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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380. [역경의 열매] 이봉관 <1-10> “주님이 세상 지으신 것처럼 아름다운 건물 짓자”
하나님께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까… 창조과정 닮은 건축하기를 늘 고민
서희건설 회장 이봉관 장로가 지난 21일 서울 서초구 남부순환로 집무실에서 건축에서 느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나는 올해로 22년차를 맞는 건설회사 대표다. 동시에 23년을 교회의 장로로 섬긴 뒤 ‘원로’라는 갓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보시기엔 아무 보잘 것 없는 존재의 인생이겠지만 건축을 대하는 나의 삶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실까’를 끊임없이 묻는 과정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위대한 예술가다. 어느 가을 날 풍경을 바라보다 경이로움을 느꼈다. 낙엽이 떨어지는데 붉은 빛깔, 노란 빛깔이 어우러져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낙엽이 무엇인가. 잎사귀가 생명줄인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곧 하나의 생명이 죽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처량하고 쓸쓸한 과정인데 하나님은 그 과정조차 아름답게 만드신 것이다. 그것이 예술적인 하나님의 창조 섭리다. 그 섭리를 하나씩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 솜씨에는 비할 바 못 되지만 건축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창조 과정과 닮은 모습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건축물을 창조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 왔다. 건축 현장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자. 참으로 삭막하다. 먼지투성인 데다 삐죽삐죽 철근들이 솟아나와 있고 잿빛 시멘트들이 가득하다. 한 층씩 건물이 올라가는 순간들은 힘든 과정의 연속이다. 그 안에 땀과 고민, 분쟁과 협력이 뒤엉켜 있다. 모든 것을 인내하고 건축물이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크리스천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매 순간들을 하나님께 의지하며 견디고 천국에 갔을 때에야 아름다움이 완성되는 것이다.
서희건설은 지금까지 40개의 예배당을 건축했다. 그 가운데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이영훈 목사) 명성교회(김삼환 원로목사) 광림교회(김정석 목사) 등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교회들도 있다. 혹자들은 묻는다. “장로님이시니 아무래도 예배당 건축할 때는 다른 건축물보다 더 심혈을 기울이시겠네요?”라고. 그들이 아쉬워할지 모르겠지만 내 대답은 “아니오”이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도 계시고 밖에도 계신다. 아파트 사무실 병원 공장 등 모든 공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생각으로 건축에 임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신 것처럼 건축물들을 아름답게 짓자’는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역경의 열매’란 이름으로 삶을 돌아볼 제안을 받았을 때 가진 생각은 딱 한 가지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기업을 운영하는 것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미력하나마 사람들이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는 일에 이바지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지나온 내 삶을 통해 가르쳐 주셨던 것들, 생의 힘든 순간마다 의지하기만 하면 힘과 용기와 위로를 주셨던 일들을 꺼내어 하나님을 알려주고 싶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을 건축해가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작은 변화가 있길 기대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봉관 <1> "주님이 세상 지으신 것처럼 아름다운 건물 짓자"
* [역경의 열매] 이봉관 <2> 공산주의 피해 월남하다 아버지와 영영 헤어져
* [역경의 열매] 이봉관 <3> "내가 집안의 가장"… 일곱 살부터 농사일 시작
* [역경의 열매] 이봉관 <4> 짚신도 못 신고 일 다닌 맨발은 늘 상처투성이
* [역경의 열매] 이봉관 <5> 성경공부 통해 한글 깨우치고 '요셉의 꿈' 키워
* [역경의 열매] 이봉관 <6> 어머니 도우려 저수지 공사장서 자갈 캐는 일
* [역경의 열매] 이봉관 <7> 학업 중단 위기에 어머니까지 병환으로 쓰러져
* [역경의 열매] 이봉관 <8> 꿈 잃고 주님 잊은 채 지낸 대학시절 부끄러워
* [역경의 열매] 이봉관 <9> 믿음을 자본으로 기업 운영… 잇단 위기 견뎌내
* [역경의 열매] 이봉관 <10·끝> 교회 건축 은혜롭게 마칠수록 회사 빠르게 성장
◇약력=△1945년 평양 출생 △한국건축문화대상, 매경이코노미 선정 올해의 CEO, 대한민국 명품 브랜드 대상 수상 △경희대 총동문회장, 재경 서라벌경제인 연합회장 역임 △현 서희건설 회장, 한남대학교 재단이사, 기독교사회봉사단 공동대표.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이사, 서울 청운교회 원로장로
***[역경의 열매] 이봉관 <2> 공산주의 피해 월남하다 아버지와 영영 헤어져
‘금수저’ 해방둥이로 태어났지만 외가 더부살이·전쟁 소용돌이에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난 이봉관 장로의 백일 사진. 명품 옷을 입고 사진을 찍을 만큼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풍족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서희건설 제공나는 194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전주이씨 양녕대군 후손으로 태어나 부유한 삶을 보장받은 소위 ‘금수저’ 해방둥이였다. 중국을 오가며 무역업으로 큰 부를 축적했던 증조할머니는 ‘유학’이란 단어가 생소하던 시절에 자손들을 만주로 보내 공부를 시키기도 하셨다. 내가 태어난 당시에는 백일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가정이 얼마 되지 않았다. 찍더라도 옷을 벗고 있는 아기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시절에 요즘으로 치면 1000만원이 나가는 명품 옷을 입고 백일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풍족한 삶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이 일본의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후 북한이 공산주의 사회가 되자 기독교 가정이었던 우리 가족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공산주의의 핍박을 받던 미국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은신처로 집을 내줄 만큼 신앙심이 두터웠던 아버지의 결단이었다.
