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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모호한 설렘>
“그래서, 렌이 타니구치한테 엿 먹을 동안 니들은 뭐했어? 친구라는 것들이 버젓이 눈만 뜨고 불난 집에 불구경만 한 거야?”
아키의 목소리는 상당히 앙칼지게 이뤄졌다. 오후 강의를 마친 신지와 아키, 타쿠미는 도쿄대 근처에 있는 우에노(上野)공원으로 향했다. 우에노공원은 일본 최초의 지정공원 중 하나인데 도쿄를 대표하는 공원이자, 도쿄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아주 큰 공원이다. 여름의 초목을 띠고 있는 우에노공원은 휴일이면 붐비는 인파들로 넘쳐나지만, 평일 오전 중에는 여유롭게 공원을 둘러볼 수 있다. 또 건물 자체로도 문화재 가치가 높은 박물관이나 미술관, 동물원까지 있어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은 다방면으로 볼거리와 재미를 구경할 수 있다.
아키 역시 문화적 취미 생활이 몸에 배 있는 터라 가까운 곳에 있는 우에노공원의 미술관을 찾았다. 우에노는 평상시 홈리스들의 천국이지만, 역 앞의 허름한 시장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그다지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은 1년내내 매우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어, 아키의 흥미를 돋울만한 요소들이 참 많았다. 그 중에서 아키는 국립서양미술관을 선택했다. 입장료를 내지 않고도 볼 수 있는 야외의 로댕 조각품을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로댕의 지옥의 문을 보기 위해.
“그 자식이 자초한 거라니까 그러네. 우리는 입 다물고, 빠져 주는 게 그 상황을 위해 돕는 일이었어.”
“아! 정말 굉장해! 볼 때 마다 감탄사가 흘러나오는 군. 역시 조각품은 직접 와서 봐야 한다니까. 실제 크기를 보면 압도되어 버리고 마니까.”
“아키, 내 말 듣고 있어? 렌은…….”
“타쿠미, 저기 윗부분 정중앙에 있는 조각이 바로 ‘생각하는 사람’ 이야. 멋지지?”
넌 멋질 게 그렇게 없냐. 타쿠미는 신경질적으로 아키를 보며 으르렁 거렸다. 자신이 왜 이 선머슴 같은 계집에게 변명 따윌 늘어놓는 지 의문이었다. 타쿠미는 쳇, 실소를 터트리며 궁시랑 거리다 결국은 체념해 버렸다.
“어느 책에선가 이런 말을 본 적 있어. ‘지옥의 문 앞에 서 있노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오히려 지옥인 듯 느껴진다.’ 라는.”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니까.”
“맞아. 우린 한 세상에 살면서 간혹 천국을 가기도 가고, 지옥을 맛보기도 하지.”
신지의 말마디에 아키가 기분 좋게 맞받아쳤다. 오후라 그런지 노부부나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여자, 그리고 큰 개와 산보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중에, 한 곳에 머물러 재즈공연을 펼치고 있는 사람과 커다랗게 나 있는 연꽃잎이 무성한 연못으로 아키가 눈을 돌렸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뜨거운 열에 숨조차 쉽사리 내쉴 순 없었지만 다소 평안해 보이는 사람들과 공원의 둔치는 그야말로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아키는 차분히 내려앉은 머리를 쓸어내리며 벤치를 찾았다. 공기는 더웠지만 참지 못할 만큼은 아니다. 신지와 타쿠미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 벤치에 나란히 기대어 앉았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면 이곳에도 방학이란 커다란 축제가 내려앉겠지. 그 생각에 아키는 두근두근 뛰는 왼쪽 가슴께로 살포시 손을 올렸다.
“왜, 가슴 아파?”
아키의 행동에 타쿠미가 별 뜻 없이 물었다.
“아니, 심장이 뛰잖아. 두근두근.”
“안 뛰면 죽어.”
“바보야, 이건 설렌다는 뜻이야. 넌 낭만을 몰라!”
