찾아오는 부당함 때문에 누구를 미워하는 그것이 심판의 대상거리가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 공동체 안에 있다 보면 원망할 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다르잖아요. 가치관도 다르고 세대도 다르잖아요. 그래서 세대가 바라보는 그 상황 속에서 원망거리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부당하게 느껴질 때 이해되지 않아요. 왜 그러지? 목사님 오늘 왜 저러시지?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잖아요. 저분은 왜 저러실까 이러면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원망이 생기게 됩니다. 근데 그것이 계속 끊임없이 원망으로 발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 교회 성도 수가 천 명, 2천 명 3천 명 아무리 많아도요. 원망으로 인해서 불협화음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절대로 아름다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성장도 없고 재미도 없고요. 모이는 것도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기 싫은데 막 이러면서 흩어지게 돼요.
반대로 여러분 화목해 보십시오. 우리의 소리가 아름다운 하모니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는 즐거움의 소리가 있고요. 행복의 노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화목으로 인해서 늘 만나고 싶은 거예요. 저 사람 보니까 행복해지고 또 만나고 싶다. 그 만남의 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신은 공동체 안에 원망과 불평이 아닌 우리 주님이 주시는 화평 이 화목을 누리며 사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이 원망과 불평의 문제를 어떻게 화목으로 바꾸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가만히 있으면 이게 원망이 화목으로 바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 그 해답을 좀 찾아보려고 합니다. 원망으로 인해서 사도들은 헬라파 교인들이 제기한 문제를 두고 기도하면서 아마 머리를 맞대면서 상의했을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결정한 것은 이거였습니다. 모든 제자들 다 모 다 모이십시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하기는 했는데 의도치 않은 실수로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됐습니다. 사실 우리 사도들의 직무는 우리 주 예수의 명령을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인선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지하는 일에 매달리다가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것을 등한시 여기는 옳지 않은 모습을 우리가 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 중에 지혜롭고 또 성령 충만한 인물로 알려진 칭찬받는 일곱 사람을 세우고자 합니다.
그렇게 해서 뽑힌 일곱 사람들로 하여금 이 구제하는 일을 하고 교회의 여러 업무 행정 업무들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사도들도 오로지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교인들이 다른 이견 없이 다 좋습니다. 옳은 것 같습니다. 찬성하고 모두가 기쁘게 받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총회를 열어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칭찬받는 일곱 사람을 뽑아서 그들에게 안수하고 세웠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 내용이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원망이 화목으로 바뀌는 포인트가 있다는 겁니다.
짧게 두 가지만 좀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첫 번째는 대화입니다. 2절을 읽어보실까요? 2절 같이 읽습니다.
12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12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모았다는 거예요.
왜 불러모았을까요?
싸우자고요. 아니죠. 그들에게 이야기하고자 대화하고자 들었던 것이죠. 여러분 원망의 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치해 두면 공동체를 허무는 여우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솔직히 말씀하셨죠.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원망받을 만한 일이 생각나 형제에게 원망받을 일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앞에 두고 가서 그 형제와 화목하고 와서 제물을 드려라.
그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뭐가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화목이 더 중요하다는 거잖아요.
여러분 재물을 드린다는 건 뭐예요?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인데 하나님과 화목하기에 앞서서 성도 간의 화목을 먼저 이루어서 하나님과 화목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 더 좋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이 원망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뭐라고요? 가라는 거야 형제에게 가서 가서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니죠. 가만히 서 있으면 해결되지 않잖아요. 대화해야 됩니다. 대화로 잘 풀고 화목하고 돌아와야 됩니다.
여러분 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가정에서 대화가 잘 됩니까?
부부끼리 가족끼리 대화가 잘 되세요 저도 솔직히 잘 안 되는데 이거 아멘 하시는 분이 계시네요. 진짜 대화가 쉽지가 않아요. 그쵸? 성도 간의 대화가 잘 됩니까? 쉽지 않죠. 왜 그렇습니까? 내 생각만 얘기해서 그래요. 내 고집 내 생각 그래서 여러분 대화하다가 문제를 풀려고 대화하다가 갈등이 더 심해지는 경우를 이곳저곳에서 봅니다.
tv에 그런 문제들 가지고 상담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더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대화에 대한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는 거예요.
잠언 13장 10절에 보면 교만에서는 다툼이 일어날 뿐이다.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로운 자다. 듣는 자 대화에 있어서 1 원칙은 듣는 거예요. 내가 말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도 말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라.
여러분 내가 먼저 말하기 시작하면 그 말 때문에 성내는 자리까지 가는 거예요. 그렇죠 그러니까 말하기는 좀 더디하고 우선 들어라. 듣고 이해를 한 상태에서 말하면서 내 마음을 두드리치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된다고 가르치는 거예요.
또 베드로 사도가 말하자 만일 누가 말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해라. 이 내 말을 할 때 내 생각 내 고집대로 그냥 따다닥 내뱉지 말고 감정에 치우쳐서 막 내뱉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여러분 얼마나 신성스럽습니까? 얘기를 하는데 하나님의 마음으로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제가 잘 들었습니다. 이렇게 부드럽게 이야기한다면 얼마나 화목해지겠어 그러니까 말하고 듣는 기술에 대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때 하나님 듣는 귀, 보는 눈 다 여호와께서 지으셨는데 우리에게 교만한 마음 제거해 주시고 듣는 귀 듣는 마음 듣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또 말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말하면 해결되지 않을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망이 화목되어지기 위해 저와 여러분들의 대화가 성경이 가르쳐주는 대화로 잘 만들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 말만 막 쏟아내지 말고 들어보고 그래 맞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은 또 이렇습니다. 저도 사실 되게 못하는 것 중에 하나인데 말씀을 통해서 그래 좀 더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겠구나 생각을 하는 것.
