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 의견;먼제 깨달음이란 논리를 벗어난 체득이며 증오이니 자연계의 논리(물과 파도 같은 비유)보다 우선하고 다만 자연계의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함 일뿐이니 논리가 맞다고 하여도 증오보다는 못하다는 점을 밝혀둡니다.
도명:자연계의 논리도 깨달음의 논리일 수 밖에 없지 않겠읍니까? 인간이 과학을 하고자 함은
자연의 당연한 논리를 이용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나;상을 6경과 6경을 신구의 삼업에 의한 8식에 저장된 기록물로 본다면 어떨런지요?
도명:이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다만 8식 마저도 상에 해당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참나;용은 자성의 작용으로 보아야겠지요. 즉 체의 작용으로 본다는 겁니다.여기서 상과 체의 작용과의 관계를 말한다면 무생물은 상에 속하고 생물중에 모양을 갖는 육신도 상에 속하고 인식할 줄아는 자성의 8식에 기록된 것도 상에 속하겠지요.
여기서 살펴봐야 할 것은 8식에 저장된 상에 대한 자성의 작용시를 살펴봐야 할 겁니다.
도명:이 의견에 동감합니다. 다만 존재하는 그 자체에도 모임이라는 인연의 주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 런지요
<단경 지침-육조> 담연히 공적하여 둥글고 밝아 움직이지 아니함이 곧 대원경지요. 능히 모든 육진(대상)에 대하여 사랑함과 미움을 일으키지 않음이 곧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니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이 곧 평등성지니라.
능히 모든 육근의 경계에 들어가 잘 분별하되 어지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하니하고 자재를 얻음이 곧 묘관찰지요. 능히 모든 육근으로 하여금 일을 따라서 응용하여 모두 正受에 들어가서 두 가지 모양이 없음이 곧 성소작지니라.
<참나 참고 사항;간시궐님을 떠올리면(생각) 떠올리는 것은 체일 것이고 떠오르는 간시궐님의 모습은 상일 것이나 그 상과 체 사이에 체의 작용(용)이 없다면 상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간시궐님의 모습을 제가 본 적이 없다면 체가 작용을 한다고 하여도 떠올릴 수는 없겠지요?
대상이 없는 체의 작용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을까?
상은 이미 신구의로 체험한 대상이 8식에 기록되어 있어야 하고 체의 작용(생각)에 의해 선택되어져야 하겠지요.
여기서 상이란 몸에 국한 하는 것이 아니라 6경의 대상과 신구의 삼업으로 인해 8식에 기록된 대상을 말한 다고 봅니다.
각인은 체를 깨달아 현전하므로 대상만이 존재하는 줄아는 중생의 집착과는 다르며 체의 본성인 자유성을 회복하였으므로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다는 겁니다.
저는 이러한 이치를 능히 살펴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공안이라는 것들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지고 이러한 자유를 방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도명:떠 올리는 것 자체가 이미 변화를 가졌다 할 것이니 체가 아님이며 모습과 생각이전에 그
러한 흐름 자체가 체가 아닐까요. 그래서 체는 움직임이나 생각이 없으나 이미 이루어졌
다고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참나;돌,나무,꽃피고지는 것등 6경의 대상과 그것이 이미 경험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또 다른 대상을 이루지요. 그 둘을 상으로 보면 어떨까요?
그런데 그 상은 체의 작용이 없다면 인식의 영역에 들지 않겠지요.
상의 세계는 인연에 의해서 끊임없이 연기하지요.중생심은 6경의 세계보다 기록된 상의 세계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것이 습관을 형성하고 성격을 형성하지요.
그러나 각인은 8식 넘어의 체를 깨달아서 그 특성을 회복하였으므로 8식의 세계의 상이 환임을 알지요.
따라서 각인은 8식인 무몰식을 부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체가 작용을 하지 않을 경우도 있질 않겠느냐 는 점입니다.
