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nAbnTAtqzl4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작곡가 안병원
동요 '우리의 소원'의 작곡가 안병원 씨가
지난 5일 캐나다 토론토의 한 병원에서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분단의 고통을 안고 있는
현 시대를 살고 있는
한민족이라면
이노래를 불러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중 가요가 된 노래가 있습니다.
남 북한의 통일모임에서는
빠지지 않고
심지어 남북한 정부관리들이
만나는 장소에서도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습니다.
네, 바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인데요.
이 노래는 남한에서 지어졌지만
북한에서 열린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에 참가한
임수경씨가 처음 부르면서
북한에 급속히 퍼졌고
이제는 사상과 신앙을 초월해
남 북한뿐 아니라
전세계 흩어져 있는
우리 한민족이 통일을 소원하며 부르는
겨례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노래를 지은 작곡가,
캐나다 교민 안병원씨가
지난 5일
향년 89세의 나이로
캐나다 토론토에서 별세했는데요.
고인의 마지막 길에는
그가 지은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가
함께 했습니다.
작곡가 안병원씨는 생전에
“장장 65년이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니
부끄러운 일”이라며
이제는 그만 불렀으면 좋겠다고
긴 분단의 아픔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세계로 울려 퍼지면서
하나가 되기 위한
남북한 민족의 얼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었고
바로 통일이 우리민족을 살리는 길임을
확고히 심어준
희망의 노래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작곡가인 안병원씨는
사실 지금 일반인들은
거의 모를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1970년대에 캐나다로 이민가면서
한국에서는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캐나다에서
안 씨는 어려운 이민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통일 음악회,
북한어린이 돕기 등
여러 활동들을 계속했습니다.
안병원씨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만들게 된 계기는
1947년 갓 해방된
한반도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노래가 탄생할 당시
노래의 원제목은
우리의 소원이었고
가사의 내용은
우리의소원은 독립...
꿈에도 소원은 독립”
이렇게 독립을 소원하는
가사로 시작됩니다.
당시 해방되어 맞이 하는
3.1절을 기념하는
독립의 날 특집방송을 위해서
만든 노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해방은 되었지만
남한은 미 군정이,
북한은 쏘련이 들어와 있었고
남북한 정부도 수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좌익과 우익이
첨예하게 대결하는 상황에
안병원씨에게
우리의 소원은
진정한 독립이라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탄생된
우리의 소원 노래는
1947년 3월 1일
방송을 타고
전국곳곳에 퍼져나갔고
이때 대중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 었습니다.
하지만 1948년
남북 정부가 각각 따로 수립되자
남북의 분단이 확실해졌고
남한의 문교부에서는
안병원 씨에게 이 노래를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고쳐 부르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때부터 이 노래는
처음으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게 되고
제목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남한에서는
특별한 행사라든지 기념식 때
불렀는데요.
80년대
남한의 학생운동이 일어나면서
주로 운동권내에서 불리워졌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평양 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씨가 부르면서
북한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요.
북한은 이 노래를 합창으로 만들어
평양축전 전 기간
거의 매일 중앙방송으로
내보냈습니다.
하지만 가사를 고쳤습니다.
원래 1절밖에 없는 이노래를
북한에서는 2절에서는
통일을 자주로,
3절에서는 민주로
만들어 불렀습니다.
즉 미군이 진주해 있고
독재에 억압당하는 남한에서는
자주가 필요하고
민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순수한 통일노래를 개작해
북한주민들에게 선전했던 것인데요.
하지만 당시 북한정부의
의도와는 다르게
많은 북한사람들은
순수하게 통일의 열망을 느꼈고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남한사람들도 이렇게
통일을 원한다는 것을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남한을 은밀히 공격하는 수단으로
이 노래를 이용했던
북한의 의도로
작가 안병원씨도
생전에 끊임없는 이념논쟁에
시달려야 했는데요.