타쿠미는 아키를 흘겨보곤 특유의 행동으로 입을 이죽거리며 궁시랑 거렸다. 그깟 낭만, 알아서 뭐한다고.
“그래도 아사상이 있어 걱정은 덜었잖아.”
“쇼리가 없어도 렌은 무난히 해낼 걸? 그리고 신지, 왜 렌이 타니구치한테 엿 먹었을 지 생각 좀 해 봐.”
“그 자식이 자초한 일이야.”
“아니, 그건 아닐 거야.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라며, 아키는 신지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분명, 알고 있어도 말 해주지 않겠지만. 하지만 신지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보나마나 타니구치의 속물근성에 속이 뒤집혔을 테지. 단지 그렇게만 생각하고 싶었다. 그리고 믿고 싶었고. 미즈키가 연루됐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맞아. 그리고 신지 넌, 용기가 너무 없어.”
“왜 잘 나가다 그쪽으로 빠져? 나 용기 없는 거 몰랐어?”
“저 자식, 삐쳤다.”
“그러게. 타쿠미는 신지의 저런 행동 닮지 않길 바라. 여자로서 저런 남자 그리 달갑지 않다고.”
“젠장. 아주 이럴 때만 죽이 잘 맞는군.”
타쿠미와 아키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따 렌한테 전화해볼까? 우리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지 모르잖아.”
“우리가 없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보는데, 난.”
“확실히 그럴지도.”
높게 뜬 태양을 쳐다보는 세 사람의 시선은 필시 다른 마음이 더해졌다. 하지만 그 후로 그들은 말을 잇지 않고, 각자 걸음을 달리했다. 아키는 부티크 숍으로. 신지는 집으로. 타쿠미는 오늘 밤을 기약하기로 한 낯선 아무개에게.
미즈키의 연구실은 다시 한 번 쑥대밭이 되어갔다. 요 전번 완성된 논문은 그야말로 대성을 이뤘지만 그녀의 현 심정은 개죽을 쒀도 모자랄 지경에 이르렀다. 미즈키는 현재 타니구치를 취조할 분위기를 조성하며 맘껏 그를 농락할 참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타니구치의 변태근성은 하루가 멀다 하고 미즈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들리는 소문으론 오늘 렌의 지각으로 타니구치가 그를 괴롭혔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렌이 자신의 조카라는 걸 버젓이 알고 있는 그가, 물론 가만히 있을 놈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그를 괴롭힐 이유 또한 없었다. 미즈키는 이런 타니구치의 비뚤어진 마음가짐을 박살내든, 바로 잡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헌데,
“미즈키 교수, 지금 날 취조할 생각이라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거요.”
“어머~! 타니구치 교수님은 내 조카에게 그런 식으로 벌을 내릴 수나 있고요?”
“벌이라니, 당치도 않소. 난 그저 준이치 의원의 여식의 실력이 궁금했을 뿐이오. 오해는 하지 말게.”
“상당히 오해할 만한 소지죠.”
미즈키는 여왕벌처럼 맹렬하게 가늘게 뜬 눈으로 대번 타니구치를 쏘아보았다.
“우리, 이런 시시콜콜한 얘긴 집어치우고 우리 장래에 대한 얘길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
“우리의 장래라뇨? 타니구치 교수의 혼자만의 장래겠죠.”
“마음을 숨기고 있군.”
“제발 그 주둥아리 좀 닥쳐주시죠, 타니구치 교수님!”
“앙칼진 여자가 따로 없군. 원래 난 눈물이나 찔끔찔끔 짜는 여자보다 미즈키, 당신 같이 톡 쏘는 여자가 더 매력있다 생각하오.”
“오호! 그러셔서 경영학부 여학생들을 만지고 느끼고 하는 건가요? 자신만의 톡 쏘는 여잘 찾기 위해?”
“그건 오해요. 내가 섹스와 돈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단지 그 이유 하나로 여학생들을 만지고 느낀다는 생각은 좀 삼가주었으면 좋겠는데?”
