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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서울대공원 개장
1984년 5월 1일 과천에 자리잡은 서울
대공원 개장 첫날 많은 인파가 몰려가족
과 함께 봄을 즐겼다.
서울대공원이 1984년 5월1일 개장했
다. 이날 개원식에는 전두환 대통령 내
외를 비롯, 정부 인사와 서울시 관계자,
각계인사, 시민, 학생 등1천2백여명이
참석했다.
육군군악대의 주악으로 시작된 개원식
에서 전대통령내외는 안상영 서울종합
건설본부장으로부터 공원 현황을 보고
받은 뒤 개원식 에 초청된 서울시내 어
린이 4백여명과 함께 큰물새우리 해양
동물관 맹수사육장 등을 약 40분간 돌
아보았다.
서울시는 이날 오후2시부터 가장행렬,
씨름, 그네뛰기 등 개원 축하행사를 가
졌으며, 남녀 고교생 6백 80명이 참가
한 가운데 지하철2호선 서초역을 출발,
대공원 입구까지 10km구간의 단축마
라톤도 있었다.
오후 6 시부터 2시간 동안 대공원 호수
앞광장 에서는 인기연예인들이 출연한
경축쇼가 있었다.총공사비 9백85억원
을투입, 착공 5년7개월 만에 우선 1단
계로 문을 연 대공원동물원들은 4백31
종 4천61마리의 동물을 수용하고 있으
며, 면적만도 창경원의 16배인 87만평
규모에 달했다.
▶ 2011년 오늘,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인 #오사마_빈라덴 의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다.
▶ 2011년전범 아이히만 사형 선고한 이스라엘 판사 별세
▶2010년 중국, 상하이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세 계 박람회가개막됨.
▶ 2010년장 루이 뒤마 에르메스 전 최고경영자 별세
▶2009년 2007년11월 21일 싱가포르에서 서 명된 "대한민국과 동남아시아국가연합 회원국 정부간의 포팔적 경제협력에 관한 기본협정하의 서비스무역에 관한 협정"이 2008년 8월 26일 제36 회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치고 2008년 확정
▶2007년 터키 헌법재판소가 4월 27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 1 차투표가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2007년 영국 브리 티시 페트롤리
엄사의 CEO존 브라운 사임키로
▶2005년 대한민국의 산악인 박영석
이 북극점에 도달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또는 어드벤쳐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다.
▶ 2004년 '수퍼 EU(European Union)출범. 유럽연합 확장:
유럽연합(EU) 회원국이 25개국으로 확대되고 냉전의 잔재가 유럽 대륙에서 사라진 1일, 유럽 전역에서는 축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EU 가입에 반대하는 시위도 잇따랐다.
이날 유럽 각국 지도자들은 EU 확대라는 역사적 순간을 기념하는 축사를 쏟아냈다. EU 순번제 의장국인 아일랜드의 버티 아헌 총리는 1일 “유럽은 이제 전쟁에서 평화로, 분열에서 통합으로, 독재와 억압에서 민주주의로 옮겨갔다”면서 “오늘은 우리에게 희망과 기회의 날”이라고 말했다. 로마노 프로디 EU 집행위원장은 “마침내 냉전으로 인한 분열이 종식되고, 우리는 완전히 통합된 유럽 속에 살게 됐다”고 축하했다.
유럽 통일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로 꼽히는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는 국경지대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연설했다. 콜 전 총리는 “EU의 확대 통합만이 유럽에서 피의 세기를 마감하는 유일한 길”이라며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전쟁을 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축하했다.
25개국 정상들이 모여 공식 행사를 가진 아일랜드 더블린은 물론, 새로 가입한 10개 회원국에서는 다양한 축제가 벌어졌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는 지난 달 30일 밤 10만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대규모 불꽃놀이를 벌이며 전야제 행사를 펼쳤고, 1일에도 수십만명의 주민들이 다뉴브강가에 모여 축제를 이어갔다.
리투아니아 방송국에서는 2004년 5월 1일 태어난 ‘수퍼 EU 베이비’들을 카메라에 담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반면 일부 국가에서는 반(反)EU 시위도 벌어졌다. 7년간 자유로운 인력 이동을 제한하는 등의 현 EU 정책에 반대하거나, EU 통합으로 인해 개별 국가의 주체성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었다.
공식 행사가 열린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는 2000여명의 시위대가 시위를 벌였다. 이날 밤늦게 시위대 중 수백명이 과격 시위를 벌이자,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시위대를 진압하고 28명을 연행했다.