체가 작용을 하지 않는 경우라면 상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겠느냐는 점이고 상대와 법거량을 하는 경우라면 반드시 체의 작용이 있어야 가능하므로 체만으로 존재하는 경우는 만나지 않겠지요?
도명:그렇습니다. 이 몸 자체가 그러한 흔적들의 모임이며 그래서 이생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것
조차도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체와 용을 구분의 관점에서 볼 것
인지 체의 움직임을 용이라 하고 체는 움직이고 움직이지않는 것과 관계없이 항상 현전
하는 것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라 생각합니다.체는 인식한다 안한다 이전의 문제이므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체와 용의 구분이 없을 것이라 보임니다
참나;체가 허공과 같다고 하지만 하공이 아니라는 것은 허공은 반야지혜가 없어서 인식할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자성의 체는 반야지혜가 있어서 인식할 줄을 안다는 점이 다르지요.
깊은 잠속에서는 반야지혜가 있질 않지요.기절이나 전신마취시에도 반야지혜가 육신에는 없겠지요.
생물에서 조건반사와 무조건반사라는 것이 있지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뇌에서 의식적으로 하는 의도적인 작둉은 조건반사이고 대뇌의 작용을 떠나서 무의식적으로 위험시에 반응하는 무조건적인 반응을 무조건반사라하지요.
한의에서 5장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곳이고 6부가 의식적으로 작용하는 곳이지요.
문제는 간시궐님께서 예로 든 것들은 다 무의식적인 것들인데 무의식적인 영역이 자성의 체의 작용에 의한 것이냐 하는 점이지요. 또한 자성과 반야지혜와의 관계에서 깊은 잠이 자성의 작용이 있어서 숨쉬고 피가 돌고 한다면 반야지혜는 어디 있느냐 하는 점이지요.
이 점에 대하여 논의들이 있어야 할 겁니다.
이 부분은 다른 분들의 논의가 있은 후에 제 견해를 밝힐렵니다.
다만 경전에 나오는 글을 소개하고요.
이견왕이 바라제 존자에게 성품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는 대답에 " 태속에서는 몸이요. 세상에 나와서는 사람이요 눈으로는 본다고 하고 귀로는 듣는다고 하고 코로는 냄새맡고 입으로는 말을 하고 손으로는 움켜잡고 발로는 몸을 옮기네.두루 나타나서는 무수한 세계를 덮고 거두어 들이면 한 티끌에 드네. 아는 이는 이를 불성이라 하고 알지 못하는 이는 정혼이라 하네.
도명: 여기서는 분명히 궤를 달리 하시는 군요.반야지혜가 인식의 세계라면 인식하지 못하는
제8아뢰야식 조차 상으로 보셨던 내용과 어긋남입니다.그렇다면 반야지혜는 나라로 하는
존재상에 의해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건반사든 무조건
반사든 이것은 대뇌의 신경체계라는 상을 여의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같은 내용입니다.5장
이 무의식에 의한 작용이라 하더라도 상의 모임이라는 점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 이 또한
체의 작용을 여읜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자성과 반야지혜는 둘이 아니며 상을 이룸 자체가 체의 작용일진대 깊은 잠에 있다고 해서
체가 없겠읍니까? 그러니 바라제 존자가 말씀하신 속에 어찌 작용만이 있다하겠읍니까?
각각의 구슬이 제각기 색을 달리 한다고 그것을 어떤 순서에 의해 조화 시키는 의지없이
어찌 목걸이가 되겠읍니까? 사람이 각각등이나 우주라고 하는 흐름을 벗어날 수 있겠읍니
까? 그래서 참선을 하지요. 그래서 부처님을 존경하되 경쟁자라 생각하지요.그래서 이 생
에 한번 부처를 이겨먹으려 하는 것 아니겠읍니까?
참나;물이 바람(에너지)에 의해서 출렁일 때를 파도라 한다면 물은 자성의 체로 비유되고 파도는 작용으로 비유되고 바람은 연(조건)으로 비유되겠지요.