“들리는 소문이 너무 사실적이어야 말이죠, 타니구치 교수님.”
타니구치는 껄껄, 호탕하게 웃으며 미즈키를 쳐다보곤 음흉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래, 저 눈빛! 그 눈빛 좀 제발 어떻게 할 수 없어요? 미즈키가 꽥 소리쳤지만 타니구치는 이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신의 영역 밖이라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했다. 사실 타니구치의 눈빛이 상당히 변태적이고 느끼한 건 그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래서 그는 퇴근시간을 피해 대중교통을 이용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닐 정도다. 언제는 한 번, 지하철에서 변태로 내몰린 적도 있었다. 여성의 허벅지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분명 자신의 사무용 가방임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식이 대부분이니, 그 부담스런 눈빛이 어디서든 장애가 되는 건 마찬가지의 얘기였다.
타니구치는 미즈키를 쳐다보았다. 앙칼진 고양이 같으니, 저런 여자가 바로 쉽게 질리지 않고 매력이 솔솔 풍겨 나는 모르핀 같은 여자지.
“언제 술 한 잔 합시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내가 왜요?”
“어제는 그 쪽이 먹자하지 않았소. 다음엔 내가 먹자 해야 도리가 아니던가?”
“글쎄, 그런 도리는 처음 들어보는 걸요?”
“그냥 술 한 잔 하자는 것뿐이오.”
“저번처럼 날 더듬으며 끝내는 덮칠지도 모르는 비상식적인 인간과는 더 이상 한 자리에 있고 싶지 않네요!”
“조카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당신을 닮았군.”
“실질적으론 오빠의 아들이지만 키운 건 내가 키웠으니까요.”
“힘들었겠군.”
“힘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즐거웠죠.”
“그럼 기대하겠소.”
타니구치는 말이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대하지 말라고요! 난 당신 같은, 뱀 같은 남자완 더 이상 상종을 안 할 테니까!”
“당신 조카에게 기대한다는 거요. 미즈키, 기대는 오히려 당신이 하는 것 같군. 난 이만 가보겠소. 딸아이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아, 선물을 보러 가봐야겠군. 혹시 시간되면 같이 가지 않겠소? 저녁은 내가 사지.”
“차라리 시간당 5천 엔 하는 데이트 메이트나 알아보지 그래요? 그 쪽이 더 유혹하기 수월하고, 쉽고 편리할 텐데.”
“그것도 꽤 좋은 생각이군. 충고 고맙게 받지, 그럼.”
연구실을 이제 막 빠져 나가는 타니구치의 뒤통수 역시 좋게 보일 리 없다. 미즈키는 쥐고 있던 펜을 아작아작 씹어 삼킬 태세로 닫힌 문짝을 맹렬히 노려보았다. 이 빌어먹을 자식! 미즈키는 뜨끈 미지근한 물을 단번에 갈아마셨다. 그도 그럴 것이, 타니구치와 소싯적 연애했을 때의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가 유부남에 애까지 딸려 있는 가정을 이룬 남자였다는 사실을 안 건 교제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이 사랑하는 터였고, 쉽사리 마음을 정리한다는 건 그녀에게 상당히 곤욕스런 일이었다.
그와 헤어지고 난 뒤, 타니구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와 이혼했다는 사실이 파다하게 떠돌았다. 그래도 그와는 다시 만나지 않았다. 타니구치의 끈질긴 구애에도 불구하고. 아마 그러는 쪽이 자신과 타니구치, 그리고 그의 딸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의 생각은 변함없었다. 물론, 반년 전 술에 취해 그와 혼미한 정신에 몸을 섞었다는 끔찍한 기억만 빼면. 미즈키는 다시 논문준비를 위해 급급히 정신을 챙겼다. 타니구치 같은 얼간이 자식에게 신경을 쏟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일본 도쿄를 대표하는 하라주쿠(原宿)는 젊음을 상징하는 거리다. 타케시타(竹下) 거리의 오래된 구제 숍에서부터 오모테산도(Omote山も)의 명품 브랜드 숍. 우라하라주쿠(ウラ原宿)의 개성이 넘치고 최신유행이 즐비 하는 가게들. 또 다양한 패션 부티크와 음식점, 캐릭터 점들이 굉장히 많은 곳이다. 주말에는 일본 젊은이들이 근처 요요기공원에 모여 코스프레를 즐기기도 한다. 그만큼 하라주쿠의 거리는 코스프레들이 종종 관광객의 시선을 끄는 역할을 하고 있다.