부모님과 누나 둘, 나까지 우리 다섯 식구는 콩나물시루 같은 기차를 타고 며칠을 이동해 서울에 도착했다. 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데다 생후 6개월 된 아기였던 나는 고된 여정 때문에 팔딱팔딱 뛰던 숨골이 멈추고 말았다. 깜짝 놀란 아버지가 사방으로 의사를 찾아 숨골에 100여개의 뜸을 뜨고 나서야 간신이 숨이 돌아왔다.
한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문제가 터졌다. 신의주를 출발해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했던 할머니가 오시지 않았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서울행 기차를 타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는 다시 결단했다. 외가인 경북 영천에 어머니와 삼남매를 맡겨두고 할머니를 모시러 신의주로 떠난 것이다. 3개월 안에 할머니와 함께 오시겠다던 아버지는 그날 이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외가댁은 100호 가량이 같은 성씨인 집성촌에 있었다. 이씨라곤 우리 삼남매뿐이었다. 하지만 외가 더부살이도 나쁘진 않았다. 외할아버지와 형제들은 나와 누나들을 친손자처럼 아껴주셨다. 빼어난 미모에 넉살도 좋았던 어머니는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을 받으며 가정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하면서 영천 지역의 주민들도 피란길에 올라야 하는 상황이 됐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을 아껴주셨던 외할아버지들도 전쟁이 터지고 피란을 가게 되자 아들 내외와 그 자식들을 먼저 챙겼다. 우리 가족은 한순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돼 버렸다. 어머니가 받은 충격과 상처도 컸다. 결국 어머니와 우리 삼남매는 외가댁 식구들과 따로 경주행 피란길에 올랐다. 다른 지역에는 연고도 없었거니와 마침 어머니의 사촌동생이 경주에 산다는 소식에 한 줄기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어머니는 경주 시내의 한 식당에서 일을 하며 우리 삼남매를 키웠다. 경주에 산다는 어머니의 사촌동생도 큰 힘이 돼 주진 못했다. 전쟁의 공포도 여전했다. 하나뿐인 아들을 살리는 게 가장 큰 목표였던 어머니는 전쟁의 위험을 피해 경주 외곽의 깊은 산골로 또 한 번 피란을 감행했다. 고작 일곱 살의 나이.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에서 또 한 번의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봉관 <3> “내가 집안의 가장”… 일곱 살부터 농사일 시작
6·25 난리 피해 경주 외곽 산골로… 네 식구 살리겠다 논밭 나가 일해
지난해 10월 이봉관 장로(오른쪽)가 경주시청을 방문해 이 지역 중·고등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서희건설 제공경주 시내에서 30리(약 12㎞) 길을 걸어 내려가 도착한 곳은 지금의 내남면에 해당하는 소재지였다. 전쟁 피란처로 택해 들어간 곳은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었다. 당장 끼니를 챙기는 것도 막막했다. 태어나서 먹고 잘 것을 걱정해 본 것이 처음이었다. 어떤 연유였는지도 모르게 문득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곱 살이던 꼬마 아이는 학교로 향해야 할 발걸음을 논밭으로 옮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내가 이 집안의 가장이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남의 집 논과 밭을 돌아다니며 일거리를 찾았다. 동네 머슴들과 함께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짚으로 새끼를 꼬아 생계를 이어갔다. 어느 이른 봄날 논 주인에게 일거리를 받아 모를 심으러 논에 들어갔다. 초봄의 논물은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를 악물고 꾹 참으려는 순간 시커먼 거머리들이 피를 빨아먹겠다고 내 종아리로 달려들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소리를 “꽥” 지르고는 논 밖으로 뛰쳐나왔다. 발을 동동 구르는 내게 주인이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아! 네가 세상 모르고 게을러 터졌으니까 그렇게 밖에 못 사는 거야. 당장 논에 들어가 일을 하든지 집으로 가든지 해!”
