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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본 '왜 안철수인가'
이하천(소설가, 문화비평가)
긍지와 자부심의 땅을 찾아서
“세상 현상을 모조리 알게 되는 것이 우리가 할 바는 아닐지라도, 우리 안의 현상들을 이해하고 우리가 처해 있는 이 시대의 구조를 규명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분야 속의 악을 뿌리 뽑는 일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 후세들이 지구를 보다 쾌적하게 가꿔 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때 그들이 어떤 기후를 갖게 될 것인지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톨키엔( J. R. R. Tolkien)의 말이다.
세월호 침몰 사건, 최순실 사태로 한국인들은 집단 우울증에 걸렸다. 그만큼 깊은 분노, 불신, 상실감, 패배감을 체험했다. ‘분노, 우울, 불면의 대한민국’.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당연히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그동안 과연 우리는 어떤 공짜를 갈망하고 꿈꿔왔던 것일까?
하늘은 가혹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실의 길을 얻는 것은 가혹한 시련을 요구한다.
이것은 역사를 들여다보면 증명되는 사실이다.
싸우지 않고도 얻어질 것 같은, 나 하나 참여하지 않아도 저절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멋진 나라가 될 것 같은 그런 환상이 박살이 나는 현장을 세월호 사건과 최순실 사태로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1차 촛불집회를 시작으로 매 주 마다 놀랍도록 평화로운 촛불집회가 열렸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50대 이후는 잘못된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 준 것 같은 미안함에서, 10대, 20대, 30대, 40대는 ‘이게 나라냐’는 위기감에서 참여를 했을 것이다. 그 위기감이란 마치 자신이 서 있던 땅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면서 뒤이어 쓰나미가 몰려든 것 같은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사적정신에 갇혀 버린 한국인의 심리, 정신
양반과 상놈이 존재했던 무자비한 왕조시대, 한일합방, 일본으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극심한 좌우 갈등, 그리고 6.25 전쟁, 처참한 가난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표면적인 민주화 결실, 그리고 산업화... 한국사회는 이 길을 걸어오느라고 심리적으로 죽을 만큼 너무도 바빴고 고달픈 시간을 보냈다. 자부심, 자긍심, 윤리성... 이런 인문학적인 영역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이 엄청난 고통의 시대는 한국인의 내면에 ‘창피는 잠간이고 이익은 영원하다!’는 검은 그림자를 쫘~악 깔아놓는 역할을 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주목해야 된다고 본다.
‘창피는 잠간이고 이익은 영원하다’는 심리적 축대는 우리사회 곳곳에서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 정의사회, 공정사회로 가기 위한 길목마다 버티고 서서 방해한다. 그리고 한국인에 내재된 긍정성과 선량한 에너지를 위협하며 부정성과 악의적 에너지로 나아가도록 인도하고 속이고 유인하고 있다.
최순실사태를 맞았을 때 대통령 주변 사람들이 처리하는 과정을 보면 이 장면이 여실히 드러난다. 어떻게 그렇게 하나 같이 자존심, 당당함이 없을까? 훌륭한 인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 좋은 학벌이 하나 같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2017. 2.9일 김현정 CBS 뉴스 쇼에서 손범규 대통령 측 변호인과의 대담을 보고 아이디 coffee는 “박근혜나 박근혜 주변에 것들은 모조리 버러지들 같다. 진짜 정상적인 것들이 단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아이디 자유만세는 “진짜 오만방자한 놈...촛불 든 국민들에게 오만방자하다고 했냐? 네 눈에는 국정이 장기간 공백상태가 되어 나라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게 보이지 않겠지. 나라가 어떻게 되던 국민들이 어떤 고통을 받던 너는 알 바가 아니라고 하고 있구나”라고 답답한 마음을 표현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은 공적정신과 사적정신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정신이 사적정신에 지배당한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인들은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을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정신적 틀에서 살도록 강요받아왔다. 왜 새삼스럽게 가부장제인가? 호적제도까지 없앴고 사회적으로 여성의 입장도 많이 신장이 된 것은 맞다. 그러나 이 가부장제의 정신적 틀에서 확립된 질서는 아직도 우리사회에 유령처럼 남아있다. 이 배회하는 유령은 심리적으로 한국인에게 너무도 깊은 상처로 작용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사적정신, 왜곡된 강자의 논리, 인간의 본질에 위배되는 악의를 부추긴다.
최순실 사태로 보여 준 강자들의 모습
최순실 사태로 보여 준 박근혜 정부의 핵심 인물들, 즉 이 사회의 최고의 강자들, 즉 조윤선, 김기춘, 우병우, 안종범...등등이 좋은 예다. 그 좋은 학벌, 그 좋은 자리 위에 선 그들의 의식은 철저하게 사적인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훌륭한 인간적 면모, 당당함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이 보인 당당함은 꼼수로 왜곡된 사적인 당당함뿐이었다. 또 공적영역인 법 앞에 무조건 거짓말을 해대는 그들의 모습은 가히 꼴불견이었다. 충격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 충격적인 장면은 아직 공적정신이 내면화 되지 않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에 불을 지폈다. ‘이게 나라냐’는 절규는 ‘이게 내가 서 있는 땅이란 말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로 귀결되었다. 가뜩이나 세월호 사건으로 그 집단무의식이 울렁거리다 패배감에 숨어들다 하던 때였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30년 넘게 주장해 온 필자의 논리, 그 논리의 살아있는 증거를 보는 것 같았다. ‘드디어 증거를 잡았다!’는 기분, 그런 기분이었다. (이 부분은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에 지면상 결론만 말한다.)
왜 안철수인가?
안철수 현상은 왜 일어났는가?
이것은 한국인의 현 단계 심리적 배경이 어느 선상까지 와 있는가를 짚어야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한국인들은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을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정신적 틀에서 살도록 강요받아왔다. 이것은 EQ와 IQ라는 두뇌영역을 IQ만 보도록 유도했고, 또 공적정신이라는 인간의 높은 정신을 사적정신이라는 좁은 틀에 가두는 역할을 해왔다. 이 사적정신이라는 좁은 틀을 기반으로 누군가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을 보아왔고 또 누군가의 횡포를 끊임없이 경험하면서 결국 이 사회 곳곳에 정신적 물질적 사기꾼들이 판을 치게 된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그렇다면 이 가부장제가 한국인들에게 끼친 심리적 폐해는 무엇일까?
