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이해한 나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산물은 고독(孤獨)으로부터의 탈피(脫皮)였다. 홀로 몇 십년을 수양한 나에게 여자란 것을 모르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의 수련이었던 터라 어떠한 욕정(欲情)이나 인간에 대한 그리움 따위는 없었다. 허나, 알 수 없는 고독만은 낡은 철검하나가 대신해 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홀로 고독을 삼키며 그 고독을 검에 담았다. 숲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나이든 철목 한 그루가 있었다. 이제는 너무도 오래 살아 나의 키만큼이나 굵은 둘레의 몸집을 자랑하며 홀로 선 나무는 숲의 많은 여느 나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고독함이 마음 깊이 느껴져 왔다. 그 고독한 나무를 벗 삼아 대화를 나누다 그 끝없는 고독함과 그 가운데서도 굳건히 서 있는 태산같은 鐵木의 기세를 검에 담고 싶었다.
칠일밤낮으로 고민한 가운데 마침내 한 가지 검식을 창안해 내었다.
이름 하여 고독삼검식(孤獨三劍式)이라 했다.
총 열두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이 검식은 첫째 초식부터,
제 일 초식인 태산중검(太山重劍).
상대방으로 하여금 대지를 찍어누를듯한 태산의 힘이 무겁게 내리꽃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초식으로 중압적인 기세가 대지를 질타하는 중검(重劍)을 위주로 한 초식이었다.
제 이 초식은 고독월천검(孤獨月天劍). 밤하늘의 달을 보며 창안한 검식으로 비할바 없는 예리한 검격을 자랑했다. 신월형(新月形)의 날카로운 검강이 수십가닥으로 망을 이루며 폭사되어 나오며 상대방을 조여가는 초식이었다. 내공에 중점을 둔 초식으로써 시전자의 공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위력은 배가 되는 지극히 패도(覇道)적인 초식이었다. 나의 내공이 되는 공력은 인위적으로 자연의 기를 몸안에 가둔 것이 아니라 수련의 깨달음이 더해갈수록 본신지기가 강대하게 발전되어진 것이었다. 또한 자연을 이해함으로써 내게는 이미 내공이라하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막힘없고 끊임이 없는 무한한 자연을 통한 기의 공급. 그 것이 내 공력의 원천이었다.
마지막 초식 무극월강(無極月剛).
주자학의 설에 있어 태극에 처음 상태이자 우주의 근원을 뜻하는 무극(無極)을 기본으로 하였다. 무극, 즉 우주의 근원이자 최초의 혼돈인 혼원(混原). 혼원의 상태에서는 고독도 존재할 수 없으며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혼돈과 허무만이 존재하는 그 공간. 혼원무극의 그 공간은 내가 추구하는 가장 큰 이상이었으며 후에 의지검(意志劍)을 이뤄 파천무극검(破天無極劍)을 창안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그 무극을 바라보며 고독을 이겨내려 하는 마음이 담긴 검식이었다.
오직 허무함만이 존재하는 지극히 무심(無心)한 초식. 그 가운데에는 빈틈도 약점도 존재할 수 없다. 완전한 자연만이 존재할뿐. 그 초식은 자연체를 이룬 나였기에 가능한 초식이었다.
가장 완벽한 방어초식이자 가장 완벽한 공격초식이었다. 보통 세가지의 초식으로 이루어진 삼검류의 초식을 보면 일초와 이초의 합일로 이루어진 것이 삼초인 것이 지배적이다. 허나 내 초식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세 초식을 삼초합일했을 시에는 어떤 무공이 생겨날지는 그당시에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창안한 세 검식을 갈고 또 닦아 삼일 후에는 완전한 오성을 깨우쳤다. 자연체를 이룬 후에는 무엇을 보고 듣던 사물의 본질을 곧바로 파악하고 느낄 수 있게 되어 자연 성취도 빠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또한 나 자신이 느끼기에도 나는 너무도 검에 미쳐있어 고독이라는 이름을 딴 세 초식을 연마하며 고독한 마음도 한꺼풀씩 벗겨져 나갔다. 불가나 도가의 수양이 참선이라면 내 정신의 수양은 검이 대신하고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세상으로 나가기로 다짐했다.
