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무디 이성봉 목사 예배신학의 이해
작성일: 2001/11/29 22:38:21
글쓴이: 조기연
들어가는 말
성결교회의 목사요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거장인 이성봉 목사에게 붙는 수식어는 한국의 무디이다. 이 이름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서 이는 아주 적절하며 타당한 이름이라고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 땅의 부흥사에게는 누구나 한국의 무디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가? 아니면 특별히 이성봉 목사에게만 그러한 이름을 붙여줄 만한 어떤 신학적 정당성이 있는가? 이러한 질문의 토대 위에서 이성봉 목사 부흥운동에 관한 예배학적 이해의 시도와 이성봉 목사에게 붙는 그러한 이름의 예배학적 정당성을 인식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I. 이성봉 목사의 예배 유형
예배의 유형과 전통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예배와 같이 오래된 동방교회의 예배전통들은 물론 로마 천주교회의 미사의식이나 성공회 루터교 등의 개신교 예배 전통, 그리고 청교도, 개혁교회, 감리교 등의 또 다른 개신교 예배전통들도 꼽아볼 수 있다. 물론 이 외에도 여러 다양한 예배전통들이 과거에도 존재하였고 현재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주목하는 예배는 소위 개척자-부흥회 전통(Frontier-Revival Tradition)이라고 하는 예배의 형식이다. 이 예배는 독특하게 미국 대륙에서 생겨난 예배형태로서, 선교와 예배라는 두 가지 요소를 포괄하여 실행되었으며, 주로 야영집회에서 이루어졌던 예배형태이다. 한 가지 사례를 들자면, 1801년 미국 켄터키 주 부르봉 카운티의 케인 능선(Cane Ridge, Bourbon County)에서 열렸던 야영집회는 비록 장소가 외떨어진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2만 5천명이 모인 대형집회였다. 물론 이러한 천막집회는 조금 후에 챨스 피니(Charles G. Finny, 1792-1875)에 의해 교회나 대형 건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부흥회 형태로 정착되게 된다. 교회에서 여러 날 계속되는 부흥회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척자-부흥회 예배 전통은 일종의 미국화된 개신교 예배라고 할 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예배가 생겨난 후에 루터교, 개혁파, 청교도, 감리교, 남 침례교, 그리스도의 제자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와 같은 대다수 개신교의 예배까지도 모두 이 예배로 흡수되어 버릴 만큼 대단한 위력을 떨쳤기 때문이다. 개척자-부흥회 예배는 원래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일종의 전도집회였다. 그러므로 예배의 절정은 언제나 설교가 끝난 후에 새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는 결신자를 앞으로 초청하는 시간이었다. 이렇듯이 예배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계획되고 진행되기 때문에 자연히 실용주의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개척자-부흥회 예배는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예배형태를 따르거나 정해진 예배집 등에 의해 제약을 받기보다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순서를 자유롭게 도입함으로써 실용주의와 자유로움을 택하였다. 유일한 규범이 있다면 그것은 집회에서 얼마나 많은 결신자를 이끌어 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천막집회를 계획하는 주최측에서는 항상 회심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예배를 설계하였으며, 설교는 언제나 간단한 내용과 쉬운 언어를 사용하였다. 설교 중에는 힘찬 찬송을 부르거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고함을 지르기도 하였고, 박수를 치거나 손을 쳐들거나 춤, 노래, 진동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자유롭게 사용하였다. 찬송도 가사와 곡조가 반복되는 배우기 쉬운 음악을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개척자-부흥회 예배의 전형적인 형태는 3부분으로 구성되는 예배구조이다. 준비단계로 풍자되는 찬송순서, 예배의 중심을 차지하는 설교, 그리고 예배의 절정인 결신자 초청이다. 이는 준비운동-회심으로의 부름-결신자 초청 등으로 이루어지는 부흥회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무디와 이성봉의 예배는 동일하게 개척자-부흥회 예배의 전통에 서 있다. 이는 다음의 몇 가지 공통된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우선 무디의 경우를 살펴보자. 무디가 인도하는 예배는 형식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유롭고 실용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다. 무디의 아들 윌리암 무디가 쓴 {D.L. 무디}라는 책에 의하면, 무디의 전도집회는 처음 30분간 시편이나 찬송가를 부르고 난 후에, 기도요청서의 낭독과 기도, 무디의 성경 몇 구절 낭독과 설교, 그리고 또 다시 30여분간의 찬송과 기도 등으로 이루어졌다. 또 어떤 경우에는 이보다 더 변칙적으로 예배를 진행한 경우도 있었다. 어느 날은 집회가 시작되고 나서 찬송과 기도를 한 후에 무디가 "오늘 저녁 집회 순서는 완전 변칙적일 겁니다. 사실 예배드리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질서가 있게 마련이죠, 제가 말씀을 증거하는 동안 누구라도 예화를 말씀해 주실 수 있으며 원하신다면 찬양을 부르거나 기도를 요청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밤은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무디의 예배는 그 형식에 있어서 단순하고 자유롭고 비 예전적인 것이 특징이었다.