가부장제가 한국인에게 끼친 가장 큰 첫 번째 폐해는 한국인의 심리 속에 공적인 강자의 논리 대신 사적인 강자의 논리를 심어준 데 있다. 강자가 강자인 것은 강자답기 때문에 강자이다. 이것은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강자가 된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하늘이 또는 우주의 어떤 긍정적인 기운이 한 사람을 강자로 살도록 해주었다는 것은, 쉽게 말해 성공적인 삶을 살도록 해주었다는 것은 약자를 위해 또 이 사회를 위해 헌신하며 살라는 즉 보다 훌륭한 삶을 살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이 뜻을 나, 나, 나, 내 가족, 내 고향, 나와 잘 아는 사람.... 등등으로 잘못 이해하도록 한국인의 심리를 유도하면서 엄청난 부작용을 유발해 냈다. 결국 공적정신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았다. 명절 뒤 고속도로가 쓰레기장으로 변하는 것은 이 선상에서나 해석이 가능하다. 한국인들이 근본적으로 나빠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땅히 공적정신의 향기를 맡으며 살아야 될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다는 증거다. 병적인 심리적 상처가 없다면 인간은 쓰레기를 공공장소에 마구 버리는 그런 행동을 다수가 하지 않는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 물이 맑은 법인 논리는 이곳에서도 적용된다.)
인간은 생명을 부여받으면서 기본적으로 훌륭한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저 깊은 무의식 속에 단단한 씨앗으로 이곳저곳에 박혀있다. 그런데 이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자라면서 꽃을 피우기도 전에 거대한 공룡처럼 이 사회를 무자비하게 휘감고 있는 사적정신의 틀 속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그러면서 마음의 평화를 놓쳐버렸다. 너무도 불행한 일이다.
가부장제의 두 번째 폐해는 한국인에게 한 사람이 두 가지 언어를 갖고 살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강자 앞에서는 이런 언어를, 약자 앞에서는 저런 언어를 쓰면서 어깨를 들썩거리도록 유도했다는 얘기다. 독특한 나, 아름답고 복잡한 질서의 세계를 획득한 나로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언어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야 하는데... 한국인들은 그런 길을 갈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는 허리를 15도 굽힌 언어를... 저 상황에서는 45도, 60도 90도... 또 몸이 완전히 얼어붙는 마비상태를 경험하면서 한국인들의 정신은 산산조각이 나버릴 수밖에 없으면서 자신의 언어를 구축해 내지 못했다. 결국 한국인의 정신은 Super I(허상의 나)와 Real I(진실의 나)를 껴안고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해졌다. 그런 사이 공적정신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 사적정신 즉 개인의 이익을 채워 넣으면서 윤리성 확보에 실패했다. 정신의 자유로운 펄럭거림을 아름다움으로 보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칭찬하면서 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어야 하는데... 권력을 남용하면서 타인과 다름에 더 더욱 인색했다는 얘기다. 이 인색하고 무지하고 욕심만 가득한 에너지는 크고 작은 권력을 가지면서 EQ 세계를 무시하고 자신이 가진 권력을 휘두르면서 약자들의 앞길을 이렇게 저렇게 막았다.
이런 부정성에 크고 작은 권력이 붙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이런 부정성은 이 사회에 ‘야박성, 천박성, 음흉성, 크고 작은 오만성, 악의성, 조악함, 고의적인 교활함, 거무칙칙한 색채, 윈윈이 존재하지 않는 파괴성, 나, 나, 나만 부르짖는 사적인 에너지... ’ 와 같은 부정적 개념들을 쫙~ 깔아놓으면서 흔들거렸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되는 긍정성에서는 어떤 색채들이 나올까? 긍정성에는 ‘보다 훌륭한 해결, 윈윈을 위한 선의적 해석, 사회상처치유적인 판단, 인간성 회복, 건설을 위한 파괴, 위대한 모성성, 밝고 아름다운 색채, 약자를 위한 헌신적인 삶, 부정성을 약화시키려는 에너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언어로 사회적인 책임지는 공적정신...과 같은 색채들이 아닐까 싶다.
(이 지점에서 한 마디 해야겠다. 공인인 정청래의 박지원 상왕론과 김종인의 옥황상제론이다. 박지원과 김종인은 필자가 계속 지켜봤는데 혀를 내두를 정도로 훌륭한 정치인들이다. 적어도 공적정신이 사적정신을 뛰어넘은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어떤 경우에도 국민들에게 나쁜 일을 할 확률이 낮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 말을 하는 게 맞나? 정청래는 판도라에 나와서는 SUPER I를 보이고 있고(훌륭한 인간: 어른모습) 인터넷 상에서는 REAL I( 부정성의 극치: 어린아이 모습)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자라지 않은 어린아이를 껴안고 있는 게 보인다는 것이다. 10대~30대이면 맞지는 않지만 이해는 된다. 그러나 그대 나이 벌써 50대 정치인이다. 이건 사회적 영향력이 큰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뿐 아니라 그대 자신을 생각해서도 심각한 문제다. 한 사람의 인격은 REAL I와 SUPER I를 일치시켜야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공인이 된다. 자신의 내면에서 부조화를 이루는 이 부분을 일치시키는 노력부터 하기를 바란다. 이런 심리적 상태에서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잡으면 참으로 걱정된다. 이 부분도 더 정확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뒤로 넘긴다. 그대만큼 치열하게 일생을 살아 온 연장자로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한마디 하니 너무 상심하지 말기를 바란다. 판도라에 나오는 그 훌륭한 모습, 진지한 모습이 진짜 정청래의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그대도 그것을 원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내면에 자라지 않은 아이를 성장시키는 노력을 하는 게 첫 걸음이다. 두 모습으로 국민들을 헷갈리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느 게 진짜 자신의 모습인지 결정하라는 것이다. 가뜩이나 부정성이 난무하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 공인이라는 자가 부정성이 담긴 흙탕물을 계속 붓고 또 붓고 하는 게 맞나? 자신의 언어가 있는 공인이라면 합리적인 언어로 비판하는 게 맞다. 그리고 더불어 민주당에서는 김종인에 대해서 할 말이 없어야 한다. 다 죽어가는 당을 살려줬는데 그거로 부족하나? 이런 사람들한테 권력이 붙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정말 걱정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에서는 이 부정성과 긍정성에 대한 싸움이 전혀 없었나?