지난 세월간 함께 해온 철목에는 내 검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난 세월을 연상케 하는 그 흔적들을 뒤로한 채 낡은 철검을 더러워진 천조각에 조심스레 감싸고 등에 매어 길을 나섰다. 내가 최강의 길에 어느정도나 더 다가섰는지 알고 싶었고 세상에 대한 분노와 또한 세상을 제압하고픈 혈기를 품에 안고 그렇게 길을 나섰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중 나의 기(氣)를 감지하고 친숙한 자연의 기를 느낀 동물들이 길을 따라와 주어 심심치 않게 내려올 수 있었다. 작은 청설모들이나 토끼들이 떼를 지어 내 뒤를 따르고 있었고 그들과 이야기하며 남은 고독들을 씻어내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길을 내려가는 중 등 뒤의 짐승들 중 특이하게도 뇌격(雷擊)의 기운을 지닌 짐승의 기가 느껴져 뒤를 돌아 보았다. 작고 검은 흑묘 한 마리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흑묘를 마주 보며 그 생김새를 살펴본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어릴적 아버지의 서재에서 흥밋거리를 찾아 책을 뒤적이다 여러 영수들에 관한 책을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를 주시하고 있는 그 흑묘는 분명 천년뇌령묘라 불리우는 영수중의 영수였다. 천여 년 간 응집되어온 천상의 뇌격의 기운이 천년에 한번 월식때에 지상에 내리는 때가 있는데 그 때에 그 뇌격의 기운을 맞아 엄청난 힘을 얻게 되는 영수중의 영수라 하였다. 뇌간에 깊이 박혀있는 붉은 보주에 뇌격의 기운을 저장하는 것이었다. 그 보주가 뇌격이 응집되어진 내단과 같은 것이었다. 그 전설상에서나 존재할법한 영묘를 발견한 나의 가슴은 터질듯한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영묘는 나를 바라보더니 갑작스레 뇌격의 기운을 쏘아냈다. 하늘까지 찌를 듯 뻗친 흑묘의 털에선 파직하는 정전기가 솟고 있었다. 갑작스런 공격자세에 마음을 가다듬고 있으려니 땅 속으로부터 강한 지뢰(地雷)의 기운이 느껴져왔다. 강한 뇌격이 지면을 통하니 위험을 감지한 짐승들은 제각기 도망치기에 바빴다.
용천에 기를 모아 내뿜으니 나의 몸이 어느새 흑묘의 뒤에 도달해 있었다. 애초부터 단전이란 개념이나 내공이란 개념 따위가 없었던 나는 내 본신자체가 하나의 단전이었으며 끊이지 않는 내공의 주머니였다. 때문에 나의 의지가 곧 기의 발현이었기에 생각하는대로 곧 흑묘의 뒤에 내가 있었다. 내가 서 있던 자리는 땅 속에서부터 솟아난 섬광과 같은 뇌격에 검게 그을려 있었다. 나는 곧 쌍장에 진기를 모아 칼날같은 바람의 힘으로 천년뇌령묘를 옥죄였다.
허공 중에 붙잡힌 뇌령묘는 벗어나고자 섬찟할만한 뇌격을 연달아 내뿜었으나 하나의 결계와 같이 형성된 나의 풍막 안에 갇혀 튕겨지는 뇌격을 고스란히 받아내다 결국엔 포기하였다. 바람의 막을 풀어주자 풀려난 뇌령묘는 내 어깨로 올라가 얼굴에 털을 비벼댔다.
나를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표시였다. 새로운 친구를 얻게 된 나는 한층 즐거운 마음으로 강호행을 계속했다.
산비탈을 내려와 그간 모아둔 짐승의 가죽들을 팔아 옷을 갈아입고 약간의 여비를 마련하여 한 객잔에 투숙하였다. 객잔의 이름은 삼룡(三龍)객잔이었다. 원래는 보잘 것 없는 이름이었으나 아주 오래전 무림삼성(武林三聖)이라 불리는 세 고수가 연이 닿아 그 길목을 지나다 그 객잔에 투숙했던 뒤로는 이름을 그렇게 바꾸었다고 했다.
객잔에 숙박비를 치르고 방안에는 짐이라고해야 낡은 철검뿐인 나는 새로 산 천조각에 말아 한구석에 놓아 두고는 어깨에 앉은 영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식사를 하기 위해 아래 층으로 내려왔다.
무엇을 시켜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아주 어릴적, 술은 문방사우(文房四友)에 더하여 문방오우(文房五友)로 불리워야 한다 주장하시며 늘 책과 함께 사시면서도 술을 떼어놓지 않으시던 호탕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주점에 따라갔던 기억을 더듬어 아버지가 즐겨 드시던 죽엽청과 국수를 시켜 놓고는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객잔 입구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