라트비아에서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수만명의 시민들이 오는 9월부터 시행될 라트비아어 사용령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폴란드에서도 수천명의 바르샤바 시민들이 ‘EU 가입 반대’ ‘자유 폴란드 만세’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한 시위대원은 “EU 가입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줄 듯하지만, 실제 얻는 것은 높은 물가와 세금 뿐”이라고 비판했다.
▶2003년 사스 바이 러스 유전자 구조 캐나다 연 구팀서 최초 발견.
▶2001 년 부시 미국 대통령, 국가 미사일방어체 제 공식천명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1일 이른바 ’불량국가’ 의 미사일 및 핵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다국차원의 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을 공식천명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오후 워싱턴소재 국방대학에서 가진 연설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상이한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사일방어체제를 구축해야 할 새로운 틀을 필요로 하고 있다” 며 “우리는 미국을 포함, 우리의 우방과 동맹국들의 안보를 강화하기 위한 미사일방어망 배치를 추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특히 부시 대통령은 이를 위해 “우리는 30년 묵은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을 넘어서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고 주장, “이 협정은 현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미래의 방향도 제시해 주지 않고 있다” 며 사실상 ABM 협정 무용론을 제시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번 선언에서 ’국가미사일방어’ 용어 중 ’국가(national)’ 라는 단어를 전혀 쓰지 않고 대신 미국의 우방과 동맹국들의 안보와 안전을 지키기 위한 “미사일방어체제” 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사실상 자신의 대선공약을 그대로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 부시 대통령은 핵무기 감축문제에 대해 “핵무기는 여전히 미국의 안보 뿐 아니라 동맹국들의 안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고 전제, 그러나 “앞서 밝힌 새로운 틀은 핵무기의 감축으로 이어져야 할 것” 이라며 “우리는 냉전시대가 종식됐다는 현실에 입각해 이에 따라 핵무기 수와 구성 배치 및 핵 전력 전반을 교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고 핵무기 감축 용의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의 이같은 미사일방어체제 구축과 관련, 민주당 의원 등 미 의회와 여론 일각에서 그 구상의 타당성 및 막대한 소요비용을 들어 반대의사를 밝혔다.
이에 앞서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미사일방어체제가 100% 완벽하지 않더라도 공격에 대한 억지력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며 부시 대통령의 미사일방어체제 추진에 지지를 표명했다.
▶ 2001년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 김정남, 일본에 불법입국하다 체포(4일 강제추방)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이 2001년 5월 1일, 처인 신영희와 그녀의 친척인 30대 여성, 그리고 아들로 보이는 4세 남자아이와 함께 위조여권을 소지하고 싱가포르발 JAL 712편으로 나리타(成田) 공항으로 불법입국하려다 체포돼 4일 간 일본경찰의 조사를 받고 중국으로 강제추방됐다.
김정남은 조사 과정에서 자신이 김정남임을 시인했으며, "도쿄에는 디즈니랜드를 보러 왔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법무당국에 따르면 김정남은 도미니카 정부 발행 여권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름은 `팡 시옹(PANG XIONG)`, 출생지는 `KOREA`로 기재돼 있었다.
김정남은 외부엔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북한 내부에선 `작은 김정일` 또는 `새끼 장군님`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뚱뚱한 체형, 통 큰 스타일, 급한 성격 등 외모와 성격이 아버지 김정일을 빼닮았으며, 김정일과의 관계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의 첫째 부인 성혜림의 소생인 김정남은 컴퓨터와 인터넷에 능해, 이 분야의 `전문가`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 언론은 김정남이 과거 일본을 수차례 드나들었으며 미국과 제주도에도 방문한 것으로 보도했다.
한편 일본 정부가 김정남을 중국으로 추방, 서둘러 사건을 종결시킨 데 대해 일본 내에서 강한 비판론이 제기됐다. 일부 정치권과 언론, 북한 인권단체 등은 "좀더 잡아두고 철저한 조사를 벌여야 했음에도 불구, 조기 송환함으로써 `외교카드`를 스스로 포기했다"고 아쉬워했다.
