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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30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루카 21,34-36
심판 때 그리스도 앞에 설 힘은 기도로 얻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
오늘 복음에서 종말의 긴 말씀 가운데 마지막 당부가 나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우리 대부분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 앞에 설 힘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힘은 곧 그분의 뜻을 따랐느냐에 의해 생겨납니다.
중동에서 남편들이 나가 돈을 보내줄 때 아내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아껴 쓰면서 자녀를 잘 키워 몇 년 만에 남편이 돌아올 때 기쁘게 김포공항에 나가는가 하면,
어떤 자매들은 남편이 돌아올 때 도망을 치거나 자살을 했습니다.
그 돈을 제비에게 다 가져다 바치고 빚까지 졌기에 남편을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했다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야곱은 장자권을 받아 구원에 이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20년 동안 많은 고생을 했음에도 감히 에사우 앞에 나설 힘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세상에서 자신이 낳은 자녀들과 모은 재물들을 먼저 선물로 보냈지만, 여전히 에사우
앞에 설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남아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천사와의 씨름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천사는 축복을 청하며 밤새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야곱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리고 그의 이름을 바꿔주었습니다.
이름을 바꾸었다는 말은 새롭게 태어났다는 말이고 새 정체성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정강이뼈가 부러졌다는 말은 더는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기도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서는 힘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산다”라는 믿음입니다.
사람 앞에 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누구의 앞에도 설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으로만 죽는데 부모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이들은 자아가 강해서 남들 앞에 잘 서지 못합니다.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는 자아가 상처받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무대 공포증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자아가 살아 있어서 잃을 것을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알게 되면 하느님의 사랑으로 부모가 죽여주지 못한 자아까지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누군가의 앞에 설 힘이 생깁니다. 나 대신 그리스도께서 나서주신다고 믿으면 사람들 앞에 설 수 있고 하느님 앞에도 설 수 있습니다.
조두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소원’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소원이네 문방구, 그리고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아빠, 이들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이는 늦게 학교에 가게 되고 아저씨가 우산을 씌워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소원이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소원이는 우산을 씌워준 것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고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세상과 담을 쌓습니다.
아빠가 들어와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빠도 세상에 속한 한 남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호스를 낀 옆구리로 변이 새어 나와서 그것을
닦아주기 위해 바지를 벗기려는 아빠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아빠 말고는 아이의 상처를 치유해 주어 세상과 소통하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빠는 소원이가 냉장고 나라 코코몽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코코몽 인형 안으로 들어가 소원이와 친해지려 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을 좋아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점심시간에 소원이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코코몽 인형 속에서 소원이를 응원합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보이면 그 무시무시한 학교 앞길도 힘 있게 걸을 수 있습니다.
소원이는 코코몽이 지켜주기에 학교도 갈 수 있고 남자친구들과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그것으로 만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원이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그 코코몽이 아빠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원이는 아빠를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세상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빠의 희생 덕분으로 잃어버렸던 말도 되찾아 말을 하게 되고 아이들과도 이전처럼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소원이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코코몽에게 다가와 인형 얼굴을 벗기고 아빠의 땀을 닦아줍니다.
아빠는 눈물을 흘립니다.
사실 우리도 같은 상황입니다.
상처받아 자아가 커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동행해주심을 믿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동행해주시는 하느님의 땀과 피를 봅니다.
그리고는 그분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과정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나아갈수록 상처받은 나는 사라집니다.
죽는 것입니다.
마치 태양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주님께 다가갈 때 나는 타버립니다.
그렇게 나도 하느님의 인형 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에게 다가갑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시는 것이기에 타인이 나를 모욕하고 상처 주어도 크게 두렵지 않습니다.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받아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이 믿음을 증가시켜 줍니다.
결국, 야곱이 에사우 앞에 서는 힘은 기도로 내가 죽고 에사우에게 속한 사람임을 고백할 수 있을 때 가능했습니다.
야곱은 에사우에게 일곱 번 절하며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며 하느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과 같음을 고백합니다.
마치 마지막 만찬상에서 요한이 예수님께 그랬던 것처럼 에사우에게 안기고 그의 땅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소원이가 아버지의 땅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세상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처럼,
하늘나라에서도 하느님 품에서 살 수 있게 될 때 하늘나라 백성들과도 소통할 수 있게 됩니다.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기도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나를 죽이고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분 품에 안겨있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마지막 때에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십자가를 거친 요한이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숨는 일 없이
기쁘게 그분께 엎드려 그분 품으로 달려들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이 있다면 바로 그분 앞에서 설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하여 자기를 죽이는 것뿐입니다.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인정해야 합니다.
