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남자의 생각이 교차하는 제3의 공간-2
20기 최영준
일주일에 두 번, 밤샘 당직근무를 배정받은 A는 연신 하품을 하다 말고 시계를 본다. 빨간색 디지털시계는 새벽 1시 3분을 알려주고 있다. 교대시간까지 6시간이 남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따라 시간이 느리게 가는 느낌이다. 저녁에 먹었던 도시락이 아직 소화가 되지 않았는지 배에서 이상한 느낌이 감지된다. 변비를 앓은지 2개월여. 화장실을 수십번 들락거려보지만 시원하게 배변을 해본 기억이 가물하다. 데스크를 자주 비운 탓에 최주임에게 주의를 자주 받은 탓인지 화장실에 자주 가는 것마저 자유롭지 못하다. 최주임은 퇴근한 뒤에도 가끔 데스크로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2년전 이혼한 뒤로 매사에 날카롭게 반응하는 최주임과 사소한 일로 마찰이 생겨 한숨을 내쉬는 직원이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작은 직장이라 작은 소문이라도 금새 돌아 문제가 생기더라도 쉬쉬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제 최주임은 홍보팀장을 불러 연휴이벤트 홍보실적이 저조하다며 한바탕 난리를 쳤었다. 그럴 때면 A는 기획실소속임에도 불구하고 행여나 자신에게 불꽃이 튀지나 않을까 전전긍긍이었다. 그리곤 괜히 최주임을 건드린 홍보실이 미워지는 것이었다.
A는 문득 지난주에 만났던 여자를 떠올린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그녀는 28살로 김포에 살고 있는 직장인이었다. 묽은 갈색으로 염색한 단발머리, 약간 낮은듯 하지만 작은 입술과 어울리는 코, 하얀 얼굴과 둥그스름한 눈매, 적당한 볼륨감과 163cm정도의 키를 가진, 딱히 이상형은 아니지만 왠지 끌리는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정윤희..였던가. 아직 여자의 이름이 입에 익지 않아 어색하다. 연락은 일주일뒤에 하는게 정석이라는 친구의 조언 때문에 만남 후 연락을 하지 않아 조바심내던 A는, 괜히 휴대폰을 이리저리 뒤적거린다. 여자와 어떤 연유로 만나자고 할지 고민하면서 피식 웃는다. 역시 공상을 하면 시간이 빨리간다. 홀의 소파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저 녀석만 아니면 완벽할텐데!!! 회색 모자에 노란 등산점퍼를 입고서 1시간째 책을 보고 있는 녀석은 거의 미동을 하지 않으며 책을 보고 있다. 책표지는 검정색이고 제목은...너무 멀어서 보이진 않는다. 녀석은 왼손을 자신의 허벅지에 올려 놓고 연신 박자에 맞추어 손가락을 두드린다. 키는 어림잡아 180cm정도에 덩치가 상당하다. 홀은 트렌디한 카페처럼 꾸며져 있어 손님들이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자정이 될 때까지 손님들이 여럿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정을 넘기면 약속이나 한 듯이 각자 방으로 사라지기 마련이므로 그때부터 해가 뜰때까지 홀은 A의 놀이터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녀석 때문에 기분을 잡쳤다. (아아...;녀석이 아닌 이쁜 아가씨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 녀석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던 찰나, 엘리베이터가 그르릉 소리를 내며 1층으로 내려온다. 이내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애기를 안고서 껑충하게 내린다. 이건 또 뭔가. 이 시간에 체크아웃을 하고자 내려온 건 아닐 것이다. A의 생각은 속절없이 맞아 떨어진다. 남자는 울며 보채는 아기를 안고 홀을 천천히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오른손은 아기의 엉덩이를 토닥이고, 왼손은 아기를 꼬옥 잡고서 리듬을 타면서 말이다. 책을 읽던 녀석이 잠깐 남자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어폰을 고쳐 끼고는 다리를 꼬며 책을 본다. 미칠 노릇이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다 말고 온 신경을 홀에 집중한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홀의 공기를 온통 휘젓고 있다. 남자는 아기를 잡고 있던 손으로 이마를 닦아가며 홀을 천천히 거닐고 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녀석의 앞을 지나, 컴퓨터 책상에 앉았다가, 괜히 입구를 힐끔거리기도 하다가, 인형앞에서 어기적거려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기는 좀체 울음을 그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A의 머리는 두 남자가 주는 혼란과, 최주임의 서슬퍼런 목소리와, 여자의 달콤한 입술이 온통 뒤섞여 버린다. A는 왼쪽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러본다. 두통이 시작될려나보다.(아, 젠장할 새끼들같으니라구!!)