▶ 1998년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훈할머니 50년 만에 영주 귀국
국적과 호적을 인정하는 인증증서와 태극기를 전달받고 있는 훈할머니.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지 55년 만에 국내 혈육과 한국 국적을 되찾은 훈할머니 이남이씨가 캄보디아 생활을 정리하고 1998년 5월1일 영주 귀국했다. 경남 진동에서 태어나 18세인 1940년대 초 부산항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훈할머니는 1943년 캄보디아에서 일본군 장교와 살다가 전쟁후 그가 떠나자 캄보디아 남자와 다시 결혼해 어려운 삶을 영위하다 1997년 한국인 사업가에 의해 우연히 발견돼 이날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검찰청의 유전자 감시을 통해 고향과 가족, 한국이름 이남이까지 되찾는 감격까지 느꼈던 훈할머니는 한동안 경북 경산에 머물렀으나 한국말을 전혀 못하고 캄보디아 가족이 그리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훈할머니는 2001년 2월15일 굴곡많은 인생역정을 뒤로 한채 생을 마감했다.
▶ 1997년토니 블레어 영국 노동당 당수, 총선승리로 수상에 취임
▶ 1996년`학교종` 작사-작곡한 김메리 여사 내한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우리나라 어린이가 즐겁게 따라 부르고 있는 `학교종`의 작사작곡가 김메리 할머니(92)가 1996년 5월 1일 김포공항을 통해 내한했다. 김할머니가 `학교종`을 작사작곡한 것은 광복 첫해인 1945년. 당시 김할머니는 현제명, 김성태 선생과 함께 음악교과서 만드는 작업을 하면서 초등학교 1학년용 음악교과서를 맡았다.
1904년 서울에서 태어나 배화학교를 졸업한 김할머니는 잠시 논산 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다 1930년 미시간대로 유학, 영문학을 전공했다가 1년후 전공을 음악으로 바꿨다. 이어 1934년부터 13년간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와 이화여대 음악과장을 맡은 뒤 웨인주립대에서 화학과 미생물학을 다시 전공, 20년 간 병원에서 근무했다.
1978년 칠순을 넘긴 김할머니는 평화봉사단원을 자원,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2년 넘게 봉사활동을 했고, 자선사업단체인 `육영선교회`를 만들어 한국문화보급에도 힘썼다. 1989년 뇌일혈로 쓰러졌으나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해 이후 뉴욕 한인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어린이들을 지도했다
▶ 1993년노동절 행사 35년 만에 해금
▶ 1993년스리랑카 프레마다사 대통령 폭탄테러로 사망
라나싱게 프레마다사 스리랑카 대통령이 1993년 5월 1일 수도 콜롬보에서 발생한 폭단 테러로 사망했다.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이날 집권 통일국민당(UNP)을 이끌고 노동절 퍼레이드에 참여해 행진하던 중 폭탄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이날 발생한 테러로 대통령의 개인경호원 등 3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60여명이 부상했다. 목격자들과 경찰은 폭탄을 몸에 부착한 자살 테러범이 대통령 일행에 접근하는 순간 폭발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대통령 피살사건으로 스리랑카 전역에 무기한 통금령이 선포됐고, 수도 콜롬보 일대에 군이 배치됐다. 68세인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10년 간 총리를 역임한 뒤 1988년 12월 대통령에 당선, 1989년 대통령 취임 이후 끝없이 정치적 위협에 시달려왔다. 프레마다사 대통령은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데다 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과 천성적으로 예리한 판단력의 소유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지난 195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좌익계의 거물 인사와 싸워 패한 뒤 1977년 주니우스 자예와르데네 대통령 집권당시 실권이 없는 총리직을 맡아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대대로 가난에 찌든 지방주민들을 위한 1백만 가구의 주택 건설과 빈민들을 위한 구호정책의 실시로 주로 지방과 하류층을 중심으로 지지 기반을 쌓아왔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 장관들에게 엄격한 규율을 적용, 자신의 사전허락 없이는 해외 여행까지 함부로 할 수 없도록 했으며 장관의 임명을 임의대로 행하는 등 다소 독선적인 통치로 많은 정적들을 만들어왔다.
▶ 1990년불교방송(BBC) 개국
▶ 1989년서울교대 휴교령
문교부는 1989년 5월 1일 학내분규로 47일째 시위하고 있는 서울교육대학에 휴교령을 명령했다. 문교부가 대학에 휴교령을 내린 것은 1986년 10월 31일 인천대에 휴교령을 내린 이후 처음이다. 이에 따라 단순학교관리 업무를 제외하고는 학교기능이 이날부터 무기한 정지됐다.