서러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떻게 어린 아이에게 저런 모진 말을 할 수 있을까.’ 당장 일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대로 집에 돌아가면 우리 네 식구는 끼니를 걸러야 했다.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제가 열심히 일해서 이 동네의 논을 모두 살 수 있게 해주세요. 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고 일을 시키는 모습을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기도를 하고 다시 논에 들어가니 신기하게도 서럽고 분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렇게 차갑던 논물도 한여름 신나게 발 담그던 계곡물처럼 반갑게 느껴졌다.
또래 동무들보다 몸이 약했던 나는 그야말로 집념으로 농사일에 임했다. 그렇지만 부족함 없이 챙김만 받던 일곱 살 소년에게 농촌의 들녘은 목숨을 건 전쟁터와 같았다. 하루 종일 허리를 숙인 채 모를 찌고(모내기철에 못자리에서 모를 뽑아 묶는 것) 또 심고 나면 저녁 무렵엔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모가 자라 김을 매는 것은 더 힘든 작업이었다. 잡풀을 제거하기 위해 벼 사이로 몸을 숙여 들어가면 무성하게 자란 벼에 눈가가 찢기고 피가 새어나왔다. 삼복더위라 얼굴에 땀이 쏟아지면 상처에 땀이 들어가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눈이 따가워 손으로 닦기라도 하면 손에 묻은 진흙까지 눈에 들어가 안구가 땀과 진흙으로 뒤범벅 됐다.
잡초를 뽑기 위해 진흙땅을 뒤집을 때면 흙 속에서 나오는 거름냄새가 코를 찌르고 지열이 숨을 막히게 했다. 입고 있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가끔 쇠파리가 젖은 옷 속으로 살을 찌르기라도 하면 물린 자국이 주먹만큼 부어올라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팠다. 그렇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견뎌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우리 가정의 가장입니다. 저에게 힘과 지혜를 주세요. 이 가정이 축복의 가정이 될 수 있도록 저의 무릎과 허리를 세워주세요.”
***[역경의 열매] 이봉관 <4> 짚신도 못 신고 일 다닌 맨발은 늘 상처투성이
어느날 알아채신 어머니 눈물 펑펑… 어머니 사랑에 고난 이겨낼 힘 얻어
이봉관 장로(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대학 졸업식 때 가족과 함께한 모습. 어머니(앞줄 오른쪽 두 번째)는 이 장로의 어린 시절 ‘인내’의 원천이었다. 서희건설 제공다른 또래 친구들은 여름에 짚신을 신고 다녔지만 피부가 약한 나는 짚신을 신을 수 없었다. 짚신을 신고 걷다 보면 이내 발바닥과 뒤꿈치에 상처가 나고 짓물러 고통스러웠다. 결국 시골길을 맨발로 다녀야 했다. 하지만 맨발의 소년이 겪어야 할 고통도 만만치 않았다.
농사일과 함께 주로 했던 것이 소를 먹이는 일이었다. 소를 산에 풀어 놓고 꼴을 먹게 한 다음 해가 지면 소를 몰고 집으로 오는 일이다. 등에는 소에게 먹일 꼴을 잔뜩 짊어지고 한 손으론 소를 몰고 내려가는데 오가는 길목에 어찌나 뾰족한 돌들이 많은지 지뢰밭이나 다름없었다. 잠깐 한 눈을 팔다 맨발로 돌 모서리를 밟을 때면 발바닥이 찢어지면서 피범벅이 됐다. 돌을 피해 발을 디디려다 논두렁으로 굴러 떨어져 크게 다친 적도 있다.
발에 난 상처가 아픈 것도 힘든 일이었지만 집에 돌아와 그 상처를 숨기는 것도 역시 힘들었다. 상처 난 발이 아픈 것보다 어머니가 보시고 마음 아파하실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더 아팠다. 상처가 쓰라려 절뚝거리다가도 집에 도착하면 어머니 앞에서 바로 걷는 연기를 해야 했다. 잠을 잘 때도 이불을 몸 아래로 덮어 발을 가리느라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발을 숨긴 채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뒤척이면서 드러난 내 발을 어머니가 발견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내 발을 붙들고 서러움에 크게 소리를 내어 우셨다. 나는 벌떡 일어나 어머니께 소리를 질렀다.