무디의 예배가 개척자-부흥회 형식이라는 것은 또한 그의 사역이 대부분 새로운 새로운 결신자를 이끌어내기 위한 천막 전도 부흥집회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몇 몇의 사례를 들어보자. 무디가 영국과 스코틀랜드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할 때에 한번은 1851년에 세워진 수정궁이라는 곳에서 집회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모였던 청중의 수는 약 5만 명이었으며, 무디가 설교를 마친 후 새로 믿기로 작정한 사람을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하니 수많은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왔고, 또한 상담을 원하는 자를 일어서라고 하니 약 2천 여명이 일어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6월 14일 애버딘이라는 곳에서 집회를 할 때에는 큰 건물이 없어서 산기슭에서 집회를 가졌는데 집회 전에 1만여 명이 모여 기도로 준비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후 버밍험에서는 두 주일 동안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서 리버풀로 옮겨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빅토리아 대 강당을 임시로 건축하여 사용하였는데 이 강당은 연일 가득 찼다고 하였다. 1873년 6월 16일부터 1875년 8월 3일까지 약 2년에 걸쳐 런던에서 행한 무디의 집회 수는 285차에 달했으며 여기에 동원된 연인원은 250만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개척자-부흥회 예배형식은 이성봉 목사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스스로 전도자와 부흥사로 부르심을 입은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이 목사는 회갑 때까지 1천 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실제로 그는 6.25 전쟁 때 수복이 되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천막집회를 하였는데,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인천 등지에서 천막을 치고 대중집회를 할 때에 수천 수만 명에 이르는 청중들이 운집하였으며, 어떤 때는 하루에 5, 6차례의 집회를 인도하기도 하였다.
이성봉 목사 역시 집회 때마다 새로운 결신자가 생기는 것을 강조하였다. 사례를 몇 개 들면 다음과 같다: "1월 30-2월 2일 은산교회에서 철야하며 집회를 할 때에 결신자가 90명이었으며, 2월 4일부터 6일 까지 청양 미당 산골짜기에 있는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였을 때 결신자가 42명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대대로 타종교를 섬기던 사람도 있었다." 물론 전도의 열기가 매우 높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도 있었다. 당시 성결교회의 뜨거운 전도 열기는 성결교회의 제 1회 연회 회의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본 지방 각 교회는 특별히 기도의 불이 붙는 중 각 교회마다 기도회를 힘쓰는 바... 신의주 교회에서는 5개월 간 기도회를 계속하야 많은 은혜를 받았으며, 신의주 동교회에서는 1년 동안 계속하야 기도회를 회집하여 많은 은혜를 받는 중이요, 각 교회에서 개인전도 노방전도를 힘쓰는데, 신의주 서교회에서는 신 결신자가 180명이요, 동교회에서는 900여명에 달하여 신천교회에서는 30여리 간에 있는 문회에 신 개척하고..."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의 이러한 전도 열기가 이성봉이라는 전도집회의 대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이성봉 목사가 개척자-부흥회 예배형식을 취하게 된 데에는 또 한가지의 이유가 있다. 한국 교회는 19세기 말 미국의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전수받으면서 전래 초기부터 불신자들을 회개시키는데 강조점을 둔 전도집회 형식을 활용하였다. 그러다 보니 예배는 자연히 특정한 형식을 갖춘 공적인 예배(liturgy-corporate worship)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형태를 지닌 사적 예배(personal devotion)의 모습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이목사의 부흥집회 방식은 주로 설교를 중심으로 한 밤 집회, 천로역정과 요나서 및 명심도 강화 위주의 낮 집회, 그리고 기도 중심의 새벽집회로 진행되었다. 집회는 일주일간 계속된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2-3일간 진행되었으며 참석자의 대부분은 부흥회 기간 동안 교회에서 숙식하였다. 이상의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이성봉 목사의 부흥집회는 무디의 전도집회 형식과 일치하는 개척자-부흥회 전통의 예배형태라고 단정짓기에 전혀 무리가 없다.
