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세상 누가복음 13장 18-19절
오늘은 파종예배로 함께 합니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모종예배입니다. 절기로 보아서 파종은 4월에 이루어지고 모종은 5월에 이루어집니다. 계절적으로 4월은 여전히 날씨가 추워서 매년 파종예배를 5월에 드리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이곳에 나오면 새는 재잘거리고 바람은 살랑 살랑 불어오고 식물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우리를 반겨줍니다. 대지는 모든 것을 키워내고 모든 것을 먹여 살리는 생명의 근원 - 어머니의 품입니다. 오늘 서정홍 시인의 시처럼 밭에 와서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고 씨를 뿌리면서 생명이 자라는 걸 보면서 우리는 생명의 원리를 봅니다. 서정홍 시인은 그걸 착해진다고 표현했지만 생명의 이치와 원리를 아는 삶이 착한 삶 선한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 텃밭은 처음부터 힘들고 어렵더라도 생명의 원리를 지키는 텃밭을 운영해 왔습니다. 그래서 텃밭공동체를 꾸려가는 정신은 동녘의 정신이요 신앙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생명의 원리는 살리는 정신입니다. 나 살자고 남 죽이면 같이 죽습니다. 타인을 살려야 나도 살고 자연을 살려야 인간도 건강합니다.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들이 많지만 그 중의 하나가 먹거리입니다. 병든 먹거리 약한 먹거리 편한 먹거리는 인간을 병들게 하고 약하게 하고 여리게만 만듭니다. 평생 죽만 먹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고기 못 먹습니다. 치아가 아파서 못 씹어요. 단일 열흘하고 다시 음식을 먹으려니 턱이 많이 아프더라구요. 좀 질기고 적당히 힘도 있고 씹는 맛도 있고 그래야 치아도 발달시키고 턱의 힘도 키우고 인간의 신체도 발달시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지켜온 농법이 3무 농법입니다. 농약하지 않고 비닐치지 않고 화학비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살리면 자연도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타인도 타자도 자연도 생명이라는 신앙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온갖 것들을 보십시오. 물, 공기, 나무, 흙, 바람 이 모든 것들이 병들면 우리도 병듭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한 유명한 명언이 있습니다. “자연을 벗 삼는 이는 절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 아침마다 참새들이 말을 걸어와요. 꽃들이 말을 걸어와요. 고독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텃밭 농사를 하면서 농사짓는 것 가운데 하나가 살림의 정신입니다. 살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두 번째 정신은 순환의 정신입니다. 살림의 정신을 좀 더 확대시키면 순환입니다. 이 밭에서는 모든 게 순환됩니다. 화장실 변과 소변은 밭으로 갑니다. 주일에 가져오는 음식찌꺼기들은 왕겨와 함께 발효됩니다. 이 모든 것들은 텃밭으로 들어가 식물과 작물을 살리고 우리는 그걸 먹습니다. 생태계는 유기적 순환에 의해 지속가능합니다. 이것이 인류역사요 생명 순환의 원리에 의해 지구는 지속가능한 삶을 유지해왔습니다.
현대 문명은 쓰레기문명입니다. 순환되지 않는 쓰레기는 생명의 적이고 생명의 숨통을 조이는 문명입니다. 고래, 사슴, 거북이 뱃속에서 나오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수백 년이 지나도 지구상의 수없이 많은 생명체를 위협할 뿐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지구상의 생명을 살리지 않습니다. 지금도 밭을 일구다 보면 비닐 쓰레기가 나옵니다. 십수 년 전에 깔아놓았던 비닐들이 지금까지도 썩지 않고 땅속에서 생명들의 유기적 순환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순환되지 않는 쓰레기처럼 삶에도 썩지 않는 독약과 같은 삶과 관계의 순환을 끊어버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마치 비닐 하나씩 하나씩 걷어내 순환시스템을 만들어가야 삶에도 숨통이 트입니다. 삶에서 순환의 원리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데 이 순환의 원리를 몸소 배우고 깨닫고 길러가는 곳이 바로 이 텃밭입니다.
마지막은 함께 사는 철학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은 것은 모두의 것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투자금을 모집하는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해 농사지을 만큼 들어옵니다. 신기합니다. 어떻게 아시는지 한해에 필요한 만큼 딱 주시고 그 비용으로 넉넉히 농사를 지어 모두가 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올해는 이런 저런 다년생 나물들도 많이 심었습니다. 아마도 올 농사는 야채와 나물이 풍성한 농사가 될 것 같습니다. 초록부장님이 꾸러미도 해볼 야심을 가지고 계시는데 잘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취나물을 심었는데 잎사귀가 다 말라 죽은 거예요. 그래서 죽었나 하고 다른 것들을 심을까하고 들여다 보았더니 말라죽은 잎사귀 그 사이로 어린잎들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뿌리가 산 거예요. 올해 잘 하면 내년부터는 다년생들은 큰 수고 없이 계속해서 번성할 것입니다. 안쪽 텃밭은 다년생 밭입니다. 우리가 매년 텃밭 농사를 지으면 돈 낸 사람 안낸 사람 구분 없이, 노동 한 사람 안 한 사람 구분 없이 다함께 나누어 먹습니다. 동녘의 기본소득입니다. 이 텃밭 안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고 누구나 존중받고 신분이나 지위, 나이, 학력, 직분, 돈이 없어도 노동이 없어도 먹을 자격이 있습니다.
이 작은 100평정도 밖에 안 되는 텃밭에서 일구는 꿈과 세상은 살림, 순환, 존중의 철학과 신앙입니다. 생명은 나도 귀하지만 남도 귀하고 인간도 귀하지만 자연도 귀하고 내 자식도 귀하지만 남 자식도 귀하고 내 식구도 귀하지만 남식구도 귀하고 서로 존중하며 살리며 더불어 함께 순환하며 살아야 한다는 신앙적 신념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겨자씨 비유에서 겨자씨와 비유되는 나무를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은 매우 작은 씨앗과 커다란 백향목 같은 나무를 연상합니다. 그러나 이런 연상은 예수님의 본래 비유의 의도를 잘못 왜곡할 수 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작은 씨앗과 대조되는 백향목과 같은 커다란 나무는 어쩌면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높은 자리, 많은 수확, 큰 제국과 같은 이미지를 즉 성장과 성공과 발전의 이데올로기를 연상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에서 말하는 겨자나무를 어떻게 이미지화 하셨었습니까? 이게 겨자풀입니다. 백향목/소나무처럼 크고 웅장한 나무가 아닙니다. 겨자씨가 뿌려지면 뿌리를 다 걷어 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번식력이 강해서! 마치 잔디나 쑥과 같은 겁니다. 저희도 쑥 밭이 있는데 뿌리를 캐내다 보면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무작위하게 깔려있어서 다 캐내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공중의 새들이 앉을 겨자자무가 된다는 것은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곳에 두루두루 퍼진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다음에 나오는 누룩 비유와 같은 이미지입니다. 밀가루 안에 누룩이 들어가면 밀가루 전체에 들어가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겨자씨가 겨자나무의 세상이 된다는 것은 전체에 스며들어 전체를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나하나 크게 되어 우뚝 솟는 게 아니라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심지 있고 야무지게 영향을 주고 스며들어 마침내 전체를 질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겁니다.
저는 우리가 텃밭에서 일구어가는 지켜가는 심한 이런 귀한 신앙의 가치들이 겨자씨 세상처럼 우리들 삶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마침내 우리 삶 전체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신앙의 가치, 삶의 가치 철학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