강의가 파한 뒤 렌은 쇼리와의 약속대로 하라주쿠로 향했다. 그녀는 아직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겠지만 렌은 그녀가 끝나기를 고대하면서 남는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판단했다. 하라주쿠에 있는 유니클로 매장으로 가기 위해 그는 더욱 과감히 엑셀을 밟았다. 출발하기 전, 유니클로 매장에 전화를 넣었는데 다행히 하라주쿠에 새로운 방식의 매장이 오픈했다는 기막힌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매장에 들어선 렌은, 이곳에서는 유니클로 티셔츠만 전문으로 판다는 매니저의 말에 단연 혹할 수밖에 없었다. 매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단연 젊은이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아이템들이 참 많았다. 바닥은 다소 난잡할 수 있겠지만, 만화책의 그림이라든지 대사를 활용한 짧은 이미지 컷이 예쁘게 박혀 있었고 뭣보다 더 중요한 건 조금 독특한 방식으로 티셔츠를 진열해 판매하기 때문에 유명해 졌다는 것이다. 하기야, 티셔츠만 판매한다고 해서 유명해질 리는 없겠지만.
“이게 뭐죠?”
매장 점원에게 렌이 물었다. 다소 신선한 아이템이라고 나 할까, 마치 편의점 냉장고에 들어있는 음료수 캔 같은 것들이 벽 전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티셔츠에요. 저희 매장에서만 그렇게 판매한답니다. 여기, 이 투명한 플라스틱 병 안에 티셔츠가 들어 있어요.”
확실히 점원의 말대로 플라스틱 병 안엔 티셔츠가 들어 있었다. 상당히 독특했다. 렌은 신기하면서도 기발한 유니클로의 아이디어에 감탄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사진 몇 장 찍고 싶은데…….”
“네? 네, 그렇게 하세요.”
흔쾌히 허락한 점원의 말에 렌은 들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로 매장 이곳저곳을 사진 속에 담았다.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에 두고 다닌 게 이럴 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약 500여 종류의 달하는 각기 다른 티셔츠, 자판기형식으로 되어 있는 버튼을 꾹 누르면 앞에 진열 된 티셔츠가 캔처럼 아래로 떨어진 뒤 저절로 뒤에 있는 병들이 앞으로 나오는 방식이다. 렌도 다른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예쁜 캐릭터가 그려진 셔츠를 골라 버튼을 꾹 눌렀다.
매장 전체의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밝고, 무엇보다 전광판처럼 밝은 파란색과 붉은 색 계열의 불빛이 반짝여 매장 안을 더 세련되고 은은하게 돋보이게 해주었다.
렌은 이제 막 거리로 나와 허리춤을 징, 울리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벌써 30분 전에나 왔을 쇼리의 메시지가 긴 장문으로 와 있었다.
「혹시 저녁 안 먹었으면 잠깐 우리 레스토랑에 들렸다 가지 않을래? 내가 살게. 그 간 엔도 군한테 도움도 많이 받았으니까. 또 오늘 일은 미안하게 생각해. 올 생각 있으면 출발하기 전에 연락 줘.」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쇼리의 여우같은 행동에 박수갈채라도 보내고 싶다. 남자 마음을 이리도 영리하게 쥐고 흔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차피 하라주쿠에 온 이상, 그녀를 만날 생각이었다. 렌은 연락을 달라는 쇼리의 메시지를 가볍게 씹고, 그녀가 일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직행했다.