“그깟 발바닥 상처 난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울어! 이 동네 아이들 다 그래. 엄마 없이 사는 애들도 많아. 그래도 나는 엄마도 있고 누나들도 있잖아. 이거 조금 찢어진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어머니의 서러운 눈물을 보니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파서 도리어 큰소리치면서 아무 일도 아닌 듯 행동한 것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고됐던 유년 시절은 그렇게 어린 봉관이를 ‘효자 봉관이’로 만들어 놓았다. 어릴 때 돈이 없어 고생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만 있으면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없이는 못 살 것 같았다. 어머니는 하나님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아들 봉관이를 가장 우선으로 사랑해주셨다. 내 삶 가운데 그 무엇도 뚫을 수 없는 든든한 방패가 어머니였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사랑했고 어머니 또한 나를 끔찍이 사랑하셨다.
한 번은 곧 죽을 정도로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었다. 사경을 헤매며 누워 있는데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 제발 우리 관이를 살려주세요. 북한에 있는 제 남편은 돌아오지 못해도 좋습니다. 관이만 살려 주시면 그 어떤 것도 구하지 않겠습니다.”
기도는 절규에 가까웠다.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누워만 있던 내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몸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나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감사해서, 내 몸 하나 제대로 간수를 못해 그렇게 나를 사랑해주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너무 죄송해서였다. 그 뒤로도 어머니는 내가 살아있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 수 있었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어머니에게 나는 삶의 전부였다. 그런 어머니는 내가 숱한 역경 속에서 끊임없이 키워 온 ‘인내’의 원천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봉관 <5> 성경공부 통해 한글 깨우치고 ‘요셉의 꿈’ 키워
“인내하며 꿈꾸면 복 갑절로 주실 것” 열한 살에 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
이봉관 장로가 2009년 8월 청운교회 새벽기도회에서 대표기도를 하고 있다. 고된 유년 시절, 교회에 가는 것은 이 장로의 유일한 행복이었다. 서희건설 제공논밭에서 만난 동네 머슴들과 다르게 내가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던 것은 교회를 다녔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기도하고 성경이야기를 듣는 것은 고된 삶 가운데 유일한 낙이었다. 성경공부는 지친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치유시간이자 학교에 다니지도 못한 내가 한글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수업시간이었다. 부모를 떠나 노예생활을 했던 꿈의 사람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늘이 괴롭더라도 꿈을 간직한 채 인내하면 하나님이 복을 곱절로 주실 것이라 믿었다.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서당개처럼 성경공부에 흠뻑 빠져 있던 3년여 동안 나는 한글을 깨우칠 수 있었다. 농사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성경말씀을 되뇌었다. 주일학교에서 열린 성경암송대회에서는 산상수훈이 담긴 마태복음 5∼7장을 모두 암기해 상을 타기도 했다. 학교에도 다니지 못한 ‘머슴 아이’가 101구절을 술술 암기하는 모습에 선생님들은 감탄했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한글을 배우고 성경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닫지 못했다면 평생 일만 하는 머슴으로 살았을지 모른다.
당시 교회가 삶의 유일한 기쁨이었지만 그 기쁨을 얻기 위해 힘든 여정을 감수해야 했다. 우리 식구가 살던 집에서 교회를 가는 길은 산 하나를 넘고 큰 저수지를 지나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만만치 않은 여정이었다. 주일 밤 예배를 마치고 혼자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며 돌아오는 길은 어린 소년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저수지를 지날 때는 짐승들이 우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물풀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로 오싹했다.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는 귀신 이야기, 호랑이가 나타나 옆집 아이를 잡아갔다는 이야기들이 생각나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교회에서 찬송가 ‘주 안에 있는 나에게’를 배우던 날 상황이 달라졌다.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담대함이 생겼다.
제일 무서운 길이었던 저수지 입구에서 막대기 하나를 부러뜨려 쥐고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찬송가 가사대로 주님이 나를 항상 보호하신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 후로 이 찬송은 삶의 고난과 역경이 찾아올 때마다 부르는 내 인생의 애창곡이 됐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어머니를 만날 때마다 “봉관이처럼 총명한 아이는 하루 빨리 학교를 보내야 하는데 무엇하느냐”며 안타까워했다. 어느 날 밤 어머니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셨다. 어머니 말씀으론 “아들 하나 있는 것을 머슴살이를 시키느냐”며 호통을 치셨단다. 어머니는 그날로 자신이 삯바느질을 해서라도 아들만큼은 학교에 보내야겠다고 다짐하셨다고 한다.
