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을 찾아서
지금은 스마트폰 시대, 65년 묵은 민법 바꿔야 한다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49호(2023.12.15)
양창수 (법학70-74) 민법개정위원장
보증금∙부동산 등기효력 등 현실 반영 못해
총칙∙물권∙채권…꾸러미로 나눠 진행 예정
법관은 감수성∙상상력 풍부해야
로스쿨제도 사법고시와 같은 길 갈까 걱정
대담: 오정환 (공법83-87) MBC 국장
2023년 6월 민법개정위원회 위원장에 양창수 서울대 명예교수가 위촉됐다. 양 위원장은 서울민사지법 판사, 모교 법대 교수, 대법관 등을 역임하고 ‘민법연구’ 도합 10권을 저술하는 등 우리나라 민법학의 최고 권위자로 불린다. 2023년 12월 1일 바닥 여기저기에 책들이 쌓여 있는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난 노 법학자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열정이 가득했다. 양 위원장은 “65년 묵은 기본법을 이제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난 6월 민법개정위원장에 위촉되고 5개월 여가 흘렀습니다. 진행 상황이 궁금합니다.
“민법은 사람이 국가 구성원이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재산과 가족에 관한 기본법입니다. 그 규정을 종합한 민법전은 총칙, 물권, 채권 등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한꺼번에 개 정하지 않고 큰 꾸러미로 나눠서 진행할 계획입니다. 일단 계약에 관한 규정들을 한 묶음으로 초안을 완성했습니다.”
-국민 중에는 ‘왜 민법을 개정하나’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민법을 대대적으로 개정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라가 독립했다지만 여전히 일본 민법을 쓰고 있었으니 우리 민법을 가질 필요가 있어 아무래도 좀 서둘렀지요. 전공한 학자도 거의 없었고요. 무엇보다도 1958년 민법이 제정된 뒤로 사회가 매우 많이 달라졌습니다. 새로운 사회 현상들을 이제 우리 민법에 반영해야 합니다. 세부적인 것은 차치하고 라도, 예를 들면 이제 인터넷이니 휴대폰이니 해서 개인에 대한 정보나 평판이 흔하고도 쉽게 퍼집니다. 그런데 민법은 사람의 인격적 가치를 보장하는 법적 장치에 대해서 그 침해로 생긴 손해를 배상하는 것에 대해서만 규정을 둡니다. 그러나 오히려 현재 또는 장래의 침해 자체를 막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또 나중에 만들어진 주택임대차보호법 등에는 보증금에 대한 규정이 여럿 있는데 막상 민법에는 임대차보증금에 대한 규정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부동산등기의 효력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지요. 민법 제정 당시에는 일정 하의 토지조사사업의 문제점이나 전쟁으로 인한 등기부의 멸실 기타를 고려해서 등기 믿고 거래한 사람을 그대로 보호해주는 법장치를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좀 달라질 필요가 없을까요?”
-정부가 1999년과 2009년 두 차례 민법 개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민법을 개정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신가요?
“먼저 민법학계의 뜻을 모으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민법개정위원회 자체도 1999년에는 위원 수가 너무 적어 동력이 약했고, 2009년에는 오히려 너무 많아 의견 조정이 어려웠습니다. 무엇 보다 국회 설득이 어렵습니다. 국회 법사위 위원들 상당수가 변호사인데 본인이 배웠던 것과 다른 법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아요. 또 관련업계의 의견도 중요하지요. 시간을 두고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할 생각입니다.”
-그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겠군요.
“물론이죠. 제가 1999년의 처음 개정 작업 때 총괄간사를 맡았는데, 이게 넓은 의미에서 매우 정치적인 일임을 절감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작업을 하는 일이니까, 국장님 같 은 언론인들이 많이 도와주셔야죠(웃음).”
-화제를 바꿔보죠. 위원장님 고향은 제주도인데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청소년기를 보내셨나요?
“할아버지가 일정시대에 서울서 법을 공부하셨고, 아버지도 휘문고보를 나와 동경에 유학하셨지요. 그러니까 집안 분위기가 ‘중학교 때는 서울 간다’ 이렇게 돼 있었어요. 큰 형님 따라서 저도 만 11 살에 서울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갑자기 어머니 곁을 떠나 혼자 지내려니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동기들은 다들 같은 초등학교 친구들과 삼삼오오 몰려다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서관에서 책을 벗삼으며 지내는 날이 많았습니다. 당시 동아출판사, 정음사, 을유문화사 등에서 세계문학전집 그리고 문고판 등이 쏟아져 나올 때였어요. 실존주의 문학에도 푹 빠졌습니다. 식민사관 청산을 강조하였던 고등학교 국사 선생님의 말씀에 끌려 국사학과에 가려 했는데, 형들이 이공계를 갔으니 너라도 할아버지 뒤를 이으라는 아버지 말씀에 순종해 법대에 들어갔죠. 대학 가서도 법보다 문학, 철학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연극판도 기웃거리고 시 도 써봤지만, 결국 소질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다 3학년부터 불안해져서 친구 따라 절에 들어가 법 공부도 하고 하다가 다행히 1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죠.”
-대학 졸업 후 판사로 일하시다가 5년여 만에 서울대 교수로 돌아오셨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었나요?
