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권이 이처럼 바닥에 떨어진 근본 원인은 한국의 교사들이 정치적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직업군 중에서 정치적 권리를 제한받는 수준을 넘어서 완전히 박탈당하고 있는 직업은 교사(와 공무원)밖에 없다."
위 김누리 교수의 의견은 한국의 교육 또는 정치 개혁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지금까지 '교육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일종의 진리처럼 여겨져 왔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의 실제적 의미는 초중등학교를 뜻한다. 요즘은 유치원까지 공교육 또는 국가교육의 대상에 포함되어 유치원까지 포함된다.
현행 공무원법상 유초중고 교원과 공무원들의 정치적 발언과 정당 가입 등 정치적 행위를 일체 금지하고 있다. 이른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는데 필요하다는 유용성이나 당위성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원의 정치권 또는 시민권에 대한 제한이 교권의 약화를 초래했다고 김누리 교수의 의견이다. 교원의 정치권 제한에 대해 논의의 필요성이 있다 하더라도, 교원의 정치권 역시 교원의 권리 즉 교권 중에 하나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아래 김누리 교수의 글에 의하면 OECD 국가 중 교원의 정치권을 제한하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고 한다. 한국의 교원(교사+ 교감, 교장)들이 피선거권자가 되려면 교원 신분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과 대학교수들은 교육에 있어서나 정치활동에 있어서 유초중고 교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정치권을 갖고 있다. 대학교육 또는 대학교수들은 되고 유초중고 교육에서 또는 유초중고 교원들은 안되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일까? 나름 이유와 근거가 있지만 그 이유와 근거는 요즘 같은 시대에서도 여전히 타당하고 유효한 것인가?
유초중고 교육의 교육목적 또는 교육목표는 현재가 아닌 또는 현재 보다 최소 10년, 20년 후이다. 즉, 학생들이 적어도 20살 이상 성인이 된 뒤, 수십년간 살아야 할 개인적, 사회적, 국가적 삶에 대한 준비라고 할 수 있다.
이런면에서 국민공통기본교육을 추구하는 유초중고 교육(과정)에서 현실 정치에 초점을 맞추는 정치적 교육을 지양할 필요는 확실히 있다. 그러나 교원들의 정치권을 제한하고 있는 현행법에 대해서는 김누리 교수 글과 같이 재고가 필요하다 할 수 있다.
이유는 김누리 교수 의견과 같이 초중고 교원만 40만명이 넘는 전문인 전문가 그룹의 정치권(피선거권, 정치적 행동권 등)을 제한하는 것은 교권 약화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치 발전에도 저해된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유초중고생들은 대학생들과 연령이나 사회적 경험 등에 있어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교육에 있어서 정치적 발언의 내용과 수위가 대학교육과 분명 달라야 한다.
글을 마무리 지으면, 유초중고 교육에서 교원의 정치적 발언은 유초중고 교육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어느 정도 제한될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교원들의 정치권 제한에 대해서는 숙고와 논의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문제들에게 대한 보다 면밀하고 종합적이며 체계적인 연구와 숙의가 필요하다 하겠다.
이병호 남북교육연구소장·교육학 박사
원문보기 : [김누리 칼럼] 교권을 넘어 정치적 시민권으로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모바일 (hani.co.kr)
교사의 자살과 불안은 한국 교육의 총체적 난맥상을 보여준다. 교권이 이처럼 바닥에 떨어진 근본 원인은 한국의 교사들이 정치적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직업군 중에서 정치적 권리를 제한받는 수준을 넘어서 완전히 박탈당하고 있는 직업은 교사(와 공무원)밖에 없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마스크를 착용한 교사들이 지난 7월29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열린 ‘7·29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집회’에서 안전한 교육환경 조성 등을 요구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교육 지옥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참혹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살인적인 불볕더위 속에 모인 수만명 교사들의 절박한 심정을 알겠다. 23살, 젊은 교사의 죽음 앞에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어떻게 학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 사건을 계기로 교육이 전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교권 붕괴다. 최근의 여론조사를 보면 붕괴의 실상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교사의 99%가 교권 침해를 경험했다고 하고, 93%가 학생 지도 중에 학대 신고를 두려워한다고 한다. 교사의 87%가 최근 1년간 사직이나 이직을 고민했다고 하고, 27%가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지금 교사들은 학부모 갑질과 악성 민원, 아동학대법 신고를 두려워하며 ‘전시 간호사 수준의 스트레스’ 속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교사의 자살이 보여주는 것은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고, 교권의 붕괴만도 아니다. 그것은 곧 교육의 죽음이다. 한국 교육이 사망했음을 알리는 부고다.