A는 지방대학을 겨우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왔다. 종로에서 인쇄소에 근무하고 있는 형과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고향이 너무 싫었다. 공기좋고 물좋다고 주말마다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지만, A에겐 지옥과 다름이 없었다. 수협공판장에서 흘러나오는 비릿한 생선썩는 냄새, 여름이면 넘쳐나는 관광객들의 술주정소리, 지저분한 길거리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더러운 고양이와 젖이 축쳐진 똥개들, 그리고 그리고 그놈의 갈매기들. 바다에서 태어나 줄곧 자랐지만 갈매기는 정말이지 정이 가지 않는 동물이었다. 빨간 눈동자는 박제품과 같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비정상적으로 길고 큰 주둥이는 언제라도 사람을 공격할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관광객들의 새우깡을 받아 먹을때의 그 게걸스러움은 A에게 혐오를 불러일으켰다. 수백마리의 갈매기들이 새우깡을 먹을려고 달려드는 광경은, 마치 미군이 주는 초콜렛을 받아먹을려고 달려드는 거지꼬마들을 연상시켰다. 그런 갈매기들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A의 초등학교 동창들이었다. 횟집, 공판장 등지에서 일하고 있는 동창녀석들은 하루를 멀다하고 A를 불러내 술을 마셔댔다. 녀석들이 풍기는 생선냄새와 소주냄새는 비위 약한 A를 자극했다.(우린 고향에서 썩어야지 가긴 어딜가! 이런 류의 대화는 20여년간 마셔댔던 소주병보다 더 많이 들었다). 유난히 억센 몸을 가지고 있는 녀석들에 비해 왜소한 체격의 A는 언제나 호구취급을 받았다. 사내자식이 책이나 보면서 기생오라비마냥 방구석에 쳐박혀있으면 장가나 가겠냐. 머 이런 식의 대화들이 오가다 술자리가 끝나곤 했으니, 집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지쳐 쓰러져 고향을 떠날 생각에 사로잡혀 잠을 설치는 밤이 늘어갔다.
사실 서울로 올 생각은 아니었다. 고향이 아니면 어디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다보니 A는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형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 곳 강화도에 흘러온 것이다. 그리고 두 남자와 울고 있는 아기와(남자일까 여자일까) 함께 새벽을 지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깊은 공상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던 A는 시계를 본다. 2시10분. 배가 다시 살살 아파온다. 화장실을 가기엔 틀렸고, 동료에게 받아두었던 약을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린다. 행여 두 남자가 볼새라 알약2개를 순식간에 목으로 넘긴 A는 시원한 맥주가 그리워짐을 느낀다. 문득 고개를 들어 홀을 보니 책을 읽던 남자가 자리에 없음을 발견한다. 아기를 재우던 남자는 여전히 이리저리 홀을 거닐고 있다. 대형 유리창밖으로 남자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팔자가 좋은 녀석이다. 이 곳의 숙소비가 저렴한 편은 아니다. 물론 세일기간이라 평소보다 저렴해지긴 했지만. A는 고향에서 어선을 몰아 오징어를 잡는 아버지와 시장에서 건어물을 파는 어머니가 떠올린다. 그 뒤편으로 그 여자가 살며시 웃고 있다. A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구겨진 약봉지를 휴지통에 냅다 던진다. 물론 최대한 살며시, 홀의 녀석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말이다. 어느새 아기의 울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남자는 잠든 아기를 안고 홀을 돌고 있다. 담배를 피던 남자는 소파에 앉아 다시 책을 편다. A는 퀭한 눈으로 홀을 한 번 훑어 보며, 나지막히 한숨 짓는다. 아기를 안고 있던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책을 읽는 남자를 흘끗 쳐다본다. 홀 내부의 공기는 뒤섞여 휘돌고 있고, 시간은 공기에 흐름을 맡긴채 천천히 흐르고 있다.
첫댓글 내가 갈매기를 싫어하는 이유들을 어떻게 아셨어요? ㅎㅎ
와~~ 딱 맞췄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