문교부의 서울교대에 대한 휴교령은 교육법시행령 제68조 3항 `감독청은 특별히 급박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휴교처분을 할 수 있다` 는 규정에 따른 것이다. 문교부에서는 "제2세 국민을 교육해야 할 교사를 배출하는 국립교원 양성기관에서 교수들에게까지 폭행과 폭언을 하여 교권이 유린당하고 있음은 매우 통탄스러운 일로 더 이상 인내할 수 없게 됐다"는 휴교조치의 배경을 설명했다.
서울교대 사태는 지난 3월 15일 학생들의 기성회비 동결요구로 시작돼 학장실 점거, 분신자살, 학생들의 자치학교 개설 등으로 확대돼 왔다. 대학 당국은 이에 맞서 4월 26일 "4월 29일까지 학교를 정상화하지 못할 경우 법적조치를 강구하겠다"는 내용의 계고장을 발송한 바 있다.
▶ 1989년로드리게스 파라과이 대통령에 당선
▶ 1987년통일민주당 창당(총재 김영삼)
▶ 1985년제22회 법의 날
▶ 1984년 서울대공원 개장
서울대공원이 1984년 5월 1일 개장했다. 이날 개원식에는 전두환 대통령 내외를 비롯, 정부인사와 서울시 관계자, 각계인사, 시민, 학생 등 1천2백여명이 참석했다. 육군군악대의 주악으로 시작된 개원식에서 전 대통령내외는 안상영 서울종합건설본부장으로부터 공원현황을 보고받은 뒤 개원식에 초청된 서울시내 어린이 4백여명과 함께 큰물새우리 해양동물관 맹수사육장 등을 약 40분간 돌아보았다.
서울시는 이날 오후2시부터 가장행렬, 씨름, 그네뛰기 등 개원축하행사를 가졌으며, 남녀고교생 6백 80명이 참가한 가운데 지하철 2호선 서초역을 출발, 대공원입구까지 10km구간의 단축마라톤도 있었다.
오후 6시부터 2시간동안 대공원호수앞광장에서는 인기연예인들이 출연한 경축쇼가 있었다. 총공사비 9백85억원을 투입, 착공 5년7개월 만에 우선 1단계로 문을 연 대공원동물원들은 4백31종 4천61마리의 동물을 수용하고 있으며, 면적만도 창경원의 16배인 87만평규모에 달했다.
▶ 1983년슐츠 미국 국무장관 동베이루트 미국 대사관서 피격 모면
▶ 1982년영국 아르헨티나 개전
▶ 1981년정부, 1982년부터 교육세 신설 발표
▶ 1981년공직자윤리법안 의결
▶ 1980년팔레스타인 자치문제 타개 위한 미국 이집트 이스라엘 3국회담 개막
▶ 1978년남산 3호터널 개통
▶ 1973년미국 상하원 워터게이트사건 수사를 위한 특별검찰관 임명요구 결의안 가결
▶ 1973년닉슨-브란트 1차 회담
▶ 1970년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영친왕) 이은 사망
▶ 1970년미군 캄보디아 침공
시아누크 실각으로 좌경화된 캄보디아의 공산군성역을 소탕하기 위해 닉슨 미 대통령이 1970년 5월 1일 미군의 캄보디아 진공을 명령했다. 닉슨 대통령은 미군 전투부대를 캄보디아 내에 있는 공산군 은신처를 공격하도록 캄보디아로 파견했다고 발표했다.
전국에 방송된 TV 연설에서 닉슨 대통령은 "캄보디아를 침입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전쟁의 빠른 종결과 미군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월남전쟁의 필요한 확대라고 말했다. 공산군 수용 지역인 사이공 북서쪽 80km 지점으로 월남쪽으로 돌출된 부분을 공격하기 위해 수천명의 미군이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갔다.
닉슨 대통령의 이 조치는 반전주의 의원들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고, 미 국민은 물론 전세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미군은 두달후인 6월 29일 캄보디아에서 철수했다.