거리는 온통 10대와 20대의 젊은 열기로 들썩였다. 한국의 서울 거리로 치자면 명동에 가까웠는데, 하라주쿠는 특히 옷가게가 가장 많이 즐비 했다. 가격은 천지차이지만 독특한 패션 스타일의 젊은이들이 이색적으로 보이는 거리이기도 했다. 골목골목을 지나 그녀가 있을 만한 패밀리 레스토랑을 찾았다. 먹 거리 역시 유명해선지 하라주쿠의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면 단연 한 곳뿐이 있지 않다. 렌은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매장을 응시하며 걸었다. 곧, 도쿄대 퀸이 저곳에서 일한다는 얘기겠지. 그는 ‘사이제리아’라는 간판이 귀엽게 걸린 출구로 가볍게 발돋움 했다.
“어서 오세요!”
활기찬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아직 저녁을 하기엔 다소 이른 시간이지만, 빼곡하게 들어선 자리는 만석에 가까웠다.
“렌?”
자리를 찾는 렌을 반갑게 맞이하는 낯익은 목소리. 쇼리. 예쁜 유니폼에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그녀가 빠르게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짧은 스커트와 남방, 그리고 허리춤에 꽂힌 필기도구를 지닌 채 옅은 미소로 그를 쳐다보았다. 조막만한 그녀의 이목구비가 더 빛을 발한다 할까……. 학교에서 본 그녀와는 사뭇 다른 이미지였다.
“어떻게 온 거야?”
“그냥 짐작. 자리는?”
“아, 조금만 기다려 줄래? 미리 연락 해줬더라면 더 좋았을 걸……. 지금 만석이라 기다려야 되는데 어쩌지?”
“괜찮아, 자리 나면 말해 줘.”
“고마워. 이리 와, 간이 의자라도 좋다면 안내할게.”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곧 쇼리의 뒤를 따랐다. 하나로 묶은 머리는 그를 보며 반갑다고 말하는 듯 보였다.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비단보다 더 곱게 느껴지는 찰나의 순간. 렌은 그녀가 안내하는 간이 의자에 앉아 만석이 얼른 풀려나길 기다렸다.
해가 풀리고 붉은 석양이 하늘을 뒤덮었다. 제법 한가한 시간을 이룬 쇼리는 렌을 정식 테이블로 안내했다. 아무리 밥값을 그녀가 내는 거라지만 렌은 그녀의 의사에 동의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손님으로 온 것이고, 뭣보다 여자에게 얻어먹는 고상한 취미 따위 갖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고학생이라는 사실도 비롯됐지만 예의가 아닌 것 또한 맞았다. 그 대신, 쇼리에게 제일 맛있는 메뉴를 추천 받기로 서로 합의를 맞췄다.
일본 패밀리 레스토랑은 대부분 정기적으로 모여 식사를 하는 문화가 일반적이지 않고, 한국처럼 여럿이 모여 식사를 하는 경우도 드물다. 해서 혼자서 간단히 밥을 먹어도 어색하지 않고 편하게 식사하는 게 일본의 식문화다. 그렇기에 패밀리 레스토랑에 온 손님들도 대부분은 혼자나 소수의 사람이 식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거기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패밀리 레스토랑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메뉴 역시 일본식 퓨전으로 섞인 것이 많다. 저 가격이라 그런지 렌 또한 부담 없이 그녀에게 추천을 받고자 했더랬다.
“마실 거는 간단한 걸로 줄게. 드링크 바는 저 쪽에 있으니까 다 먹으면 리필하면 돼. 무한리필이니까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또…… 음, 호타테(가리비) 정식 먹을래? 대부분 사람들이 그거 시키거든. 아니면 여기 토마토 크림스파게티랑 샐러드, 스프는 어때?”
“네가 마음에 드는 걸로 갖다 줘.”
“엔도 군, 그러다 내가 맛없는 메뉴를 가져다주면 어쩌려고?”
“맛없는 것도 있어?”
“이거. 버섯 불고기 덮밥이랑 사라다 세트는 영~ 아니거든.”