아니다. 단계 단계마다 한국인의 인간정신이 우리의 내면에 있는 긍정성을 끌어올리기 위해 치열하고 처절하게 싸웠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내던지면서, 어떤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 삶을 돌보지 않고 파괴시키면서... 싸웠다. 그 결과 이 정도까지 이룩해 낸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서 그 길을 걷느라고 사적영역을 통째로 희생한 사람들에게 머리 숙여 깊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현 단계 우리사회는 부정성과 긍정성을 50 대 50까지 이룩해 내는 데 성공했다. 엄밀히 말하려면 강인한 부정성과 허약한 긍정성으로 표현해야 맞을 것 같다. 긍정적인 기운이 올라오다가도 부정적으로 결론이 나는 일이 많은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어떤 복잡한 싸움이 일어날 때 부정적 즉 너 죽고 나 살자에 능하고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결론에는 인색한 것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제 이 비율을, 즉 50%에 육박한 이 허약한 긍정성을 강인한 긍정성으로 만들면서 다음 단계로 끌어올려야 하는 데 직면했다.
이것이 현 단계 한국인들의 심리적 배경이다. 왜 심리적 배경이 중요한가? 단적인 예로 심리적인 배경이 부자냐 가난하냐, 공적인 정신이냐 사적인 정신이냐...에 따라 똑같은 상황에서 똑 같은 사람이더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180도로 틀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어떤 복잡한 문제가 필자 앞에 던져질 때 항상 누가 강자냐, 그리고 누가 횡포를 부리느냐, 그 다음 심리적 배경이 뭐냐를 추적해 들어간다.
더 이상 나갈 길이 없는 곳에서 보다 높은 긍정성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이 안철수를 문제 삼는 것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국민이 정치권 보다 앞서 나간다는 얘기다. 왜 이렇게 억울하지? 왜 이렇게 답답하지? 저건 또 뭐지? 왜 이렇게 마음에 평화가 오지를 않지? 왜 훌륭하게 살 수가 없는 거지? 왜 저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왜 아무도 존경할 수가 없지? 저런 판단은 또 뭐야? 대학을 다닐 때까지도 우리나라가 이렇게 엉망인 줄 몰랐어, 한국은 안 돼...안 돼...안 돼... 판소리로 밖에 풀어낼 수 없는 이런 한스러운 감정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다는 얘기다. 그래, 이런 한스러운 감정 말고, 누군가의 잘못된 권력의 횡포로 인한 억압된 짓눌림 말고, 인간의 근원적 복잡성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사회문제들이 상식적으로 해결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 그래서 인간적인 최소한의 품위 유지를 하며 살고 싶다는 염원이 한국인들 마음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이 것... 이 끓어오름이 안철수를 부르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안철수 현상과 공적 윤리성 확보와의 관계
자~ 한국인의 정신을 꽉 잡고 있는 이 거대한 사적정신이라는 역사적 기름띠를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이 사적정신을 2,30%로 낮추고 나머지 7,80%를 공적정신으로 채울 것인가? 공적정신이 50%면 윤리성도 50%...공적정신이 70%면 윤리성도 70%... 이렇게 정신과 윤리성은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사를 적당한 선에서 통제하고 나머지를 공으로 채우는 작업...이게 흔히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공인은 그만큼 책임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 글도 ‘이 땅의 모든 문제는 강자들의 책임이다’는 선상에서 쓰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선진국이라는 나라는 바로 이 비율을(2,30% 대 7,80%)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곳을 말한다. 강자가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비상식을 가지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거나 교묘하고 교활하게 어두움 속에서 부정적 힘을 쓰는 것을 약화시켜내야 하는 것...
이제 우리는 우리 앞에 떡 버티고 서 있는 이 검은 그림자를 직면해야 하는 단계에 왔다. 막연히 외면하고 두려워하며 움츠러들었던 그 실체... 이상과 꿈은 밝고 투명하고 아름다운 빛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 이상과 꿈을 현실에 뿌리 내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많은 시간과 고통과 희생을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치열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거대한 일상성과 북한이라는 존재로 파생되는 핵과 이념논쟁은 이 문제를 더욱 더 복잡하고 힘들게 만들 것이다. 이상과 꿈을 보고 안철수 현상에 다가섰다가 떠난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힘든 싸움인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또 이런 싸움은 참가를 한 자신이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이 말은 그냥 어느 대 기업에 취직해서 돈을 버는 구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삼한 제일 검 길태미는 장삼봉의 제자이며 후일 삼한 제일 검이 되는 이방지에게 이렇게 외친다.
‘1000년 전에도 1000년 후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는 강자는 약자를 병탄(빼앗아 삼킨다)한다!’ ‘강자는 약자를 인탄(짓밟고 빼앗는다)한다!
정말 왜곡된 강자의 논리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그리고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게 놀라운 일이다.
인간은 한없이 약하고 한없이 이기적인 동물이다. 불안과 공포에 휘둘리며 지배받기가 쉬운 존재다. 더군다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 불안과 공포를 조장한다면 그 그물에서 벗어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 조장으로 이득을 보는 계층은 강자들이다.
