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1914년에 발발한 1차대전을 백주년을 기려 만들어진 BBC News WW1 웹페이지의 글을 번/의역 한겁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고 재미있게 보일 수 있도록 나름 수정을 가한 것이니 즐겁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ㅋ
저작권 관련해서 좀 불안불안하긴한데
그런게 없다면 가능하면 다른 흥미로운 글들도 하루 한편씩 번역해서 이곳에 올려보려 합니다.
아무튼 즐감하시라요.
역사학자 댄 스노우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1차세계대전에 관해 생각하는 것들 중 많은 것들이 잘못된 사실이라고 주장합니다.
1차세계대전만큼 많은 논란과 근거없는 믿음들을 만들어내는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전쟁 내내 싸운 병사들에게 이 '대전쟁'이 옛 전쟁들에 비해 더 나쁜 점들도 있었지만
나은 점도 분명 존재하였습니다.
1차세계대전만을 유일하게 끔찍한 전쟁이었던것처럼 다루는 것은
세계대전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전쟁에 관해서 우리 스스로를 장님으로 만드는 꼴입니다.
그럼으로 인해 역사속이나 현재 일어나고있는 다른 끔찍한 유혈사태들을
과소평과하게 될수도 있기 때문이죠.
세계대전은 그 이후전까진 가장 피비린내나는 전쟁이였다.
1차대전에 발잘하기 반세기전에 중국 남부에는 태평천국의 난이라는 더 끔찍한 유혈사태가 터졌었습니다.
세계대전 동안 1천 7백만명의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던 반면에
14년이라는 기간동안 벌어졌던 태평천국의 난은 2천만에서 3천만의 사망자를 냈다고 추산됩니다.
세계대전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영국인의 숫자가 그 어느 다른 전쟁보다 월등히 많기는 합니다만,
전체 인구를 비례로 했을 때 영국 내전만큼 피비린내는 전쟁은 없었습니다.
대전쟁 동안 영국제도 전체 인구의 2%보다 못한 숫자가 사망하였지만
영국 내전 당시 잉글랜드와 웨일즈에서는 약 4%에 달하는 인구가 사망하였고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인구비율을 상실했다고 추산됩니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전사하였다.
영국의 경우 총 6백만명이 동원되었으며 그 중 사망한 숫자는 전체 비율의 11.5%인 칠십만명에 불과합니다.
비율로 봤을 때, 사실 크림전쟁만큼 영국군이 많은 사망자를 낸 전쟁은 또 없었죠.
병사들은 참호에 수년가량이나 처박혀 있었다.
모두다 알다시피 제일선에 구축된 참호는 정말 잠시 머물기에도 너무나 끔찍한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축축히 젖어있는데다 춥기까지하고,
거기에다 적의 무지막지한 화력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기에
그곳에 오랫동안 부대가 주둔한다면 분명 그 부대는 금방 사기를 잃고 와해가 됬을것 입니다.
그래서 영국군은 계속해서 병사들을 교대하였지요.
통상적으로 부대는 한달마다 열흘씩 참호 시스템에 머물렀으며
그 중 최전선에 배치된 기간은 보통 3일을 넘지 않았습니다.
참호에서 한달이상 벗어난 일은 그리 생소한일이 아니었지요.
주요 공세들 같은 긴급상황엔 병사들이 최전선에 최대 일주일까지 머무르기도 하였습니다만
하루나 이틀만에 교체되는 일이 훨씬 더 잦았죠.
상류층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조지5세와 그의 장군들
세계대전동안의 사상자들 중 다수가 일반적인 노동계층에서 나왔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만
정치-사회적 엘리트들 또한 비정상적인 비율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들의 아들들은 하급사관으로써 병사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위험천만하기 짝이없는 최선두에서 병사들을 이끌었기에 더 큰 위험에 자주 노출되기도 했습니다.