▶ 1962년프랑스. 사하라사막서 첫 지하 핵실험
▶ 1962년해양경찰대 발족
▶ 1961년중국-캄보디아 우호불가침조약 체결
▶ 1961년카스트로 쿠바 대통령, 사회주의 공화국 선언
▶ 1960년미국 정찰기 U2, 소련 상공에서 피격
소련 상공을 침범한 미국 정찰기 `U2기`가 1960년 5월1일 오전 7시30분경, 소련 우랄산맥 상공 2만m에서 격추됐다.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가 오전5시에 U2기의 영공침입을 보고받고 격추를 지시한 뒤였다. 소련은 그동안 U2기의 영공침범에 대해 수차례 항의했지만 미국은 1956년 7월 이후 줄곧 소련 전역을 정찰하고서도 이 사실을 부인해 왔다. 소련은 내심 분통을 터뜨렸지만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데다 아직 요격기나 요격 미사일을 개발하지 못해 속으로만 끙끙앓고 있었다.
U2기는 최대상승고도 2만7400m에 속도는 마하 0.7의 제원을 갖고 있는, 록히드사가 극비리에 개발한 첨단 첩보기다. 목표지 상공에서는 제트엔진을 정지시켜 소리를 내지않고도 정찰비행이 가능하고, 광선 반사를 막기 위해 기체 전체를 검은색으로 뒤덮어 `검은 스파이기`라고도 불렸다.
이날 격추된 U2기는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를 발진해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어 소련 영토를 가로지른 후 노르웨이에 기착할 예정이었다. 조종사 게리 파워스는 기체가 피격되면 기체를 파괴해야 하는 원칙을 지키지 않고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자살용 독약도 사용하지 않고 체포돼 결국 미 CIA의 정찰기라는 사실을 자백하고 말았다. 미국은 이 사실도 모른 채 기상관측기가 실종됐다고 둘러대다가 흐루시초프가 증거를 들이대자 그제서야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5월 17일 예정된 동서 4개국 정상회담이 연기되는 바람에 1년 전 흐루시초프가 방미때 제창한 `평화공존` 무드도 일거에 물거품이 됐다. 10년형을 선고받은 조종사는 1962년 2월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과 독일 그리니케 다리에서 교환됐다.
▶ 1956년농업은행 발족
▶ 1956년일본 미나마타만에서 미나마타병 발생 첫 보고
일본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 있는 신일본질소 미나마타공장 부속병원 원장이 미나마타보건소에 `원인불명의 중추신경질환이 빈발하고 있다"고 1956년 5월 1일 보고했다. 이것이 후에 사회적인 문제로 된 미나마타 공해문제의 첫 발단이다. 구마모토대 의학부는 그 원인이 구마모토시에 있는 신일본질소 미나마타 공장의 폐수에 함유된 유기수은이 어류를 매개로 해 인체에 들어와 중독을 일으킨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1965년에는 니이가타현 아가노가와 하류에서 같은 유기수은중독에 의한 제2의 미나마타병이 발생, 669명이 중독증상을 보이고 55명이 사망했다. 미나마타병 환자동맹은 신일본질소 사장과 공장장을 미필적고의에 의한 살인-살해 혐의로 고소, 1979년 구마모토 재판소는 유죄판결을 내렸다.
▶ 1953년미국 국무성서 한국전 공산측 포로중 송환거부자는 48,000여명 이라고 발표
▶ 1952년일본, `피의 메이데이`
미일강화조약이 발효된 후 처음 맞는 메이데이(노동절)인 1952년 5월 1일.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는 행사를 `인민광장`이라 불리는 황궁앞 광장에서 열 계획이었다. 하지만 정부가 불상사 발생을 이유로 사용을 금지시키자 행사장을 명치신궁 근처로 옮겨 개최했다. 집회는 40여만명이 모인가운데 성황리에 끝났다. 참가자들은 집회가 끝나고도 가두행진을 계속했다.
해산지점의 한 곳인 히비야공원에 시위대가 모이자 이들 가운데 수천명이 `인민광장 탈환`을 외치며 황궁앞 광장으로 이동했다. 시위대가 이중교 앞에 도착해 집회를 열려하자 황궁 주위를 지키던 5천여명의 경찰들이 이들의 집회를 제지했다. 최루탄과 플래카드가 난무하는 대혼란의 와중에 돌연 경찰이 발포하기 시작했다. 2명이 사망하고 1천500여명이 부상해 일본에서는 이날을 `피의 메이데이`라고 부른다.
체포된 사람만 1232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261명이 소요죄로 기소되었지만 이들 전원이 무죄로 확정될 때까지는 자그만치 20년의 세월이 흘러야했다.