그때가 열한 살. 초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하기엔 너무 많은 나이였다. 한참 어린 동생들과 같은 학급에 다니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차라리 농사일이 낫겠다 싶었다. 친구들이 있는 4학년에 입학시켜 달라고 했지만 학교에선 교회를 다니면서 한글은 뗐으니 2학년으로 입학하게 해주겠다는 대답뿐이었다. 아들 얘기라면 세상 무서울 것 없었던 어머니를 조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우리 아이 고집은 아무도 못 꺾으니 제발 4학년에 넣어 달라”고 수차례 사정했고, 결국 남들보다 4년 늦게 4학년으로 초등학교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정리
***[역경의 열매] 이봉관 <6> 어머니 도우려 저수지 공사장서 자갈 캐는 일
‘전국 어린이 모범 효행상’ 2등 수상, 도지사 등이 금일봉 … 중학교에 진학
이봉관 장로 중학교 시절 모습. 서희건설 제공고집을 피워 초등학교 4학년에 입학하긴 했지만 성경공부로 한글만 뗐던 나는 읽고 쓰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특히 수학 시간에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멍하니 칠판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숫자는 알아도 ‘더하기’ ‘빼기’ ‘구구단’이란 단어 자체를 모르던 내게 수학은 철천지원수였다. 선생님이 칠판에 셈을 적고 물어보면 같은 반 친구들이 모두 손을 드는데 나만 조용히 있었다. 결국 생애 첫 학기에 수학 과목 ‘0점’이란 성적표를 받아야 했다. 너무 창피해서 학교를 다니기 싫었다. 그때 문득 성경 한 구절이 떠올랐다. ‘원수를 사랑하라.’(눅 6:27) 그깟 수학도 공부로 치면 한글과 다를 게 없었다.
‘학교도 안 다니고 성경 말씀으로만 한글을 깨우쳤다. 그리고 그토록 소망하던 학교를 다니게 됐는데, 더하기 빼기가 뭐라고 수학이랑 원수를 지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용기가 생겼다. 셈을 하다 틀리면 선생님께 묻고 또 물었다. 조금씩 수의 이치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다른 과목들도 점점 재미가 붙었다.
그렇게 한 해를 마무리할 때쯤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꼴찌였던 내가 전체 60명 중 6등으로 우등상을 타게 된 것이다. 당시 학업 발달과정을 중요하게 평가해 1학기를 제외하고 2학기 성적으로 우등생을 선발했다. 불과 6개월 전 더하기 빼기도 못해 나를 바보라고 놀리던 아이들 중 54명을 제친 셈이다. 한 번 자신감이 붙자 학업 성취도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5학년 때부터는 줄곧 1등을 도맡아 했고 6학년 때는 전교 어린이회장이 됐다.
이런 과정을 신기하게 여긴 담임선생님이 나의 일상생활에 대해 조사를 하셨다. 선생님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학교에 입학하면서 낮에 농사일을 할 수 없게 된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저수지를 막는 둑 공사장에서 자갈 캐는 일을 했다. 공사장 일은 새벽과 밤에만 할 수 있었다. 새벽에 공사장에서 자갈을 캐다가 어머니가 아침밥을 가져다주시면 그것을 먹고 등교했다. 하교하면 바로 공사장에 가서 어머니와 밤늦게까지 일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공부는 이후 시간에 했다.
선생님은 고단한 생업을 견뎌 가면서 학업에 진력하는 나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전국 어린이 모범 효행상’ 후보로 추천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도와 생활고를 극복해 가는 효자로 인정받아 전국 2등으로 이기붕 국회의장상을 받았다(1등은 이승만 대통령상). 지금의 청와대인 경무대에서 생필품, 학용품 등 많은 상품을 선물로 받았다.
