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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묘앙 에오 無明庵 回小 EO
깨달음과의 거리 죽음과의 거리
삶과 죽음을 다루는 많은 사상들은 그저 혼미할 뿐이다.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지금, 이 지구에서는 단언컨대 긍정적인 사고라고 알려진 기만의 도구는 결코 필요하지 않다.
자아는 경험의 반복을 통해서 결정화된다. 즉 반복되는 경험이
아니면 자기 동화自己同化(하나가 됨)는 이루어질 수 없다.
매번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에 인간은 자기동화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명상의 체계 중에서 주요한 부분은 <반복되지 않는 것>만을 실습자에게 경험시킨다.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자아가
결정화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마스터들은 명상의 기법 속에 익숙치 않은 상황이나 예측할 수 없는 것만을 계속적으로 부여한다.
어떤 경험이 전혀 반복되지 않고 항상 새로운 것일 때에 자기(自己)는 붙을 수 없고, 나아가 자기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다.
이는 주로 동적인 명상 혹은 고풍스런 선(禪)의 세계에서 사용되어 왔다. 진정한 마스터는 당신을 매일 매일 실망시키려 한다.
그들은 몇 번이고 당신의 기대를 저버리는 짓을 계속적으로 행한다. 그들이 당신을 비참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선험적인 기대나 희망이야말로 이 현재의 순간에 존재할 수 없는 원인임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당신의 희망을 계속적으로
때려부술 따름이다.
당신이 완전한 무위의 정적 속에 빠지기까지, 가령 논리적으로
바른 것을 말하든 틀린 것을 말하든 마스터는 그것을 전혀 구별하지 않고 부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스터가 진정 기다리는 것은,
당신이 정합성을 갖춘 올바른 것을 유창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선악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져서 <절대 침묵이 되는
순간>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자에게 끊임없이 동적인 변화와 부정을 던져주는 것과는 반대의 방법, 가령 그저 앉아서 정적 속에 머물러 객체와 주체가
동시에 사라지게 하는 경험도 실제론 반복되지 않는다.
지긋이 앉아 있는 것이 만약 당신에게 매번 똑같이 되풀이되는
감각을 만들어낸다면 그 명상이나 좌선은 철저히 잘못된 것이다.
명상은 당신의 자아가 결정화되는 장이 되고 있을 뿐이다.
만약 명상을 하면서 똑 같은 것이 반복되는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전혀 명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라.
만약 그것이 형태 있는 것이라면 <반복>될 것이다. 만약 무언가
특정한 대상이라면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명상이란 절대적 허공에 드는 것이다. 만약 그 허공에 든다면 거기에는 그 어떤 것도 반복되지 않는다. <기억에 머무는 것조차 없는> 허공과 고요 속에서는
경험되는 것은 어느 것도 반복될 수 없다. 그렇다고 순간순간 매번 새로운 것도 아니다. 결코 새로운 것도 아니지만 오래된 것도 아니다.
새롭다, 오래되었다 등은 모두 비교에 의한 구별이다. 완전한 마음의 침묵과 고요 속에서는 오래된 것이나 반복되는 것은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울 것조차도 없다.
그것은 새롭지도 않고 오래되지도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한 <무형無形>이기 때문이다. 무형에 대해서는 새롭다고 말할 수
없고 또, 오래된 것이라 말할 수도 없다. 무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을 고요나 침묵이나 허무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거기에 명칭과 형태를 부여하는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원에 대해서는 결코 무엇 하나도 말할 수 없다.
더구나 그것은 볼 수조차도 없다. 그저 당신은 그것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3.1.EO
-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는 것의 가장 근저에 있는 것은
<고통을 회피하는 행위>일 뿐이다.
<무엇 때문에 사는가> 에 대해서 가장 명확한 논리적 해답은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산다는 것이다.
- 당신은 왜 수행을 하는가?
<타인과 사회, 인간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자기 한 사람이 진정 정직한 모습으로 발가벗는 것이 두려워 어쩔 줄 몰라 한다.
당신은 아무 것도 갖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약하기 때문에 좌선과 무심가운데 심리적으로 무장하고자 한다.
그 목적은 오직 살아남기 위함일 뿐이다.
- 인간은 "편안해지고 싶다' 고 자주 말한다.
"나는 영원히 괴로워하고 싶다" 고 진심으로 말하는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 일곱가지 재난과 여덟가지 고통을 달라" 고 말하는 위대한 성자라도
"나에게 <영원히> 일곱가지 재난과 여덟가지 고통을 달라" 고 말할 수는 없다.