▶ 1949년첫 전국 인구조사 실시 (남한인구 2,018만명)
▶ 1948년미소라 히바리 가수 데뷔
▶ 1948년재판 3심제 실시
▶ 1947년내몽고자치공화국 수립
▶ 1946년메이데이 제60주년 기념대회 개최
▶ 1946년국방경비대 사관학교 창설
▶ 1945년나치 선전상 괴벨스, 가족과 동반자살
1945년 5월 1일,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갈 무렵 베를린이 포위된 가운데 요제프 괴벨스가 자살했다. 아내와 6명의 자녀를 먼저 권총으로 죽인 뒤였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만나기 전까지 나치주의자도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민족주의적 열정이 가득한 사회주의자에 가까웠다. 하지만 괴벨스는 1922년 6월 히틀러를 처음만난 뒤 곧 그에게 빠져들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독일문헌학으로 막 학사학위를 받은 뒤였다.
괴벨스는 빠르게 히틀러의 사람으로 변신해 갔고, 히틀러는 그를 중용했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들기 위해 선전, 선동과 조작된 여론으로 대중을 나치즘으로 끌어들였다.
1933년 1월 마침내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괴벨스는 내각선전상 겸 제3제국 문화원장에 임명됐다. 괴벨스는 선전 전문가로서의 동물적 후각으로 당시 새로운 전파수단으로 떠오른 라디오를 적극 활용했다. 또한 그는 영화에도 손을 뻗쳐 대중들을 전체주의로 끌어들였다.
초기의 괴벨스는 교조주의보다는 효용성을, 원칙보다는 편의를 우선했지만 나중에는 극단적인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압력에 굴복해 왜곡과 과장을 일삼았다.
괴벨스의 진가가 발휘된 것은 승승장구하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와 아프리카에서 패배해 전세가 역전되던 순간이였다. 신문과 라디오를 이용한 선전활동을 강화했고, 나치 간부들이 지하벙커와 요새로 숨어든 뒤에도 끊임없이 대중 앞에 다가섰다. 하지만 이미 전쟁은 막바지로 접어든 뒤였다.
▶ 1942년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 폐간
▶ 1936년경부선 복선화1935년레니 리펜슈탈, 영화 `의지의 승리`로 국가대상 수상
▶ 1924년그리스 공화제 선언
▶ 1923년소파 방정환,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을 `어린이날`로 제정
▶ 1921년 오늘,
연합국 배상위원회,
독일의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을
1320억 마르크의 금으로 결정하다.
당연히 독일은 이 돈을 갚을 능력이 없었으며,
이로인해 독일은 점점 우경화되어 2차대전의 불씨가 되었다.
#하이퍼_인플레이션!
1차대전이 발발할 즈음 세계 주요 국가들은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독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암살당하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어 동맹관계에 따라 독일, 러시아, 프랑스, 영국 등이 전쟁에 뛰어 들었다. 1차대전이다. 당시 참전국들의 수뇌부는 전쟁이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의 빌헬름 2세 역시 7월 28일 개전한 전쟁이 낙엽이 지기 전까지는 끝날 것이라고 낙관했다. 따라서 비축된 자원은 고작 1~2년 분에 불과했는데 전쟁이 그 이상으로 길어지자 참전국들은 재원 조달을 두고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참전국들은 전쟁 기간 동안 막대한 전쟁 채권을 발행했다. 이 중 상당량은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국민들에게 떠넘겼다. 남은 물량은 연합국의 경우 런던이나 뉴욕같은 국제금융시장에서 처분했다. 반면 국제금융시장이 없는 독일, 오스트리아는 부족한 자금을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통해 해결했다. 금본위제는 중앙은행이 가지고 있는 귀금속의 양 내에서 은행권을 발행해야 하지만 다급한 상황에서 이 원칙이 지켜질 리가 없었다. 사실상 금본위제는 무력화되었다. 그 결과 인플레가 기승을 부렸고 식량난 속에 발생한 혁명으로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승전국들은 독일에 1,320억 금 마르크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하였다. 이 금액은 전쟁 전 기준 독일 국민총생산의 3배를 뛰어넘는 액수였다. 신생 독일 정부는 국민소득의 10% 이자 전체 수출액의 80%를 매해마다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했기에 재정적자를 벗어날 길이 없었다. 방대한 재정수요를 민간 차입(국채 발행)으로 해결하기에는 전쟁 중에 한 번 우려먹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신뢰가 바닥나 다시 시행하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분위기상 세금을 인상하기도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정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통화증발이었다. 즉, 중앙은행에 금이 없는데도 중앙은행권을 찍어내 이 돈을 금으로 바꿔 전승국들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보유한 금도 없이, 아니 금을 계속 전승국에 지불하면서도 화폐를 발행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고 해외 사정에도 밝은 금융가, 기업가들이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그들은 곧 휴지조각으로 변할 독일 마르크화를 파운드나 달러로 환전해 해외에 예치시켰다. 그 결과 독일은 1922년부터 자본수지 적자가 심화되었고, 이에 따라 독일 마르크 환율은 급등하기 시작했다. 환율이 급등하면 수입물가가 폭등하고, 수입물가 폭등은 전체 물가폭등으로 이어졌다.