II. 이성봉 목사의 예배신학
1. 그리스도와 십자가 중심의 단순한 복음
개척자-부흥회 전통의 예배는 예배형식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예배신학에 있어서도 단순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성봉과 무디는 공히 이 전통에 서 있기 때문에 그들의 메시지 또한 단순하고 평범한 것이 특징이었다. 먼저 무디의 경우를 보자. 무디 예배의 주제는 아주 평범한 것이었다. 주로 그리스도의 나라와 의, 그리스도의 보혈, 하나님의 공의와 권능,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의 언어 역시 단순한 것이었다. 무디는 복음에 대해 말하기를, 세 가지 위대한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 세 가지는 첫째로 인간은 타락에 의하여 파멸되었으며, 둘째로 인간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하여 구원받는다는 것이고, 셋째로 중생은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디는 3R, 즉 파멸(Ruin), 구원(Redemption), 중생(Regeneration)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볼 때에 무디와 이성봉은 공히 복음의 핵심을 간단히 요약하고 그것의 선포를 통해 회심을 유도해 내는 것을 사역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무디가 전하는 복음은 언제나 강력한 그리스도 중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1875년 10월 브루클린에서 전도 운동을 시작하였을 때 {뉴욕 트리뷴}지(New York Tribun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세 번째는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이들은 새로운 교리를 설파하는 것도 아니며, 이쪽이나 저쪽 분파의 독단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그저 그리스도를 증거할 뿐이며 우리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낼 필요가 있다고 역설할 뿐입니다. 우리 중 누가 이 진리에 항변할 수 있습니까?" 이는 무디 자신의 말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의 신조는 이사야 53장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예배신학은 이성봉 목사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중심 신앙에 대한 분명한 체험이 있었다. 그가 수원에서 목회할 때에 과로한 탓에 열이 심하게 오르고 혼수상태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한 꿈을 꾸었다. 꿈에 마귀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흥 네가 아무리 회개한들 될 줄 아느냐? 너는 주께 버림받은 거야 라고 하였다. 이 목사가 사탄아 물러가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외치자 마귀는 흥,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란다 하고 응수하였다. 이 목사가 다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지 않았느냐? 하고 소리치니 흥,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구원 얻는 줄 아니? 하고 달려들었다. 그래서 이 목사가 회개하고 믿으면 용서를 받는다 라고 대답하니 사탄은 흥, 알고 짓는 죄는 사함 받지 못한다 라고 정죄하였다. 그때에 이 목사는 주여!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믿나이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그 십자가를 저에게 보여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였다. 그러자 한 십자가가 나타났는데 그 십자가는 검정색의 텅 빈 십자가였다. 그래서 이 목사는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님이 나 위하여 달리신 그 십자가가 아니다, 주여, 저에게 당신이 달리신 참 십자가를 보여주소서, 당신의 형상을 보게 하여 주소서 하고 결사적으로 기도하였더니 이번에는 하늘로부터 또 다른 십자가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달려 계신 십자가였다. 그는 감격하여 그 십자가를 붙들고 애통하며 죄를 자복하였고, 이 꿈을 깬 후에 그는 정신과 함께 육체도 깨끗이 나음을 입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이러한 생생한 경험은 이성봉 목사로 하여금 그것을 전하는 전도자로 만들었다. 그의 명심도 강화는 이러한 신학을 잘 요약해 보여주고 있다:
성신이 우리 마음에 내주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린 십자가가 그 마음속에 뿌리를 박고 서게되는 것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몸을 버리신 십자가 구속의 도리를 깨닫고 그 흘리신 피에 젖은 마음은 항상 정결할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사람은 애굽의 심판을 면하였고 여리고 기생 라합의 문설주의 붉은 줄은 여리고 멸망 시에 구원을 얻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는 그 심령은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심판에서 이미 해방을 받은 것이다.