영국군의 경우 12%의 사병들이 사망하였는데비해 장교단은 17%라는 더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튼 대학의 경우 (19명의 수상을 배출한 명문중 최고 명문학교) 약 천명에 달하는 학생들을 잃었고 (군에 입대한 학생들 중 20%에 달하는 비율)
전쟁기간동안 수상이였던 허버트 애스키스는 아들을 하나 잃었으며
후에 수상이 될 앤드류 보날 로 역시 두명의 아들들을 잃었습니다.
앤소니 이든은 두명의 형제를 잃었으며,
그의 다른 형제는 끔찍한 부상을 입었고 삼촌은 포로로 붙잡히기까지 했습니다.
'사자때를 이끄는 당나귀들'
아마 이 말은 용감하고 거침없는 영국병사들을 후방의 대저택에서 편히 지휘하는
무능한 상류층 출신의 영국 장교단을 비꼰 독일군 지휘관들의 입에서 나온것 일겁니다.
하지만 전쟁 기간동안 이백여명의 장군들이 목숨을 잃고, 부상을 당하거나 포로로 붙잡히기도 하였습니다.
대부분은 최전선을 매일 시찰하였고 전투 기간엔 오늘날의 장군들보다 전선에 훨씬 더 가까이서 지휘하였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장군들은 무능하기에 짝이 없었고 또 어떤 장군들은 입대전 삶이 실패로 얼룩졌다할지라도 전장에서는 큰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지요.
세계대전만큼 급작스러운 전장의 변화를 받아들여야했던 사례는 전사상 거의 전무할 것입니다.
영국군 지휘관들은 소규모 식민 전쟁들을 상정한 훈련을 받았지만
막상 그들이 전선에 투입됬을때엔 전혀 겪어보지 못했던 총력전을 기반한 대량 생산 및 살상과 파괴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영국인들은 새로운 전쟁 기술들을 도입하는데 성공하였지요.
1918년의 영국군은 가장 완벽한 상태에 이르렀으며 독일군에게 큰 패배를 안겨주기에 이릅니다.
갈리폴리는 호주인들과 뉴질랜드인들만이 싸운 곳이다.
호주인들과 뉴질랜드인들에게 있어서 갈리폴리만큼 그들에게 의미심장한 사건은 없었습니다.
갈리폴리 전역에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온 병력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영국군이 투입 됬었습니다.
그 전역에서 영국군은 ANZAC (Austrai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군보다
네배에서 다섯배에 이르는 더 많은 사상자를 냈지요.
프랑스군 또한 호주군보다 더 큰 전사자를 내었습니다.
하지만 비율로 봤을때,
호주와 뉴질랜드가 가진 조그만 군대나 총 인구에 비해
입은 손실은 어마어마하였기에 그들이 오늘날까지 갈리폴리 전역을 열심히 추앙하는 것은 이해할만도 합니다.
서부전선에서의 전술은 반복되는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전혀 바뀌지 않았다.
대전쟁 기간동안 기술이나 전술이 그토록 급격히 발전했던 사례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시대는 보기드문 혁신의 시대였죠.
1914년엔 장군들은 전장 위에서 말을타고 다녔으며
병사들은 천으로 된 모자를 쓰고 엄호사격없이 무모한 돌격을 하였죠.
하지만 4년 뒤에는 방탄헬멧으로 무장한 전투부대들이
야포사격의 탄막의 보호를 받으며 앞으로 전진하게 됩니다.
거기에다가 그들은 화염 방사기와 휴대가능한 기관총에,
소총에서 발사가 가능한 총류탄까지 무장하고 다녔습니다.
동시에 상공에선 과거에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웠을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죠.
실험적인 라디오 세트와 기관총들을 정비한 전투기들이
서로 치열한 공중전을 벌이며 실시간으로 정찰보고를 후방에 전달하였습니다.
상공에서 보낸 항공사진들과 수학을 이용한 거대한 포대들은 정확하게 원하는 지점을 타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탱크라는 새로운 전쟁무기는 도안에서 그려진지 불과 2년만에 전장에서 그 모습을 출현하였고,
이는 이후 전쟁에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냅니다.
