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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절실한 말
이영숙(시인ㆍ문학평론가)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누군가>가 그들을 불렀기 때문이다.
보르헤스가 「죽은 자들의 대화」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맺었을 때, “그들”의 “얘기”는 닫히지 않고 오히려 무한히 열린다. 작가가 “누군가”에 대한 정보나 “누군가”의 개입으로 인한 서사의 방향성을 보여주지 않아도 그 지분을 자유롭게 이월 받은 독자의 상상력이 각자의 서사로 만들어나가기 때문이다.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이야기가 ‘발생’한다.
이미지로 말하는 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서사가 해피엔딩과 세드엔딩을 독자의 가슴까지 배달하지 않는 게 현대적 감각이라면, 현대시는 시공간의 어긋남을 통해 감각을 갱신한다. 있음과 없음, 차 있음과 비어있음, 유와 무, 존재와 비존재와 같은 개념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의 주요 테마이지만, 시는 주로 후자 쪽에 매료되어왔다. 이들은 암반을 떠받치는 지하수 같고 달의 뒷면 같으며 앞면이라고 해도 크레이터에 가깝고 평원보다는 절벽이며 눈보다는 비이거나 햇빛보다는 바람이다. 있어도 있지 않음과 없어도 없지 않음의 아득한 기원이고 미래이며,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이라는 노래 가사의 주제이거나 각주이며, 한편 부재로 말하는 존재이다. 익숙함이 낯설어지고, 익숙하지 않은 것이 익숙해지는 세계. 한명희의 시는 ‘부재’의 시공간을 거쳐 그곳에 도착한다. 천 명이 읽으면 천 개의 이미지가 ‘발생’한다.
이 노을은
어딘가 익숙하다
그때의 그 어스름이
아직 그 자리일 리 없지만
나는 이 저녁을 이미 겪은 듯하다
땅강아지들이 슬슬 땅 위로
올라올 준비를 하는 시간
지붕과 첨탑과 오래된 나무들이
가장 먼저 어둠에 물들 것이다
가로등이 켜지더라도 그것은
어둠을 더욱 강조하는 것일 뿐
땅강아지들은 불빛을 피해
어디로든 숨어들 것이다
이 바람도
어딘가 익숙하다
바람이 가는 곳을
나는 이미 다 거쳐 온 듯하다
멀리서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어둠은 차츰
몸을 낮출 것이다
익숙한 온도와
더 익숙한 습기
당황한 내가 이국처럼 서 있다
―「이 노을은 어딘가 익숙하다」 전문
익숙함 때문에 “당황한 내가 이국처럼 서 있”는 이 시는 낯설다. 익숙함과 낯섦을 동시에 배반한다. “어딘가 익숙”한 “노을”과 “바람”, “온도와 더 익숙한 습기”는 지금 여기의 것이고, “그때의 그 어스름”과 “그 자리”는 지금 여기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의 것이 아닌 것이 지금 여기를 관장한다. “이 저녁”은 새로 찾아온 저녁이지만 “이미 겪은 듯”한 저녁이 되고, “바람이 가는 곳”은 예측 불가한데도 마치 “나는 이미 다 거쳐 온 듯하다”. “그때”라는 시간과 “그 자리”라는 공간, “그 어스름”이라는 정황에서 세 번이나 강조된 ‘그’ 극점을 반복해 살고 있었으므로, “나”의 모든 나날은 경험되어진 것으로 실재한다.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므로 미래 역시 현재의 연장선에 있을 뿐이다. ‘그’ 극점에 속한 것이 아닌 일상, 일테면 “지붕과 첨탑과 오래된 나무들이/ 가장 먼저 어둠에 물들 것”이고, “땅강아지들은 불빛을 피해/ 어디로든 숨어들 것”이며, “어둠은 차츰/ 몸을 낮”추는 평범한 저녁이 문득 낯설어지는 현장에 “당황한 내가 이국처럼 서 있”는 풍경이 그려지는가. “이 노을”도, “이 저녁”도, “이 바람도” ‘그’의 자장에 속하여 지금 여기에는 지금 여기가 부재한다. 이 낯섦 앞에서 사물처럼 외로운 “나”와 함께 어떤 강한 인상, 어떤 충만, 어떤 격렬한 사건이 결부되었을 ‘그’로 거슬러 오르는 우리의 시적 탐험이 시작된다.