국민을 “개 돼지로 표현한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의 막말”, “눈 먼 돈 줄줄 새는 보조금", "주식대박 진경준 검사장”... 이런 기가 차는 뉴스를 매일 접하고 있는 국민들이 어떻게 올바른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天網恢恢 (천망회회) 疎而不失(소이불실)이라고 했던가.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서 엉성한 듯 보이지만, 결코 악을 놓치거나 선을 잃는 일이 없다.” 노자 도덕경 76장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세월호 사건, 최순실 사태를 바라보면 하늘은, 이법은 얼마나 정확하게 움직이는가 알 수 있다. 최순실과 박근혜와 그 주변 인물들은 권력을 가지고 정말 오만방자하게 굴었지만 결국 하늘이 쳐 놓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 놀랍지 않은가? 하늘은 민심 촛불을 움직여 단죄했다. ‘민심은 천심이다.’ 이 말이 이토록 실감 난 적이 없다. 여기서 민심은 총체적 집단지성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정신은 잠시라도 두드려주지 않으면 응고되고 마비되는 엄청난 생명의 세계를 안고 태어난 존재다. 이런 존재를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틀 속에 가두어 버렸으니 자연히 그 부작용은 심각할 수밖에 없다. 그 부작용은 한국인에게 심리적으로 어두움과 부정성이 우세하도록 만들었다. 여성은 여성대로, 남성은 남성대로 다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이 부정성과 어두움을 2,30% 대로 낮추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없다고 단언한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심리적인 문제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풀어낼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가부장제가 한국인에게 공적정신으로 나아갈 정신성장을 철저하게 막고 사적정신으로 숨고 피하고 도망다니게 만들었다는 것, 이제 이 실체를 끄집어 내서 밝은 햇볕 아래서 조금씩 조금씩 살펴보는 작업을 해야 할 때이다.
인간은 진실을 직면하게 되는 용기가 없을 때 정신적으로 계속 어디엔가 자신을 숨긴다. 칼 융(Carl G Jung)은 이것을 “노이로제(신경증)란 마땅히 격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라고 표현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신적인 성장을 내면에서 요구한다. 그런데 가부장제라는 정신적 틀은 이 성장부분을 철저히 막았다. 부모와 사회가 합심해서 전력질주를 하며 막았다. ‘부모에 효도, 나라에 충성’,이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조상과 나라를 팔면서 협박하고 짓눌렀다. 그리고 한국인의 정신을 사적정신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이 사실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필자의 나이 40대였다.
윤여준은 한 때 사방에 지뢰밭~이라는 발언을 했다. 맞다. 그러나 끔찍한 지뢰밭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것 역시 뛰어넘을 수 있다. 어떻게? 한국인들의 선량한 에너지가, 안철수 현상의 바람을 일으킨 역사가 그것을 도울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문제는 절대반지를 가진 자가 미션을 수행하는 도중에 그 반지를 팔아먹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위로의 언어와 각성의 언어
언어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바로 위로의 언어와 각성의 언어다.
사적정신을 가진 심리적 배경에서는 위로의 언어로 문제를 해결하는 특성이 있고(대표적으로 홍준표 식), 공적정신을 심리적 배경으로 가진 사람은 각성의 언어로 문제를 해결하는 특성이 있다. 위로의 언어는 문제를 해결하다가 결국 ‘아, 우리는 슬프다’로 끝을 내고(그러면서 강자들은 이익을 날름 먹는다), 각성의 언어는 문제를 끝까지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한 때 송호창(전새정치연합 소통위원장)은 TV에 나와서 새정치연합(국민의 당) 사람들은 다른 곳 하고 언어가 틀리다는 발언을 했다. 언어가 틀리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이 발언을 나는 사적정신을 가진 기존 정치인에서 나오는 언어와 공적정신을 가진 자신들의 언어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새정치연합은 여러 경로를 통해 국민의 당이 되었다. 더불어 민주당과 국민의 당 사람들은 서로 언어가 틀리기 때문에 같이 할 수 없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패권은 사적정신의 전유물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공적정신은 약하고 사적정신이 더 많은 사람은 직책에 따른 책임은 적당히 하고 사익추구에 더 열을 올리게 된다. 여기서 형성되는 것이 바로 패권이다. 패권은 사적정신의 전유물이다. 사적정신이 왜 위험하냐고 하면 그 정신이 도달한 마지막 여정이 바로 패권이라는 덫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공인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그냥 우연히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세월호 사건도 사적정신의 총체적 집합체가 만들어 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모두 경악한 일이지만 놀라지만 말고 이제는 실체를 직면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역사란 건너뛸 수가 없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건너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강자들은 가부장제가 만든 어두움의 그늘인 사적정신 속으로 피신하며 안주하고 개인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열심히 때론 음흉하게 때론 은근하게 협박하며 움직이고 있고, 약자들은 피하거나 방관하거나 도망 다니거나 숨고 있다. 이제 그 진실을 직면할 때가 되었다. 더 이상 도망 다닐 수 없는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최순실 사태와 세월호 사건의 의미는 한국인에게 더 이상 숨지 말고 도망 다니지 말라는 경고라고 본다.
한국인의 고통의 근원이 이 사회에 촘촘한 그물망처럼 건재하고 있는 강자들의 사적정신에 의한 관계설정이라는 것, 공적정신의 부재가 그 원인이라는 것, 그 결과 진정성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개인의 이익이 떠~억 들어앉아버렸다는 것. 자연히 자신의 자리를 놓쳐버린 ‘진정성’은 허공에서 허공으로 떠돌아다니다가 소멸되다 엉뚱한 곳에 가서 붙어있다 느닷없이 애국! 외치다가 정의!하고 생사를 걸기도 하다가 마마~하기도 하다 주여~하기도 한다. 이 진정성은 사회정의라는 측면으로 확대된다. 애국, 정의라는 부르짖음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구호를 부르짖는 개인이 상황이 바뀌면 사적정신의 극치를 보인다는 점이다.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웬 충성경쟁?
이런 기억이 있다. 필자는 공적정신을 타는 목마름으로 찾아다닐 즈음 어떤 사람의 지지운동에 뛰어든 적이 있었다. 이유는 그 사람에게서 공적정신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걸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 사람이 착한 백성인 지지자들을 이용하고 충성경쟁을 시키고 싸움을 시키는 것을 보고 공적정신이 아니라 사적정신으로 똘똘뭉친 한 인간을 보는 것 같아 화들짝 놀라 손을 뗀 경험이 있었다. (지지자들에게서도 처음에는 공적정신의 원형을 보았다. 그러나 그 공적정신은 시간이 감에 따라 사적정신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 경험으로 아직 공적정신이 없다는 결론을 내기에 이르렀다. 공적정신이 조금 있다가도 자신의 내면에서 움직이는 사적정신을 뛰어넘지 못하는 장면을 봤다는 얘기다. 그렇다. 여기를 봐도 없고 저기를 봐도 공적정신은 없었다. 나중에는 충성경쟁으로 사활을 걸었다.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지지운동에 나왔다면서 웬 충성경쟁? 북미에서 2,30대를 보냈던 필자에게 이것은 그야말로 충격, 충격 그 자체였다.)