“독일 유학 시절에 공부에 대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또 서울민사법원에서 배석판사로 재판을 하다 보니 우리 교과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 문제들에 자꾸 부딪혀요. 1970년대 말 80년대 초니까 전에 없던 난문이 적지 않았지요. 부장님들에게 물어보면 도서관 가서 찾아보라고 합니다. 가 보면 책 기타 자료들이 전부 일본 것이에요. 나라가 독립했다는데 실은 아직 식민지잖아요. 우리의 법문제를 설득력 있게 체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법이론을 내 머리로 제시해 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학교로 가게 되었죠.”
이때 자신의 저서 ‘민법연구’에 인용한 다른 교수의 글을 보여주었다.
“성문법의 해석 운용에 관한 주류적 발상과 관점이 오늘날까지도 일본 법학의 것을 일방통행으로 면세 수입한 것임을 자꾸만 느끼게 되어 우월한 인방 법률문화의 정신적 외판원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한 각성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법 학자들의 오랜 고민과 과제를 보여주는 말이다. 그런 사명감으로 교수의 길을 걸은 양 위원장은 서울대 재직기간 제자들에게 엄한 스승이자 탁월한 이론가이며 쉬지 않는 학자로 기억됐다.
-2008년에 첫 학계 출신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는데요, 임기를 마친 뒤에 대법원의 과도한 사건 부담에 대해 지적하신 글을 읽었습니다.
“제가 대법관으로 처음 부임했을 때 대법원이 다룬 본안사건만 연간 2만 8000건이에요. 대법관이 12명이니까, 한 명당 연간 2,400건 정도를 다루는 거죠. 6년 뒤 퇴임할 무렵에는 대법관 한 명당 연간 3,200건으로 늘었어요. 1년 365일을 일해도 매일 10건은 판단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많은 국민이 3심까지 법원 판단을 받아보고 싶어하지만, 이래서는 재판이 제대로 안 됩니다. 또 우리 사회가 많이 바뀌었는데, 그전 50년대, 60년대 만들어진 판례에 기대는 일도 있어요. 대법원 판례를 변경하려면 전원합의체를 열어야 하는데, 앞에서와 같은 상황에서 힘이 매우 많이 드는 전원합의체 재판을 쉽사리 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급심 재판을 충실하게 하는 방도를 강구하고, 결국은 다른 나라들처럼 상고허가제를 도입해서 그걸 담당하는 법관을 따로 두어 야지요. 요즈음 대법원이 민사∙가사∙행 정 등 사건에 채택하고 있는 심리불속행제도 아래서는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게 되는데, 그 비율이 현재 70%를 넘습니다.”
-법원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적지 않다고 봅니다. 판사들이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다른 판결을 내린다고 보는 시각들도 있는 데요.
“재판은 법을 구체적인 사건 즉 실제의 사실관계에 적용하는 것인데, 법은 그걸 적용하는 사람에 따라 변할 수 없는 핵심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법 이론에서는 법의 ‘이데올로기성’이라는 것을 극력 주장하고 있고, 특히 우리 사회의 급격한 변화 특히 민주화 과정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에 좇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저는 이것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법조인에게 감수성이 필요한가요?
“법을 제대로 운용하려면 사람 마음의 구조나 그 생각 또는 행동의 문법을 매우 민감하게 포착해야 합니다. 우선 아까 재판이란 법을 사실관계에 적용하는 과정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구체적인 사건에서 과연 사실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려면 사람 일에 대한 감수성 또는 상상력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민사 소송법이 사실 인정에 대하여 ‘경험의 법칙에 따라서’ 하라고 정하고 있는 겁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위증죄, 그러니까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서 자신이 아는 바와 고의적으로 다르게 증언하는 범죄가 다른 나라보다 비율적으로 매우 많다고 하는데, 증언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또한 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국면에서도 결국은 마찬가지라고 생각 합니다. 교과서에 밑줄 치고 외우는 것만으로 좋은 법조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대법관 퇴임 후에 한양대 로스쿨 교수도 역임하셨는데, 로스쿨 제도가 성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법시험만으로 제대로 된 법조인을 양성할 수 없어서 로스쿨을 도입했지요. 그런데 지금 로스쿨 제도 아래서는 통상 초시(初試)라고 부르는 맨 처음 보는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두 번째, 세 번째 시험에서 합격하여 변호사 자격을 얻어도 좋은 일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스쿨 3년 내내 오직 변호사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법 공부의 목표로 삼는 경향이 있지 않나 우려가 됩니다. 모든 시험에는 거기에서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한 말하자면 수험 테크닉이란 게 따르기 마련이지만, 제대로 된 법 공부가 그 바탕이 되어야지요. 결국 사법시험제도가 폐지되기에 이른 경로와 비슷한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걱정됩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 됐던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젊었을 적에 어느 책에서 읽은 건데, ‘사람은 사랑하고 일하기 위해서 산다’는 말이 뇌리에 깊이 남았어요. 사랑의 측면은 말씀을 삼가기로 하고, 일 측면에서는 1992년부터 2019년까지 논문집 ‘민법연구’ 도합 10권을 낼 수 있었던 걸 들고 싶습니다만 어떨지요.” 정리=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