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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あなたがたも心を広くしてください。(2024년 6월 23일 주일예배)
본문: 고린도후서 6장 1절~13절
6:1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2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은혜의 때에, 나는 네 말을 들어주었다. 구원의 날에, 나는 너를 도와주었다"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3 아무도 우리가 섬기는 이 일에 흠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거리낌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4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5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6 또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8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9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10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11 ○고린도 사람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 놓았습니다. 12 우리가 여러분을 옹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옹졸한 것입니다. 13 나는 자녀들을 타이르듯이 말합니다. 보답하는 셈으로 여러분도 마음을 넓히십시오.”
1. わたしたちはまた、神の協力者として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神からいただいた恵みを無駄にしてはいけません。2. なぜなら、/「恵みの時に、わたしはあなたの願いを聞き入れた。救いの日に、わたしはあなたを助けた」と神は言っておられるからです。今や、恵みの時、今こそ、救いの日。3. わたしたちはこの奉仕の務めが非難されないように、どんな事にも人に罪の機会を与えず、4. あらゆる場合に神に仕える者としてその実を示しています。大いなる忍耐をもって、苦難、欠乏、行き詰まり、5. 鞭打ち、監禁、暴動、労苦、不眠、飢餓においても、6. 純真、知識、寛容、親切、聖霊、偽りのない愛、7. 真理の言葉、神の力によってそうしています。左右の手に義の武器を持ち、8. 栄誉を受けるときも、辱めを受けるときも、悪評を浴びるときも、好評を博するときにもそうしているのです。わたしたちは人を欺いているようでいて、誠実であり、9. 人に知られていないようでいて、よく知られ、死にかかっているようで、このように生きており、罰せられているようで、殺されてはおらず、10. 悲しんでいるようで、常に喜び、物乞いのようで、多くの人を富ませ、無一物のようで、すべてのものを所有しています。11. コリントの人たち、わたしたちはあなたがたに率直に語り、心を広く開きました。12. わたしたちはあなたがたを広い心で受け入れていますが、あなたがたは自分で心を狭くしています。13. 子供たちに語るようにわたしは言いますが、あなたがたも同じように心を広くしてください。」
지난 주일에는 시편 20편의 말씀으로 오직 주님의 복음을 자랑함으로 견고해지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세상에서 허무하게 사라지고 여건에 따라서 변질되는 것을 자랑하려고 애쓰는 노력에 휘둘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으로 성취된 복음을 자랑하는 간증과 찬양으로 세속의 유혹에 시달림이 없는 일상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몇 해 전 개그우먼 이성미씨가 진행하는 기독교방송 프로그램을 흥미롭게 본 적이 있습니다. ‘예방주사’라는 제목의 방송인데요. 일주일에 한 번씩 유튜브에 업로드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방송에서는 믿지 않은 사람들, 혹은 교회생활에 의문이 많은 성도, 그리고 교회의 문만 넘나드는 교인들을 위한 방송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목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어서 당시에 적지 않은 배움이 있었습니다. 그 방송을 진행하는 이성미씨는 당시에 교회 집사로서, 연예인 예배를 조직해서 사명감을 갖고 섬겨 오고 있다고 하지요. 그분의 에세이가 몇 해 전에 책으로 출판되어서 저도 읽어보기도 하고, 우리교회에도 한 권이 비치되어 있는데요. “사랑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책을 읽어보면 그분이 어떻게 믿음을 지키게 되었고, 건강한 삶을 회복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이 자신을 살린 찬송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찬양을 이야기했는데요.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이제는 권사님이신 이성미 권사님은 이 찬양의 가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동을 실감한 후 매일매일 하루만큼씩 삶의 변화와 연단을 통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삶이란 언제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삶도 완벽하다고 아직 단정하여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이성미 권사님의 고백은 오늘 성경을 통해 증언하고 있는 사도들이 체감한 은혜와 다르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여러분들의 삶에도 아마 그런 은혜의 씨앗이 심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과 그 동역자들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과 또한 우리들에게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이 권면을 받아 들일 지의 여부는 각자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다만 이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로 세움을 받은 저는 저와 여러분의 삶에 선포할 뿐입니다.
