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11/9) 춘천문화원의 창립60주년 기념학술대회에서 강의한
박성수 교수의 <맥국의 유래와 춘천 - 우두대촌과 청평사>를 다시 읽어 보았다.
강의나 논문의 대요는 맥국과 단군문화의 전통을 전해주는 기록도 버젓이 있는데,
왜 그런 상고사의 사실 기록들을 내버려두고 무시하는가를 물으며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주요 전거는 계연수가 지었다고 알려진 <환단고기>다. 강의실 입구에서는
안경전이 새로 역주한 그 책과 함께 출판사에서 나와 판매도 하였었다.
춘천역사문화연구회 회원님들이 많이 찾아와 경청해주길 기대하였으나 많이들 오시지
않았기에, 여기 내용을 추려 소개해 봅니다.
박성수는 "춘천의 우두촌과 청평사는 우리나라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어주는 열쇠"라면서
"예맥은 고조선의 핵심민족"으로서 그 유민들이 "우두벌에 정착하여 고조선을 재건한 성지"가
바로 맥국이고, "맥국은 단군조선과 삼국의 맥을 어어준 고리"로서 그 유적인 "유두대촌은
단군조선과 삼국 사이의 역사적 정통성을 이어주었고 또 하나 청평사는 단군조선의 정신문화를
이어준 혈맥이었다"는 것이다.
춘주 북방 13리 소양강 서쪽의 맥국 도읍지 우두대촌에는 지금도 왕대산, 조천지, 맥둑의 유적이
있다. 게다가 "청평사는 본시 태소암(太素庵)이 있었던 곳인데" 거기 살던 소전거사(素佺居士)에게는
환단진서들이 있었고, 고려 말 행촌 이암과 청평 이명, 휴애 범장 3인이 이곳을 찾아가 그 진서들을
보고 각각 <단군세기>, <진역유기>, <북부여기>를 지었으며 이를 합친 것이 바로 <환단고기>란
책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도 맥수(貊帥)의 활동과 천제를 지낸 사실이 확인되며, "맥국의
인구는 5만 명에 그 강역이 사방 100리"였는데, 이는 "단군조선의 삼신문화"를 이어받은 터전이었다.
단군조선의 선인문화를 국자랑이라 하였고 그것이 신라의 화랑, 고구려의 조의선인이
되었는데 이런 호국선인의 문화는 예맥이 중간 역할을 하며 전해주었다. 조선의 단궁을 이은
맥국의 맥궁(貊弓)이나 맥포(貊布)는 그 사회와 문화를 알려주는 증거다.
예맥족의 후손들은 일본으로도 건너가 아직도 가라시마라는 성명을 쓰며 우물 신사를 세워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일본으로 건너간 예맥족 지도자가 아마테라스 여신(天照大神)과 소시모리
(素尸毛利) 내외였는데, "자기네 고향은 강원도 춘천이 아니면 경상도 김해라고 믿고 있었다."
우두산의 소시머리가 그것이란 말이다. 일본의 화랑도라 할 '수험도'란 것도 단군조선의 고유 문화를
이은 것이다.
행촌 이암이 천보산(지금의 오봉산)을 유람하다 태소암에 묵으며 환단시대의 진결을 보았듯, 숙종 2년(1676년) 북애자라는 선비가 태소암을 찾아가 진결을 보았다. 그는 이암과 함께 암자를 찾았던
이명의 <진역유기>를 보고 <규원사화>라는 책을 지어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이명은 스스로
청평도사라고 자처했다는데 그 은거처가 지금의 청평사다. 영지라고 알려진 못 안에는 삼신바위라는
성석(聖石)이 지금도 있고, 그것은 "하늘로 승천하는 조천석(朝天石)"이다. 이로 추정컨대 천제를
지내고 조천하는 유적이 있는 이곳은 바로 태백산이며, 단군조선의 수도는 우수하 언덕, 즉 "소양강과
신연강이 합치는 곳에 우두대촌"으로서 "제2의 평양"이다.
그 문화의 중요한 것은 바로 제천문화로서 "사람을 선인으로 개선하고 진실한 진인으로 만들어주는 것"
이다. 국자랑을 지도하고 이끄는 스승을 '전(佺:신선 전)'이라고 하며 그 수련을 '전계(佺戒)'라고 하며
소전거사의 '소전'이란 말도 이를 이어 지은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런 수행법을 '정해법(靜解法)'이라 하며 그 내용도 <환단고기>에 상세히 전해 온다는 것이다.
이상이 이번 강의의 요지이다. 먼 상고시대의 춘천 역사의 개요를 그려주면서 일견
저 윗쪽 우리 정신문화의 근원을 알려주는 내용들이라 머릿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듯도 하였다.
문제는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와 같은 서적들이 사학계에서는 별로 주목을 받거나 인정되지
못해왔다는 점이다. 어쩌면 춘천의 강안을 따라 대대적으로 남아 있는 선사유적들을 앞으로
더 발굴하고 밝혀서 상고사의 사실들이 더 구체적으로 알려질 날을 기대하는 길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이번 강의는 사학계의 원로사학자가 춘천의 상고사와 관련하여 이런 기록의
내용을 일단 잘 요약하여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는 생각이다.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이들 사서의 내용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 지방의 유적을 살펴보는 데도 훨씬
넓은 상상력과 깊은 성찰을 가능하게 해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제시대에 처음 한국사를 공부하여 대학에서 어른 역할을 해왔던 이병도 박사가
내내 고조선을 부정하다가 말년 타계하기 전에 장도빈 등 주변의 원로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고조선의 실재를 인정한다고 기자회견을 열었던 이른바 '실증사학'의 맹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또한 분단시대를 살아온 우리 후손들은 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가 사는 춘천이란 곳이 강원도나 한반도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지리적 감각이
원활하지도 못한 것이 사실이다. 비근한 예로 양구에 살던 화가 박수근이 평양의 학교에
근무하게 된 것처럼 강원도와 평양 사이의 길은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고, <규원사화>에도
춘천과 평양이 서북으로 600리인가(?)라는 말이 소개되어 나온 걸로 기억된다.
필자는 전부터 춘천의 환경과 문화를 요약하는 말이 바로 '선동(仙洞)'이라고 주장하였다.
청평사의 유적들도 불교만이 아니라 도교적 전통인 신선문화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는
생각인 것이다. 그 뿌리가 고조선, 단군시대의 고유한 삼신문화와도 닿아 있다는 점을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해도, 위와 같은 기록이 있음을 늘 염두에 두고서 그 깊이를
가늠해보아야 하리라 여겨진다. 필자도 휴식시간에 박성수 선생과 인사를 나누며 청평사의
영지를 '조천지'라고 언급하신 점을 이야기하며, 거기에 비치는 산봉우리가 '천단(天壇)'이며
삼신신앙과도 연결되리라 여겨지는 그 말이 바로 김시습의 시에도 나온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기도 하였다.
옛 맥국이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에 끼어 있던 일개 소국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오히려 고조선의 전통을 이은 가장 중요한 나라였다는 점을 이번 강의를 계기로 하여
새로이 새겨두어야 할 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어쩌든 중조선의 실채를 찾으면 명명백백하게 들어 날 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