경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이룬 쾌거에 도지사, 교육감, 경찰청장, 군수 등이 금일봉을 전달했다. 성적이 오르는 아들의 모습에 기특해하면서도 중학교에 갈 학비가 없어 내심 걱정이던 어머니의 얼굴에서 근심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시골에서 중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은 20% 미만이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에 가슴이 벅찼다. 내 가슴에 큰 인물이 될 수 있으리라는 꿈이 생겼다.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해결해 주실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원대한 꿈을 가지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역경의 열매] 이봉관 <7> 학업 중단 위기에 어머니까지 병환으로 쓰러져
선교사 부부 통해 손 내민 하나님… 장학금 주고 어머니 수술도 도와
2005년 10월 경북 경주 문화중·고등학교 개교60주년에 참석한 마리엘라 프로보스트 사모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이봉관 장로(뒷줄 오른쪽 두 번째). 서희건설 제공원대한 꿈을 갖고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골에서 경주 시내까지 20리(약 8㎞) 이상 되는 길을 매일 걸어 다니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왕복 네 시간이 걸리는 등하굣길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에 갈 걱정, 학교가 끝나면 집에 갈 걱정뿐이었다. 걱정 없을 것 같던 학비에도 문제가 생겼다. 3년간 장학금을 보장받고 들어간 학교로부터 등록금을 납부하라는 독촉이 오기 시작했다. 성적이 95점 이상이어야 등록금이 면제되는데 1학년 성적이 95점에 조금 미달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가슴에 품었던 꿈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으로 서서히 쪼그라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의 건강에까지 빨간불이 들어왔다. 당시 통학 시간이 길어지면서 내가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어머니는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천을 떼어다 파는 장사를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시장에서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리나케 달려가서 자초지종을 들으니 자궁근종으로 인해 그동안 하혈을 해 오신 것이었다. 우리 집 형편에 수술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어머니는 급속히 쇠약해지셨고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생계를 꾸리기도 힘든 상황이 됐다.
‘학업을 중단하고 다시 농사일을 할까? 어머니를 대신해 장사를 해볼까?’
온갖 생각이 머릴 맴돌았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또 다시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셨다. 당시 경주 문화중·고등학교가 부도가 나 폐교 위기에 처했는데 이 학교를 레이몬드 프로보스트(한국명 부례문) 선교사가 인수했다. 학교에서 신앙심 좋고 공부 잘하는 장학생을 찾는다는 공고가 났다. 나는 목사님, 어머니와 함께 선교사님을 찾아갔다.
학교에 도착하자 선교사님과 마리엘라 프로보스트(한국명 부마리아) 사모님이 우리 일행을 맞았다. 선교사님은 내 생활기록부와 성적표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장학금을 주겠다고 하셨다. 절망 속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머니의 표정을 보니 여전히 근심이 가득해보였다. 어머니는 무언가 결단한 듯 선교사님께 말했다.
“우리 봉관이에게 장학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간절히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는 병이 심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부디 제 아들을 맡아 키워 주십시오. 이북에서 아이 아버지가 오면 꼭 보답할 것입니다.”
어머니는 병을 앓고 있으면서 자신의 죽음 후 아들의 삶까지 고민하고 계셨던 것이다. 어머니의 말을 들은 사모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아주머니 병도 고쳐드리고 봉관이 대학도 보내겠습니다.”
그간 창백하기만 했던 어머니의 낯빛이 그제야 생기를 찾는 것 같았다. 선교사님은 어머니를 바로 병원으로 보내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셨고 치료 절차도 마련해주셨다. 나는 고아들만 20명 정도 양육하는 기숙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고아만 받아들이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 한 명을 입사시키고 나는 그 장애인을 돌보는 역할로 동반 입사했다. 장애인 도우미 역할이 생소하긴 했지만 통학과 등록금 걱정을 덜고 어머니가 치료도 받을 수 있게 된 상황이 내겐 그저 기적 같기만 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반드시 지키리라’는 확신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는 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이봉관 <8> 꿈 잃고 주님 잊은 채 지낸 대학시절 부끄러워
겨울날 한밤중 찾은 교회 예배당서 마음 속 회개 쏟아내고 희망 되찾아
이봉관 장로의 포스코 재직시절 모습. 그는 대학 졸업 후 1970년 공채 2기로 포스코에 입사해 13년간 몸담았다. 서희건설 제공프로보스트 선교사님의 배려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통학에 대한 걱정은 덜 수 있었지만 입사 조건으로 나에게 맡겨진 장애인 도우미 역할은 물리적·정신적으로 큰 부담을 줬다. 점자책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학교 수업을 마친 후 매일 저녁, 하루 동안 배운 모든 수업내용을 점자로 옮겨 적을 수 있도록 시각장애인 학우에게 읽어줘야 했다. 밤 10시를 훌쩍 넘겨 그 작업을 끝내고 나면 너무 피곤해 정작 내가 공부할 기력이 남아있질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학 진학까지 지원을 약속했던 선교사님 부부가 고3이 되던 해 본국으로 소환되면서 도움이 끊길 형편이 됐다. 이런 상태로 어느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갈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불굴의 의지로 버텨가며 공부 시간을 마련하는 길밖에 없었다. 새벽잠을 줄여가며 공부에 매진한 끝에 경희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운의 꿈을 키워가야 할 나의 대학 시절은 어느 샌가 꿈과 희망 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이렇게 고되기만 한 대학 생활을 마치고 졸업한들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을까’라며 자조하는 날이 많아졌다. 무뎌지다 못해 녹이 슬어가는 칼날처럼 나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돼 가는 것 같아 신경쇠약증, 불면증에 시달렸고 체중은 45㎏까지 줄었다.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죽을 수도 없었다. 당신의 아들만 바라보고 사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니 도저히 가당치가 않았다. ‘나는 왜 죽을 수도 없는가’라며 절규했던 욥의 모습이 곧 내 모습이었다.
