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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돌과 비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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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문학관* 스크랩 나의 전생 외 / 최재경
동산 추천 0 조회 5 15.10.10 09: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나의 전생 / 최재경

 

 

나는 전생에 산지기나 종지기였다

그러나 가끔은, 붓으로

하얗고 검은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썼다

봄이 다시 살아 돌아오면

창꽃 피어나는 애장터 근처에서 비를 맞았고

물싸리가 하얗게 고봉으로 피어나

배고픈 줄도 모르고 산길을 해매고 다녔다, 그리고

산을 깎고 꽃을 베고 종을 쳤다

잠 못 이루는 달밤에는 

지는 꽃잎을 덮고

울다 웃다 잠이 들었다

가을에는 꼭꼭 숨어 지내다

겨울에는 아예 숨을 끊고 죽어 있었다

봄이 다시 올 줄도 몰랐다

 

나는 전생에 산지기나 종지기였다.

 

 

 

 

 

아내의 말씀 / 최재경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바람 좀 쏘이고 온다 했더니, 피우러 가는겨, 쐬러 가는겨?, 물었다 

그러더니, 여기 집에는 바람 안 부나?, 거기만 바람 부나?

그래서, 그냥 집에 있기로 했다

모임에 좀 다녀온다 했더니, 거기 가면 돈이 생기는 겨 나가는 겨?, 물었다

진드감치 집 일이나 하고, 돈 벌 궁리나 하란다

그래서, 그냥 집에서 돈 벌 궁리를 하기로 했다

나도 얼마 전 까지 그랬지만  

머리 묶은 시인은 집에 데려오지 말란다, 꼴도 보기 싫다고

그렇게 한다고 했지만, 아직 말을 못 했다

건강검진 날 잡았으니, 한 달 간 술 담배 싹 끊으란다

고개 만 끄덕였더니, 대답을 하란다

그래서, 그리 한다고 대답을 했다

이장 그만 둔 것도, 순전히 그 사람 뜻이었다

이런저런 말 듣기 싫으니 그만 두라 해서였다

참지 못하고 ?빨을 확 부리면, 나 보다 목소리가 더 커진다

그래서, 그냥 시키는데로 말 잘 듣고 살기로 했다.

벌레 생긴다고, 잘 뻗어 오르는 담쟁이를 자르고 있다

아무 소리 못했다.

 

 

 

 

 

장마 / 최재경

 

 

언제부터인지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꿈속에서 내가 울고 있었다

싸리 재 넘어

아부지 산소에서 울었다

흙투성이 신발이 벗거져

맨발로 흐느끼고 있었다

머리를 땅에 박고 두 손으로 빌어도

한 말씀 없으시고

비 맞으면 기침한다고

내려가라 하셨다

 

그칠 비가 아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미꾸라지가

마당 물길을 타고 올라와

양재기를 들고 달려갔다

"그냥 둬"

호통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숟갈도 뜨기 전에 점심상이 나갔다

비를 맞고 고샅길을 돌았다

늦은 밤

식은 방에 있어도

엄니 한숨에 놀란 쥐가

벽장에서 부스럭거렸다

그칠 비가 아니었다

새벽이 와도.

 

- 최재경 시집  < 가끔은, 아주 가끔은 >

 

 

 

 

 

어떤 조문 / 최재경

 

 

길바닥에

지렁이가 길게 누워 있다

이슬참에 나왔다가

뙤약볕에 말라 죽은 것이다 

부고도 없었는데

어디서 들었나

개미들이

새카맣게 몰려들고 있었다

문상은 뒷전이고

물어뜯고 끌고 당기고 아우성이다

얼마나 살다 갔을까

반나절

지렁이 한세상 그렇게 사라지고

죽은 나무에서 

쓰름 쓰름 쓰~~ 매미가 혼자 울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 최재경

 

 

고약하다고 소문난 그 노인네

아침 자시고 담벼락 양달에 나와 앉아계신다

가는귀는 먹었지만 정신은 말짱하시어, 오늘도

작대기로 뭔가를 쓰시는데, 지우고 또 지우신다, 그러시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진지 드셨남유?,

편히 주무셨남유?" 하면 인자하시게, "잉 그려, 밤새

별일?었능가?," 내지는, "자네 자당님도 그만하신가?"

물으시다가 그냥 뻣뻣하게 고개만 끄떡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고약하시게 싸가지가 지 애비 애미 닮았다는 둥

궁시렁거리시다가.

 

그 노인장 어느 날

일을 하고 있는 아들을 불렀는데, 아들이 좀 성가시어

"곧 가요" 했겄다?,

좀 있다가 또 부르니, "아이 참 곧 가요" 또 했겄다?

가는귀먹은 아버지, 세상에 저 숭악헌놈이!.

아들을 지팡이로 내리치시며, "뭐시 이눔아?"

"뭐 까라고?" 

.

.

숭악헌 아들 놈 참 고단허겄다.

 

 

 

 

 

개장사 복만이 / 최재경

 

 

날이 더워지니까 개나 사람이나 그늘 찾기 마련인데

오늘도 개장사 복만이는 개하고 싸우러 나간다

사람이

개하고 싸워봤자

사람이 이기면, 개보다 나은 놈이고

개한테 지면, 개만도 못한 놈이고

개하고 비기면, 개 같은 놈이라는데, 그러나 복만이

늘 개보다 나은 놈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쌍판때기 팔심 뚝심 좆심 이빨심 고루 갖춘

복만이만 떴다 하면, 독하다고 소문난 개들도 꼬랑지를

내리고 고대 뒤지는 소리를 했다.

한참 흥정을 하는데, 산통 깨는 소리로 누가 역성을 들면,

금새 약 먹은 개처럼 눈을 까거나 식식거려 개 주인도

얼른 값을 쳐 주었다

내가 그랬다, 집에서 키우던 진돗개 두 마리 사가라고

복만이 오더니, 얼른 차에 실으며 흥정도 없이 계산을 했다

내가 물었다, 작업을 해서 식당에 팔면 얼마나 남냐고

씨 웃으며, 초복 중복 말복 다 가격이 틀리다며, 곱절은

남는다 했다

시 그만 쓰고, 나도 개장사로 나가면 어떨까?, 물었더니

그럼 형님은 개만도 못한 놈 된다고 했다

 

개 삽니다, 개 팔어요, 염생이도 삽니다

복만이가 신명나게 떠들며 떠나갔다

 

나는 개만도 못한 놈이 될 뻔 했다.

 

 

 

 

 

서운하게 지는 꽃 / 최재경

 

 

서운하게 지는 것이 어디 한 송이 꽃뿐이랴

올해도

마루에 송홧가루 노랗게 내려 있고요

강 버들 꽃씨가 술렁이며 날아갑니다

꽃대궁 까칠한 민들레가 안쓰럽고요

누릇푸릇 피다 진 보리 터럭이 까슬해지면 

한나절 꼬박 울던 뻐꾸기, 어디로 가고

흙담 아래 당매화 처량도 합니다 

꽃에게 나이를 물어봅니다

며칠 만 더 살다 가도 좋으련만

붉은 꽃잎 구슬프게 떨어집니다

웃으며 지는 꽃이 어디 있으랴

서둘러 떠나는 모습 내내 측은하여

속절없이 떠나는 모습 쳐다봅니다

꽃이 서운하게 피고 지며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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