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갈 군대도 없다 / 정희연
나는 87학번이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로 민주화 바람은 계속되었고, 1987년 절정에 다다랐다. 그해 1월 서울대학교 박종철 학생이 경찰에게 고문을 받다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4월은 전두환 정권이 호헌조치(헌법을 보호하여 지킨다)를 선언하고 직선제 개헌을 거부하자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발족, 연세대학교 이한열 학생 시위 중 사망하는 등 여러 사건들이 겹쳐 노동자, 종교계, 학생들까지 총집결한 6월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 그해 우리나라는 언제 끝날지 모를 투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 학점을 이수하지 못해 졸업을 미루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찾은 피난처가 군대였다. 비겁한 행동이긴 했으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었다. 합격 통지서를 받은 날 어디다 알리지도 못하고 친한 친구를 불러 소주를 마셨다.
낯선 땅을 밟았다. 진해 해군훈련소, 6주간 군사훈련, 과거 내가 살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고 저녁 열 시에 잠을 잤다.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규율, 군인의 자세, 가치관, 애국심 높이는 교양 교육을 받을 때만 해도 할 만해 보였다. 민간인이 군복만 입었다고 해서 군인이 되는 게 아니었다. 계급도 없는 훈련병이었다. 번호표와 이름표를 옷에 붙인 이후부터 세상이 바뀌었다. 군인의 길이 시작되었다. 옷도 행동도 모두 내 몸에 맞지 않았지만 그건 내 사정이었다. 교양 교육과 함께 간간이 맛배기로 보였던 행군, 구보, 포복 그리고 얼차려는 늘 우리와 함께했다. 일부러 기율을 잡으려고 틀리고 다른 것을 찾아내고 유도했다. 날이 갈수록 단계를 높여 나갔다. 언제부터 였는지 몸도 정신도 내 것이 아니었다. 사격훈련, 체력단련, 유격 및 각개전투, 화생방 훈련, 기본 전술과 전투 기술을 배웠다. 그 사이 사이를 팔 굽혀 펴기, 앉았다 일어서기, 엎드려뻗쳐, 오리걸음, 연병장 달리기, 좌로 굴러, 우로 굴러, 개구리 뛰기, 목봉 체조로 매꾸며 하루를 채웠다. 남북 분단의 아픔을 처음으로 느꼈다.
진해 해군훈련소는 바다를 접하고 있다. 그 면적이 어찌나 넓은지, 각 내무반과 훈련소를 빙 둘러 보초를 섰다. 2인 1조로 2, 3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야간 보초는 극한의 상태로 내 몰았다. 그것도 모자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 키운다는 명목으로 야간 훈련은 시도 때도 없이 이어졌다. 신체적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가 높을 때 효과를 크게 할 수 있다고 한다. 군인의 길은 이처럼 강인한 정신력이 더해졌을 때 진정한 대한민국 군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낮에 몸을 혹사 시켜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놓고 잠자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한데 야간 훈련과 야간 당직은 한계를 극에 달할게 했다. 앉아 있기만 하면 눈이 감겨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무렵, 훈련도 끝이 났다.
하루 세끼 식판 가득한 음식은 삽시간에 사라졌고, 훈련소에 입대한 날 이후로 내 엉덩이에서 똥을 보지 못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6년 같은 6주의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2차 교육을 받으러 이송되던 날 가족에게 전화할 시간을 주었다. 주머니가 무거울 정도로 100원짜리 동전을 준비했다. 340명 해군 훈련병은 전국 각지로 흩어졌고, 의무해양경찰에 지원한 80명은 인천 해양경찰학교로 이송되었다. 마산역 공중 전화 박스가 멀리 눈에 들어왔다. 여덟 개의 전화기, 인솔자는 박스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 4열 횡대로 우리를 앉혔다. 열차 시간은 충분했는지 서두르지 않았다. 길게 줄을 늘어설 줄 알았는데 첫 번째 이후로 한두 개 비어 있다. 손으로 주머니 속 동전만 만질뿐 몸이 굳어 꼼짝하지 않았다. 고민이다. “잘 있어요 걱정 마세요.” 이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눈에는 눈물이 한가득 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가 버렸다. 전화도 못하는 바보가 되었다.