성탄절이 다가올 때면 골목마다 전축가게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 음악이 듣기 싫어 귀를 막았다. 3학년이 되던 성탄절 날, 문득 어린 시절 성탄절에 시골 교회에서 동무들과 같이 밤을 새고 떡국을 먹고 ‘새벽송’을 돌던 때가 떠올랐다. 이튿날 늦은 밤 교회를 찾아갔다. 예배당 장의자에 기댄 채 홀로 눈물을 쏟아냈다. 슬픔과 괴로움이 함께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대학시절을 돌아보니 지금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나는 하나님 은혜가 아니었다면 초등학교도 못 나오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 인생이었다. 감사가 넘쳐날 상황이었는데도 하나님께 불평만 늘어놓는 배은망덕한 놈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가만히 눈을 감으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봉관아. 서울대나 하버드대를 나와야만 성공할 것 같으냐? 내가 너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네가 무얼 할 수 있겠느냐.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내가 함께해야 무엇이든 능히 할 수 있으리라.”
곁에 계신 주님은 보지 않고 현실만 바라본 채 살아 온 나를 돌아보니 마음속에서 회개가 복받쳐 나왔다. 그 마음이 찬송의 고백이 됐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하나님은 한없이 작은 자인 내 투정과 원망도, 주님에 대한 배신도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다. 예배당을 나서며 ‘하나님. 앞으론 어떠한 역경이 와도 다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결단했다. 그날 이후 하루하루가 기쁨으로 시작됐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고, 힘에 부치는 순간이 와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학업에 임했다.
무사히 학사모를 쓴 내게 하나님은 ‘포스코(POSCO) 공채 2기 입사’라는 축복을 주셨다.
***[역경의 열매] 이봉관 <9> 믿음을 자본으로 기업 운영… 잇단 위기 견뎌내
운송업 창업 12년 만에 건설업까지 ‘주님은 양보하는 자를 사랑’ 확인
1983년 7월 ‘유성화물(현 유성티엔에스)’ 직원들과 함께 시무예배를 드리는 모습. 서희건설 제공포스코(POSCO)에 입사할 때만 해도 ‘어떻게 하면 정년까지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회사 생활 10년이 넘어 가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단조로운 일상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워낙 큰 조직이라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한계를 느낀 적도 많았다. 작더라도 조직의 방향을 직접 결정하고 업무를 집행해보고 싶었다.
2년여 간 해볼 수 있는 사업을 고민하고 연구한 끝에 1983년 화물차 20대로 물류업에 뛰어들었다. 창업하던 날 직원들과 시무예배를 드리면서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회사를 경영할 것을 다짐했다. ‘유성화물(현 유성티엔에스)’이란 이름으로 포스코 광양제철소, 동부제철 등 국내 철강사 물류운송사업을 하며 규모를 키워갔다.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던 4년차에 위기가 찾아왔다. 87년 6·29선언과 함께 전국적으로 노사분규가 극심해지면서 많은 물류업체들이 문을 닫게 됐다. 나는 전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농사일하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진솔하게 꺼냈다.
“제가 온갖 설움 속에 농사일 하면서 다짐했던 것이 ‘논의 주인이 되면 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으며 함께 일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창업 때부터 여러분은 사랑하는 제 가족이었습니다. 가족 같은 마음으로 함께 이겨냅시다.”
직원들의 눈빛에 애정이 엿보였다. 그날 이후 직원들은 어려운 순간마다 주인의식을 갖고 더욱 책임감 있게 회사 일에 임했다. 가족 같은 마음으로 상호 신뢰를 쌓은 것이 일터의 어려운 시절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이다.