이성봉 목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마치 밤송이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예수의 도는 밤송이와 같다. 밤송이는 껍데기에 무서운 가시가 났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밤알이 나온다. 그러나 그대로는 먹지 못한다. 두꺼운 껍질을 벗기고 또 속에 내피를 벗기면 달고도 고소한 맛좋은 것이 나온다. 예수의 도에는 십자가가 있어 찌르는 어려운 고통이 많다. 그러나 내버리지 말고 참고 참아 속 진리를 체험해야 된다."
중요한 사실은 이성봉 목사가 지녔던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신학이 전통적인 예배신학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리교 예배학자 폴 훈(Paul Hoon) 박사는 {예배의 완전}(The Integrity of Worship)이란 책에서 예배의 그리스도 중심성을 분명하게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으로서, 그 중심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그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는 그 정의(definition)에 있어서도 기독론적이며, 그 의미의 분석에 있어서도 역시 근본적으로 기독론적이다. 그러므로 무디와 이성봉은 공히 그리스도 중심적 예배신학을 견지하였으며, 이는 예배학적으로 볼 때에 지극히 정통적인 입장에 해당한다.
2. 회개와 죄 사함의 강조
회심을 불러 일으키는 전도집회는 언제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형식이 있게 마련이다. 개척자-부흥회 예배의 두 번째 특징은 바로 이점이다. 19세기 미국의 천막집회에는 집회 장소 앞부분에 항상 "참회자의 자리"(mourners bench)가 놓여져 있었다. 예배는 또한 고도로 개인적 차원의 구원을 강조하였고, 항상 "구원 아니면 멸망" 등 절대적인 개념의 이분법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19세기 미국의 천막집회 때에 가장 많이 불린 찬송가는 화니 크로스비의 "저 죽어 가는 자 다 구원하고"(우리말 찬송가 275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찬송가 204장) 등인데, 이러한 찬송가들은 항상 1인칭 단수 대명사를 사용하고 구원과 멸망을 대조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처럼 회개와 죄 사함을 강조하는 것은 또한 칼빈 예배의 핵심이었으며 장로교를 중심으로 한 한국교회 예배의 전형적인 영성을 형성하였다.
개척자-부흥회 예배의 전형적인 패턴인 회개와 죄 사함의 강조는 무디와 이성봉 목사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먼저 무디의 경우를 보자. 무디와 생키가 스코틀랜드에서 사람들에게 격찬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전하면서도 개종 유도하기 위해 감정주의나 어떠한 인위적인 조작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1874년 1월초에 발행된 {크리스챤}(The Christian)지에는 다음과 같은 보도가 실려 있었다: "이 은혜의 사역을 검토하기 위하여 온 낯선 사람이 느낀 특징 중의 하나는, 가장 흥미 있는 때인데도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것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교회와 강당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또한 진지한 설교와 열렬하고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노래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였다." 분명 무디의 전도예배에서는 회개의 눈물과 회심의 결단이 풍성하였다.
회개와 죄 사함의 역사는 이성봉의 전도예배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령을 받으면 회개의 눈물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부흥사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자랐다. 그가 어렸을 때에 한번은 집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눈물로 회개하며 애통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며 그래서 엎드려서 눈에 침을 발라 부흥강사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는 고백이 있다. 또한 그가 신학교에 오기 전 젊을 때에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그 때에 그는 극심한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양심에 호소하기를, 요만큼 살다 죽는 것을 이렇게 죄를 많이 지었던고, 아! 나는 이 죄로 인해서 영원한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마는구나. 오 하나님이여, 나를 이 죄악에서 건지소서! 하고 대성통곡을 하다가, 최후로 죽어도 회개나 하고 죽어야지 하고 생각하고 엎드려 울면서 회개하였다. 그러자 그 때에 그의 어머니가 회개하라. 죄 지은 자가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이란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세상에 오셨단다 라고 권면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철저하게 회개와 죄의 용서함을 교육받고 자란 이성봉은 신학을 하고 난 후에 회개와 사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1927년 여름 김천교회에서 하기성경학교를 인도하면서 어린이들에게 죄를 회개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그 결과 어린이들이 애통하며 회개하고 자복하는 역사가 있었다. 그러자 온 동네에 큰 소동이 일어났으며 기독교를 반대하는 신문기자들이 찾아와서 이목사가 아이들을 마취시켰다고 비난하였던 일이 있었다. 그는 "사죄의 복음"이라는 설교에서 말하기를, "기독교의 진리를 간단하게 말한다면 사죄이니 인간이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고 죄 사함 받는 인간이 또한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죄 사함을 받아야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함으로써 회개와 죄 사함의 도를 강조하였다. 정인교 박사는 이성봉 목사의 목회 특징을 요약하면서, "구령열에 불타는 복음 전도자의 사명" "철저한 회개" "죄를 질책하는 설교"가 많은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하였다.