이런 사람들이 약자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냥 지나칠 일이다. 그러나 강자, 그것도 최고의 권력자로서 국민에게 끼치는 피해를 생각하면 약자인 착한 백성들을 사용하고 이용하는 이런 사람들을 필자는 용서할 수가 없다. 청와대 문고리 삼인방도, 김기춘도, 우병우도 막강한 권력을 쥐었을 때 이런 심리 상태, 즉 말로는 애국을 부르짖으며 바빴지만, 실제로는 충성경쟁을 하는데 더 열을 올렸을 거라는 얘기다.
한국인에게 감지되는 특이한 정신적 좀비현상... 이것도 한, 홧병(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병), 진정성, 사회정의라는 언어가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결과라고 본다. 누가 아직도 이 어두움의 안개를 생산하고 있는가. 바로 ‘압살 당하면서도 허용하고’, ‘달달한 당분 맛’이라고 섭취하고 ‘내 일은 아니라고 방관하고’ ‘직면하기 보다는 무섭다고 도망 다니고’ ‘ 인간정신은 사라지고 대신 오만의 괴물만 우글거리는 정신을 껴안고 나는 강자며 승자라고 낄낄 대고 있는’... 우리 모두가 이런 정신적 괴물들을 허용한 결과로 생산해 내는 어두운 안개라고 본다. 인정하기 어려운 참담한 진실이다.
이번 선거의 핵심 키워드는?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플라톤 BC428~BC348)
이번 선거의 핵심 키워드는 공적정신이다. 사적정신으로 얼룩진 사회를 공적정신으로 그 틀을 바꿔내는 일이다. 그런데 자유한국당 홍준표는 잽싸게 안보를 핵심 키워드로 잡았다. 이것에 속지를 않아야 한다고 본다. 그동안 마치 안보는 보수정권의 전유물인양 국민을 속여 왔다. 안보는 보수나 진보 모두에게 중요하다. 안보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사적정신으로 박살이 난 대한민국을 공적정신으로 바꿔내는 게 우선이다.
왜냐하면 긍지와 자부심, ‘이게 나라냐’는 외침을 실천하려면 우리가 역사적으로 축적시켜 온 사적정신에서 파생된 심리적 쓰레기더미를 치워야만 한다. 그걸 깔고 앉아서 ‘정의’를 부르짖어 보아도 사람만 바뀌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그래서 이번 선거는 좌우의 싸움,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 아니라 공적정신과 사적정신의 싸움으로 그 프레임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싶다. 강자들이 70% 정도의 공적정신, 30% 정도의 사적정신의 심리적 윤리성만 확보되어 움직인다면, 우리가 말하는 적폐는 너무도 쉽게 해결된다.
여기서 정치는 너무도 중요한 이슈로 등장한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죄가 적은 권력도 없는 국민들이 잘못 선택한 죄로 인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정치가 바뀌면 나라의 기본 틀이 바뀌는 일이나 잘 속는 한국 사람들의 특성 상 잘못 뽑아놓으면(박근혜 정부처럼) 또 다른 광풍을 만날 수 있다. 해서 선거에 임할 때는 그 당의 윤리성 확보가 어느 정도 되어 있는가, 그 당과 대통령 후보자가 내미는 언어의 심리적 배경은 무엇인가라는 인문학적인 접근을 해야만 보다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온갖 단꿀이 묻어 있는 공약 보다 심리적 배경과 윤리성 확보를 따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좋은 공약은 다 나와 있다. 그것을 실천할 심리적 배경이 누가 가장 우위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각 후보들 중 누가 공적정신을 실현하며 살아왔는지를 살펴야 한다. 공적정신이라는 그릇이 없으면 또 다시 패권주의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사적정신의 극치가 바로 박근혜 정권에서 보여 준 패권주의다.
청와대에서 박대통령 지시가 틀렸다고 직을 내던진 사람들이 많았다면 대통령도 그 길로 계속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충성경쟁 하느라고 편승해 놓고 국민께 사죄드린다는 말을 끝까지 안한 우병우, 김기춘은 국민밉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심리적 배경이 문제지 실력이 아니라는 증거다. 우병우, 김기춘 보고 누가 실력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실력을 시대에 맞게 쓸 심리적 배경이 문제였을 뿐이다.
어느 여성 국회의원의 찰떡처럼 착착 감기는 언어를 심각하게 바라 본 적이 있다. 국정교과서 찬성 패널로 나온 그때도 그렇게 찰떡처럼 말을 잘했다. 이 여성 국회의원의 문제는 무엇일까? 가장 큰 문제인 윤리성 확보에 실패를 해놓고 그 사실을 깡그리 무시하면서 계속 맑고 청명한 햇볕 아래를 날렵하게 걷는다는 것이다. 참으로 후안무취의 극치를 보여 주는 신기한 장면이었다. 아직도 할 말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새롭게 태어나려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넓은 문을 선택하며 철저히 개인만 생각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국민들에게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아직도 잘 속는 국민들을 감안한다면 말만 잘한다는 것의 폐해는 심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의 언어의 구조도 깨야 한다고 본다. 기본, 즉 윤리성 확보가 안 되어 있는데 그 위에서 현란한 춤을 춰 본들 있는 사실이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거짓 언어의 빵, 즉 보기 좋고 맛 좋게 만든 빵, 그러나 몸에 나쁜 온갖 당의를 입힌 빵을 국민들에게 풀어먹이는 역할을 할 것이다. 말을 잘 한다는 것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행동으로 누가 더 공적정신으로 살아왔고 움직이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정서적 측면에서 보면 19세기, 20세기 초반 중반 후반이 혼재된 사회로 읽힌다. 21세기의 언어를 획득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질은 21세기에 와 있는데 언어는, 정신은 시간을 따라잡지 못했다. 여성성과 남성성이 양 날개를 균형 있게 잡으며 날아올라야 비로소 21세기적 언어가 나오는데, 심리적 역사를 짚어보면 그런 길을 닦아 놓지 않았다는 답이 바로 나온다. (종편이 생긴 것은 그야말로 신의한수였다. 종편의 역할로 한국사회는 정신적으로 빠르게 발전할 것 같다. 많은 수의 평론가들에게서 21세기의 언어를 획득한 면을 보았다. 그들은 이 사회에 부드럽고 질 좋은 언어의 빵을 풀어 놓을 것이다. 그런데 이 종편을 자신이 당선되면 두 곳 정도 없애겠다는 후보가 있다. 필자가 보기에 종편은 앞서 가는 국민들의 심리를 따라잡기 위해 너무도 열심히 준비해서 방송에 내보내고 있다. 정신적 게으름으로 여지껏 불러왔던 노래를 계속 부르려고 하는데, 새로운 노래를 언론이 부르고 있으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또 특검과 헌법재판소가 보여 준 훌륭한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카타르시스적 희망을 준다. 권력이 개입해서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이미 훌륭한 한국인이 곳곳에서 그 에너지가 차오르고 있다는 증거다.)