그녀는 허리를 살짝 숙여 렌에게 귓속말을 하듯 속삭였다. 아무래도 점장의 눈치가 따갑게 느껴져 그런 가보다. 렌은 목덜미를 훑고 아래로 길게 떨어지는 쇼리의 머리끝을 쳐다보다, 급히 시선을 올렸다. 초롱초롱 영롱하게 빛나는 소녀의 설렘처럼 그녀의 눈동자 또한 소녀 못지않은 눈을 하고 있었다. 가는 목과 그녀의 오물거리는 입술은 여전히 귀여웠다. 그는 살짝살짝 현기증이 일기 시작했다. 아랫도리가 뜨거워지는 것 마냥 입 안에선 갈증과 뜨거운 숨이 거칠게 터져 나왔고, 바싹바싹 침이 말랐다.
“아무거나…… 시켜.”
“아, 응. 그럼 곧 갖다 줄게. 기다려.”
먼저 렌이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정말 애간장 녹이게 만드는 군. 몹시 긴장됐다. 이렇게 긴장되기도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쇼리가 돌아가고 주방 바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저마다 쇼리를 붙잡고, 렌에 대해 코치코치 캐묻기 시작한 것이다. 반반한 남자 손님이 와도 음식점 내 규칙상 손님에게 대시하는 것은 금물이기 때문에 모두 기대가 한껏 부푼 상태였다.
“그냥 같은 학교 클래스메이트야.”
사실이지만 그녀는 어떠한 질문에도 모두 같은 답을 내렸다. 소개시켜 달라는 직원의 말엔,
“엔도 군한테 물어볼게.”
라며 상냥하면서도 아리송한 답을 주기도 했다. 기대에 들뜬 아이들은 저마다 그녀의 대답에 환상을 이루기도 했다.
폐점시간이 이제 막 다가왔다.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쇼리는 저를 찾아온 친구를 위해 간간히 드링크를 리필 해주었다. 그리고 더 기뻤던 건 무엇보다 막차를 타기 위해 죽기 살기로 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차 안에서 여러 가지 말을 늘어놓았다.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아이들의 소소한 얘깃거리라든지 아니면 음식은 어땠냐는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를 말이다. 곧이곧대로 응답해주는 덕에 어색한 기색을 몰고, 신코이와까지 가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쇼리가 사는 집, 담장 옆에 차를 세운 렌은 쇼리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쥐죽은 듯 고요한 것은 그가 사는 지유가오카뿐이 아니었다. 신코이와의 하늘 역시, 별은 총총 빛나 있었고 뭣보다 깜깜한 집 안을 불도 키지 않은 채 능숙하게 걸어가는 그녀를 보고 살짝 놀라기도 했다. 5평 남짓한 집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 그는, 먼저 들어가 불을 키고 자신을 맞이하는 쇼리를 쳐다봤다. 5평도 생각만큼이나 작지는 않네. 식도구들은 하나 같이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고 바닥엔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다다미를 밟는 느낌이 무척 새롭다.
“할머니, 계시다고 하지 않았나?”
렌은 고요히 내려앉은 적막을 무너뜨리고 먼저 입을 달싹였다. 할머니는 저기, 방안에 계셔. 지금은 주무실 거야, 네가 온다고 말해놨으니까 안심해. 라며 그의 궁금증들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집안은 좁지만 후줄근하거나 형편없진 않았다. 그녀 나름대로의 매력처럼 안락하고 소박하지만 예뻤던 것 같다. 쇼리는 렌을 자리에 앉히고, 구석에 쳐 박혀있는 가방을 끌어왔다. 마루에 작은 상과 허름한 노트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마루가 그녀의 방처럼 여겨지는 공간인가보다.
“아까 일하면서 유니클로에 대해 좀 알아봤어. 같이 일하는 동료 하나가 그 매장에서 일하는 친구를 알고 있다고 해서.”