물론 이성봉 목사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회개와 죄 사함의 영성은 기독교 전래 초기부터 형성된 한국교회 예배의 영성과 잘 맞아떨어진 것이 사실이었다. 초기 선교사 클라크 목사가 1919년에 출판한 {목사지법}에 의하면, 주일예배의 목적은 사람들을 "형벌과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었다. 한국교회 초기의 예배와 부흥집회는 언제나 사죄의 복음을 제시하며 개인적 회개와 결단을 유도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특히 초기 한국교회의 예배당에 참회자의 좌석(mourners bench)을 두었던 것을 보면 회개와 죄사함을 강조하였던 미국의 개척자-부흥회 예배 전통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알게 된다.
회개와 죄 사함을 강조함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지옥에 대한 인식이다. 이성봉 목사는 지옥을 강조하였는데 그의 지옥에 대한 입장은 지극히 성서적인 것이었다. 그의 천로역정 강화에 나타난 지옥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옥의 광경은 어떠했는가? 그곳은 캄캄하고 사면에 불이 나서 불똥 튀는 소리도 있고 사람들이 혹독한 형벌을 받으며 슬피 부르짖는 소리도 처참했다. 유황불이 일어나 냄새가 코를 찔렀다(계 20:10). 애곡 절치 하는 곳이요(마 13:42), 고통하는 곳이요(눅 16:28), 주야로 평안함이 없으며(계 14:11), 슬피 부르짖는 곳이요(눅 16:24), 영원히 벌받는 곳이요(마 24:41),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곳이었다." 그렇다면 지옥에는 어떠한 사람들이 들어가는가? 이성봉 목사에 의하면 사탄마귀, 무신론자, 지옥을 부인하는 완악한 자, 예수의 제자 가룟유다, 세상의 쾌락만 추구하는 사람, 우상 섬기는 자, 거짓말하는 자, 음행하는 자,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허탄한 데 뜻을 두는 자, 주님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자기를 위하여 일하는 자, 참된 회개와 중생의 경험이 없는 자 등이다.
지옥에 대한 강조가 무디에게는 이성봉 목사에게 있어서처럼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무디는 직접적으로 지옥 불에 대한 설교를 하지는 않았다. 비록 챨스 피니(Charles Finny)가 심판의 공포를 설교하라고 충고를 하였지만 무디는 그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설교들은 지옥, 하나님의 진노, 미래의 심판에 대한 부수적인 언급을 자주 내포하고 있었으며, 가장 무관심하게 무디의 설교를 읽는 독자일지라도 그의 설교 속에서 이것을 놓칠 수 없다고 지적되고 있다.
