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지난 겨울은 - 아직 겨울이 다 간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부르고 싶다 - 워낙 춥고 눈이 많이, 그리고 자주, 와서 교회 주차장이 미끄러울 때가 많았다.
아직도 사방이 캄캄한 새벽 5시부터 부지런한 교인들 몇 명이 오기 시작하는 기도회에는 밤새 낮은 기온으로 주차장 주위의 습기가 바닥에 다 몰린 듯 군데 군데 얼음이 살짝 얼어 더욱 위험해서 교회사찰 겸 예배수종원으로 봉사하시는 L장로님은 소금통을 붙잡고 사셔야 했다. L장로님은 80이 다 되시는데 모태(母胎)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은 모범신앙인이시다.
그런 와중에 연초(年初)부터 젊은 여자 성도 한 분이 이제 두어살 먹은 딸아이를 데리고 새벽기도에 참석하기 시작을 했다. 무슨 연유인가 주일 낮 예배나 수요일 또는 금요일 저녁 예배에는 참석치 않고 주일 새벽기도회에만 참석을 하는데 아직 잠이 덜 깬 아이를 데리고와서 맨 앞자리에 앉고, 딸은 양탄자 바닥에 엄마가 자신의 오바를 한 쪽은 요로 깔고, 다른 한 쪽은 이불로 덮어주면, 마치 지퍼를 연 슬리핑백(sleeping bag, 寢囊)속에 든 아이처럼 쌔끈쌔끈 잠을 잔다.
한 번, 두 번, 세 번... 꾸준히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던 이 자매님은 지난 달부터는 매월 첫 주일 새벽에 교회에 오면 먼저 헌금 봉투 하나를 얌전하게 강단위에 얹어놓는다. 겉봉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적고 그 밑에 'K아무개'라고 한글로 이름을 썼는데, 그 이름이 남자이름 같기도 하고 여자이름 같기도 하여 분별이 안 된다.
기도회 예배가 끝나고 각자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에 그 자매님이 언제나 남보다 일찍 나가는 바람에 미처 묻고 말하며 신원파악을 할 틈이 없었다. 예배당 초입에 당일의 예배순서지가 있으니 본인이 그것을 보고 연락을 해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을 편히 갖고 있던 참이었는데 L장로님이 내게 먼저 말씀을 하신다.
"목사님, 새로 오신 자매님과 말씀을 나누어보셨습니까?"
"어린 딸 아이 데리고 오는 분 말씀입니까?"
"예."
"아뇨, 아직..."
"아, 목사님도 아직 모르고 계셨군요. 저도 기도하다가 눈을 떠 보면 그 자매님이 벌써 가버려서..."
"장로님, 제 생각에는, 그 분 마음이 내켜서 스스로 알려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제까지 꾸준하게 새벽기도회에 참석을 하고, 또 월초에 규칙적으로 헌금도 하시는 것 보니, 조만간 연락이 오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목사님. 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사고요? 혹시 그 분이 미끄러져서 넘어지기라도 할까봐서 그러십니까?"
"그럼요. xx교회에서는 요즈음 두어번이나 사람들이 미끄러졌답니다. 넘어진 교인 하나는 허리를 많이 다쳐서 얼마동안 일을 못 나갔는데, 교회에서 무관심했다고 화가 나서 고소를 하려고 해서 그 일을 무마 하느라고 P장로가 아주 혼이 났답니다."
"......"
"제 생각에는 목사님이 편지를 한 장 써서 그 자매님 자리에 놓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만..."
"편지라고요?"
"예. 추운 새벽에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오면 찬 바람을 쏘여서 감기 들기 쉬우니, 머지않아 날씨가 좀 풀린 뒤에 다시 나오시라고..."
"장로님 말씀 잘 알았습니다. 제가 생각을 좀 해 보겠습니다."
며칠간 그 문제를 놓고 이리저리 생각을 하며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좋은 방도가 전혀 떠오르지를 않는다. 본래 이수과(理數科) 계통의 공부를 해서 어떤 문제든간에 흑백이 뚜렷한 해답을 찾는 데에 익숙한 나의 성격으로는 이렇게 대책 없이 애매한 채로 두세 주간을 보내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다.
더군다나 매사에 온건하고 흠잡을 데 없이 모범적이신 L장로님이 이 문제에 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신다.
"목사님, 무슨 대화라도...?"
"아직 기도하는 중입니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응답을 주시겠지요."
"......"
L장로님이 실망하시는 안색이다. 아마 옆 교회의 성도가 다친 사고로 인해 마음이 불편하신 모양이다.