승자도, 패자도 없다.
유럽 땅 대부분이 초토화 되었고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생존자들은 정신적 트라우마를 이겨내며 힘겹게 살아나갔죠.
영국은 파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이겼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죠.
하지만 적어도 군사적인 측면에 있어서 연합군은 확실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독일의 대양해군은 왕립해군에게 전쟁기간 내내 봉쇄를 당하였고
마침내 종국엔 자살 돌격을 실행하는 대신 총구를 돌려 독일정부를 상대로 폭동을 일으키게 되었죠.
지상에서는, 연합군의 강력하고 줄기찬 공세 끝에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방어선이 결국 무너지면서
독일육군 또한 붕괴되었습니다.
1918년 9월말에 이르면 독일황제와 군지도자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시인하고 평화를 구걸해야할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11월 11일의 휴전은 독일의 항복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1945년의 히틀러와 다르게
독일정부는 연합군이 베를린에 들이 닥칠 때까지 무의미한 싸움을 지속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 결정은 셀 수 없이 많은 인명들을 살렸으나
훗날 독일은 절대 전쟁에서 진적이 없다는 주장에 악용당해버리고 맙니다.
베르사유 조약은 매우 가혹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10%에 해당하는 영토들을 몰수하였으나
여전히 가장 부유하고 커다란 나라로 남게 해두었습니다.
점령된 지역은 일부에 불과하였고 전쟁 보상금의 액수는 독일의 경제를 고려하여 책정되었으며
나중엔 다 돌려받지도 못하였죠.
사실 베르사유 조약은 보불전쟁과 2차세계대전의 조약에 비하면은 훨씬 자비로운 편에 속하였습니다.
보불전쟁의 경우 독일은 광물이 풍부한 알자스 지역을 비롯한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들을 할양받았고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평화 조건에 내걸었습니다.
2차대전 후 독일은 점령되었고 동과 서로 분할 되었으며,
나라에 있던 각종 공장 기기들은 파괴되거나 몰수당했으며
수백만명의 포로들은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으며 일을 해냈어야 했습니다.
독일은 전간기동안 얻었던 땅들을 다시 내뱉어야 했으며
본토의 큰 부분인 프로이센 지방 또한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은 끔찍한 고통만을 안겨주었다.
"어이 아가씨들.. 우리랑 놀아볼레?"
여느 전쟁에서 그러했듯이 운만큼 중요한 것도 없지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심리-육체적 고통을 평생동안 겪게 될 수 도 있고,
생채기 하나 입지 않은 체 멀쩡히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시간을 보낼 수도, 나쁜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던 것이죠.
사실 많은 군인들은 전쟁기간내내 즐길거 다 즐겼습니다.
운이 좋은 경우엔 주요 공세들을 피할 수 있었고,
집에 있던 것 보다 더 건강하게 지낼 수도 있었지요.
영국군의 경우 집에서는 귀한 고깃덩어리 외에도 담배와 홍차, 럼주 등
하루 총 4,000칼로리에 육박하는 식단이 항상 배식되었답니다.
부대의 사기를 가늠케하는 중요한 지표인 질병으로 인한 결원율은
놀랍게도 평시의 그것과 별반 차이를 보이지 못하였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안정적으로 급료를 지급받았으며
평시의 영국에서보다 더 많은 *성적인*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죠.
[원문보기]
첫댓글 독일인이나 프랑스인 생각은 좀 다를지도..
번역해주신 글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아무리 봐도 베르사유 조약이나 마지막 부분은 좀 그렇군요. BBC도 참 훌륭한 개소리를 쓰는 거 같네요.
영국인의 생각은 이러하군요.