<일시적으로 괴롭더라도 그 댓가로 나중에 편안해지고 싶은> 어디까지나 자아의 흥정이다.
당신은 가장 편안한 길을 가고 싶은 것이다.
비록 고행의 길이라도 궁극적으로는 편안해질 수 있는 길만을
간다.
- 사고 활동 전체는 지적 호기심보다는
항상 <생존명령이나 사활문제>로 기능하고 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주어진 기본 운명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여 생존에 유리한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생물의 기본 프로그램이다.
- 무욕이 되고 무심이 되는 것이 좋다고 가르치는 종교,
동양의 선이나 불교에서도
깊이 통찰되지 않는 망언이 항상 있을 뿐이다.
" 고苦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라는 석가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인 전제일 뿐이다.
돌이켜보면 욕망이야말로 당신의 인생을 즐겁게 해 준 때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욕망을 뜻대로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의 도피처로
"무심과 무욕이 소중하다" 는 말 따위를 내뱉는다.
욕망이 너무 커서 달성되지 못했거나 여러가지 욕망이
다 충족되지 못했을 경우에도
무욕이 진리라거나 무욕이야말로 도道 라는 말을 내뱉는다.
좀 더 정직해 보라.
결국은 <욕망도 무욕을 향한 욕망도 모두 동일한 욕망>에 불과하지 않은가?
당신은 어떻게든 만사를 해결하는 가장 편안한 방법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어떤 기술도 없이 그때 그때 무력한 채 상황에 직면하는 쪽이 훨씬 용기있는 방법이다.
당신은 용기가 없기 때문에 언제나 최선에 맞추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허용량을 초과할 정도의 움직임에 접근할 때
고를 느끼고 또, 자기 허용량을 초과하는 <고요>에 익숙해지는
데도 고를 느낀다.
만약 신이 존재에 진정 만족하고 있다면 우주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법칙으로 만족 속에서는 일체의 생산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생산 행위는 항상 어떤 필요성에서 오는 것이 법칙이다.
그 필요성이란 무엇인가? 언제나 그것은 누군가가 존재하기 때문에 정해진다. 먹히는 것과 먹는 자들(신들)을 단순한 왕바보들의 집단으로 본다고 해도 이미 자신의 생과 되풀이되는 윤회로부터
받는 고통을 덜어줄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한다.
우주는 본래 절망적인 고의 연쇄에 지나지 않는다는 속임수를
<구실>삼아 우리들은 환상적인 위로에 의존하게 된다.
더구나 환상은 오래 가지 못하고, 반드시 무료함이 다가오므로
항상 새롭게 바꿀 필요가 생겨난다. 생명이란 고행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헛수고이다.
- 자아, 사고, 윤리, 우주, 사상, 문명..
이것들은 모두 생존 때문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생존이라는 단 하나의 명령 속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수단이다.
만약 생존이라는 목적이 제거되면 이 모든 것들은 그 자체의 존재가치를 상실한다.
그리고 <굶주림> 내지 <부족감>이라는 생명체의 기본적인 고통은 모든 생명체가 움직이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요소이다.
<부족감> 이란 <고통>과 같은 말이다.
고통은 <안정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생명체 본래의 이 부족감 때문에
당신은 의식주가 채워져도 지긋이 있을 수가 없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구하고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들은 모두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부족감 이외의 다른 원인일 수가 없다.
그저 지긋이 있어 당신이 만족할 수 있다면
움직이거나 무언가를 보고 듣거나 배우거나
누군가를 만나러 가거나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당신이 그저 지긋이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완을 위해 명상하거나 혹은
명상할 필요조차도 없을 것이다.
- 자신이 품은 의문과 화두에 대해서 그 답을 끝까지 찾아가는 것은 진정한 통찰이나 사색이라 할 수 없다.
가장 깊은 탐구의 자세는 의문 그 자체에 당신이 의문을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기 탐구와 자기 확립 이전에 의식이나 정신, 살아가는 방식이
왜 처음부터 ' 명료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질문해 보라
누가 대체 <또렷이 하라>는 강박관념을 심었단 말인가?
어떤 의문이나 결말을 짓고 싶을 때는 스스로 답을 내리기 전에
' 그런 것을 하지 않아도 좋지 않은가' 라고 솔직한 반대의견을 제시해 보라.
제대로 사고하려면 정반대의 가치를 양측 면에서 생각해 보고
자문하는 것이 올바른 사유방법이다.
정당한 목적, 세간에서 위대하다고 칭하는 목적을 갖는다 해도
자신의 과거를 잘 생각해 보면
그 목적의식은 모두 타인, 책, 스승들로부터 얻은 정보로 조합된 것일 뿐이다.