그런 대화가 있은지 이삼일후에 그 자매님에게서 전화가 와서 반갑게 받았다.
"목사님, 저 'K아무개'예요. 내일 저녁에 무슨 약속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목사님 댁에서는 저녁식사를 언제 하세요?"
"글쎄요, 무슨 일로...?"
"저희가 식사대접을 하고 싶어서."
"아, 그렇습니까? 아무 시간이라도 좋습니다."
그 자매님이 사는 아파트는 깨끗하게 정돈이 잘 되어 있었지만 여간 누추하지가 않았다. 한인촌 상가 이층에 월세값이 싸서 들었다는데 제대로 난방이 안 되어 난로를 피우고 있었다. 자매님 댁의 어린 아이는 교회에 와서 새벽마다 잠만 잤는데도 나를 보고는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오늘 저녁에 목사님과 사모님 모시고 저녁 먹는다'고 일러주니까 얘가 저렇게 좋아하는군요."
"그래, 고맙구나!" 나는 웃음으로, 아내는 인형 하나로 선물을 주었다.
아이 아버지는 쎄븐 일레븐(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가게에서 일년 삼백육십오 일을 일 하고 이 자매님은 그 동네 아이들을 두엇 돌봐주면서 살고 있다는 현재의 가정형편에서부터 어렸을 때 어머니 손을 붙잡고 교회에 다니던 옛 추억에 이르기까지 '목사님에게 꼭 하고 싶었다던 얘기'를 다 들려주는데 그 중의 한 마디가 '쿵!' 하고 내 귀를 울렸다.
"저는요, 목사님. 자라면서 온갖 험한 고생을 다했는데, 심히 어려운 그 때마다 제 어머니를 생각하며 큰 위로와 용기를 얻곤 합니다. 특히 어렸을 때, 그러니까 제가 너댓 살 되었을 때, 어머니를 따라 새벽기도를 다니던 기억이..."
자매님 눈에 반짝 이슬이 맺힌다.
"어머니의 따뜻한 치마를 덮고 누우면, 목사님은 앞 강단위에서 중얼중얼 하시는데 자장가 소리처럼 포근하고, 여럿이 부르는 찬송가 소리는 꿈결에 또 얼마나 황홀한지..."
집으로 오면서 아내와 이런 말을 주고 받았다.
"한 보름간 대책 없이 애매했던 것, 바로 그것이 내가 받은 기도의 응답이었구려. L장로님 말씀대로 '당분간 새벽기도회 참석하는 것을 쉬는 게 어떻겠느냐?' 말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마터면 이 모녀의 가슴에 큰 마음의 상처를 줄뻔 했겠지!"
■ 다음은 <부고USA>에 올라온 댓글들입니다.
12회 최윤현 (한국, 춘천시)
김 목사님! 난 장로님 말씀대로 목사님이 먼저 따듯한 손길을 내밀고 그래도 위안의 말을 할 무드는 만들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하긴, '하마터면'이 더 옳았던 것 같기도 하고. ㅎㅎㅎ
12회 황등일 (카나다, 캘거리시)
어휴, 아이 아버지는 7-11에서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일년 365일을 일을 하다니, 그거 너무 한 것 같습니다. 아마 자기가 맡은 가게로 그리 열심히 하는 모양인데 건강을 해칠까 염려 되는군요. 대개 젊어서 너무 일을 과하게 한 이들은 나이 들어 잔병이 잦고 건강문제로 더 고생들을 하던데. 그저 인삼 차를 장복하면 좋을텐데....