편의점은 그대로 있고
떡볶이집은 어느새 많이 낡았구나
버스 정거장은 그대로인데
공항 가는 버스는 없어졌구나
놀이터가 많은 동네
놀이터마다 압정이 떨어져 있는 동네
3단지 앞 소나무는 몰라보게 자랐고
313동 앞 측백나무는 든든한 담이 되었구나
한번 나간 앰뷸런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 동네
짧지만 길게 살았던 동네
일없이 문득 들러보는
옛날 동네
―「살던 동네」 전문
조금 다르게 변주해 보자. 모든 시공간은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논의의 판도가 많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공간의 어긋남의 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던 동네”를 “일없이 문득 들러보”았을 때, 내가 직면하는 것은 그곳에 존재했던 나와 지금은 부재하는 나를 동시에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동시에 흐르지만, 그 무게중심이 평형을 이루거나 평등하지 않고 “옛날”로 경사질 때, 현재는 공허해지고 “옛날”은 풍요롭게 살이 오른다. “3단지” “313동”에서 “짧지만 길게 살았던” 날들은 지금 여기로 불려와 잠시 풍요롭게 북적인다. 물론 그 무게중심이 현재로 경사지기도 한다. ‘그래도 옛날이 좋았어’의 방식으로 반추되곤 하는 “옛날”에 비하면, 재개발이 되지 않은 바에야 현재는 대체로 “낡았구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소나무”와 “측백나무”의 성장이 늙수그레한 시간의 흐름을 대변한다면, “공항 가는 버스”가 “없어”진 “버스 정거장”은 “동네”의 쇠락을 대변한다. “놀이터가 많은 동네”이지만, “놀이터마다 압정이 떨어져 있는” 정황은 아이들로부터 버림받았거나 어른들로부터 방치된 폭력의 방증이다. “한번 나간 앰뷸런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 시간대를 지난 지금까지의 시간은 ‘길지만 짧게 살았던’ 부재로 현재화된다.
나냐 신이냐
하나를 택하라
성난 외침이 계속되고
여자는 떠났다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
눈먼 제사장은
올해는 가을 없이 겨울이 올 거라고 했다
겨울이 유난히 춥고 습할 거라고 했다
분노를 가라앉히는 것은
이교도의 딸을 개종시키기보다 어려웠다
이국땅에서 아이들은
모국어를 잊고도 잘도 자랐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다만 여자의 신에게
돌봐야 할 여신도가 너무 많았을 뿐
정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남자가 지상에서의 행복 대신
천국에서의 행복을 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뿐
그때야 여자는
아이들을 남자에게 돌려보냈다
한 명씩 한 명씩 차례로 보냈다
텅 빈 신전 앞에서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일들이었다
―「고대 그리스식 비극」 전문
시인이 “사랑”을 “고대 그리스적 비극”에 견준 이유는 명백하다. 신화적 아우라를 통해 신이 내린 운명에 저항하고 파멸을 감내하면서까지 자유의지를 실현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현대적 어법으로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을 우회한 전략이기도 하다. 지상에서 실현되지 않은 “사랑”의 비극(“남자가 지상에서의 행복 대신/ 천국에서의 행복을 택했다”)을 벗어나기 위해 “남자”와 “여자”의 “사랑”의 결과물인 “아이들을” 제물(“그때야 여자는/ 아이들을 남자에게 돌려보냈다/ 한 명씩 한 명씩 차례로 보냈다”)로 바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는 현대적 제의란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자”는 “나냐 신이냐/ 하나를 택하라”는 “남자”의 “성난 외침”에 “남자”로부터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났”던 사람이다. “여자”가 “아이들”을 “남자”에게 “돌려보”냄으로써 “남자”는 “신”과 동등해진다. 그것이 자신의 “신”을 버린 “텅 빈 신전 앞에서/ 여자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던 선택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이 모든 “일들”의 전말이다.
이 대범한 시적 구상은 「이 노을은 어딘가 익숙하다」와 「살던 동네」에서 언뜻 감지되던 죽음의 이미지를 좀 더 굵은 선으로 연결한다. “익숙한 온도와/ 더 익숙한 습기”(「이 노을은 어딘가 익숙하다」)는 “한번 나간 앰뷸런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살던 동네」) 사건을 지나 “눈먼 제사장은/ 올해는 가을 없이 겨울이 올 거라고 했다/ 겨울이 유난히 춥고 습할 거라고 했다”(「고대 그리스식 비극」)에서 트라이앵글로 묶인다. ‘그리스’라는 신화적 시공간을 빌어 “사랑”은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게 위대해졌다. “남자”는 여기에 없어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절실한 말이
또 있을까
사이비
영어도 아니고
일어도 아니고
순우리말은 더욱 아닌
다시 생각해 보면
영어 같기도 하고
일어 같기도 하고
우리말 같기도 한
사이비
가짜인 듯하다가 진짜인 듯하고
진짜인 것 같다가 가짜 같기도 한
진짜일까 봐 떠날 수 없고
가짜일까 봐 더욱 떠날 수 없는
알면서도 속고
몰라서도 속는
사이비
이 안에도 사이비가 있다
우리들 중에 숨어 있는 사이비가 있다
내 안에도 있다
아닌 척 앉아 있는 사이비가 있다
―「사이비」 전문
한명희 시인이 <시작 노트>에서도 썼듯이, 그녀의 “직설적인 어법”이 잘 드러난 이 시는 군살 하나 없다. 언젠가 시인에 대한 또 다른 평문에서 이미지 없이 이미지를 말하는 시인이란 표현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그 방식이 “직설적인 어법”에서 비롯된 것인지 잘 개념화해내지 못했던 것 같다. 다수의 시들이 그렇지만 「사이비」는 특히 그 점에서 더 명징하다. 이 시는 “사이비”에 각주를 달 의사는 없다.