나는 명료하게 해야 한다고 왜 생각할까?
세계의 의미를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처음부터 나는 무엇을 알고 싶은 것인가?
알고 싶다는 나의 질문은 확실한 것인가?
무엇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 자체가 정말 확실한 것일까?
나는 만물의 존재의미를 알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럼 < 만물 > 이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내가 만물의 의미를 알고 싶다고 말해도 지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어서
입으로 만물이라 말해 본들 정작 나는 만물을 알고 있지 못하다.
또 의미를 말해 본들 각 생물의 생존상태 시점에 의해 실로
그 의미가 무한해 진다.
그 속에서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렇다면 나는 사는 의미에 꼭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주의 법칙에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자신이 지각할 수 있는 좁은 범위에서 대해
명료히 할 것 같은 좁디 좁은 진실만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자칫하면 나는 만물에 대한 물음을
마치 정신적인 탐구인 양 거짓으로 과장해서 평가하는 것은 아닐까?
- 내가 알고 있는 최대 원칙은
' 만물은 결코 명료해 질 수 없다' 는 것이다.
아무리 정합성을 가지고 지식을 조합해 본들
곧장 명료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하나의 답은 항상 100가지 의문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확실한 체험이나 지식을 가진다면
당신이 얻은 그 확실함에 대립하는 실제 현상 혹은 대립하는 의견과 반드시 부딪치게 될 것이다.
사물을 확정하는 것 자체가 <보편성>을 빼앗는 최대원인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그 확실함이 만약 당신에게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면 당신은 생애 내내 어디서 무엇을 경험하든 생명의 경험 자체를 즐긴다기보다는 꽉 틀어쥔 확실함의 재확인을 오로지 지속할 뿐이다.
그렇게 되면 생生의 신선함은 모조리 잃어버릴 것이다.
확실함이란 무한을 유한으로 제한하는 행위이다.
바꾸어 말하면 ' 언어란 모두 반대어를 갖는다.'
- 불안정하고 불확정한 사물 속에 만족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확실함>을 찾는 것을 그만 두었을 때
비로소 <족함>이 되는 것이다.
- 사고는 내용이 변화하고 감각은 대상이 변화하며 의식은 밀도가 변화한다.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할 때 주체의 존재의식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 어느 특정 체계를 접하거나 혹은 스승 아래에서 배우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방법에 과연 어떤 진리가 있는 것일까?
나의 최대관심..
그것은 인간이 완전히 무학 그리고 무위인 채로
그저 혼자 자신을 대면할 때 생겨나는 무언가이다.
몸하나 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진리라면 인간에게 필요없다.
나는 사고도 믿지 않는다.
사고란 본래 일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여기' 의 감각도 믿지 않는다.
그것 역시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도 마찬가지다.
그 또한 명료함을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한다면
그 행위 자체로 이미 일정할 수 없는 것(도가 아닌 것)을 다루려 한 것임이 증명될 것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그의 노력은 헛수고일 수밖에 없다.
그 무엇도 하지 않고
어떤 것도 구하지 않고
사고도 없이 존재감도 잊어버리고
20분이라도 좋으니 그냥 거기에 머무는 것
이것이 수행의 궁극적 의미이다.
일체의 언어로 부터 떠나라
질문 : 나는 머릿속의 독백(사념)이 멈추지 않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지요?
에오 : 내가 아는 한 여성은 신기하게도 여러 동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경계 하지 않았다.
경계하기는커녕 오히려 면식도 없는 개나 고양이 하늘의 새까지도 그녀에겐 모종의 친숙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는 일반적으로
동물들이 아이들에게 보이는 모습과 흡사 했다.
동물도 아이에게는 경계심을 덜 갖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이들의 작은 탓일까?
(한층 내면적인 문제가 따로 있다.)
--- 그 여성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태어나면서 언어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사물에 대한 표현이 곤란했다는 것이다.
( 그녀에겐 말로 표현하는 것이 정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 그런데 언어의 역활이란 무엇인가?
원래 언어란 --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당신의 머릿속에 귀 기울여보라.
그러면 당신은 하루 중 당신 자신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양의 독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말로 사고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애초 말은 사고의 순서를 세우려던 것이 아니다. 오직 상대가 있을 때만이 말이 필요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여차 저차 하여 이렇게" 되어 등으로
줄곧 말을 앞세우며 사고한다. 그런데 말을 사용하면 사고력의
효율은 크게 떨어진다.
