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둥댈 때 본성을 어지럽히지 않으려거든 모름지기 한가할 때 마음과 정신이 맑아져야 하고, 죽을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려거든 모름지기 살아있을 때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채근담(菜根譚)】, 홍자성 지음, 김원중 옮김>
세상은 하나의 사원
과학과 자본주의의 발달로 무자비한 대량살상이 이뤄진 20세기부터 철학은 형이상학을 철폐하기 시작했다. 산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도를 닦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하늘이 부여한 생명의 가치를 지키지 못하는 공리공론이 도대체 삶에 어떤 질서를 부여했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일어난 것이다. 동서양의 현철들이 야만의 인간을 교화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지만, 대중은 결국 문명이라는 허울 아래 무명(無明)과 욕망을 더욱 극대화하고 있다. 교두보인 인문사회는 무너지고, 종교마저도 욕망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우주의 작은 점에 불과한 지구 안에서 인간은 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토록 증오와 저주의 칼끝을 서로의 심장에 겨누고 살아야만 하는가. 마침내 호모사피엔스는 절멸할 것인가.
『채근담』을 저술한 홍자성은 근세의 인간이었지만, 요동치는 세파를 겪으며 저자거리에 도가 흘러넘침에도 그 도를 주워 담지 못하고 원망과 갈등으로 지새우는 인간을 날카롭게 관찰하고 있다. 금과옥조 같은 깨달음의 언어를 인간이 깊이 음미했다면, 이처럼 비참한 근·현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도처에는 세상의 모든 풍파를 겪지 않아도 갈고 닦은 지혜의 등불로 세상을 밝히는 이가 있다. 16세기 중국 사천성 출신인 홍자성은 남경에서 벼슬도 했지만 순탄하지는 않았다. 말년에 선종에 귀의하여 수행으로 도와 덕을 닦아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그는 불우한 말년을 오히려 도심(道心)으로 유유자적하게 가꿨다. 가난한 농민들이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버린 채소의 뿌리를 집으로 가져와 소금에 절여 장아찌로 만들어 죽과 함께 먹었는데, 이 책의 서문을 쓴 친구 우공겸이 그 맛이 기가 막힐 정도라며 좋아했다. 책 제목이 ‘채근의 이야기’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물뿌리만이 아니라 뭐든지 오래 씹을수록 맛있다. 맛의 윤활유인 침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도심 또한 마찬가지다. 나의 공적영지심(空寂靈知心)은 쓰든 달든 세상의 모든 경계를 일미(一味)로 만들 수 있다. 홍자성은 이 마음의 주인인 법신, 법성으로 세상을 새롭게 인식한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이 책은 현인달사들의 지남침이 되었다. 그의 일칙(一則)은 오랜 시간 다리를 꼬꼬 앉는 것만이 도를 깨달을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는 도처에 있다. 우리의 심신동작 하나하나에 도는 작용하고, 부대끼며 희로애락을 교환하는 이 삶 속에서 도는 춤추고 있으며, 자연과 교감하는 눈빛과 심장 속에도 도는 만개해 있다.
그는 “높은 지위나 벼슬에도 절개와 의리가 당당하고 문장은 흰 구름보다 고고할지라도, 덕성으로 그것을 도야하지 않았다면, 결국 사사로운 혈기일 뿐이고, 기술과 예능의 말단일 뿐이다”라고 한다. 나아가 ‘평범한 백성이라도 기꺼이 덕을 심고 은혜를 베풀면 벼슬 없는 삼공과 재상이요, 사대부라 할지라도 권세만 탐내고 총애를 팔면 결국엔 벼슬만 있는 거지가 된다“고 한다. 이는 역사가 실증하고 있다. 그 많은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을 누가 알아주는가. 심지어 한 때 도인이라고 장안을 떠돌며, 구름같은 대중을 모았던 그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 뉴스를 가득 메웠던 유명하다는 그 얼굴들은 우리의 기억 어디에 남아 있는가. 도인은 오직 한 점, 맑은 심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견성을 했다고 한들 인간을 향한 구제의 심법인 제중(濟衆)의 공덕이 없다면 쌓아온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도심이 곧 도덕이고, 윤리며, 법이다. 세상이 이것을 근간으로 하지 않으면,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 또한 도의 깊은 본원에 뿌리 내려야 한다. 