두 번째는 문제 해결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공감할 만한 일꾼을 세웠다는 걸 우리 3절 말씀 읽어보실까요? 3절입니다. 시작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5절도 같이 읽어봅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밤에 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여러분 구제를 감당했을 초기에는 어땠습니까?
유대인들 특히 사도들이 한정적으로 그 일을 감당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 것 아니에요.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이 고안해낸 방책은 집사 제도를 만들어서 사명 감당할 사람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을 쭉 보니까 이 이름 가운데는 유대파도 있고 헬라파도 있고 안디옥교회 출신인 이방인 니골라도 있었다. 무슨 이야기 다양한 구성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다양한 구성원들을 만들어서 이들의 갈등이 증폭되지 않도록 그를 세웠다. 지혜롭게 일을 처리했다는 여러분 우리 가정 안에도 교회 안이고 어느 공동체든지 불평을 담은 원망으로 언제든지 갈등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초대교회가 교회다운 것은 갈등이 없어서입니까?
아니죠. 우리 두 차례 갈등을 보았잖아요. 갈등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교회라고 소문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초대교회는 갈등 때문에 건강하지 못한 교회가 된 것이 아니라 이 갈등을 극복하는 지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찾아왔던 어려움으로 인해서 대화라는 기법을 사용해서 함께 나누었고 또한 새로운 길을 모색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문제 방안을 권해냈다. 아는 것이죠. 그 결과 갈등 때문에 오히려 더 부응하는 초대교회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럼 7절을 한번 읽어보실까요? 어떻게 보겠는가? 시작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신이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여러분 이 말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위기가 바로 기회로 바뀌어진 아주 좋은 케이스가 되었다라는 거예요.
이제 결론입니다. 오늘 부흥의 이유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다음 주에 연장해서 말씀을 나눌 텐데 단어로 표현하면 박해와 원망입니다.
여러분 박해라는 단어와 원망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가 부응할 만한 요소입니까? 아니죠. 이 박해와 원망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 가운데 이들은 극복하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무너져야 할 만한 상황 속에서 더 부응하는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밖에는 기도와 기쁨으로 원망은 대화와 새로운 제도로 바꿔버리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부응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합니까?
가장 먼저는 전하는 거예요. 전하지 않으면 부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누가 오는 줄 아세요? 안 와요? 나가서 전해야 오는 거예요. 우리가 지난주에 체육대회를 했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같이 동참해 주신 어른 6분과 아이 1명이 있었어요. 그중에 어른 4분과 아이 1명은 저희가 붕어빵 나눔을 하는 가운데 초청했기 때문에 온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현수막만 걸어놓고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말하는 가운데도 설마 웃을까라는 그러한 의심이 제 안에도 들었거든요.
그런데 감사한 거는 오셨다는 거 아니에요 왜요? 들었기 때문에 같이 오셔서 즐거운 시간 보내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마음 가운데 고민하다가 결정한 것 아니에요 깜짝 놀랐어요. 진짜 우선 그러면서 느낀 것이 그래 말하는 것이 우선이다. 오게끔 초청을 해야 오죠. 그렇죠 안 하면 그냥 누가 스스로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다.
우리 이제 추수감사주의를 맞이하면서 한 영혼을 초대하고 또 우리가 잔치를 해야 되는데 여러분 우리의 마음 가운데 내가 누군가에게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전할 때 기도가 있어야 됩니다. 왜 우리가 전하기 힘드냐 기도하지 않아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전하기 위해서 기도의 자리에 열심으로 나와야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신혼 교회가 부흥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기도의 자리에 나와서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는 기도하지 않고 우리가 부흥을 꿈꾼다. 그것 또한 쉽지 않다는 거 또한 이들처럼 싫어요. 괜찮아요 왜 안 가요? 그럴 때 마음 상하지 말고 야 기쁘다 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돼. 내가 외면당해서 내가 진짜 낙심되네. 좌절되네. 이게 아니라 그때에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귀한 사역을 맡겨서 이렇게 말하는데 저렇게 반응하는 사람도 있군요. 하하.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되는 것이죠.
또한 우리 내부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다 보면 왜 내부 문제가 생기지 않겠어요?
우리 신은교회도 지금까지 오면서 숱한 위기 그리고 기회 이러한 것들을 맞봤지 앞으로도 똑같습니다. 어떤 위기가 우리에게 찾아올지 몰라. 그런데 그때 그것을 지혜롭게 할 수 있는 대화와 좋은 제도 개선 방향, 이것들을 만들어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겉보기에는 그렇잖아요. 저게 시끄러운 것 같은데 근데 그 시끄러움이 웃음으로 변했어 그러면 사람들이 오고 싶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교회는 순기능으로 자꾸 바꾸는 지혜가 있어야 사람들이 그곳을 주목하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초대교회는 이렇게 해서 도움이 되었구나 외부의 박해와 내부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지혜가 있었구나.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게 기도했던 것.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하여서 우리 교회도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다시 한 번 중의 때를 소망하고 맞이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년 전 30년 전에 우리 교회가 부흥했는데 맞아요. 그것 때문에 우리 교회가 지금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니죠. 우리의 때에도 지금 이 때에도 우리가 부흥에 대한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갈망하는 마음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