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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 세영이는 자주 내 눈에 띄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공원에 갈 때마다 내 눈에 띄었다.
항상 그 곳에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그 아이가 있을 때마다 그 곳에 간 것일지도 모르지만.
세영이는 항상 내가 좋아하던 벤치의 맞은 편 벤치에 앉아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벤치는 둥그런 분수대를 등지고 앉는 곳이었고, 그 아이는 반대편에서,
분수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자리였다. 우리는 자주 마주쳤지만,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왜일까. 하지만 나는 공원에 갈 때마다 그 아이를 찾곤 했다. 녀석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을 인식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뭐, 자주 있었던 일이었다. 유현이가 나와의 약속을 잊어버린 것은.
약속장소는 여느때나 다름없이 내가 항상 앉아있는 벤치였고, 유현이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항상 하듯 두 시간 정도는 멀뚱히 앉아 있으려고 했다. 만약 유현이가 나왔다면,
그 시간 동안 비록 이야기는 나누지 않겠지만, 적어도 둘이서 산책을 할 시간 이니까.
일찍 들어가면 끊임없는 무료함이 나를 사로잡기 때문에.
그래서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는데,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저기요."
항상 말 없이 분수대를 바라보고 있던 그 아이였는데, 어쩐 일인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 했고, 그 아이는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생긋 웃었다.
그 웃음에, 잠시 내 얼굴이 붉어졌으리라.
"비가 쏟아질 거 같은데, 안들어가요?"
"그러는 그 쪽은요?"
"나요?"
"네."
세영이는 놀란듯한 표정을 짓더니-도대체 뭐가 놀라웠을까-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그 잘생긴 얼굴에 웃음을 머금는 것이 아직은 익숙치 않은 일.
나는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물론 붉어진 얼굴을 식히면서.
"나는 비 맞는 걸 좋아해서요. 하지만 그 쪽은."
"그럼 나도 비를 맞아 보지요, 뭐."
"헤에, 그렇겐 안 될텐데요."
그 아이의 눈이 예쁘게 휘어지며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왜 그렇게 자주 웃는 건지, 애써 식힌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 쪽은 비에 젖으면 옷이 몸에 착 달라 붙을걸요! 에헤헷."
"...무슨 생각을 하는 거에요!"
나는 짐짓 화가 난 척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 장난기 가득한 웃음 소리에 빨개진 얼굴 때문에
전혀 무섭지 않을 거라는 건 당연히 아는 사실. 그 때 세영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왔었다.
그리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요. 비맞는 거, 하나도 몸에 안 좋거든요."
"하지만..."
그 때 지은 씁쓸한 미소에 나는 궁금증을 느끼긴 했지만, 내게 내민 손만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지금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내가 항상 기다리는 이유중 하나는,
유현이가 '늦어서 미안해' 라고 말하며 뛰어올 거라는 막연한 기다림도 있었으니까.
내가 머뭇거리자 세영이가 내 손을 낚아채 나를 일으켜 세워 정문 쪽으로 끌었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놀란 나는 아무 반항도 하지 않고 끌려갔다.
물론, 따뜻하고 큰 손에 왠지 모르게 부끄럽기도 했다.
"걱정마요. 그 사람, 비 오는 데 찾으러 올 사람 아니니까."
그 때는 정말 많이 놀랐다. 내가 기다리는 이유를 세영이가 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했고,
또 왠지 비밀을 들킨 것 같아 세영이의 말이 띄는 성향을 알아채지 못했었다.
세영이는 내 집이 어느쪽인지 아는듯 했고, 나를 그 쪽으로 떠밀며 잘가라는 듯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몇 발자국 걸어가다 결국 멈춰 세영이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일거다.
나는 부끄러움이 많았으니까.
"이름이 뭐에요?"
"반세영 이에요!"
"내 이름은..."
"알아요! 유이진!"
내 이름을 크게 부르고는 미소를 지으며 '갈게요!' 하고는 세영이는 사라져버렸다.
먹구름이 끼어 어둑어둑해진 하늘 아래. 우리의 첫만남이 이루어졌다.