한국사회는 아직 악하다.
필자는 일생을 한국인으로 살면서 아직도 우리사회는 청산해야 할 악한 면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많은 잔인한 아동학대, 말문이 막히는 동물학대, 약자들에 대한 음흉하고 심각한 정신적 학대를 보면 아직은 아니다. 이게 누구의 책임인가? 바로 사회적인 강자들의 책임이다. 사회적 책임을 지는 자리에 있는 강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100%는 아니더라도 7,80% 정도의 공적정신으로 움직였다면 아직까지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해서 아직은 멀고도 먼 길을 가야만 한다고 본다.
아직 우리사회는 정신의 길을 닦아가는 과정에 있다.
‘권리의 진정한 근원은 의무이다.’는 간디의 명언이다.
‘이게 나라냐’를 외치는 권리를 가지려면 국민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각자의 의무를 지켜내야 진정한 윤리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촛불집회는 그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도 그 어떤 폭력성도 없었고 쓰레기도 없었다. 한국사회가 달라질 수 있는 기본을 본 기분이다. ‘아, 그동안 자긍심이 자라나고 있었구나’ 싶었다. 10대, 20대, 30대, 40대... 대한민국을 짊어지고 갈 새로운 세대가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촛불집회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이 자긍심을 21세기로 끌어올리는 작업..., 그리고 이들이 한국사회에서 일생을 살고 난 후 영혼이 찌그러져 인간정신이 말살되는 지금의 정서적 구조를 바꿔내는 작업, 이것이 우리 앞에 숙제로 떨어졌다. 첫 걸음은 남을 향한 비판, 사회를 향한 비판과 더불어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사적정신과 공적정신의 비율을 2.30% 대 7,80%로 바꿔내는 작업을 해야 훌륭한 인간이 되는 길이다. 그래야 정말 애국이란 말을 쓸 자격이 있으며 국가, 국민에게도 나아가 자신의 영혼에게도 실제적 도움이 되는 길이다.
그래서 필자는 언제나 심리적 배경을 따지게 된다. IQ가 아니다. 우리사회는 이 IQ만 지향하는 강자들의 사적정신에 의해 얼마나 속아왔는가? 가짜 언어, 거짓언어를 동원해 국민들 위에 군림하면서 잘도 사기를 쳐왔다. 서울대, 사시 최연소 일등합격... 이런 것은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기반은 되나 자신의 심리를 관리하고 성장시켜나가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EQ와 IQ의 균형감 위에 한 인간을 성장하도록 만드는 사회가 아닌 점 때문에 훌륭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과정을 스스로 걸어야 한다. 해서 교육의 틀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본다.(심상정은 안철수가 말하는 개혁에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인식부족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본다. 안철수가 말하는 교육의 틀, 경제의 틀을 바꿔야 한다는 것은 기술적인 부분만 말하는 게 아니다. 바로 인간이 기본이라는 게 깔려있다.) 선진국에서 태어났다면 정신적 성장을 위해 개인이 따로 특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 사회적 시스템에서(교육제도) 적정 연령이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엉뚱하게 공주로, 왕자로 SUPER I 와 REAL I가 뒤죽박죽이 되는 예는 잘 없다. 이 점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사회가 부모 반쪽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가정에서 특별히 사악한 부모를 만나지 않는 한 이런 문제로 극심한 고통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우병우, 김기춘, 조윤선, 안종범... 이런 사람들도 선진국에서 태어났다면 지금 쯤 공적정신을 가진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재능있고 유능한 인간들이 이처럼 파괴된 정신을 갖는다는 것... 사적정신의 폐해다. 여기서 바로 사회적 문제라는 근거를 보게 된다.
새 정치의 실체와 핵심의 이동
안철수의 새 정치의 실체가 뭐냐? 없지 않느냐는 말이 언론에 늘 등장한다. 최진(대통령 리더쉽 연구소장)은 안철수의 리더쉽을 모호한 초현실주의 그림(피카소)에 비유했다. 웃음이 나오지만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여지껏 싸워오던 방법론 즉 흑백논리에서 벗어나서, 말하자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윈윈 방법을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싸움은 대학생들이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캠퍼스에 최루탄이 난무하던 시기의 민주냐 반민주냐의 1차원적 싸움이 아니다. 그 시기는 이미 지났다. 민주화를 쟁취하며 그 시기에 얻었던 소중한 땅, 그 땅을 보다 세밀하게 들여다보며 그 땅에 심어져 있는 허약한 공적정신이라는 식물을 어떻게 하면 잘 자라나게 할 수 있는가를 모색해야 하는 때라는 것이다. 이것은 깊은 내면의 세계로 잠수를 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인문학적인 싸움을 병행해야 한다고 본다. 인문학이 왜 중요한가? 인문학은 이런 싸움에 심리적 강건 성을 돕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것은 민주와 반민주의 싸움이 아니다. 좌익과 종북 세력과의 싸움도 아니다. 역사적인 지뢰밭을 건너오면서 우리의 내면에 쌓인 선량한 에너지와 악의적인 에너지와의 싸움이며 긍정성과 부정성의 싸움이며 공적정신과 사적정신의 싸움이다. 그러면서 한국사회의 윤리성을 선진국 수준(7, 80%)으로 끌어올리는 싸움의 시작이다. 그야말로 심리적 적폐청산의 시작이다. 아직도 민주, 좌익, 종북을 외치는 것은 바로 핵심이 이동된 역사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쉽게 말해서 다 장성한 아들이 어머니를 떠나지 못하는 것 하고 같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인정하고 어머니로부터 받은 자산을 들고 다음 단계로 올라서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인들은 이런 싸움을 해 본적이 없다. 이것은 지금껏 해왔던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싸움, 공산주의와의 싸움과는 다른 한 차원 높은 단계의 복잡한 싸움이다. 그런 언어를 누가 갖고 있을까? 걱정된다. 왜 걱정이 될까? 그들이 모르는 상태에서 과거에 사로잡혀 패권이라는 지뢰밭이나 만들면서 시간낭비, 에너지 낭비를 할까봐서...... 그러면서 안철수 현상을 땅에 묻는 역할을 할까봐서... 그렇다.