물류업 창업 12년째인 94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건설업으로 확장을 꿈꾸게 됐고 서희건설을 설립했다. 사훈은 ‘목표 확신 사랑’으로 정했다. 목표를 세웠으면 그 목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목표를 이뤄가는 모든 과정이 사랑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목표를 이뤘을 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음을 뜻한다.
서희건설은 매년 시무예배를 드린 후 업무를 시작한다. ‘유성화물’ 시절부터 이어온 ‘신앙 위에 선 기업’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22년 동안 IMF 경제위기, 리먼 브러더스 사태, 유럽 발 금융위기 등 수많은 어려움이 찾아왔다. 2013년에는 2년 연속 적자를 내며 풍파를 겪었다. 대형 건설사들과 손잡고 3조원 규모의 복합개발단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대형복합상가 시공을 맡았다가 많은 손해를 봐 어려운 시기를 겪기도 했다. 현실적인 고민들을 안고 무릎으로 기도했던 나날들이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기업이 굳건히 견디게 해주셨다.
숱한 어려움들을 이겨내면서 깊이 새긴 교훈은 하나님께서 양보하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거주할 땅의 선택권을 양보했지만,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며 복을 주신 것처럼 말이다. 양보하는 것이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내가 선한 마음으로 양보하면 하나님께서 큰 복으로 돌려주신다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창립 이후 짧은 기간 동안 매출 1조 5000억원, 업계 28위의 탄탄한 건설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의 욕심을 내려놓고 양보의 마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역경의 열매] 이봉관 <10·끝> 교회 건축 은혜롭게 마칠수록 회사 빠르게 성장
손해보더라도 잡음 없는 공사 우선… 하나님께 의존·기도로 고난 이겨내
이봉관 장로가 서울 서초구 서울사무소 집무실에서 성경책을 편 채 기도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서희건설이 매출 1조 5000억원 규모의 건설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전환점은 교회 건축이었다. 역사적인 첫 교회는 경북 포항시 북구 포항중앙교회(손병렬 목사)였다. 포스코(POSCO)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출석하게 된 교회였다.
건설회사를 창립하면서 내게는 ‘교회를 상대로 사업을 하면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다. 기업의 중요한 목표는 이익을 창출하는 것인데 이익을 목적으로 하다보면 성도들끼리 서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2001년 포항중앙교회 교육관을 건축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교회 건축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쏟아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사실 건축을 하면서 손해를 많이 봤다. 한 번은 당시 담임목사였던 서임중 목사님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교회 건축 때문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며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러자 목사님이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이 장로님 믿음이 그것밖에 안 되십니까? 우리 교회 성도들은 건축이 진행되는 동안 밤낮으로 장로님 이름을 부르며 축복을 간구하고 있는데 손해라니요. 손해가 아니라 몇 곱절의 수익이 날 겁니다.”
그때 마음속으로 결단을 했다. ‘그래. 내가 하나님의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은 교회를 다른 회사보다 더 경제적으로, 더 좋게, 더 은혜롭게 짓는 것이다.’ 그 결단과 함께 여의도순복음교회 영산성전, 명성교회 월드글로리아센터, 새에덴교회 등 40개의 예배당을 건축했다. 예배당을 건축할수록 회사의 성장 속도도 빨라졌다.
일반적으로 건설업계에서 교회 건축은 성도들 간, 교회 임직들 간 이견 등으로 시공이 지체되는 경우가 많아 까다로운 부문으로 꼽힌다. 아파트나 오피스텔 같은 건물은 한 개 층만 만들면 나머지는 똑같이 시공하면 되는데 교회는 층별로 완전히 다른 설계를 해야 하고, 음향과 심미적 면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직원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교회 건축 시 손해 봐야 할 때는 깨끗이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건축 과정에서 잡음 없이 은혜롭게 짓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윤만 바란다면 교회 건축은 할 수 없다. 건축을 위해 수고하는 손길들을 향한 성도들의 기도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완공’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이다.
기업의 가장 큰 사명은 존속하는 것이다. 성장을 멈추는 것은 곧 후퇴를 의미하기에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위해 CEO들은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끊임없이 고민한다. 크리스천 CEO는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경영자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자신의 업무를 통해 성장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코 사람의 지혜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크리스천 CEO는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
사람도 기업도 성장 과정에서 많은 고통과 고난이 따른다. 청소년들이 성장통을 겪듯이 오늘의 나와 서희건설이 있기까지도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참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늘 함께 계시며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