교사의 자살이 드러낸 것은 교권의 붕괴를 넘어 교육의 총체적 난맥상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는 교사에 대한 보호 강화라는 소극적 정책이나, 학생인권조례 폐지 따위의 퇴행적 조치로 해결될 수 없다. 이제 사태의 본질을 보아야 한다. 교권 붕괴의 뿌리를 더듬어야 한다.
교권이 바닥에 떨어진 근본 원인은 무엇보다도 한국의 교사들이 정치적 시민권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없고, 정치 활동을 할 수 없으며, 피선거권도 없는 정치적 금치산자라는 사실―이것이 핵심 문제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민주주의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등불’이자, ‘세계 민주주의의 모범’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한국의 교사만은 민주주의의 변방에서 여전히 ‘정치적 천민’ 상태에 놓여 있다. 시민의 가장 중요한 기본권인 정치적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무권리 상태는 사회적 무기력으로 이어지고, 교육적 무력감으로 전이된다. 사실 교권의 붕괴는 지난 수십년간 교육계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무력감이 불러온 필연적 결과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대다수 국가에서 교사들은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서 막강한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국회 내 영향력이 상당하다. 국회의원 중 교사 비중이 핀란드의 경우 20%나 된다. 독일도 15%이며 오이시디 평균은 10% 정도이다. 대체로 국가의 선진성과 교사의 대표성은 비례한다. 선진국일수록 의회에 많은 교사가 앉아 있는 것이다. 한국의 의회에 교사가 한 명도 없다는 ―과거의 교사가 2명 있을 뿐이다― 사실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왜 선진국에서는 교사가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교사는 어느 나라에서나 가장 대규모의 지식인 집단이고, 그들에게는 높은 수준의 윤리성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가치와 의미, 윤리와 도덕이 실종된 시대에 교사 집단의 지성과 윤리성은 더욱 크게 요구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교사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이 초라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박정희 군사정권 때문이다. 1963년 박정희가 박탈해버린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것이다. 이승만 독재의 정치적 동원으로부터 교사(와 공무원)를 보호하기 위해 1960년 민주당 정부가 만든 ‘정치적 중립 의무’ 조항을 박정희는 교사의 ‘정치적 시민권 박탈’의 빌미로 악용한 것이다. ‘중립 의무’를 내세워 ‘참여 권리’를 빼앗았다. 이후 한국의 교사들은 무려 60년 동안 ‘정치적 중립 의무’의 덫에 걸려 있다. 그 결과 그들은 세계가 경탄하는 ‘케이(K)민주주의’의 화려한 무대 뒤편에서 서성대는 마지막 정치 천민이 되었다.
교사는 국가의 보호 대상이 아니고, 정치적 금치산자도 아니다. 교사는 교육의 주체로서 국가 발전을 견인하고 사회 진보를 주도하는 지식인이다. 교사는 또한 교육개혁의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제 정치적 중립 의무라는 낡은 굴레를 떨치고 나와, 성숙한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적 의무를 자각해야 한다. 요컨대, 교권 회복을 넘어 정치적 시민권을 복원해야 한다.교사의 교권 회복이 교육의 무너진 육신을 추스르는 것이라면, 교사의 시민권 복원은 교육의 빼앗긴 영혼을 되찾는 것이다. 교권 회복을 넘어 시민권 회복을 이룸으로써 죽은 교육을 다시 살려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