남한의 윤리성, 북한의 핵
김정근(부산대 명예교수)은 얼마 전 ‘이 시대 한반도에 있어서 미래로 나가는데 지뢰밭이 두 개다. 남한의 윤리성, 북한의 핵’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어 그는 ‘다른 발전을 많이 해도 미래가 불투명 하다, 매일 매일 여기저기서 지뢰밭이 터지며 서로 뜯어먹는데...(윤리성 부재 문제) 또 이층짜리 건물을 지으나 200층짜리 건물을 지으나 별 의미가 없다. 핵으로 한방 날리면 그만...’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너무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개념정리가 안 되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래서 각성의 언어가 중요하다. 각성의 언어는 막연히 알고 있던 현상의 실체를 보다 정확하게 알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또 그는 “안철수가 이 역사에 한 가장 큰 일은 바로 기존 정치인들이 변하지 않을 수 없도록 압박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도 이 점 통쾌하게 동의한다.
대표적인 보수 논객인 조갑제는 TV에 나와서 통일을 위해서 해결해야할 문제로 북한의 핵과 남한의 종북 세력을 꼽았다.
여지껏 한국사회는 생존하려고 지성을(IQ) 추구해 왔다.
조갑제의 발언은 이런 선상에서 즉 과거에 억눌린 사고에서 나온 발언이다. 말하자면 공산주의자들을 직접 겪은 세대로서 그 고통의 현장을 아직 떠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곳곳에서 훌륭한 발언을 하다가도 이 문제만 나오면 극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즉각 과거로 회귀한다.
이제는 생존과 더불어 화해로서 즉 EQ영역을 넓혀서 사고를 해야 미래가 즉 통일이 보이는 시점에 왔다. 북한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핵으로 통일을 하겠다는 발상은 서로 죽자는 얘기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미국, 중국, 러시아가 핵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선거철만 되면 안보를 내세우며 엉뚱한 자세를 취한다. 핵문제는 치열한 외교적 문제로서 해결을 해나가면 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평화통일의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북한사회 보다 윤리성을 높여 더 훌륭한 사회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화랑정신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정신적 기반은 화랑정신이다.
시인 김지하가 ‘현대 한국 최고의 천재’라고 평했던 김범부(사상가), 범부의 이러한 천재성을 미당 서정주는 ‘하늘 밑에 제일로 밝던 머리’라고 남긴 바 있다. 독립운동가였던 김범부는 화랑정신을 높게 평가하며 그것에서 한국인의 가장 한국인다운 긍정적 맥을 짚어내는데 일생을 바치며 동방학을 구축해냈다. 그렇다면 화랑정신의 핵심은 뭘까? 현대어로 번역하면 바로 공적정신이다. 공적정신을 기반으로 삼국통일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이래서 정신이 그토록 중요한 거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현 단계에서 통일에 대한 적극성을 띠는 우리사회의 발언이 나올 때 마다 왠지 좀 부담스럽다. 지금은 통일에 대해 조심스러운 접근을 해야 하는 시기 아닌가. 아마 현실이 너무 어려우니 통일로 뛰는 것은 아닌지... 통일하면 왠지 더 근사해 보이니까.
그것 보다 더 중요한 문제 즉 법의 사각지대에서 즉 이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신음하고 핍박받고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경제적으로 최하위층에 속한 약자들을 밝은 햇빛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끌어올리는 것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윤리성을 높이는 첫 걸음이다.
우리사회에는 아직 해결해야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꽃제비를 보고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염전노예...축산노예... 도가니...돌보지 않는 자식들에게 책임을 떠 맡겨 자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노인들...자살로 내몰리고 있는 축산 농민들...부모들의 이혼으로 학대받는 아이들... 장애인들의 한스러운 삶, 36분에 한 명씩 자살을 하는 한국사회, 유기견으로 떠돌고 있는 약한 생명들...거기다가 세월호 사건, 최순실 사태...정말 보고 있으면 숨이 막힌다. 농민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밭직불제, 공짜 버스 운영,
아직도 사용 가능한 도로를 헤집고 다시 하기...이런 것에 정부로서는 어마어마한 돈을 쓰고 또 쓸 예정이지만 사실 실제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려면 정말 도움이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저 생색내기에 급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할 수 없다면 그런 돈을 각 분야의 경제적 최하위권 쪽으로 돌려야 한다고 본다. 이런 것은 정치적으로 별로 표가 나지 않기 때문인가 의심한다. 이런 생색에도 공적정신 보다 사적정신이 더 많이 투입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같은 상황에서도 정신이 뭐냐에 따라 180도로 틀린 결과가 나오는 한 예다.
착한 백성과 현명한 백성
최태민의 의붓 손자 조용래는 판도라에 출연해서 ‘이제는 착한 백성은 없고 현명한 백성들이 나올 것이다는 발언을 했다. 착한 백성이 문제다. 친박 단체들도 착한 백성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이제는 현명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런 놀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필자가 내미는 잣대는 힘들게 생존을 위해 살고 있는 착한 백성들에게 내미는 것은 아니다. 지도자급 인사들에게 내미는 잣대다. 이걸 넘어라. 그래야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고 거짓말쟁이 정신적 사기꾼이 되지 않는다. 일반 소시민들은 사기를 쳐도 별로 큰 해를 이 사회에 끼칠 수 없다. 그러나 지도자급이 정신적 사기를 치면 그 피해는 너무도 막대하다. 보지 않았는가? 더 봐야 하나? 아니면 더 당해봐야 아나?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누구의 이법도 아닌 하늘의 이법이다.