사실 도심은 세상의 규칙마저 뛰어넘는 것이다. “공적과 명성, 부유함과 귀함을 추구하는 마음을 내려 놓아야만 속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도덕과 인의에 얽매이는 마음을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성인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부처든 노자든 최고의 심법은 무학(無學), 무위(無爲)의 도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상덕(上德)이며,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든 석존의 대각의 경지가 바로 이것이다. 진리는 규정하는 순간 그 본질로부터 어그러진다. 오직 자연과 우주의 이치에 따른 흐름이 있을 뿐이다. 『채근담』이 성현의 지혜를 현실에 풀어놓은 삶의 경전으로 칭송받는 이유가 이처럼 세상을 달관하고, 만물의 이치에 정통한 경지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홍자성은 세태에 부대끼는 인간에게 중용의 지혜를 보여준다. “담담하고 결백한 것은 고매한 품격이지만, 너무 (인정이) 메마르면 남을 구제하고 만물을 이롭게 할 수 없다”, “즐거운 곳에서의 즐거움은 진정한 즐거움이 아니다. 괴로움 속에서의 즐거움을 터득해야만 비로소 마음의 본체의 참된 기미를 볼 수 있다”, “악한 일을 하고 나서 남이 알까 두려워하면, 악함 가운데에도 선으로 가는 길이 있고, 선한 일을 하고 나서 알아주기에 급급해 하면, 그 선한 곳에 이미 악의 뿌리가 있는 것이다” 등등.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들은 반드시 주고받는 관계로 이어져 있다. 석존이 깨달은 연기(緣起)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하여 삶은 상대적이다. 이 상대성 속에서 어떻게 도심이 상하지 않는 절대적 평화를 누릴 수 있는가. 극과 극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상대성의 균형을 갖추는 것이 삶의 묘미다. 삶의 한계상황에 갇히지 않으며, 그것을 뛰어넘는 길이 바로 마음의 철주(鐵柱)와 석벽(石壁)을 세우는 것이다. 온갖 이념과 사물이 들락날락해도 동요하지 않는다.
이러한 도인은 평범하다 “진한 술이나 살진 고기, 맵고 단 맛이 참맛이 아니다. 참맛은 단지 담백할 뿐이다. 신묘하고 기이하며 탁월한 자는 지인(至人)이 아니다. 지인은 단지 평범할 뿐이다”라고 한다. 도인은 물처럼 담담하다. 또한 도인은 “문장이 지극한 곳에 도달하면 달리 기발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꼭 들어맞을 뿐이고, 인품이 지극한 곳에 다다르면 다른 기이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본래 모습이 그러할 뿐이다”고 하는 것처럼 사리와 분별이 절도에 맞게 떨어진다. 도인은 존재의 원인과 결과를 스스로 증명하고 주위와 조화를 이룬다.
오늘날에는 작은 재주로 많은 것을 취하는 소인배들이 판을 치고 있다. “크게 교묘한 사람은 재주가 없으니, 재주를 부리는 사람은 서툰 자”라고 말하듯이 현란한 재주로 세상을 혼탁하게 하며 이익을 취한다. 텔레비전을 장식하는 숱한 광고들을 보라. 그 내용은 확인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어떠한 인품의 소유자인지도 알 수 없는 유명인들을 내세워 대중들을 현혹한다. 우리 자신 또한 색성향미촉법의 6진(塵)에 구속되어 자본의 이익을 위한 충실한 하인이 된다. 그 결과, 지구는 머지않아 거덜나게 되었다. 소유의 갈증은 그만큼 존재의 기쁨을 빼앗을 뿐이다. 존재의 환희는 중용에 있다. ‘마음의 본체가 곧 하늘의 본체“인 까닭이다. 풍운우로의 지나감도 한 때다. 지수화풍으로 뭉친 우리 육신 또한 오래 머물지 않는다. 풍랑처럼 일어나는 마음이 거품 같음을 안다면 마음은 저절로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
홍자성은 유마거사처럼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삶을 살았다. 도의 경지를 “마음이란 비우지 않을 수 없으니, 비워두면 의리가 와서 자리를 잡는다. 마음은 채워두지 않을 수 없으니 채워두면 물욕이 들어오지 못한다”라는 표현에 담는다. 비우는 것은 허심(虛心)이며, 채우는 것은 허령(虛靈)이다. 이것이 삶의 진실이다. 왕후장상도, 필부필녀도 최후에는 하늘이 공평하게 대한다. 인과가 없다고 하지 말라.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어진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인생 같지만 마침내 원점으로 되돌아온다. 이것이 하늘이 우리에게 준 유일한 특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