3. 예배와 삶의 일치
개척자-부흥회 전통의 예배에서 회개와 죄 사함에 대한 강조는 단지 예배 현장에서 맞는 순간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는다. 철저한 회개는 삶의 변화를 수반하는 회개이며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회개이다. 무디와 이성봉의 경우 공히 이러한 점이 두드러진다. 무디의 경우를 먼저 보자. 영국 북방 뉴캐슬에서 무어하우스와 함께 집회를 인도할 때, 무디는 악한 세대와 타락한 인생의 슬픈 모습을 강조하고 새로운 생의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 집회에서 수 백 명의 결신자를 얻었는데, 집회가 계속되던 어느 날 한 사십대 여인이 무디에게 찾아와서 고백하였다. 자기는 소녀 시절에 남의 고용살이를 하였는데, 그 때 주인 몰래 고급 술 다섯 병을 훔쳐 팔은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후 예수를 믿고 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무디는 그녀에게 조언하기를, 주인에게 그 사실을 고하고 변상할 것이며, 만약 주인이 죽었다면 그 자녀들이라도 있을 터이니 그들에게 고백하고 변상하라고 하였다. 그녀는 부끄럽기도 하고 또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질 것을 염려하여 못하겠으니 그 돈을 교회에 헌금하게 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디는, 도적질한 물건을 성전에 드릴 수 없으며 그러한 명예심은 죄악된 것이니 지체없이 주인집에 변상하라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그후 며칠이 지난 집회 마지막 날 그 여인이 다시 찾아와서 말하기를, 선생님 감사합니다, 옛 주인의 아들에게 가서 술값을 드리고 용서해 달라고 사과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들은 그까짓 것을 가지고 뭘 그러느냐고 하면서 돈 받기를 거절했어요. 그러나 나를 용서해 준다면 받아달라고 했더니 오히려 칭찬하면서 받아주었습니다. 이제는 큰 짐을 벗은 것처럼 마음이 밝아왔어요라고 하였다. 진정한 회개로부터 우러나오는 삶의 전환은 무디 전도집회의 최대의 강점이었다. 무디의 뉴욕 전도집회 활동에 대해 {뉴욕 타임즈}가 한 보도를 보면 이것을 분명히 알수 있다: "이성을 신봉하는 회의주의자들이 무슨 말을 할지라도 이번 겨울 우리 도시에서 개인과 사회의 도덕심을 고양시킨, 무디 선생의 업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알콜 중독자들이 술을 끊었고 악한 자들이 선해졌으며 세속적이고 이기적이던 자들이 이타적인 사람들로 변했으며 무례하던 자들이 겸손해졌으며 방탕하던 자들이 순결해졌습니다. 젊은이들이 보다 고결한 목적을 가지고 삶에 재도전하고 있으며 나이 든 사람들은 난잡한 삶에서 떨쳐 일어서고 있습니다."
골방이나 예배당 안에서 만의 회개가 아닌 삶을 통한 회개는 또한 이성봉 목사 예배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이성봉 목사는 평소 행함의 신앙을 강조하였는데, 그는 말하기를, "우리의 믿음이란 말만이 아니요, 실제 생활에 공효를 이루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목사는 이러한 신앙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의 회개 경험을 살펴보면 이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부흥회를 할 때에 철두철미한 회개를 하여야 한다고 배웠다. 그 때 이 목사는 자기가 14세 때에 기차를 타면서 키를 줄여 12세라고 거짓말을 하고 어린이용 표를 사서 타고 다닌 일이 몇 번 있는 것이 생각났다. 그는 곧바로 중화역장에게 편지와 함께 기차요금의 4배를 넣어서 보냈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 총독부 철도국장한테서 편지와 함께 보낸 돈이 도로 왔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남을 속이지 못해서 애쓰는데 너는 어쩌면 그렇게 10여 년 전에 지은 죄까지 다 회개하느냐? 네가 믿는 종교는 참으로 귀한 종교구나. 너 같은 사람만 있으면 경찰서는 무슨 소용이 있으며 재판소는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이 사실은 시일이 이미 지나고 문부를 상고할 데도 없는 까닭에 우리가 받은 줄 알고 도로 보내니 학비에나 보충하라." 이러한 경험은 확실히 이 목사 본인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죄의 확신과 기쁨을 주었고 그로 하여금 회개의 열매를 강조하는 전도자가 되게 하였을 것이다.