체가 조건을 만나서 작용을 할 때 조건과 8식에 함장된 기록물이 상이 되어 집착하면 중생심이고 부리면 각인이 되겠지요.
수행의 목적이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도명:바다도 바람도 파도도 다 조건이 된다면 체는 어디에 존재 할까요?
조건을 만나 작용이 된 체는 작용만이 존재하고 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과 일체로 계합 한번 해 본다면 행복할까요? 불행할까요?
부처가 사람일진대 조사가 사람일진대 그 분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거짓말인지
진실인지는 가 보아야 알겠지요. 그분들이 사기꾼이라 속았다 한다하더라도 속은 것을
알 수 있으니 한 번 해 볼 만 하지 않겠읍니까?
참나;진리를 공부한다는 것은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봅니다.즉 진실을 깨닫는 것이 겠지요.
수술 장면을 보셨다는 것은 육신의 눈을 통하지 않고도 자성만으로 물질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법안과 불안과 심안과는 뜻이 상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볼見 자와 觀의 차이라고 봅니다.
만약 눈을 통하지 않고 사물의 변하는 모양을 찰라간에 볼 수 있다면 그러한 능력이 중생들이 바라는 신통이겠지요.
그 정도 된다면 육신을 통하지 않고 6경의 소리를 다 듣고 6경의 대상을 다 보고 입을 통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어 아무리 먼곳에 있는 사람에게라도 의사를 전달할 수 있겠지요.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그러한 능력이 있는 분도 있을 수는 있겠지요. 내가 못한다고 해서 다 못한다고는 장담 할 수는 없습니다.다만 이치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 고등학교 동창중에 이런 류의 공부를 지어가는 사람이 둘이 있는데 저와 또 다른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약한 학생들을 괴롭힌 전력을 가지고 있어서 많은 동창생들이 싫어하는 자였지요.
그런데 묘하게도 문제아가 나이가 들면서 이런 공부에 관심을 갖어서 돌아다니더라구요.
어느날 우연히 만났는데 그 녀석은 고등학교 밖에 않나왔는데 서울대 나왔다는 제자를 데리고 다니더라구요.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장풍도 사용하고 축지법도 한다고 하더구만요.
그러면서 제 집이 어디냐고 묻더군요.
제 집을 말해주니 버스로 어디서 내리면 되느냐고 묻더라고요.
방금 자신이 한 말도 책임을 못지어요. 축지법을 한다는 사람이 버스는 왜 타며 그 정도면 타심통도 했을 거고 굳이 물을 거 뭐있느냐 이말이지요.
도명:참나님께서 스스로 생각하시는 이치가 아닐런지요.상대방이 생각하는 이치에 먼저 마음을
열고 생각해 보시는 것도 공부에 도움이 될텐데요. 학생들을 가르치시다 보면 그런 학생들
이 있으시지 않은지요. 당연한 것을 이야기 하는데 왜 그러하냐고요. 여러 예를 들어 설명해
도 그렇지 않다고 하는 학생들이요. 참나님은 그런 아이를 어찌 보십니까? 바보로구나 그렇
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그런 학생들이 알고 깨우쳤을 때 더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되리라 생
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이 중요하구요. 기다려 줄 수 있는 마음과 계속 해서 공부 시
켜 줄 수 있는 스승말입니다.
두서없이 말을 이었읍니다.참나님의 집착이 역리로서의 집착이 되셔서 좀 더 큰 세계에
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죽음앞에 부릴 수 있는 신통이 있다면 그 신통만 있으면 되지
다른 신통이 필요할까요?