심리적 적폐청산이라는 것은 누구를 때려잡자가 아니다. 증오가 이 사회를 휩쓸어서야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과거와 현재에 안주하려고 미래를 발목 잡는 에너지를 약화시키고 강제로 제 자리에 서도록 만드는 작업, 서로 윈윈이 되도록 틀을 잡는 것, 그런 의미에서 김종인, 안철수의 개혁공동정부론은 사회상처치유적인 차원에서 기가막힌 구상이다. 이런 결정을 할 수 있는 지도자, 바로 안철수가 말하는 새 정치의 일환이다. 다른 후보들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구도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파격적 결정은 모든 분야에서 보게 될 것이다. 안철수가 당선 된 후 여의도에 일어날 빅뱅에 대해서도 새 정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사회상처치유적인 차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게 무슨 말일까?
필자는 한국인의 복잡한 심리, 극심한 상처와 상처의 갈등을 오랜 시간 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우리사회의 문제는 사회상처치유적인 차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진보 보수 안보 좌파라는 말도 안 되는 과거의 틀을 또 다시 들고 나와 국민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것은 미래로 나아가자는 게 아니라 과거에 부르던 노래를 계속 부르겠다는 정신적 게으름에서 비롯된 땡깡적 발상이다. 계속 같은 노래를 부를 것인가? 그런 발상으로 착한 백성들을 호도하지 말라. 심상정 후보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국민에게 말은 이쪽으로 하고 실제 마음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한다"며 "개혁 방향을 잃었다"고 말했는데...음... 심상정은 맞는 말만 하는 훌륭한 인물이지만, 심상정의 말은 시원은 하지만 만약 그 방법대로 한다면 불행하게도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역사는 단계를 거치는 수밖에 없다. 현 단계에서는 안철수와 김종인의 공동정부론만이 사회상처치유적인 방법으로 미래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필자는 본다. 해서 안철수의 말을 마치 양다리를 걸친 양 해석하는 것은 단계를 밟지 않고 건너뛰고 싶은 소망에서 나온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역사는 건너 뛸 수가 없다.
결론
‘성공하면 기쁘고 실패하면 기쁠 수 없다’ 이제마의 말이다.
우리는 안철수 현상이 어느 정도 성공하면 만족할까? (한 때 안철수 현상은 우리사회에 강한 바람으로 일어났다. 그 뒤 반기문 현상, 안희정 현상...등으로 크고 작은 그 바람은 이동하며 다녔다. 안철수 현상이 가장 크게 일어났기 때문에 대표적 사례로 들었지만, 다른 바람들도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총체적 집합체로서 안철수 현상이라는 표현을 썼다. 필자가 관심 있게 본 것은 불특정 다수의 형태로 움직이는 에너지들의 마음이다. 누가 그 마음들이 갖는 희망, 기대, 변화, 의문, 미래를 담아낼 그릇이 될까? 부르던 노래를 계속 부르지 말고 새로운 노래를 들려 달라는 그들의 소망이 빨리 왔으면...싶다.) 너무 많은 기대를 하면 안 된다고 본다. 허약한 긍정성을 강건하게 만들며 그 긍정성을 5~10%만 올려도 성공의 길, 바로 미래가 보일 것이다. 역사란 너무도 더디게 발전하는 면이 있어서 또 이 싸움은 바톤을 이어받으며 30년 정도는 싸워야 겨우 기본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안철수 현상에 기대를 거는 국민들은, 이 미션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6,70% 정도의 밝음으로 바라보고 응원하고 밀고 당기며 힘을 보태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이것을 100%로 무슨 백마 탄 초인 ‘비스므리’하게 신격화시키면 결국 실망도 크고 또 엉뚱한 심리적 늪에 빠질 수가 있다.
우리사회의 공적정신 즉 윤리성을 높이는 비율만큼 약자들의 심리는 한스러움을 벗어날 것이며, 동시에 강자들은 그만큼 마음의 평화를 얻을 것이다. 또 그만큼 통일도 앞당겨지지 않겠는가. 그리고 어떤 결론이 나든 그것은 현 단계 한국인의 실력임으로 너무 슬퍼하거나 가슴 아파 하거나 분노하거나 기뻐하지 말고, 그 단계에서 한 발 짝 앞으로 나가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싶다. 아직은 정신적 독립운동을 할 때이지 과실을 따 먹을 때가 아니다.
쉽게 해결하는 방법은 인간의 방법이다.
알 수 없는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로 하늘의 방법이다.
쉽게 해결이 되면 교육이 될 수 없다.
어렵게 해결 되어야 우리사회의 저 밑바닥부터 휘젓고 올라오지 않겠는가? 태풍이 한바탕 지나가면 쓸데없는 잔가지들
이 해결되듯 말이다. 세월 호와 최순실 사태로 한 바탕 태풍이 지나갔다. 이래도 과거로 회귀할 것인가? 이제 다 같이
일어나 패권으로 얼룩진 적폐심리를 뒤로 하고 사회상처치유적인 방법으로 미래로 나아가자.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천지신명의 가호가 있기를... 행운을 빈다.
첫댓글 고귀한 글 감사를 드립니다.
인간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라 인간은 이익이 생기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신하를 부릴 때 명예와 부를 주면서 다스리고, 신하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지도자를 돕는 상호관계에 있습니다. 지도자는 충성과 효도라는 명목으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인,의,예,지)가 없으면 인간이 아니라고 하여 통치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선비정신이 도도히 내려오고 홍익인간이라는 이념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질의 만능과 돈이면 최고라는 수전노에 의하여 모든 것이 변화되므로 오늘날의 결과가 나타났다라고 봅니다.
인문학이 아니라 사적인 정신으로 IQ로 암기만 잘 하면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기도 하고 남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재 사기와 횡령이 OECD에서 1위국가의 불명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님께서 주장하시는 사적정신과 공적정신을 들어 공적인 정신으로 IQ도중요하지만 EQ를 중요시하여 더불어 사는 사회를 밝게 살 수 있도록 인성을 기를 수 있는 인문학이 발전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소 눈문을 쓰셨네요
시간날때 찬찬히 읽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