******
세영이를 두번째로 만난 건, 그 뒤로 1달정도 뒤였다.
오랫만에 유현이와의 데이트-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에서 세영이가 함께 있었다.
"이진아, 인사해. 내 친구, 반세영이라고..."
"안녕!"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세영이는 유현이의 입을 딱 막고는 인사를 건넸고,
나는 어색하게 인사하며 궁금증을 날려버렸다. 감추고 싶어하는 것을 알 필요는 없었으니까.
나는 살짝 고개만 숙이며 빙그레 웃었다. 세영이는 잠시 멍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크게 소리쳤다.
"와아, 웃으니까 무지 예뻐!"
"...고마워요."
또 내 얼굴은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나는 세영이가 중간에 빠져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영이는 중간에 빠져주지 않았다. 그에 약간 서운하긴 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유현이와 만날 때는 카페에서 차만 마시거나 공원을 산책하기만 했었는데, 오늘은 세영이가 끼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스티커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런 데이트는 처음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작은 손가방을 탈탈 털어보니 나온것은, 셀수 없이 많은 우리 셋의 스티커사진.
나는 몇가지를 앨범에 넣어두고 다른 몇가지는 어딘가에 붙여두었다. 물론, 핸드폰에도.
세영이도 함께 찍긴 했지만,
...유현이와 찍은 사진은 처음이었다.
*********
그리고 몇주가 지났을까. 아니, 몇달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나는 또 유현이를 공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앞에는 여전히 세영이가 있었고 말이다. 한시간쯤 기다렸을까. 세영이가 내게 다가왔다.
녀석은 내게 또 한번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요."
"...어딜요?"
아직까지 존댓말을 고수하고 있는 우리였다. 녀석은 내 손을 찾아 잡고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유현이 집에요."
"...! 거길 왜요?"
"... 이렇게 기다리고 있지만 말라구요."
앞만 보고 걷던 세영이가 나를 바라본다. 그 애절한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질 듯 했다.
"이렇게 기다린다고 누가 오는 거 아니에요. 직접 가서 말해요! 왜 안 오냐고,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맥없이 기다리고만 있는다고 유현이가 오지 않아요. 어서 가서 말해요.
약속 잊어먹었냐고, 왜 오지 않냐고."
"하지만..."
"가요. 그렇게 기다리는거 보기에도 안좋아요."
나는 등 떠밀려서는 공원에서 쫓겨나 버렸다. 나는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어짜피 가는거! 지금 가서 말하는거야! 두발 가득 힘을 싣고 힘차게 걸어가면,
벌써 유현이 집이 코 앞이었다. 나는 유현이 집의 초인종을 눌렀고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했다.
아무도 없는데 그냥 갈까? 하고 생각도 했지만, 어짜피 온거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어쩌다 용기를 냈는데, 포기할 순 없지. 얼마나 기다렸을까. 달이 뜨고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추워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면, 천천히
걸어오는 유현이.
"...어, 이진아."
"유현아."
"...웬일이야?"
"너 왜 안왔어?"
"응?"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용기를 내야한다!
"나랑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잖아. 왜 안왔어?"
"아...그건.."
"나랑 약속 있었던 걸 까먹은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한두번도 아니고!"
"아, 잠깐만..."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몰라? 알잖아! 근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다짐이 약해질까봐 두 주먹 불끈 쥐고 쉴 새 없이 소리를 빽빽 지르고 나면 정신이 돌아온다.
숨을 헉헉 내쉬면서 유현이를 보면, 유현이는 약간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유현이가 천천히 입을 여는데...
"...너, 몰라?"
"...뭘?"
"...세영이 말이야."
"세영이가 왜."
"세영이, 너 좋아하잖아. 몰랐어?"
유현이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저 놀랄 뿐.
"그래서 세영이가 항상 공원에 같이 있으니까, 그래서 너희 둘이 있으라고..."
"...거짓말."
"진짜야. 너 몰랐구나."
"...거짓말이지."