.[죽음앞에 부릴 수 있는 신통이 있다면 그 신통만 있으면 되지 다른 신통이 필요할까요?] 하신 도명님 꼭 그런것 만은 아니올시다.죽음 그 만을 위하여 깨닫고자 하는 것은 아니올시다.구경은 일체종지를 깨우쳐 살아서나 이 몸을 버려서나 일체를 밝게 보고 밝게 살펴 자유롭고 걸림 없이 살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올시다.따라서 대오각성은 일체종지를 깨닫고 본래 구족한 6신통을 발현하여 쓰게 되는 것이올시다. 그러나 신통에 관한 토론에서 중생심으로 구하는 그 신비 신통술을 경계 하는 것일 뿐이올시다.어찌 잦춘 신통이 매하겠소이까? 다만 중생심으로 구하는 신통을 귀히 여기지 않을 뿐이라 이 말씀이올시다.()
"태속에서는 몸이요. 세상에 나와서는 사람이요 눈으로는 본다고 하고 귀로는 듣는다고 하고 코로는 냄새맡고 입으로는 말을 하고 손으로는 움켜잡고 발로는 몸을 옮기네.두루 나타나서는 무수한 세계를 덮고 거두어 들이면 한 티끌에 드네."에서 "거두어 들이면 한 티끌에 드네" 의 예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첫댓글 나무 도명불 () 나무간시궐불()...나무청봉스님불..()()()..나무집착불()..
[참나;상을 6경과 6경을 신구의 삼업에 의한 8식에 저장된 기록물로 본다면 어떨런지요? ]는 바른지견이 아니올시다.6경6경을 이오이까?6경6식을 ..이오이까? 6경이 겹치니 무슨 말인지...다를것도 없지만...境을 어떻게 8식에 저장된 기록물로 본다는 논리를 펴고 있소이까?
상이란 법성의 작용으로 그 그림자인 것이올시다. 에게게~ 글 올리자 참나님의 글은 지워 버리셨구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참....그러기에 확신하지 못한 자기 즉흥적인 소견으로 글을 함부로 올려서는 않될 것이오.()^^
.[죽음앞에 부릴 수 있는 신통이 있다면 그 신통만 있으면 되지 다른 신통이 필요할까요?] 하신 도명님 꼭 그런것 만은 아니올시다.죽음 그 만을 위하여 깨닫고자 하는 것은 아니올시다.구경은 일체종지를 깨우쳐 살아서나 이 몸을 버려서나 일체를 밝게 보고 밝게 살펴 자유롭고 걸림 없이 살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올시다.따라서 대오각성은 일체종지를 깨닫고 본래 구족한 6신통을 발현하여 쓰게 되는 것이올시다. 그러나 신통에 관한 토론에서 중생심으로 구하는 그 신비 신통술을 경계 하는 것일 뿐이올시다.어찌 잦춘 신통이 매하겠소이까? 다만 중생심으로 구하는 신통을 귀히 여기지 않을 뿐이라 이 말씀이올시다.()
전 여기에 글을 처음으로 올리는데요?
"태속에서는 몸이요. 세상에 나와서는 사람이요 눈으로는 본다고 하고 귀로는 듣는다고 하고 코로는 냄새맡고 입으로는 말을 하고 손으로는 움켜잡고 발로는 몸을 옮기네.두루 나타나서는 무수한 세계를 덮고 거두어 들이면 한 티끌에 드네."에서 "거두어 들이면 한 티끌에 드네" 의 예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체와 용에 대한 논의의 장은 2742번에서 합니다.그곳에서 상과 용에 대한 스승님의 견해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장군죽비님() 사람이 입을 열면 자꾸 실수 할 수 밖에 없군요.다만 제 공부가 진전없이 계속 그 자리를 머물고 있어 그것을 뛰어넘고 싶은 욕심이 앞섰다 하겠읍니다. 죽음도 버리고 싶거늘 어찌 신통이겠읍니까. 계속적인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참나님, 한티끌이 티끌 그 자체로만 살핀다면 어찌 겨자씨에 수미산이 들어가는 도리를 깨닫겠소이까? 체와 용에 대한 논의는 참나님이 분명하게 모르고서 자기 살림에 꿰맞추려 한 것일 뿐 구구하게 설왕 설래 할 논제가 아니였소이다.
여기서 말한 티끌을 티끌로만 본다면 상견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