1절에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를 헛되지 받지 말 것을 권면하고 계십니다. 일본어 성경으로는 無駄に受けないように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원어 성경에 헛되다의 케노스에는 실속이 없다, 어리석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은 1차적인 의미로 은혜를 실속 없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은혜가 거저 주어지는 것이라고 해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의 헌신과 사랑이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되어 가벼이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돈(금전)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대가를 치렀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우리 어머니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자녀들을 출산합니다. 이 땅에 숨을 쉬고 살고 있는 존재라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가 어머니의 목숨을 건 출산과정을 통해 호흡하게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누군가의 목숨을 건 고통과 더불어 시작된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찬가지 우리의 영생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생명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2절 후반부에는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이며, 구원의 때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구원을 받는 은혜의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는 말씀입니다. 원어에는 은혜의 때와 구원의 때를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크로노스’는 그저 흘러가는… 시계가 기록하는 시간의 때를 말하고 있구요. ‘카이로스’는 끊임없이 내게 생생한 의미로 살아있는 때를 말하지요.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씀은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가치와 소중함을 지금이라고 불리는 시간에 계속 유지하고 지키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작년에 은혜를 느꼈다고, 혹은 지난 주일에 은혜에 감동했다고 과거에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은혜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지요. 어머니의 목숨을 담보로 태어나 살고 있는 자녀의 삶을 매일 매일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은혜의 가치를 지킬 수 있지요. 매일 부모를 저주하고 미워하고 괴롭히다가, 어버이날에 꽃 한 번 달아 드리고, 어버이 은혜의 노래 불렀다고 은혜를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4절에 사도들은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개역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는데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원어성경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여긴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꾼이 된다는 뜻이지요.
교회의 모든 헌신과 봉사, 그리고 성도의 삶은 누군가의 강요나 강압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과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순종할 때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떻게 섬겨야 할 지 모르는 이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꼭 필요한 과정이지요.
사도바울은 로마서 9절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롬 9:1-2)
주목하고 싶은 것은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한다”는 부분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성령의 음성은 그 내면의 양심을 통해 들린다고 할 수 있는데요. 우리의 마음 안에 교회를 위해서 혹은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실낱같이라도 들립니다. 그렇다면 그 음성에 순종해 보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그 헌신에 대한 상급을 잊지 않고 강물같이 부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바울은 또한 성도에게 헌금에 대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6-7)
이처럼 성경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과 하나님의 질서를 오늘도 저와 여러분의 양심의 소리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자원하여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우리의 양심을 감동하십니다.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매우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때로 우리도 사도들처럼 4절부터 10절 사이에 기록된 것과 같은 환난과 어려움을 겪게 될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고난을 겪게 되면 낙심하게 됩니다. 열심히 은혜를 지키기 위해서 나름 애를 쓰는데 오히려 장애를 만나면 소위 시험에 들게 됩니다. 아마 고린도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도 그러했나 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렇게 글로 기록하여 성도들을 격려했습니다.