"세영이 맨날 너 뒤에서 바라보고 했잖아. 세영이가 저번에 우리 만날 때 같이 온거 기억나?
그 때 세영이가 나한테 말했어. 너 좋아한다고, 그래서 만나고 싶다고."
..거...짓말..
"이제 그만 좀 해. 우리 어려서 좋아했지만, 그 때는 어렸었잖아.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이야.
인생에 사랑 딱 하나 오는거 아니거든. 이제 그만해. 이제 그만 나한테 매달려."
"..."
"나도 이젠, 지쳐."
그 말에 멍하게 허공을 응시한다. 유현이는 그런 나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나는 한참을 그렇게 있다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긴다. 공원쪽으로. 왠지 그 곳에 세영이가
있을 것만 같았다. 모든 사실을 듣고 싶었다.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유현이의 집에서 조금 더
간 곳, 반대쪽 담벼락에 세영이가 기대어 서있었다. 나는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세영이 앞에서 멈춰선 나는 떨리는 입을 열어 말했다.
"...정말이야?"
"...뭘?"
"시치미 떼지 마. 듣고 있었잖아. 유현이 말이, 진실이냐구."
"...하."
세영이는 머리를 위로 스윽 쓸어올리더니, 내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고 부드럽게 끌어당긴다.
내가 아무 저항없이 따라가자 세영이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더니 나를 놓아준다.
"맞아. 널 좋아해."
"...왜?"
"...밤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무슨 소리야?"
"너는 기억 안날지도 모르겠다."
무슨 소릴까.
"우리 어렸을 때, 그 때도 나는 유현이 친구였어. 너는 몰랐지만."
"..."
"근데 내가 집을 잃고 어두운 밤거리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네가 나타났어. 달빛이 은은하게
퍼지는 밤배경을 등에 업고, 내게 와서는 집으로 가자고 나를 끌었지. 기억안나?"
"...기억나. 그게 너였는지는 몰랐어."
"그 때, 그 밤. 은은한 회색깔 배경이 그렇게 예뻤어. 그 배경을 등에 업고 있는 네가 너무도
예뻐 보였어. 그래서 너를 좋아하게 되었지."
"...하아.."
"미안해, 이제 다시는 네 옆에 있지 못하겠지. 숨겨서 미안. 하지만 널 사랑했어."
세영이는 나를 한번 꼭 껴안더니 내 뒤로 몸을 옮겼다. 한발, 두발, 세발. 세번 발을 옮겼을 때
나는 세영이를 불러세웠다. 아무도 잃고 싶지 않다. 인생에 사랑이 하나라면 그건 유현이겠지만,
인생에 사랑이 하나는 아니니까. 이제 유현이를 가질 수 없다면 다른 사랑을 받아들이고 싶었다.
사람은 사랑에 기생해 사는 작고 작은 존재니까.
"세영아."
"..."
"가지마."
"...왜?"
"나, 니가 싫진 않아."
"..."
"인생에 사랑이 하나는 아니래. 유현이는 자기 사랑을 하나 또 찾은 거 같은걸. 그렇지?"
"그래."
"그러니까, 나도 새로운 사랑을 찾겠어. 지금은 어렵겠지만, 나.. 널 사랑하도록 해볼게.
아니, 널 사랑할 수 있을거야. 내 사진 속에는, 유현이도 있지만 너도 있으니까."
잠시 그렇게 등을 맞대고 서 있던 우리들. 세영이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내게로.
나를 돌려세운 세영이가 내게 입을 맞추었다. 그래, 세영아.
나, 유현이를 잊진 않을거야. 내 첫사랑이었으니까. 하지만, 너는 놓치지 않을거야.
내게로 새롭게 온 사랑이니까. 우리 왠지 닮지 않았어? 지금 네 등에는 은은한 보름달의 빛이
퍼지는 밤이 업혀있거든. 우리 서로, 은은한 달빛이 스며든 밤에 사랑을 가지는거야.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니겠지만, 세영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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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이걸로 작가모집을 했다죠.
다시 보니까 왜이렇게 이상해보이지..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