22회 최완섭 (미국, 뉴욕시)
한국의 백화점을 가서 어떤 옷 가게를 기웃거리면 하루 종일 서서 근무하는 여직원이 거의 100% 다가와서 말을 겁니다. 선물하실꺼냐 아니면 본인용이냐, 어떤 색깔을 좋하하냐.... 아마, 점포 주인들은 매장의 판매원들이 가만히 서있기만 하면 일하지 않고 논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구매결정을 하기 전, Eye Shopping 중인 손님에게 하는 적극 권유는 사실 부담스럽기만 하지요. 자유 방임이 이경우에는 손님을 더 배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매님도 교회의 여러 모습이 익숙하여 질 때까지 기다리신 김목사님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12회 황등일 (카나다, 캘거리시)
여긴 너무 써비스가 없어서 걱정인데. 오바 써비스도 귀찮기는 하지요. 한 군데 신경 돋구는데는 drive through oil change 하는곳. 기름만 교체해주면 될텐데 무슨 메주알 고주알, air filter, transmission fluid, wind shield wiper 가 어쩌구 저쩌구... 시간을 끌며 돈 더 알겨 먹으려고 합니다. 부인네들은 당하기 꼭 십상이지요. 한번은 "야, 기름만 교체하자. 나하고 너하고 시간 좀 절약 하자고 서둘렀더니 콤퓨터 씨스템이 그 메주알 고주알 절차를 안 밟으면 기름 바꾸는 과정이 안 나와서 work order 와 invoice 작성을 못한답니다. 콤퓨터라는 연장이 편할 때도 있지만 불편할 때도 아주 많아요,
15회 김호중 (미국, 필라델피아시)
최윤현 선배님,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새벽기도회에서만 만나니까 서로 대화를 나눌 분위기는 아니라서, 저 역시 선택의 갈림길에서 갈팡질팡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날씨가 훨씬 따뜻해져서 길이 어는 일은 없으니 모두들 그럭저럭 각자의 형편을 감사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황등일 선배님,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일년 365일을 일을 하다니!" 이해가 안 가시는 것 당연합니다. 우리 서울사대부고동문들은 인류 전체는 물론이고, 아마 한국인 전체로 보아도 Top 10% 수준은 될 겁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슬프며 거의 항상 좌절하고 사는 '주변 사람들(marginal people)'의 형편을 알기가 어렵지요.
최완섭 후배님,
개인의 사정(私情, privacy)에 관한 좋은 말씀입니다. "Too close for comfort!"란 말도 있습니다만, 상대방의 인격이 숨을 쉴만한 정신공간의 인식이 중요하지요. 교인들에게도 그렇지만 교역자 자신에게도 필요한 공간 말입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중년 부부가 한밤중에 대판으로 싸움을 하고나서 부인이 "정말 못 살겠다"고 울면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아무래도 오늘밤은 목사님 댁에서 자야할 것 같습니다" 말하면서.
아내와 같이 그 집엘 갔더니 남편은 술이 취해 자고 있더군요. 부인이 보따리를 들고 따라 나서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부싸움 후에 집을 나오시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 집에 묵는 것은 어렵고, 저희가 호텔에 주무시도록 도와드리지요."
결국 그 분은 우리 교회를 떠났는데, 만나는 사람들한테마다 "김 아무개 목사는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라고 오랫동안 불평하던 뒷말을 들었지요. 그런 일은 이렇게나 저렇게나 늘 쉽지 않은 판단입니다.
첫댓글 좋은 글 소개주셔서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선 후배 동문의 글 읽을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특히나 남의 글이 아닌 본인의 글이기에 더욱 소중히 보고 있습니다. 한켠으로는 부럽기도 하고요. 김 목사님의 미주 카페 활성화를 위한 노력, 정말 보기 좋습니다.
종웅 형,
"...남의 글이 아닌 본인의 글이기에 더욱 소중히 보고 있습니다."
친절한 댓글 감사합니다.
He was me.그가 나였다는 간증이 생각 납니다.우리는 주님이 기깝게 계시는걸 모르고 산답니다.
승관 형, He was me 라니요?
이 글속에 등장인물들이 많은데, 누구의 입장에 제일 공감이 가십니까?
모범 신앙인 L장로님? 김 아무개 목사? K 아무개 자매님? 365일 일하는 남편?
위에 언급된 에피소드에는 등장인물이 제각기 다른 입장을 취했지만
아마도 우리는 "L장로님, 김목사, K자매님, 그녀의 남편" 모두 다 조금씩 해당이 되겠지요.
저는 바람막이 일군이신 L장로님 덕분에 '남 보기에 좋은 역활'을 하게되는 겁니다.
고달프고 가난한 이들에게 따뜻함을 전해 주는 목사님의 글을 짠하게 잘 읽었습니다.
천성이 부드러운 원명 형이 목회자라면 저보다 더 '넉넉한 따뜻함으로' 섬기시겠지요.
저는 타고난 성격이 '하나 보태기 하나면 반드시 둘' 모나게 말하는 깍쟁이라서
교인들 중에 기독교 신앙은 얼렁뚱땅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고단해합니다.
저에게도 그런 포근한 기억이 있는가 싶어 한참을 생각해 내느라 엄마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래요, 삼자씨.
이 세상에 엄마 같이 "포근한" 분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도 그리 새벽에 기도 하러 오는분 감탄탄사외에는.. 그러니 어렸을때 엄마와 같이 가던 새벽기도 생각해서 ,계속이군요. 잘 읽엇어요. 참 모든교인들게 잘하려면 퍽 고달푸겠군요.
부미씨,
관찰 잘 하셨어요. 보람도 많지만 퍽 고달픈 것 맞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