영국의 정신승리인가요사실이기기도했지만 ㄷㄷㄷ
시대가 갈 수록 전시 사상자의 총비율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던 거로 기억... 오히려 총력전 양상에서 민간인 피해가 늘어나죠.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핵전쟁의 가능성과 다양한 비대칭전력으로 지금은 또 달라지겠지만(...)
영국은 항상 이런식 아닌가요?
방송에서 흥미위주의 교양차원 방송인거 같긴하지만 재밌긴 재밌네요. 의심을 갖고 받아들이면 재밌는 글 잘 읽었어요.
어느정도는 영국인의 사심이 들어간 글인듯
전에 영국총 TV에 나왔던게 생각난다.....
"영국의 맛" 이후로 영국을 보는 눈이 달라졌나? ㅋ
지극히 영국스러운 글이군요 잘봤습니다.. 헌데 이건 영국이지 독일과 프랑스 입장 들어보면 또 다릅니다.... 아니 오히려 영국이라 저정도... 허허허 역시 기행의 나라답네요
전투손실 부분과 보불전쟁-1차대전 평화조약 비교 부분만 제외하면 대체로 맞는 글 아닌가요? 글 전체를 그냥 객관적이지 않은 '영국인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치부하기는 좀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전투손실 부분은 애기아빠님께서 잘 설명해주셨고, 개인적으로는 보불전쟁의 평화조약이 1차대전의 평화조약보다 특별히 더 가혹했다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영토손실로 보자면 프랑스는 알자스-로렌 한 지방을 넘겨줬을 뿐인데, 사실 독일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 지방을 할양받은 건 아니죠. 이 지방은 종족적으로는 게르만계가 다수였으니까요.
1차대전 패전 후에는 독일이 반대로 영토손실을 겪게 되는데, 프랑스로의 알자스-로렌 반환 뿐만 아니라 구 독일령의 폴란드계 거주지역까지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할양됐죠. 이렇게 놓고 보면 최소한 영토 면에서는 독일의 1차대전 패배로 인한 손실보다 프랑스의 보불전쟁 패배로 인한 손실이 더 적었죠. 알자스가 광물이 풍부했다고 하나 독일은 단치히 일대를 신생 폴란드에 할양하면서 국가핵심지역 중 하나인 프로이센이 본토와 육로로는 단절되게 되죠. 그리고 당연히 그 "광물이 풍부"한 알자스까지 프랑스에 반환했고요.
배상금 문제를 봐도 절대적인 배상금의 액수는 보불전쟁이 더 컸지만 '패전국이 해당 액수를 지불할 수 있는 난이도'로 비교하자면 보불전쟁의 배상금을 프랑스가 지불하는 게 1차대전의 배상금을 독일이 지불하는 것보다 쉽지 않았나 싶네요.
본문에는 베르사유 조약이 보불전쟁보다 관대하다고 나와있네요. 어처구니 님 의견하고 정반대의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deathscythe 예 그래서 "전투손실 부분과 보불전쟁-1차대전 평화조약 비교 부분만 제외하면 대체로 맞는 글" 같다고 했습니다.
종속적으로 게르만계가 다수라도 프랑스의 지배를 벗어나 독일지배를 환영했는지가 여부죠. 독일지배체제에서 알자스-로렌지역민이 당한 차별과. 그로인한 민중시위는 헛것인가요. 더욱이 점령초 프랑스로 이주한 인구가 25만명에 달하는데도. 알자스-로렌지역사람들이. 공화정프랑스보다도. 군국주의국가 독일을 더좋아했다는것은 궤변일뿐입니다. 그리고 보불전쟁배상금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단순히 프랑스는 돈을 낼만한데. 독일은 돈을낼만하지 않았다는것은. 말이안되는논리죠. 프랑스는 돈내도 되고. 독일은 돈안내도 되나요? 또한 프랑스 배상금은 독일이 빠지지 않고 챙겼지만. 독일배상금은. 영안과 도스안으로 흐지부지
@곰텡 전쟁으로 피해입은 게 엄청 차이나죠. 프랑스는 결국 주력군대가 박살나고 파리 포위당한 거 빼고는 딱히 경제적으로 피해본 게 없으니 보불전쟁 배상금을 충분히 감당할만 했지만 독일은 이미 1차 대전 치루면서 거지가 된 상황이었는데 거기에 보상금을 내라고 하면 답이 없을 수 밖에요. 같은 돈이라고 해도 부자하고 거지하고는 당연히 그 가치가 다를 수 밖에 없는게 아닌가 싶군요.