소원이가 아빠의 사랑을 인정했듯이. 이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마태오 4,18-22
고기보다 사람을 낚읍시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저를 불러주셨는데, 바닷가에 산다는 핑계로 너무 사람보다 고기를 더 많이 낚아 송구한 마음이 드는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원래 안드레아는 형 시몬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를 배경으로 고기잡이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전문직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여느 여부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보통 어부들의 삶은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물때가 좋고 운이 좋아 고기가 많이 잡히면 그것을 팔아 한 며칠 신나게 놀기도 했겠지요.
안개라도 자욱이 끼여 조업이 불가능한 날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술로 하루를 지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지도자들 안주삼아 독주도 많이 마셨습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내면은 영적생활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피 안에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모세와 다윗의 전통과 신앙이 힘차게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의 시선은 임박한 메시아의 도래에 초점이 맞춰져있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의 신앙을 좀 더 성숙시켜나가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영적생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려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안드레아 앞에 나타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안드레아는 깊은 광야에서 자신의 내면을 열심히 갈고 닦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서 참 구도자로서의 모델을 찾았습니다.
안드레아는 세상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그릇된 권력 앞에 혈혈단신으로 당당히 맞서던 세례자 요한을 자신의 정신적 지주, 멘토로 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때가 지나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도래하자 세례자 요한은
안드레아를 예수님께로 안내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본 세례자 요한은 지체 없이 안드레아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는 이제 나의 때가 지나가고 예수님의 때가 도래했으니 저분을 따라가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지체 없이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지도에 힘입어 영적인 눈이 이미 많이 트여있었던 안드레아는 즉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확신합니다.
한 걸음에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간 안드레아는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 안드레아의 의미는 ‘사내다움’ 혹은 ‘용기’입니다.
용기 있게 세례자 요한을 스승으로 모셨던 안드레아, 사내답게 예수님을 따라나선 안드레아는 형 시몬과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단순하고, 과격하고, 급하고, 다혈질적이었던 형 시몬에 비해 안드레아는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그리스 북부 지방의 에피루스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70년경 로마 황제 네로의 대대적인 박해 때 아카이아에서 체포되어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안드레아는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로 X자형 십자가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어로 X는
그리스도의 첫 글자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안드레아에 관해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한 가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드레아는 십자가에 매달린 이후 꽤 오랫동안 죽지 않고 매달려있었습니다.
이틀간 매달려있었는데, 그 순간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겠습니까?
그러나 안드레아는 십자가 위에서도 복음 선포 활동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십자가 주변에 둘러서있는 군중들을 향해 설교를 계속했답니다.
이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던 적대자들은 안드레아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렸는데, 그 순간 하늘에서 한 줄기 강한 빛이 안드레아를 오랫동안 감쌌답니다.
그 강렬한 빛 한 가운데 안드레아는 숨을 거두었다는군요.
임종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사람 낚는 어부로 살고자 노력했던 안드레아, 그리스도의 향기였던 안드레아 사도의 삶과 신앙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신앙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강론>
(2024. 11. 30. 토)(마태 4,18-22)
<남을 인도하려면, ‘내가 먼저’ 잘 걸어가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마태 4,18-22).”
1) “나를 따라오너라.”는 “나의 제자가 되어라.”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신앙생활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직무나 직책을 맡는 것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자체가 그렇습니다.>
자기가 종교를 선택한 것이고,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결정한 것도 자기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런 생각은 어리석고 오만한 착각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당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부르심’은 사랑이고, 은총입니다.
2)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너희는 지금까지는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사는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도의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들이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지,
사도로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에 부르심을 받을 때에는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도 많았고, 미숙한 점도 많았습니다.
그랬는데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깨달았고, 또 그들 자신들이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완성’을 향해서 나아갔고, 결국 ‘완성’에 도달했습니다.
<따라서 ‘사람 낚는 어부’로서 사도들이 첫 번째로 낚아야 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먼저 ‘구원의 길’을 잘 걸어가야만
다른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사제들의 서품도 완성된 상태에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신품성사는 ‘시작’일 뿐이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제의 삶’은 ‘사제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신품성사를 받는 그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완성된 것으로 착각한다면, 세상에서 제일 교만한 사람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세례성사도 마찬가지인데, 세례성사는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고,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만일에 세례성사를 받자마자 신앙의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고 착각한다면, 곧바로 교만과 위선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3) 요한복음에는 어부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요한 1,35-37).”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 라고 번역되는 말이다(요한 1,40-42).”
요한복음의 이야기와 마태오복음의 이야기를 합하면, 예수님을 만나서 믿게 된 일이 먼저 있었고, 몇 달쯤 뒤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서게 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몇 달은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 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어부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구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받기를 바란 것은, 첫 번째가 자기 자신의 구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이 아니라...
그 직무를 받게 된 것은 제자가 된 다음의 일입니다.
<사실 세례성사도 그렇고, 신품성사도 그렇고,
모든 성사는 일차 목적이 각자 자기 자신의 구원입니다.
‘나의 구원’을 생략하고서 ‘남의 구원’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