철저한 회개와 죄의 용서에 대한 강조는 두 가지의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는 회개 당사자의 심령의 평안이며, 또 하나는 사회의 정화 및 복음의 전파이다. 이 성봉 목사는 철저한 회개를 몸소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부흥집회에서도 항상 이것을 강조하였다. 그 예를 들어보자. 이 목사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수원에서 신 개척을 할 때의 일이다. 그 교회에 군청 농회 기사로 일하는 김 모씨가 있었다. 그가 고백하기를, 자기는 과거에 황해도 국무농장에 사무원으로 있을 때에 공문서를 위조하고 벼나락 열 가마의 공금을 횡령하였다고 하면서 이것을 어떻게 회개하여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 목사는 김씨에게 그 농장으로 편지를 보내고 그것을 변상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김씨는 자기 집을 팔아서라도 교회에 바치겠지만 그것만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목사는 교회가 도둑의 돈을 받는 곳이 아니요, 물론 주인을 찾을 수 없을 경우에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그 주인에게 상환하는 것이 도리요 하고 단호히 말하였다. 김씨가 집으로 돌아가서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마침내 고백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며칠 후에 농장주임으로부터 답신이 왔다. 네 편지를 보고 감사하였다. 너는 어쩌면 그렇게 좋은 종교에 들어가 이러한 죄까지 다 회개를 하느냐, 네 편지를 보니 내 죄가 또 생각나서 견디기 어렵구나, 네 말을 전부 상관에게 전하였더니 너그럽게 용서하라고 하더라라는 내용이었다. 이 답장을 받고 김씨는 기쁨이 충만하여 교회에 돌아와 간증을 한 일이 있었다. 그의 간증은 회개하기 전의 고통과 회개 후에 얻은 사죄의 기쁨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은 이성봉 목사의 목회 여정에서 아주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렇듯 이성봉 목사는 회개와 그 열매를 중시하였다. 그에 의하면 회개란, 첫째로 지적으로 자기의 진상을 깨닫는 것이요, 둘째로 의지적으로 죄를 인하여 슬퍼하는 것이며, 셋째로 정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는 또 회개의 열매에는 소극적 열매와 적극적 열매의 두 가지가 있는데, 전자는 과거의 죄를 청산하는 것이고 후자는 삶의 방향 전환 곧 의로운 생활의 열매로서, 이 회개의 기초가 철저하여야 신앙과 구원이라는 건물이 반석 위에 세운 것처럼 튼튼해진다고 하였다. 요컨대 이성봉 목사는 철저한 회개를 강조하는 부흥전도집회를 통해 수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을 영접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였으며, 그의 이러한 운동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놀라운 동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재림과 천국을 대망하는 종말론적 예배
이성봉 목사의 부흥 전도집회는 하나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천국과 재림에 대한 대망이었다. 이러한 예배의 종말론적인 차원은 초대교회의 예배에도 분명히 나타나는 아주 중요한 사항이다. 일제하에서 이성봉 목사가 황주 황모루라는 곳에서 집회를 할 때였다. 그 집회의 주제는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주께서 강림하시느니라"였다. 이 집회에서 이 목사는 "예수 다시 오신다, 자연계의 징조를 보아라, 국제와 사회의 징조를 보아라, 인심의 징조를 보아라, 교회의 상태를 보아라, 이스라엘이 독립하는 것을 보아라,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민족이 다 망한다"고 설교하였다. 6.25 동란 때에 공산당의 압제가 치열하고 많은 목사와 성도들이 학살당할 때에 이성봉 목사의 딸이 그에게 아버지, 이젠 영영 공산국가가 되고 마는 건가요?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이 목사는 아니란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그러면 좋은 날이 다시 온단다 하고는 "조금만 더 기다려라"라는 제목으로 노래를 지어 가만가만 불렀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만국이 사모하는 자 반드시 강림하시어 천지를 진동시키고 네 소원 성취하리라. 2.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그렇게 낙심 말아라. 만사에 때가 있나니 조금만 더 기다려라. 3. 심신이 피곤하여서 실패를 거듭하여도 주님을 앙망하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라. (후렴) 신실한 약속 붙잡고 조금만 더 기다려라. 조금만 더 기다려라. 이 노래 말을 통해서 알수 있는 것은 이목사가 단순히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으며, 진정 참으로 좋은 날은 주님의 재림으로 인해 이루어질 것을 믿었다는 사실이다.
