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간증- ‘꿈 덕에 총살 면한 신비한 예지몽들’
“일본 패망 꿈대로”
100세를 훌쩍 넘겨 살아보니 인생,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귀하다는 것을 느낀다.
중학교 때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다.
평양지역 학교 학생들을 위한 부흥회가 일주일 동안 저녁시간에 열렸다.
감리교 김창준 목사와 장로교 윤인구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심을 깨달았다.
그 후부터 오늘까지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일제로부터 해방 전 날인 1945년 8월 14일. 나는 25세 나이로 일본 조치대학교 철학과에 유학중이었다.
저녁을 먹고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중학교부터 나를 사랑으로 키워준 평양 숭실전문학교 학장 마우리 선교사님이 평양 해변가에 있던 나를 해변가 큰 창고로 데려가 문을 열어 주면서 보라고 했다.
창고 안에는 일본인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바닷물을 마셔 퉁퉁 불은 시체들을 들춰보니 철학과 동기인 내 일본 친구들도 함께 섞여 있었다.
군에 입대한 친구들이라 너무 놀라 꿈에서 깨어났다가 다시 잠을 청했다.
새벽녘에 또 꿈을 꾸었다.
저녁 무렵 거대하고 붉은 태양이 동쪽 산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
왜 태양이 동쪽으로 지는지 놀라서 바라봤다.
아침을 먹으며 아버지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내가 네 나이쯤이었을 때 꿈을 꾸었다. 동쪽 산 위로 작은 고무공 같은 태양들이 수없이 떠올라 오더니 우리 땅에 가득 찼다. 얼마 뒤 한일합방이 되면서 일장기가 들어와 온 세상을 뒤덮었다. 꼭 꿈대로 되더구나. 오늘 네 꿈도 몹시 이상하니 이 시간 평양에 가서 어떤 소식이 있는지 알아봐라.”
나는 곧장 평양 시내에 있던 누이동생 집으로 갔다.
낮 12시 정각. 번화가 시청 앞에 전차가 잠시 멈췄을 때 길가에 있던 가게에서 라디오 방송이 들려왔다.
일본 천왕의 목소리였다.
전차에서 뛰어 내려서 가게 앞으로 달려갔다.
내용은 간단했다.
“이 시각부터 일본은 전쟁을 끝내고 무조건 항복한다.”
정말 믿기 힘든 소식이었다.
꿈을 생각해 봤다.
태평양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태양을 동쪽으로 다시 돌아갔다.
“6.25 전쟁 꿈대로”
6.25전쟁이 일어나기 몇 달 전인 1950년 1월 1일 새벽에도 놀라운 꿈을 꿨다.
집 앞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오니 북쪽에서부터 중무장한 군대가 남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넓은 길 가득히 전투복과 군화 행진이 한없이 이어졌다.
무슨 일인가 하고 북쪽을 바라보니 소련 스탈린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 있었다.
깜짝 놀라서 깨어났다.
“공산군 전쟁인데”하는 예감이 들었다.
몇 달 후 6월 25일 낮이었다.
주일 오후 2시 시청 옆 덕수교회에서 학생들과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서울 시내가 아수라장 같이 혼란스러웠다.
휴가 나온 군인들은 복귀하라는 전갈이었고, 휴전선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나 곧 진정될 것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나는 전쟁이 터졌다고 직감했다.
학생들과 우리 대한민국을 보호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헤어졌다.
다음날 월요일 내가 교사로 근무하던 중앙고로 가서 교장에게 “이 전투는 전쟁이 될지 모르니 은헁에 예치해둔 예금을 모두 찾아 3개월치 봉급을 선불로 달라”고 제안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나도 모르겠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30대 젊은 교사의 제안을 받아준 교장 선생님께 지금도 감사드린다.
그 뜻이 이뤄져 우리 학교 교직원들은 3개월 동안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잘 지낼 수 있었다.
나는 3개월 동안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왔다.
부산 피난 때였다.
1950년 8월 1일 경남 진영에 있는 한을중고등학교를 방문했다.
강성갑 교장선생님은 연세대를 나와 일본에서 조치대에서 신학을 공부한 목사님이다.
그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늦게 잠들었다.
새벽에 꿈을 꿨다.
꿈에 평양에 있던 막내 여동생이 갑자기 나타나 “오빠 여기가 어디라고 오셨어요. 잠에서 깨는 대로 곧 떠나세요.”
여동생은 또렷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나자 당황스러웠다.
서둘러 떠나기로 했다.
새벽에 길을 나서니 강 교장 사모가 놀라며 인사했다.
“아침이라도 먹고 가라.”
“다시 기회가 오면 찾아 뵙겠습니다.”
인사말을 남기고 속히 그곳을 떠났다.
다음날 조간신문에 김해지역 양민학살사건이 보도됐다.
강 교장을 포함한 200여명이 친북좌파라는 명목으로 낙동강 수상교 아래 백사장에서 총살됐다.
오랜 조사와 재판 끝에 진영경찰서장이 자신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까지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사건은 진영경찰서장이 사형집행 당하는 것으로 종결됐다.
만일 그날 내가 꿈에 나타난 동생의 말을 무시하고 그곳에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회상하곤 한다.
급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를 건저내신 것은 그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사건을 겪다보면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다.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섭리 아래 움직이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어려운 때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가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