@곰텡 그리고 보불 전쟁 종결시 프랑스는 공화정도 아니었다는.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는 제정 국가였죠.
@곰텡 저는 곰텡님이 "궤변"이라고 지칭하는 해당 의견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독일의 알자스-로렌 지방 통치가 '아무런 근거가 없지는 않다'고 했을 뿐.
@deathscythe 보불전쟁종결후 프랑스로 이주한 이주민들이 숫자만 25만명이고 남아있던사람들도 걸핏하면 시위하고 거부반응보이던게 알자스-로렌지역민들입니다. 더군다나 독일제국내에서도 심각한 차별대우를 받았죠. 보불전쟁종결부를 찍은것은 프랑스 제3공화국입니다. 누가 평화협정을 이뤘는지요? 프랑스제3공화국이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떼어준겁니다. -_- ; 전쟁중에 포로로 나폴레옹3세가 붙잡히면서 제정이 붕괴되었죠. 선후관계를 파악하셔야죠. 님은 보불전쟁 종결시 당시 프랑스가 제정이라는 말을하셨는데. 불행히도 종결시에는 제3공화국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비스마르크가 불러주는대로 도장찍었습니다.
@곰텡 그렇군요. 그런데 어쨌든 전쟁 전에도 알자스-로렌은 나라는 달랐지만 제정 통치 하에 있었군요.
@deathscythe 경제적으로 피해본게없다고 무지막지한 프랑스의 배상금에 대해선 합리화하고. 베르사유조약으로인한 보상금은 불합리? 그래서 베르사유조약에서 요구한 배상금 깎고 깎아서. 날로먹었죠. 영안과 도스안으로 현실화되고. 그마저도 히틀러가 안내고. 2차대전이후에는 축소되서 사실상. 그거 요구한대로만큼도 못받았죠. 결론은 프랑스가 초기요구대로 돈받은것도 없으나. 프랑크푸트르조약으로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은. 모조리 받아냈다는점.
@어처구니 제정이전부터 프랑스왕국령이였죠
@곰텡 그건 곰텡님 주장 중 "공화정 프랑스보다도 군국주의 국가 독일..." 부분을 반박하기 위해 한 말입니다.
@어처구니 보불전쟁중에서 공화정으로 전환되었던게 프랑스입니다. 그런데 나폴3세가 말아먹어서 반격도 제대로 못날렸죠.
@곰텡 "그렇군요. 그런데 어쨌든 전쟁 전에도 알자스-로렌은 나라는 달랐지만 제정 통치 하에 있었군요."
@어처구니 오 같은제정이라도. 프랑스랑 프로이센이랑 동급으로 보시는데서 뭔 할말이있을까요. ^^
@어처구니 나폴레옹 3세 제정하고 독일 제국 제정은 동급이라고 볼 수 없는데요.
맨 꼭대기에 황제만 있으면 모두 같은 겁니까.
@곰텡 꼭 동급으로 본 게 아니라 보불전쟁 전의 알자스 역시 곰텡님이 처음에 언급하신 "공화정"이 아니라 제정 통치 하에 있었다는 걸 지적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왕정이 얼마나 전제적이냐는 면에서 동급이었다는 주장은 한 적이 없습니다.
@bookmark 위에 단 곰텡님 댓글에 대한 답댓글로 답변을 갈음합니다.