1920년 이후 독일에서는 월간 기준으로 물가가 50% 이상 오르는 현상이 나타났다. 하이퍼 인플레이션이다. 연구에 의하면 1차대전 이후 독일의 물가 상승율은 1조 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런 살인적, 전무후무한 인플레로 중앙은행권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망가졌으며, 사람들은 월급을 받는 즉시 현물을 사기 위해 미친듯이 달려나갔다. 힘들게 일해 받은 월급의 가치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 독일인들은 돈의 가치을 부정하고 돈으로 된 모든 형태의 부와 고정수입을 무가치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근로의욕이 사라지고 저축욕구, 미래에 대한 희망등을 버리면서 경제도 붕괴됐다. 1923년 독일의 산업생산은 1914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허나 독일의 하이퍼인플레는 해외채권, 즉 파운드나 달러로 발행된 채권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못했다. 달러나 파운드에 대한 마르크 환율도 급등해버려 외채에 대한 상환 부담은 하이퍼 인플레 이전이나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쟁 전후 누적된 독일 국내의 모든 부채는 청산되었다. 가장 큰 피해자는 고정적 연금 수입으로 생활하던 사람들이었으며, 애국심으로 독일 정부의 채권(국채)을 구매했던 사람들도 대부분의 재산을 날렸다. 반면 토지나 공장등 실물자산을 가진 자들이나 다른 이에게 빚을 진 사람들은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그런데 실물자산을 보유하면서 다른 이에게 큰 빚을 진 경제주체는 정부와 기업 딱 둘뿐이었다. 결국 독일의 하이퍼인플레는 대다수 국민을 거덜내면서 국가와 기업의 배를 불렸고, 이는 이후 히틀러의 전체주의 세력이 득세하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
1920년대의 하이퍼인플레는 독일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따라서 독일인들은 인플레에 극히 민감하며 독일 중앙은행은 최우선적으로 인플레에 대응한다. 작금의 유럽에서 독일 중앙은행이 양적완화에 소극적인 배경이다.
▶ 1918년조선임야조사 시작
▶ 1915년제주군과 울릉군을 제주도, 울릉도로 개칭
▶ 1914년원세개, 중화민국약법 제정
▶ 1910년경원선, 호남선 착공
▶ 1906년프랑스 파리서 20만인 파업. 계엄선포
▶ 1906년휘문의숙 설립 (민영휘)
▶ 1904년체코 작곡가 드로브작 사망
체코 작곡가 #드보르작 (체코어: Antonín Leopold Dvořák) 체코
프라하에서 사망 (1841년 9월 8일 오스트리아 제국 프라하(현재는
체코 공화국) 근처 넬라호제베스 에서 출생~ ) 교향곡 제9번
, 현악 4중주곡 등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고 있는 드보르작의 작품이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에 작곡되었다.
#신세계 교향곡
https://youtu.be/mJjk7vbVaOY
▶ 1903년민속학자, 철학자 임석재 출생
▶ 1900년일본, 동경에 전차 운전 개시
▶ 1873년 탐험가 리빙스턴 사망
리빙스턴의 탐험 선교의 목적으로 아프리카에 간 리빙스턴은 그곳에서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네 차례의 탐험을 완수하였으며 인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 1851년 세계최초의 만국박람회 개최 [런던]
▶ 1844년 미국 모르스 볼티모어 워싱턴간 전신 타전 성공
▶ 1819년 프랑스 언론자유 인정
▶ 1707년 영국-스코틀랜드 합병
▶ 1700년 영국의 시인, 문학비평가 드라이든 사망
▶ 1415년 조선, 일식 발생
▶ 1127년 송의 고종, 남경에서 즉위 (국명은 남송)
▶ 1091년 고려, 일식 발생
https://youtu.be/mdFs5fd2BTs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