누구나 웃으면서 세상을 살면서도 / 말 못할 사연 숨기고 살아도 / 나 역시 그런저런 슬픔을 간직하고 / 당신 앞에 멍하니 서 있네 / 언제 한 번 가슴을 열고 소리 내어 / 소리 내어 울어 볼 날이 /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남자라는 이유로’ 조항조 노래다. 감정과 사연을 숨기며 사는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감정을 묻은 시간이 길어져 버린 것을 후회하는 마음이다. 남자는 모두 그런가? 어려서부터 그랬다. "남자는 울어선 안 돼"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넘어져 피가 나도 침으로 한 번 ‘쓱’하는 것으로 응급처치는 끝났다. 감정과 내면을 감추고 고통을 참으라 배웠다. “야! 그냥 살아 너만 힘들어, 다 그렇게 사는거야.” 가정과 사회에서 묵묵히 견뎌 내는 것을 교양으로 받아들였다. 왜 남자들은 텔레비전 리모컨만 들면 아내와 딸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는 자연인이다」에 빠져 산다. 대화도 서툴고 감정표현도 서툴러 그런 곳이 필요 없는 산을 찾은 걸까?
인생은 타이밍이라 했는데, 염병할 그놈의 남자라는 이유로 다 놓치고 만다. 죽음을 맞닥뜨리면 “하고 싶은 것을 해보지 못하고 살아온 것을 후회한다.”고 한다.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내와 딸이 텔레비전을 본다. ‘나는 솔로’다. 울고 웃으며 그 속에 흠뻑 빠져있다. 하나 하나 공감하면서 감정을 잘도 가지고 논다. 함께하고 싶은데 그 틈을 찾을 수가 없다. 옳고 그른 곳만 보인다.
어제도 배고프다 말 했다가 딸에게 한소리 들었다. 또 배가 고프다. 정말 고픈데 그냥 참는다. 더 이상 갈 군대도 없는데······.
첫댓글 아이고, 입이 무지하게 무거운 남자시군요. 그래도 아내와 딸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야겠는데요. 못 갈 군대로 피할 생각 마시고요. 하하. 하다 보면 늘지 않을까요?
일은 배웠어도 마음을 들여다보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는 걸. 놓친 게 많았다는 걸 말하고 싶었고 그것을 되돌리고 싶다고 이야기 하려 했는데 삼천포로 빠져 버렸습니다. 고치려 했는데 이미 날은 밝아버렸구요.
남자라는 이유로 감정 억제하고 살고 있군요. 아직 젊다는 증거겠죠? 좀더 살다보면 여자들처럼 드라마 보고 눈물 흘리고 있을겁니다. 히하하.
그러게요, 눈물을 흘렸어도 됐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저도
자연인이 재밌어요.
자연인과 멀어지고 싶은데 자연스럽게 그곳에 있었어요.
라면이 먹고 싶으면 누구 시키지 말고 끓여 먹으세요. 나 쯤의 세월을 살면
더 눈치밥 먹고 지낼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의 세월에 있으면....... 어떤 모습이 새로워 질지 절로 웃음이 납니다. 아직 젊다는 이유겠지요? 고맙습니다.
남자로서의 짐이 무거우셨던 것 같습니다. 딸이 퉁명스럽게 말해도 가족과 함께 지내는 이 시간들이 아주 소중하게 느껴지실 것 같은데요?
위 세대를 보면 더 하겠지요 그것이 좋은 면으로 다가오면 좋은데 그렇지 못한 모습을 봅니다.
다시 가고 싶은 건 아니죠? 남자들은 나이 들면 자꾸 배가 고파지나 봐요. 저희 남편도 그러거든요. 하하.
대 선배님들 앞에서 아양 떤 기분입니다. 말을 섞고 싶어 한 말이었습니다. 딸도 그걸 알구요. 표현이 서투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