@어처구니 뭔가 말을 바꾸시는데. 저는 "보불전쟁전"이라는 말을 한적이없습니다. 그걸 지적하고 싶으셨다고 하시는데. 말하지도 않은것을 주장했다고하면 곤란합니다.
ㅡ> 더욱이 점령초 프랑스로 이주한 인구가 25만명에 달하는데도. 알자스-로렌지역사람들이. 공화정프랑스보다도. 군국주의국가 독일을 더좋아했다는것은 궤변일뿐입니다 <ㅡ 여기서 보고 그런말을 하셨다고 하시는데. "점령초" 즉 전쟁이전 상태의 대해서 왈가왈부한적은 없고. 독일점령후. 알자스 로렌지역에서 적지않은 인구가 프랑스로 잔류를 위해서 고향을 떠나야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님은. 갑자기. 둘다 제정이니. 본인이 한말도 아닌. "보불전쟁전"이라는 시한을 스스로 매
@어처구니 매기시는데. 지적하신것도 잘못된것이며. 오히려 님의 둘다 다같은 제정통치하의 있었다고 주장하는것이야말로. 프랑스와 프로이센을 동급으로 놓는것으로 이해될수밖에없죠. 프랑스랑 프로이센 둘다 제정이다! 이래놓고선. 그걸 비교가 아니라고 하시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어처구니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조약체결당시 프랑스 정체는 엄연히 공화국이였으며. 프랑스 공화국은 1년가까이 프로이센에게 버티다가 굴복했습니다. 당연히 조약체결후 상황을 언급한본인의 댓글은 보불전쟁전이라도 한적도 없고. "점령초"라고하여. 독일이 프랑크푸르트조약으로 땅을 얻어낸시점을 분명히 정하고있습니다. 그시절에 프랑스는 당연히 공화국인데. 갑자기 보불전쟁전에도 제정이였죠 라시면서 하지도않은말을했다고 하시는것은 무리가 아닐런지요
@곰텡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정체를 왕정이란 면에서 "비교"한 것이 두 체제가 완전히 같다고 주장한 건 아닙니다. 이는 정치체제의 기본적인 형식 면에서 두 국가가 비슷했다고 파악한 것이지 그 외의 부분에서 두 국가의 정체를 동급으로 놓은 적은 없습니다.
@어처구니 갈음드립만큼 성의없고 무책임한 짓도 없습니다.
@bookmark 어떤 주장을 하시려면 그 주장에 대한 근거를 대셔야죠. 제가 이전에 "위에 단 곰텡님 댓글에 대한 답댓글로 답변을 갈음합니다."라고 한 건
곰텡 14.01.22. 12:39 어처구니 오 같은제정이라도. 프랑스랑 프로이센이랑 동급으로 보시는데서 뭔 할말이있을까요. ^^
bookmark 14.01.22. 13:37 어처구니 나폴레옹 3세 제정하고 독일 제국 제정은 동급이라고 볼 수 없는데요. 맨 꼭대기에 황제만 있으면 모두 같은 겁니까.
이 두 댓글의 요지가 거의 같았으므로 한 말입니다. 상대방의 댓글을 "드립"으로 치부하면서 아무런 근거 없이 "성의없고 무책임한 짓"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이야말로 "성의없고 무책임"하게 보이네요.
@어처구니 동의합니다
영국은 또 이렇게 볼 수도 있네요... 참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근데 태평천국의 사상자는 놀라움을 넘어 충격적이군요. 역시 대륙의 스케일은 다른건가요.
내전인데 수십만 대군을 운용하는 대륙의 스케일은 그저...
내전의 경우 맞아죽는경우보다 굶어죽는경우가 더 많겠죠..
2제국빠들 참 많네...ㅉㅉ
어떤 주장이 마음에 안 드시면 저, deathscythe님이나 곰텡님처럼 그 주장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을 하시는 게 좋지 이렇게 상대방을 비아냥거리시는 모습은 좋지 않아보입니다.
확실히 이런 댓글은 문제가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