북한을 여러 번 방문했지만
항상 정치적 의견을 피하고
순수한 우리민족의 통일을
바라는 마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90년 장장 우리 민족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함께 한 안병원씨,
비록 그토록 바라는 통일을
보지 못하고 떠났지만,
그가 남긴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7천만 우리동포의 마음속에 살아
겨례를 잇고
통일을 이루는 다리로
굳건하게 서 있습니다.
1. 개요
안석주 작사, 안병원 작곡의 동요.
1947년 발표되었다.
1947년,
당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부생이었던 안병원이
조선방송협회에서
어린이 프로그램 담당으로 근무하던
친구의 의뢰를 수락하면서 작곡되었다.
당시 3·1절 특선 아동 뮤지컬이었던
독립의 날에 포함되어 있던
다섯 곡 중 하나였으나,
현재는 이 곡만이 남아 불려지고 있다.
중간에 가사가 한번 바뀐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가사가 통일이 아닌 독립이었었다.
미군정기인 당시에는
일본 제국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되찾았으나
미군정이 행정을 총괄하고
좌우익으로 상징하는 냉전체제의
대립이 극심했던 탓에
진정한 의미의 자주독립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이후 1948년,
자주정부인 대한민국 정부가 건국되고
6.25 전쟁으로 분단이 격화되면서
1954년 문교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통일로 수정이 되었다.
2013년 이 노래를 작곡한
안병원 씨가 "이제는 이 노래를 그만 불렀으면 좋겠다"는 씁쓸한 인터뷰를 하였다.
원작자라는 이유로
갑질을 한 것이 아니라,
어서 빨리 통일이 와서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이 노래가 역사속으로
사라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안병원 씨는 통일을 보지 못하고
2015년 별세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평소에 이 노래를 즐겨 불렀으며
2009년 8월 23일에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영결식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장송곡 중
하나로 연주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집권시기인
80년대부터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에 의해 알음알음 퍼지다가,
햇볕정책의 일환으로 개최된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이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계기로
북한 인민대중에게도 전파되었다.
김정은 역시 애비가 부른 노래인만큼
어느정도 용인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2016년 북한의 4차 핵실험이후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금지곡으로 선포하고 보위부, 인민보안부를 동원해
대대적으로 단속했는데,
김정은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강성대국(...)이 되는 것"이라고
교시한 것이 이유라고.
그러나 2018년 문재인 정부 시기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 평양공연 당시
레드벨벳이 부르기도 하였고,
금강산에서 개최된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북측 이산가족들과
적십자회 보장성원들이
이 노래를 부른 것을 보면,
지 꼴리는대로 즉흥적으로 선포되었다가
주민들의 반발[3]이나
남한 관계를 의식해
은근슬쩍 해금한 것으로 보인다.
2. 가사
3. 매체에서
1983년 KBS에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을 방영할 당시,
가수 조영남이 부른 이 노래를
프로그램의 엔딩 타이틀로 삽입하였다.영화 쉬리에서
북한 8군단 출신 공작원 박무영(최민식)이
남측 요원 한석규에게 하는
남북관계를 비꼬는 대사에서
이 노래가 등장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니들이 한가롭게 그 노래를 부르고 있을
이 순간에도
우리 북녘의 인민들은 못 먹고 병들어서
길바닥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어.
나무껍데기에 풀뿌리도 모자라서
이젠 흙까지 파먹고 있어.
새파란 우리 인민의 아들딸들이
국경 넘어 매춘부에
그것도 단돈 100달러에
개 팔리듯 팔리고 있어.
굶어 죽은 지 새끼의
인육마저 뜯어먹는 그 애미,
그 애비를,
너는 본 적이 있어?
썩은 치즈에
콜라 햄버거를 먹고 자란
니들이 그걸 알 리 없지.”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인 주성하 기자는
이 장면을 두고
"놀라웠다.
치즈에 콜라나 빠는 작가가 쓴 것 같지도,
햄버거를 먹는 배우가
연기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라고
극찬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분노해야 할 대상은
모두 평양에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사실 공작원으로 선발될 정도면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극에 달한 핵심계층이기 때문에
북한 체제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지적하고 싶은 마음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