우리 사회에서 “사이비”는 부정적 용어로 자주 쓰인다. 사전적 의미에 ‘겉으론 비슷하나 본질은 완전히 다른 가짜’라고 못 박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가짜”를 경유해서만 “진짜”에 도달할 수 있고, “가짜”가 없으면 “진짜”도 알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속한 시공간(“이 안에도 사이비가 있다”)과 집단(“우리들 중에 숨어 있는 사이비가 있다”)뿐 아니라, 나(“내 안에도 있다”)와 밀착되어있어 분리될 수 없는(“아닌 척 앉아 있는 사이비가 있다”) 존재가 “사이비”인 것이다. 그러나 “가짜”인데 “가짜”인 줄 모르거나, “가짜”인데 “진짜”인 줄 착각하는 “사이비”보다 “가짜인 듯하다가 진짜인 듯하고/ 진짜인 것 같다가 가짜 같기도 한” 그런 “사이비”가 어쩌면 보다 더 ‘인간적’이다. 그런데 “이렇게 절실한 말이/ 또 있을까”라는 찬탄에 초점을 맞추면, “사이비”는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주관적 자아, 곧 시적 자아의 일부가된다. “가짜”에서 시가 나온다. “가짜”에서 비유가 나온다. “절실한 말”이 나온다.
토끼풀을 먹어 치운
토끼를 나무랄 수는 없듯이
기울어진 채 돌아가는
지구를 뭐라 할 수 없듯이
금성과 화성과 토성과 천왕성까지
한쪽으로 기울겠다는 것을 어쩔 수 없듯이
강물과도 바닷물과도 섞이지 않겠다는
기름을 어쩔 수 없듯이
섞이지 않으면서도
물방울 위에 계속 떠 있는
기름방울을 어쩔 수 없듯이
토끼는 토끼의 길을 가고
토끼풀은 토끼풀의 길을
지구는 지구의 길을
금성과 화성과 토성과 천왕성도 각자 자기의 길을
강물은 강물의 길을
바닷물을 바닷물의 길을
기름은 기름의 길을 갈 뿐이듯이
그냥 가기만 하는 데도
넘어질 것은 넘어지고
쓰러질 것은 쓰러지듯이
어두워지는 것은 어두워지듯이
깜깜해지기도 하듯이
넘어진 어떤 것은
못 일어나기도 하듯이
넘어진 자리
토끼풀이 눌리고
눌린 토끼풀이 납닥납닥해지듯이
억울한 것도 같고
섭섭한 것도 같은데
올려다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듯이
아무것도 없어서
억울할 수도 없듯이
―「토끼풀을 먹은 토끼를 나무랄 수는 없듯이」 전문
앞의 논점들과는 달리 이 시는 운명에 관한 것일까. 운명이라면, 사물과 생명체들이 “각자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은 이미 주어진 바에 따르는 순리이거나 체념이 될 것이다. “그냥 가기만 하는 데도/ 넘어질 것은 넘어지고/ 쓰러질 것은 쓰러”진다. 그러나 “넘어진 어떤 것”이 “못 일어나기도” 할 때 “넘어진 자리/ 토끼풀이 눌리고/ 눌린 토끼풀이 납닥납닥해지”는 의외성까지 토끼풀의 운명에 포함해야 한다면 생은 아주 많이 편협해질 듯도 하다. “각자 자기의 길”을 가는 식으로 관계성을 배제한 채 세상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다면 “눌린 토끼풀이 납닥납닥해지”는 일은 없어야 했다.
토끼풀은 토끼가 좋아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지 이름 때문에 토끼가 마구 “먹어 치”우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토끼풀을 먹어 치운/ 토끼를 나무랄 수는 없듯이” “기울어진 채 돌아가는/ 지구”도, 물과 “섞이지 않”는 “기름”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스물여덟 행의 이 긴 비유는 마지막 다섯 행을 향해 질주하는데, “억울한 것도 같고/ 섭섭한 것도 같은데/ 올려다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듯이/ 아무것도 없어서/ 억울할 수도 없듯이”라는 비유가 다시 향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다. 그리하여 천지 사물의 시공간을 공유하는 인간 역시 “넘어지고” “쓰러지”며 “어두워지”고 “깜깜해지고” “넘어”져 “못 일어나기도 하”고 “눌리고” “납닥납닥해”진다. 「이 노을은 어딘가 익숙하다」에서와 같이 천지 사물도 ‘그’를 겪는다. 인간만이 외로운 게 아니다. 이 시는 있음과 없음, 차 있음과 비어있음, 유와 무,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들에서 후자 쪽에 매료되어온 시가 전자 쪽을 향해 보내는 시선이다.
세계는 비어있기도 하고 꽉 차 있기도 하다. 시에서 세계는 늘 재발견된다. 경이롭다.
―《미네르바》 202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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