그러면서 그녀는 조그만 수첩에 빼곡하게 적은, 깨알 같이 작게 새겨진 꼼꼼한 글씨를 그에게 내밀었다. 렌은 그녀가 건넨 수첩을 세심하게 훑어보았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프레젠테이션을 짠다는 것 또한 무리가 있었다. 며칠 더 조사하고 인터넷으로 홈페이지라도 뒤적거려야 알겠지만 쇼리는 정말 도쿄대 브레인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새삼 놀라웠다. 일할 때는, 일만 열심히 할 줄 알았는데…….
“아까 하라주쿠에 있는 유니클로 매장 가서 찍은 거야.”
“와! 독특해! 다른 매장이랑 너무 다르다.”
“실제로 보니까 더 그래. 자판기로 셔츠 뽑는 것도 상당히 센스 있는 것 같고.”
“나중에 한 번 가봐야겠다. 사진 너무 예쁘게 나온 것 같아.”
“이거, 아까 매장에서 뽑은 거야. 받아.”
렌은 아무렇지 않은 척 유니클로 매장에서 뽑은 플라스틱 병을 그녀에게 건넸다. 콜라 캔처럼 투명한 병 안에 담겨 있는 하얀 셔츠에 캐릭터가 예쁘게 새겨진 티셔츠. 좋아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첨에 머뭇거리다가도 금세 그가 건넨 병을 받고 활짝 웃어주었다. 처음이라고 했다. 친구에게 선물 받는 게.
쇼리는 그가 준 병 안에 든 셔츠를 꺼내고 얼른 자신의 몸 위로 맞대보며,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고가의 비싼 선물도 아니었고 무심코 그녀가 떠올라 의미 없이 산 것이었다. 사실 그도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명품 브랜드가 아니라 집에서 가볍게 입을 수 있는 천조가리 따위에 기뻐하는 그녀를 보며 새삼 놀라웠다는 게 더 그의 마음을 끌었다.
“비싼 거 아냐.”
“비싼 게 아니라서 더 좋아. 고마워, 렌. 너무 예쁘다. 잘 입을게.”
마루엔 큼지막한 미닫이문과 정면으로 나 있는 조그마한 마당이 있었다. 선풍기도 낡고 허름해서 마당에서 안으로 바람이 들어올 수 있게 문을 활짝 열어놨는데, 그 바람이 너무 시원하고 상쾌해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고 들떠있었다. 그녀가 열심히 설명하는 발표문에 관한 내용도 사실, 귀에 잘 들어오지 않은 얼굴이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열심히 귀 뒤로 넘기길 수차례. 렌은 그 부드러운 머리칼을 그만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렌의 영롱한 눈빛. 쇼리는 말끝을 흐리고, 느지막이 웃었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니?”
그래서 일까. 렌은 저도 모르게 가까이 앉은 그녀의 머리칼로 손을 올렸다. 그 바람 탓인지 쇼리도 옅게 띄운 미소를 지워버렸다.
분명한 건 기분 탓은 아니란 거였다. 혹시, 자신도 쇼리처럼 ‘한국인’ 이라는 데에 끌린 것일까, 잠시나마 생각했었다. 엄마가 한국인이라서, 엄마를 대신할 여자를 찾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그래서 대리만족으로라도 쇼리에게 그 느낌을 받고자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건 아니다. 그랬다면…… 분명, 이렇게 가슴이 뛰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렌……?”
손 끝에 닿는 그녀의 머릿결이 너무나도 부드럽다. 할 수만 있다면 내일도, 내일 모레도, 그 다 다음 날도, 계속 만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갈증은 절대 시들시들해지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핑핑 도는 현기증이 몽롱하리만큼 기분 좋았다. 머릿결을 따라 렌의 손 역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알 순 없지만 왠지 모를 은은한 장미향이 피어나는 것 같은 기분.
그는 느지막이 입을 달싹였다.
“이름이 뭐야?”
“이름? 쇼리……. 왜 그래? 알잖아, 내 이름.”
“그런 이름 말고, 네 진짜 이름.”