말로 하는 위로도 마음에 심겨져서 큰 위로와 격려를 줍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혹은 ‘고맙다’는 고백을 스스로에게 할 수 있도록 매주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으면 우리 대에서 끝나지 않고 후대에까지 그 힘이 전달됩니다. 사도들의 글이 성경이 되어서 오늘날 우리에게 능력이 되는 이유입니다. 100년도 제대로 못사는 인생의 말이 미덥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00년 이상을 존재하며 수많은 영혼들을 회복시킨 말씀의 능력은 의지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살아있는 것을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스스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정신병원에 한 교회에서 봉사하러 왔는데요, 한 소녀에게 한 여성도님이 성경을 읽어줘도 되겠느냐고 물었데요. 담당 의사는 자신도 크리스천이면서도 그녀의 부탁을 몇 번을 거절하다가 마침내 “대화하거나 기도해 주거나 복음을 전하면 안 됩니다! 성경만 읽어주도록 하세요!”라고 허락했데요. 그 여성도님은 매일 하루도 빠짐 없이 6개월 동안 소녀의 1인실에서 성경구절을 1시간동안 읽어주었습니다.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 하심이라...’ 는 식의 성구를 읽어주고 나서, 생각할 시간을 잠시 주고 다시 다른 성구를 읽어주곤 하다보니... 처음엔 무반응이던 소녀가 조금씩 질문도 하고 대답도 들으면서 마침내 6개월 뒤에는 정신질환으로부터 완벽히 놓여서 퇴원하게 되었고, 소녀는 이제는 자기를 살려낸 영혼의 양식 성경의 힘과 능력을 전파하며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되었다고 해요.”
오늘 사도들의 고백(성경)은 우리의 신앙을 재단하거나 진단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이 어떤 능력으로 사는지, 어떤 장애와 고난과 근심을 이기게 하는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교회 주보에 실어 드리는 매일성경읽기표의 일정을 따라 하루만큼의 분량의 성경말씀을 소리내어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우리의 목소리는 각자의 살과 뼈에 울림으로 새겨집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의 살과 뼈에 멸망의 소리를 새기겠습니까? 아니면 영생의 소리를 새기시겠습니까? 선택은 우리 각자의 자유이지만, 목사인 저는 부디 성도의 양심을 통해 증언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저와 여러분이 자원하여 순종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인 민수기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 14:28)
또한 계시록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계 2:26)
저는 순종으로 구원의 은혜를 끝까지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는 이 약속의 말씀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11절부터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마음을 넓히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억지로 순교하라, 고난을 당하라, 사람들에게 버림받으라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놀라운 일보다 먼저 우리가 회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로 받아주신 하나님을 본받아 마음을 넓히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야기를 하자면 생각의 지평을 넓히는 것도 포함됩니다.
비행기를 타 보면 우리가 사는 곳이 매우 작게 보입니다. 어떤 때는 내가 저렇게 좁은 곳에서 복닥거리며 살고 있었는가… 하며 센치한 마음이 들 때도 있지요. 생각의 지평이 넓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적 시야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시야가 넓어져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헤아려지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큰 사랑으로 사랑하시는지, 어떤 은혜로 우리에게 복음을 선물해 주셨는지를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마음이 넓어집니다. 마음을 넓히기 위해서는 먼저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은혜가 회복되려면 내 안에 복음이 분명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동행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억지로 믿는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누구나 압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한계를 더욱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먼저 마음의 문을 엽시다. 그럼 우리의 주인이 되신 성령님께서 하루에 하루만큼 우리를 성장하게 하십니다.
하루에 하루만큼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 됩니다. 나를 구원하신 그 은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찾아오신 그 은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시며 동행하시는 은혜. 어떤 환란과 풍파와 고난과 염려와 걱정이 밀려와도 은혜의 방파제가 나를 지켜 주신다고 성령님께서 우리의 양심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잊혀지기 전에 기록해 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기를 쓰고 나누는 것은 바로 그 은혜를 기억하고, 잊지 않고 늘 채우며 살기 위한 최소한의 현실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루만큼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록하며 마음의 지평이 한층 넓어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과 동행하는 이에게는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은혜가 충만한 것을 믿습니다. 은혜를 은혜답게 받고, 그 은혜에 자원하여 응답함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복음으로 나를 죄의 심판에서 구원하신 은혜를 기억합시다.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면 우리 삶의 어떤 시험과 두려움과 염려와 괴로운 환경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음을 믿습니다. 성경이 오늘 우리 귀에 들려주시는 이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고 순종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세기를 걸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오늘 말씀의 권면처럼 마음을 열고, 생각의 지평을 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매일 주님의 시선을 느끼며, 주님과 동행함으로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다운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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