이렇듯 일제와 6.25의 혼란기 속에서 천국과 재림을 강조하는 것은 어쩌면 시대적인 반향일수도 있겠으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목사가 단순히 천국에의 대망을 사모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몸소 그것을 경험하며 살았다는 데에 있다. 그의 천로역정 강화에 보면 이 목사는 네 가지의 천국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심중천국, 교회천국, 지상천국, 그리고 영생천국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심중천국은 성령을 힘입어 사람의 마음속에 평강과 기쁨이 넘치는 것을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심중천국이 바로 내세의 천국에 대한 증명이 된다는 사실이다. 심중천국에 대한 이 목사의 체험은 그로 하여금 공산당의 총뿌리 앞에서 목숨을 구원하게 하는 놀라운 것이었다. 6.25 동란 때의 일이다. 이 목사가 복음 전도를 하다가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그들이 이 목사를 당장 죽이려고 하였는데, 그 중의 대장이 이 목사에게 묻기를, 그래 예수쟁이들은 현실을 부인하고 밤낮 천당 천당 하는데, 도대체 당신 천당을 봤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이 목사는 보구 말구요라고 대답하였다. 대장이 천당이 어디있소 하고 되물으니 이 목사는 천당 본점은 보지 못하였어도 천당 지점은 보았소 하고 대답하였다. 천당 지점이 어디 있소? 하고 대장이 묻자 내 마음속에 있소. 본점 없는 지점이 세상이 어디 있겠소. 은행 지점을 보면 본점이 있는 줄 알고, 경찰서 지서를 보면 본서가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나는 천국 본점은 보지 못하였지만 천국 지점은 내 마음에 이루어졌소. 하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성신을 힘입어 의와 평강과 기쁨이요하고 대답하였다. 이 대답으로 인하여 이 목사는 총살형을 면하였다. 실로 천국을 마음속에 누리며 살아갔기 때문에 그는 감옥에서 매를 맞으면서도 기뻐하고 찬송함으로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으며 목숨까지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천국에 대한 대망은 이성봉 목사의 천로역정 강화에 있어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가 천로역정 강화를 집회의 주요 내용으로 삼았던 것도 그의 종말론적 신앙을 반영하는 증거이다. 천로역정의 한 대목을 보자. 고집이라는 사람은 기독도를 붙들고 강제적으로 위협하고, 이천이라는 사람은 기독도에게 사정하며 장망성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고집이 가로되 이 사람아, 거기(천성) 가면 무엇이 그리 좋아서 이 좋은 장망성을 버리고 그 귀여운 처자를 다 버리고 친절한 친구도 다 버리고 딴 고집을 부리면서 간다는 말이냐? 그러자 기독도는, 이 책을 좀 보아라. 거짓말 없으신 신실하신 주님의 말씀에 천성은 근심도 없고 눈물도 없고 질병과 사망의 고통이 없는 참으로 평안한 곳이요 천군 천사 성도들과 같이 영세무궁 복락을 항상 누리는 곳이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이니라 하고 대답하며 천성을 향하여 나아갔다. 이성봉 목사의 이러한 천국대망 사상은 그가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배운 찬송가의 가사내용에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어렸을 때에 어머니가 지어 가르쳐준 그리운 내 고향이라는 찬송가를 보자: 1. 하늘나라 우리 집 보석성의 내 집은 영원무궁하도록 낡아짐이 없도다. 2. 보석성의 우리 집 해와 달과 등불이 비추임이 없어도 항상 밝은 곳일세. 3. 하늘나라 내 집은 먹을 예비 안 해도 열두 종류 다달이 열매 맺어 주도다. 4. 보석성의 내 집은 의복 준비 안 해도 세마포와 흰옷이 무궁무진 하도다. 5. 하늘나라 성도들 우리 임군 우리 주 영원무궁 하도다. 이 찬송에는 하늘나라를 고향으로 표현하고 그러므로 종국에 돌아가야 할 곳으로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그의 어머니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이성봉 목사는 어려서부터 이러한 찬송가를 배우면서 자랐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것을 몸으로 체험하며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전도자의 일생을 살았던 것이다.
나오는 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성봉 목사의 예배는 그 형식에 있어서는 19세기 미국의 개척자-부흥회 전통에 속하며, 예배의 신학으로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학과, 회개와 죄 사함을 강조하는 단순한 복음, 그리고 예배와 삶의 일치를 추구하며 재림을 대망하는 종말론적인 예배임을 알게 되었다. 아울러 본 논문을 통해 밝혀진 바는 이러한 이성봉 목사의 예배형태와 신학이 유명한 세계적 부흥사 무디의 그것과도 놀랍게 일치하며, 그러므로 이성봉 목사를 한국의 무디라고 부름에 있어서 전혀 손색이 없다는 사실이다. 본 논문의 공헌은 이성봉 목사를 한국의 무디라고 부를 수 있는 예배학적 근거와 논리를 제공해 준 데에 있다. 뒤늦게나마 이러한 평가작업이 이루어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앞으로 이성봉 목사에 대한 연구가 더욱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