맞아, 네 진짜 이름. 한 번…… 불러 보고 싶다.
조그만 틈새를 보이며 쇼리의 입은 열릴 듯 열리지 않을 듯 꽤 망설이는 기분이 들었다. 촉촉하게 나 있는 그녀의 귀여운 입술로 시선을 달리하던 렌은, 그녀가 천천히 발음하는 목소리와 입을 따라 그녀의 말을 자신의 가슴 깊이 새겼다.
누구든 그녈 보면 만지고 싶다고. 갖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분명 자신만이 갖는 생각이 아닐 것이다. 요루이치도 그런 생각으로 그녀를 곁에 두고 있었던 거겠지. 만인의 연인 따위는 필요 없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연인이 필요했다.
“제이. 윤……제이.”
“제이…….”
제이…… 제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 아사 쇼리라는 가짜 이름보다는. 그래서인지 그녀를 몇 번이고 진짜 이름을 붙여, 불러주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낯간지러워 할 수 없는 자신의 두근거리는 마음이 그 상황을 더욱 고립시키는 것 같아, 그만 그녀의 머릿결에서 손을 떼버렸다.
“뭐가 묻었길래…….”
“아, 응. 그렇구나. ……하하.”
“그거 버릇이야?”
“응? 뭐가?”
“아, 응. 하는 거. 말할 때마다 매번 그러는 것 같아서.”
“아…… 응, 버릇이야. 좀 웃기지? 고친다고 나름 노력하는데 잘 안 돼. 말할 때마다 금세 까먹어. 할머니한테도 매일 혼나, 이것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바보 같고, 또 못 배운 애 같다고…….”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모(某)로 꺾었다. 그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입 주위에 살짝살짝 들어가는 조그만 보조개가 유독 눈에 띄었다.
“버릇, 귀엽다.”
어색함을 이겨내고자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 지껄였지만 진심이 담긴 한마디였다. 렌의 한마디에 쇼리는 ‘아, 응. 고마워.’ 라며 얼버무렸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던 건 바로 그들 사이에서 교묘히 도는 어색하고도 미묘한 감정이란 녀석이었다. 평소처럼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나갔지만 모호함만은 어떻게 수습되지 않았다.
그 날 밤, 난생 처음 서로의 존재를 다시 각인했다. 바람이 몹시 선명하게 불어와 수줍게 웃는 얼굴도 마주치는 눈빛도, 복숭아처럼 발개진 홍조 띈 뺨도 그들의 눈엔 설렘과 모호함이라는 감정으로 자라났다.
어슴푸레한 새벽 녘, 책상 위에 엎드려 잠든 그녀를 말없이 쳐다보던 렌은 옆에 놓인 담요를 펼쳐 그녀의 등을 덮어주었다. 조그만 틈새를 보인 문을 활짝 열고 좁은 마당으로 나가 담배를 붙여 피웠다. 보아하니 대문 하나에 여러 가구(家口)들이 모여 사는 것 같다. 집은 좁지만 대문 하나에 여러 집단이 사는 게 더 온화하고 소박하다는 생각을 했다. 단 한 번도 가정이라는 걸 완벽히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부러웠다.
“후우…….”
한산한 새벽은 늘 을씨년스럽다. 그러면서도 입 밖으로 솔솔 흘러나오는 웃음은, 그칠 줄 몰랐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베베님 언제나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정말 제 글을 보고 있으면해지네요. 엉엉.
아일님이 지켜봐주시다니.. 행복해요
잘 읽고 갑니다~~ 아 너무 좋아요♡♡ 읽는 제가 두근 두근 거리네요 ㅠㅠ
감사합니다, 저도 두근두근 거리고 싶어요..ㅠ_
재미있어요~~~아정말이런소설좋아합니다!
꺅 감사합니다, ><
베이비페이스님 저 일편부터달려왔는데 무지잼있어요 진짜 오랜만에 좋은소설찾은것 같아요 ㅋㅋㅋㅋ 암튼화이팅하세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