--- 그래서 시험 삼아 하루만이라도 온종일 머릿속에서 말 하는 것을 그치겠다고 결심해 보라
*印象(인상)과 畵象(화상)을 통해서만 사고하라. 가령 당신이
쇼핑하러 갈 때 보통 때처럼 언어화시키지 말고 그 모두를 영상으로 사고해보라. 사고는 괜찮지만 그 어느 것도 언어화해서는 안 된다.
1) 화상이나 영상이나 소리의 기억 그리고 짧은 인상의 배열로
사고하도록 하루 온종일 마음을 집중해보라. ---
그러면 지금까지 자신의 머리가 얼마나 언어에 의해 오염되어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런 언어 속에는 무수한 습관적인 반응이 배어 있다.
2) 자신의 머릿속에서 언어화를 그친 하루 동안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말 하나하나 까지 이미지나 화상(영상)으로 변환시켜보라. -- 이처럼 사고의 과정에 언어가 개입하면 얼마나 왜곡 되는지를 통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기억하는 언어수가 적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인상에 대해서도 일일이 언어화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것이 동물이나 아이들이 사고하는 방법이다. -- 말로써가 아니라 (실감을 동반한 인상이나 화상의 단편을) 늘어놓고 사고하는 방법이다. 본래 그대로의 비언어적인 사고방법이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은 특히 동물과는 아주 친숙해지기 쉽다.
또 언어가 만들어내는 망상의 폭주와 유착이 없어져 인상의 나열로 사고하기 시작하면 소위
텔레파시가 극도로 민감해지기 쉽다
* 무명암에서는 사인선 행법에 적합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한 가지 근거로 : 그 사람의 직종이나 언어습관을 체크하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직업적으로 언어화가 습관이 되어있는 자는
행법의 효과면에서 그 효율이 낮기 때문이다.
1) 가령 매스컴. 변호사. 세일즈맨. 편집자. 번역가. 집필가 혹은 무언가를 팔기위해 극단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직업이나 글을 다루는 직업들이 대표적이다.
2)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기술적인 직업들 (목수. 미장이. 이발사 등) 육체노동자와 오직 신경만을 사용하는 직업은 폐해가 적다.
그것은 아무런 실감도 없이 단지 언어의 오물을 서로 주고받는 것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3) 자신의 사고가 언어화되고 마는 것 그리고 자신의 지각물을
언어화 하고 마는 것.
4) 그리고 타인의 말을 이미지로 변경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을 변경하지 않은 것.
이런 것들을 반복하면 결국은 언어가 폭주되는 연상방법으로만
사물을 판단하는 인간이 되고 만다.
* 실제로 인간은 언어로 사고 할 수 없다. 언어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끝없는 망상일 뿐이다. 더구나 그것은 아무런 실감도 없는 망상이다. 사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언어화해서 사고하는 것이 가져다 주는 폐해를 말 할 따름이다. 가령 아이디어나 발명을 해 내는 사람은 결코 언어로 사고하지 않는다.
언어라는 것은 사물의 발상과는 전혀 적합치 않다. 언어화로는
사고의 속도가 너무 느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에는 일일이
언어화하는 것이 아니라 빠른 속도의 그림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필요로 된다. 그림. 개념. 인상을 나열하는 비언어적인 사고 말이다. 따라서 우선 머리와 감성을 명료하게 하고 싶다면 일체의 언어화를 떠나는 일정한 기간 혹은 시간을 스스로 계획해야 한다.
그 기간은 단 한마디도 머릿속에서 말 하지 않는 시간이어야 할 것이다.
* 대신에 사고할 때는 느긋해도 좋으니 화상이나 인상의 단편을
마치 동영상처럼 나열해서 사고한다. 지면 위에서 사고하는 경우도 그림의 배열로 사고 해 본다.
1) 그리하면 당신은 자기머리가 얼마나 언어의 피해를 입고 있는가를 통감할 것이다.
2) 언어로 사고한다면 즉 혼잣말로 사고한다면 당신의 사고는 평생 멈추지 않고 계속 될 것이다. 머릿속의 혼잣말 --- 미치광이에
이르는 첫 걸음이다. 이미 많은 인간이 빠져든 병이다.
사실 이미 많든 적든 언어에 의해 미치광이가 되어있다.
* 고대 티벳 우수 사원은 입문한 이후 5년은 일체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솔한 언어에 의해서가
아닌 강한 인상으로 모든 개념이나 체험을 교육시키기 위함이다.
--- 수다쟁이 인간. 독서광인 인간. 언어에 일일이 반응하는 인간을 잘 관찰 해 보라.
(그들은 단지 언어에 대해 언어만으로 머릿속에서 반응한다 )
simplicity of spirituality: 무묘앙 에오의 死心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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